일본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유학생 학비를 제공하던 1938년 당시 최낙종 선생의 모습
구만면 출신 독립운동가 최낙종 선생은 고성 최초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우리가 아는 대단한 독립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잘 모른다. 최낙종 선생의 활약상은 아직 제대로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고성 땅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지 97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 1919년 3월 20일, 고성 최초의 만세운동
최낙종 선생은 한학을 공부하던 학자였다. 그는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에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고성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보자는 뜻을 가진 동지들과 비밀리에 합심했다.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이종흥 등이 그들이다.
최낙종 선생과 허재기, 최정주 선생 등은 밤이면 최 선생의 집 사랑채로 모여들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그들은 고성의 만세운동을 어떻게 시작할지 머리를 맞댔다. 그들의 은밀한 작전은 회화면까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거사일은 3월 20일, 배둔장날이었다. 고성 동북지역 7개 면과 창원, 함안의 일부까지 접할 정도로 배둔장은 컸다.
약속한 오후 1시. 최낙종 선생은 나팔 하나를 들고 집 뒤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다. 선생의 힘찬 나팔소리는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팔소리를 신호탄 삼아 사람들은 서서히 국천변으로 모여들었고, 최낙종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선두에 섰다. 국천변에 태극기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고성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
최정원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허재기 선생은 공약 3장을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시위대열은 천천히 배둔시장으로 향했다. 10리길이었다.
시위대열의 이동 소식은 곧 일본 헌병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성헌병분견소가 동원한 일본 헌병과 경찰들은 총칼로 군중들의 배둔장터행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나라 잃은 설움을 겪었고 또한 그 때문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군중들은 일제의 무장군인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외려 헌병을 에워싸고 성토했고, 나팔수들은 그들을 조롱하며 귀에 대고 나팔을 불어대며 저항했다. 고종황제의 국상으로 평양립을 쓴 최정주 선생은 헌병에 호통을 쳤다. 헌병대는 결국 길을 터줬다. 그 기개가 대단했다.
최낙종 선생이 이끄는 시위대는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 선생이 앞장선 또 다른 시위 대열과 합류했다. 그 인원이 700~800명에 달했다. 일본 헌병대는 또 한 번 제압을 시도했고 결국 몇몇은 헌병에게 붙들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최정주 선생도 이번에는 호통으로 끝내지 않았다. 일본 헌병 오장관원의 엄지손가락을 꺾고 검거된 동지들을 구출했다. 고성군의 첫 만세운동은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끝났다.
구만면사무소로 돌아온 최낙종 선생과 동지들은 당시 면서기였던 이재홍 선생과 함께 ‘한인관리퇴직권고문’을 등사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녹을 먹고 사는 조선인 관리들에게 퇴직하라는 내용을 담은 권고문을 다음날 전국 팔도와 군의 관공서로 보낸 최 선생의 동지들은 결국 일제에 검거됐다. 그러나 최낙종 선생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나팔소리가 처음 울린 최씨문중 선산의 낙락장송은 우리가 이미 잊은 최낙종 선생의 이야기를 10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최낙종 선생이 남긴 것은 동지들에게서 받은 술잔 한 쌍과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사진 왼쪽은 선생의 유품인 술잔, 오른쪽은 할아버지가 만세운동을 했던 국천을 바라보는 손자 최연도씨
# 1920년대 일본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다
1926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조선인 위생인부를 대상으로 조직된 후 친일단체인 상애회에 저항한 동흥노동동맹이었다. 그 가운데에 최낙종 선생이 있었다.
최낙종 선생은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 머물며 인쇄소를 경영했다. 겉으로는 평범한 인쇄소였지만 기실은 독립운동이었다. 최 선생은 인쇄소를 운영하며 생기는 수익을 조선인 유학생의 학비로,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 단지 자금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낙종 선생은 월간잡지 ‘노동’을 발행해 조선과 일본에 배포했다. 일본에 건너가기 전 최 선생은 함경도에서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했다.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었다. 일본에서 만난 박열 선생은 최 선생의 사상에 불을 지폈던 동지다.
최낙종 선생이 이끌던 동흥노동동맹은 박열 선생 등이 주축이 된 흑우회와 함께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친다. 박열 선생은 일본 천황의 폭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나, 아나키스트로 이름을 떨쳤다. 두 아나키스트가 함께 활동하던 20년대 중반은 일본 내의 아나키즘 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다.
이런 최낙종 선생은 일본에게는 눈엣가시였다. 1925년 5월, 선생은 결국 출판법위반으로 벌금형을, 1926년 11월에는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벌금 30원의 형을 받기도 했다. 일본 형사가 최 선생의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감시할 때였다.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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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은 출소 후 한 달만에 눈을 감은 최낙종 선생의 죽음으로 애끓는 슬픔을 추도문에 담았다.사진 제일 위부터 박열 의사를 주축으로 한 조선건국촉진회 추도문, 조선민중신문사 추도문, 조선인연맹 추도문, 고성박물관 소장 원본
# 1945년 6월 8일, 광복 두 달 전 운명
“내 할아버지가 목숨을 버리고서도 지키려 했던 내 나라입니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었어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의 손자라는 자존심과 긍지 덕분입니다.”
최낙종 선생은 1980년 건국포장을, 더 많은 기록을 찾은 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내가 아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후손된 입장에서 어찌 명예롭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최낙종 선생에 대한 기록은 고향 고성에서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이 기록을 찾아 나섰다. 후손들도 전국 팔도를 돌며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나섰다. 자칫하면 묻힐 뻔한 기록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갖은 고초를 겪은 것도 마음이 찢어질 가족들에게 더욱 잔인한 기록들이 드러났다. 그리도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세 달 남기고 병으로 출소한 최낙종 선생은 출소 한 달 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감옥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그 주사는 같은 감옥의 사상범들이 숱하게 맞았다. 후에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일제는 조선인 사상범과 미군 포로들의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했다. 윤동주 시인도, 최낙종 선생도 그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의 간악무도함은 결국 그렇게 선생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국 독립 두 달 전인 1945년 6월 8일, 최낙종 선생은 눈을 감았다.
“제가 5살 적에 현해탄을 건너 할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리 보고싶어 하신 조국 독립을 겨우 두 달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최낙종 선생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할아버지의 유해 운구 당시를 떠올리며 손자 최연도씨는 눈물을 지었다.
개인의 삶과 사랑하는 가족 대신 나라를 택한 대가는 이제 훈장 하나로 남아있을 뿐이다.
# 독립운동가의 한 맺힌 삶을 기억하라
후손의 삶은 곤궁했다. 최낙종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 이미 가세는 눈에 띄게 기울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줄만 겨우 부지했고, 집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웃들은 멸시하기 일쑤였고 관에서는 감시가 일상이었다. 그리고 종국엔 몇 뼘 되지 않는 차디찬 감옥행이었다. 가족 대신 나라를 택한 대가는 혹독했다.
뼈대 있는 양반가문이라도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남은 논 두어 마지기로 대식구가 먹고 살기는 버거웠고, 이웃들의 눈초리는 날로 사나워졌다. 최낙종 선생의 가족들은 부산으로 향했다.
최낙종 선생의 손자 최연도 씨는 3년 전 부산에서 고향 고성으로 돌아왔다. 친일파 자손들은 땅도 돈도 많다던데 그래서 여전히 떵떵거리고 산다던데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그렇지도 않다. 오죽하면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등지고 대처로 나갔을까.
손자 최연도씨 역시 삶이 곤고하긴 마찬가지였다. 대학시절 학비도 제대로 없어 고학했다. 이 악물고 산 덕에 먹고 살 걱정은 덜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한 순간에 이웃과 관의 시선을 바꾸기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수십년을 고향을 떠나 살았던 것이다.
할아버지 최낙종 선생이 운명하던 나이의 몇 배쯤 나이가 들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이제 할아버지의 사진과 유품으로 남긴 술잔 그리고 독립유공자임을 증명하는 훈장이 최연도씨의 보물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는 분명 자랑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이웃들이 손가락질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지요.”
사진 속의 할아버지보다 몇 곱절 늙은, 백발의 손자 눈에서 눈물이 솟는다.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한 맺힌 세월을 보낸 탓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과거를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이제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독립운동가들의 청춘과 생명을, 고성 최초로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최낙종 선생과 동지들의 삶을 기억해야 할 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백부님과17세 아래의 막내동생이신 부친 최낙봉.
부친은 5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2살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온갖 궂은일을 다하여 돈을 모아서 고물상, 자전거방, 인쇄소 등을 운영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버지 같은 형님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셨다.
최낙종. 이름석자론저희집안아재.저는 고성군구만면낙동부락 전주26세손이며 모재공파13세손 욱림 이라합니다.
낙종선생님의 가계도가 무슨파 이신지 등 올려주시면 감사히 저희집안에도 문중종원께알려드려야될듯합니다.
위그림상의묘지는어릴적많이본듯한..ㅎ 죄송합니다.용서하십시요~묘지터위치도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