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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마고성모상 이야기
지리산 마고상 천황봉에는 수호신의 석상이 있다. 태고 때에 옥황상제가 딸 마고를 명하여 지리산을 수호하라고 함에 조각하여 상봉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가까이에 향적사를 지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잡귀, 맹수등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 으로 모셔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고려 태조가 되고 난 뒤에 어머니 위숙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성모상은 지리산을 상징하는 신으로서 천년을 소중히 지켜져 왔다
을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의 모진 풍파 속에서 이 석상도 많은 수난과 역경을 겪었다 석상을 후려치니 석상의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갔다 이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답니다
결손된 석상을 그대로 유지하여 오다가 시멘트가 처음 생산되었을
이 석상을 천왕봉에 모시지 않고 중산리에다 천왕사 라는 절을 지어 절 뒤편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성모상에 대하여
하나의 신비로운 석상이 온갖 풍상을 다 견디며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천 년 동안을 있어 왔다.
두 동강을 내 천왕봉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었다. 그후로 이 석상은 아직까지도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만신창이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안치되어 있는 석상은 바로 천왕봉 성모상(聖母像)이다.
성모상은 검은 돌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특이한 돌로 만들어졌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성모상을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의 상이라고 적고 있다. 혹자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민간의 무속적 치성과 경배의 대상물이었던 점에서 삼신할미상, 마고할미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성모상의 실체를 둘러싼 설이 분분한데 이제는 대체로 '지리산신상' 이라는 데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는 작은 사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다음날 일출이 좋기를 비는 김종직 일행의 고사 대상물이 되기도 했다. 1489년 4월 김일손도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본 후 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에 밥과 물 한 그릇을 올리며 집에 있는 노모의 안녕과 무사한 산행을 위해 제문을 지어 기도를 올린다. 물론 김종직과 김일손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성모상을 위숙왕후상이라 여겼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로 성모상의 목을 내리쳤다고 한다.
성모상의 두번째 수난은 1558년(명종13)에 있었다. 키가 8척이고 담력이 뛰어난 천연이라는 중이 천왕봉에 올라 성모 사당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그곳에 안치된 성모상을 밖으로 집어던졌다. 유교는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올리는 산신에 대한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고 매우 배격한다. 그래서 천연의 이런 행동은 결국 성리학자들에게는 극구 칭송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남명 조식은 [용사천연전]을 지어 천연의 행동을 칭송하였고 송천 양응정도 역시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특히 32세의 나이로 지리산을 유람 중이던 고봉 기대승은 칠불암으로 직접 천연을 찾아가 그의 행동을 칭송하는 장편의 시를 지어줄 정도로 감격해 한다.
"목이나귀, 겨드랑이에 몰려와 정성을 바치고 난잡하고 추잡하며 남녀의 외설도 많아서"라고 한다. 당시 성모상의 신통함과 영험함에 의탁하여 질병의 치유를 빌기 위해 여러 환자들이 천왕봉의 성모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원래 천연은 바로 그전 해에 성모사를 파괴하려 했지만 완력의 무리에 막혀 한 해 늦추었다고 하는데 이는 성모상을 신봉하는 그룹이 적지않게 반발하고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우기는 성모사 승려와 가벼운 입씨름을 벌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천연에 의해 파괴된 송모사는 곧 복구된 것 같다.
이로부터 약200년후인 1751년에 이중환이 쓴[택리지]에도 영.호남 지방, 심지어 경기지방의 농부들이 한참 농번기인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농사도 포기한 채 천왕봉 성모사에 모여 법석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내원리에서 발견되어 천왕봉에 다시 모셔졌다.
500년 이상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상은 천왕봉 제자리에 다시 모셔야 한다는 당위론에도 불구하고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연금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991년 12월 23일에는 비록 초라하지만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점유에 관한 법정 다툼이 있었지만 1996년 11월에 산청군과 천왕사 측이 천왕사에 보호각을 건립해 협의하에 관리한다는
높아 천왕봉에 곧 오를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성모상은 그 누구도 부당하게 점유할 수 없으며 또 천왕봉이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참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천왕봉에 모셔야 할 것이다.
지리산 수호신 聖母像 (성모상 )
우리 민족의 영산 지리산의 수호신 < 성모상> (聖母像 ) 산청군 중산리 ' 천왕사' 에 모셔져 있다.
[역사속으로] 지리산 마고성모상... 이 성모상은 민족의 삼신사상에 기인된 조상숭배의 큰할머니의 상징으로서 지리산 천왕봉 성모에 모셔진 석상으로 산을 사랑하는 민족의식을 계승한 우리 조상들이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봉안하고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상하여 나라에서 중사의 예로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왕건 역시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봉하였다는 (이종길의 지리 영봉1985년)기록과 고려의 이승체가 쓴 제왕운기도 왕건의 어머니는 위숙왕후이며 성모사는 천왕봉과 후천면 임치리의 두곳에 있다고 했고 조선조 유학자 짐종직이 쓴 천왕봉 산행지 "유두류록"에 "성모사당은 삼간판옥인데 지붕의 너와에는 큰쇠못을 박아 매우 견고하며 두 사람의 화공 스님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눈과 눈섭머리 쪽진데와 얼굴에 색감을 진하게 칠하여 눈길을 끌었다"라고 하였나는 기록이 있다.
가장 가까운 중산리에 거주하던 20대의 성기룡이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그 전통을 이어 왔던 성모상을 찾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천왕봉 및 토굴로 입산기도의 고행 6년 어느날밤 현몽에 의하여 진주 비봉산 과수원에 숨겨진 성모상을 찾아 천왕사라는 암자를 건립하여 그 경내에 복원 하였으며 음력 3월 7일 천황제를 지내고 있다.
꺾어 5백m 가량 가면 새로이 조성되고 있는 조그마한 절 천왕사가 있다. 이곳에는 지리산을 수호하는 주신으로 1천년동안 천왕봉 꼭대기에 모셔져 천왕봉에 오르던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 왔던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민족의 삼신사상에 기인된 조상숭배의 큰할머니의 상징으로서 지리산 천왕봉 성모에 모셔져 역사의 모진 풍파속에 시달려 온 역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소박하고 독자적인 조각솜씨가 오랜 세월 민중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여인상이란게 중론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미인 선도 성모를 산신으로 봉안 , 국가 수호신으로 숭앙해 봄. 가을 제사를 지냈다 하는데 이 성모상이 그런 풍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라 말기에 송도의 한 부인이 지리산에 들어와 산신에게 빌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삼국 통일하니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하였다. 그로부터 성모석상은 지리산을 상징하는 신으로 존재하며 천년을 지켜왔다. 고려왕조 때는 성모사에 신관을 두었다고 한다. 말을 탄 신관이 군위를 거느리고 왕방울을 울리며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진주 등을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고 김경렬옹이 수집한'지리산인문사적자료'에서 밝히고 있다.
어머니 위숙왕후이며, 성모사는 천왕봉과 휴천면 임천리 두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스님들은 성모상이 석가모니 생모인 마야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일부에서는 중국의 여신인 마고가 지리산에 정주한 것으로 믿고 만든 여신상이란 주장이 있다.
내지는 토속신앙으로서의 대상으로 오랜 세월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성모상은 왜구 등에 의해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최근에도 수난을 당하여 진주와 황매산 근처에 부러져 흩어진 것을 천왕사 주지스님의 현몽으로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 기도회를 갖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소재지 : 시천면 중산리 ,<<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4호 >
지리산 성모상 [智異山聖母像] 1991년 12월 21일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고대 산신숭배의 대상으로 그 영험이 크다 하여 지리산을 수호하는 민간신앙의 여신으로뿐 아니라 범국가적으로 숭상되었다. 신라시대 때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의 하나였고, 고려시대 때는 남악(南嶽)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랐고, 조선시대 때는 사악신(四嶽神)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를 올렸다. 높이 74㎝, 얼굴 너비 46㎝, 몸 너비 43㎝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1972년 분실된 것을 1987년 중산리에 살던 성기룡이 계곡에서 몸부분을, 진주시 비봉산 과수원에서 머리부분을 찾아내 천왕사라는 암자를 짓고 그곳에 복원하였다. 매년 음력 3월 7일에 천황제를 지낸다. 신라시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국가의 수호신인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고도 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라고도 전한다.
-현제 천왕사에 모셔져있는 성모상
- 밑의사진은 일반인의 참배를위해 산천군 시천면에서 새로 만들어진 성모상 (중산리 주차장 맞은편 산기슭에 있음)
천왕봉 성모상
조선 성종 3년(1472년) 음력 8월 15일 김종직은 그의 제자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과 함께 도리봉-하봉-중봉 코스로 해서 천왕봉을 오르게 된다. 중추의 보름달과 다음날 새벽녘의 일출을 맞이하려고 단단히 결심하며 그날 오후 늦게 천왕봉에 당도했는데 마침 구름과 안개가 몰려와 그가 막 지나온 중봉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길 안내자로 동행한 해공,법종 두 스님은 먼저 천왕봉 성모사(聖母詞)에 들어가 한 작은 석상을 받들어 날씨의 쾌청을 빈다. 그리고 김종직도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어 성모사에 들어가 주과를 차려놓고 석상 앞에서 그날 저녁과 이튿날 새벽날씨가 청명해지도록 빌었다.
"모(某)가 두류산 사모하기를 공자(孔子)가 대산(垈山)을 오르고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을 노닐던 뜻과 같았으나 그동안 직무에 묶여 바라던 바를 얻지 못하다가 이번 중추에 시간을 내어 남쪽 경계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우러러 정성을 받들고자 진사(進士), 한인효, 유호인, 조위등과 구름을 밟고 와서 성모님 앞에 엎드려 한잔 술을 올리나이다. 부디신공(神功)을 내리시어 오늘밤부터 하늘이 맑아져 달빛이 낮과 같고 내일 아침에는 만 리 밖까지 열려 산과 바다가 뚜렷하게 분별되게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장관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이와 같이 김종직 일행이 천왕봉에서 고사드리던 대상이 바로 성모사의 성모상(聖母像)이었다. 김종직은 그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당시 성모사당은 3간 판옥(板屋)으로 지붕의 너와에는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큰 쇠못이 박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성모석상은 눈과 눈썹, 머리 쪽진 데다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여 눈길을 끌었다고 말한다. 그후 17년 후인 1489년 4월 22일 김일손(金馹孫)은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중산리-법계사 코스로 해서 저녁 무렵 천왕봉에 오른다. 김일손도 그의 기행록에 성모사에 대해 적고 있는데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을 쌓은 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부인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천왕(天王)이라 한다. 여기저기에 신에게 바치는 종이동[紙錢]이 요란하게 걸려 있다."
"성모상은 위숙왕후상이다"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천왕봉 정상에 성모석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이들 기록은 최초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선 계속해서 김종직의 기록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석상의 머리에 찍힌 곳이 있기에 그 연고를 물어보았다. 태조(太祖 이성계)가 인월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를 때 (고려 우왕 6년, 1380년의 소위 황산대첩을 말함) 패한 왜병들이 이곳으로 도망치면서 분풀이로 두 쪽을 내어버렸는데 후에 사람들이 이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성모는 어떤 신이라 하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고 한다. 어느 서역천축(西域千竺)이 우리나라와 천백여 세계가 떨어져 있는데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느냐.
내가 이전에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었는데 성모를 풀이한 글에 지금 천왕봉에 있는 석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威肅王后)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사람들이 옛날 중국에서 들어온 신선사상에서 윤색된 선도성모(仙桃聖母)설을 믿어 이를 고려의 임금의 혈통으로 삼고자 만들어 받드는 것이고 이승휴는 이를 믿고 운기에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여기서 김종직은 제왕운기를 인용하여 성모상의 정체를 처음으로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의 석상으로 일단 밝히고 있다. 김일손도 역시 그의 기행록에서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의견에 찬동하여 위숙왕후 석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김종직이 인용했던 제왕운기는 "어언간에 성자(聖子) 낳고 성지성모(聖智聖母, 智異山 天王) 도선(道詵)시켜 명당(明堂)이라 일러주며 제왕기지(帝王基地) 분명타하니 이로써 왕성(王姓) 삼다" 라 하여 결국 지리산의 '천왕'이 성모임을 밝히고 있을 뿐이고 엄밀하게 성모상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혹 그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성자(聖子)가 태조 왕건이 아닌 그의 아버지 세조이기 때문에 문맥상으로도 성모가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는 추정도 난점이 따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종직도 물론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실토하고 있는 걸로 볼 때 성모상이 곧 위숙왕후이라는 규정은 구체적 사료에 근거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성모상의 정체에 관한 복잡한 얘기가 전해오는게 이 점에서 기인된다고 생각된다. 그럼 일단 여러 속설들을 검토하여 성모상의 정체 규명에 최대한 접근해보기로 한다.
풀 길 없는 수수께끼
우선 김종직이 강한 반론을 제기했지만 성모상이 마야부인 석상이라는 얘기를 담고 있는 한 전설을 알아본다. 태고적 시절 옥황상제가 마야부인을 명하여 지리산을 수호하라 일렀다. 지리산 주신(主神)으로 봉해진 마야부인은 신라 어느 왕 때인가 꿈에 나타나 지리산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자기의 상을 조각하여 그 사당에 모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철마 2기와 역시 철로 만든 사자상 2마리를 진열하여 지리사 일대의 잡신과 맹수들을 통솔케 했다.
이상의 전설 요지를 보면 불교의 영향으로 후에 각색되고 윤색되어진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다만 지금도 성모상이 신라시대 40대 여인상으로 추정되는 측면에서 볼 때 성모상이 신라시대 때 조각됐다는 위 전설에서의 표현은 자못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성모석상의 재료가 경주산 옥석이라는 얘기도 (다른 측면에서는 중국산 돌이라는 얘기도 있다) 성모석상의 재질이 특이하고 신비스런 돌이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간과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인도가 우리와 너무나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마야부인상이 아니라는 김종직의 지적을 단순히 유학자인 그의 반(反) 불교적 사고에서 나온 투정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한국불교에서는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던 전통이 거의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결국 후에 윤색된 얘기가 아닐까 한다.
조선 선조 때 대고깔을 쓴 천연(天然)이란 관서(關西)의 스님이 묘향산을 거쳐 지리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순례한 뒤 천왕봉에 올랐는데 신성한 천왕봉에 무당의 무리들이 들끓는다는 이유로 성모사당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성모상을 밖으로 집어던졌던 사건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성모상이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상(像)이라는 얘기는 타당성이 없거나 혹 그런 숭배전통이 불교 초기 전래과정에서 기존 민중들의 무속신앙과 갈등을 피하려는 측면에서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후에는 단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중국의 여신인 마고(痲姑)가 동쪽으로 와 정주하여 성모상으로 나타났으리라는 얘기가 있다. 흔히 마고와 반야(般若, 男神이며 반야봉을 가르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전설로 나타나는 그 주인공 마고(혹은 마야고)가 중국의 여신명이라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삼국유사 제5권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글에서 굳이 이와 비슷한 나름의 연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 대강의 요지를 말하면 "중국 제실(帝室)의 딸인 신모[神母, 원 이름은 사소(娑蘇)]가 신선의 술법을 배워 처음 진한(辰韓, 신라)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 두 성군을 낳았을 것이다.
성모는 일찍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신비스러운 영검을 알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마야와 사소라는 이름은 차이가 있지만 또 천왕봉과 선도성모를 모셔 제사지낸 노고단과의 거리도 있지만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중국에서 건너온 여자라고 한 점과 마고 또한 중국의 여신 이름이라는 점, 그리고 마야고와 반야의 설화에서 나오는 베를 짜서 옷을 만들었다는 것과 위 기록에서 비단옷을 짜서 남편에게 주었다는 점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계속해서 삼국유사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일화를 인용 소개하면서 "...... 우신관(佑臣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외국사신 접대관) 왕보가 말하기를 옛날 어떤 중국 제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像)입니다 라고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성모상 규명 첫 매듭은 전통 무속신앙에서 풀어야 비록 이것은 성모상에 관한 직접적인 얘기로 볼 수는 없겠지만 중국여신 신앙의 영향을 받았을 선도성모상이 천왕봉의 성모상과 한 계열선상에서 일정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는 있다.
신라가 선도성모를 남악사에 모시고 중사(中祀)의 예를 올리던 것과 역시 고려가 국가적 차원에서 위숙왕후를 성모사에 모셔 제(祭)를 올리던 사실은 너무나 흡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성모상이 중국 여신상을 모방한 것 이라는 얘기는 지나치게 평면적인 얘기일 뿐이다. 성모상 그 자체는 우리의 민간 무속신앙에서 보여지는 삼신할미, 혹은 성모 할미 신앙을 근간으로 해서 불교와 도교 그리고 국가적 통치이념 등과 복합 절충되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모상이 숱한 무당들과 기도객들의 치성, 경배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오히려 성모상의 원초적 발상은 우리의 무속신앙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예로부터 '삼신 큰 할머니'로 통칭되는 여신신앙이 제정일치의 부족국가시대 때부터 맥을 이어 내려오다가 왕조국가시대에는 그 국가의 시조 어머니를 모시는 성모신앙으로 자리를 잡고 그 부산 물로서 성모상(聖母像)이 나타났으리라는 유추도 타당하다. 단지 국가적 차원의 성모신앙이 민간의 모든 무속신앙을 흡수, 통합 혹은 제압했는가 에는 의문이 따른다.
고려 고종 때에 지리산 성모의 목이 달아나서 당시 민간에는 이런 변괴는 곧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조짐이라는(그 후 몽고의 침입이 있었다) 소문이 크게 나돌았던 적이 있었는데(고려사, 열전14권, 권경중 조 참조) 이때의 성모는 지금 말하고 있는 석상으로서의 성모가 아니고 나무로 깍은 것이었기 때문에 벌레가 갉아먹어 목이 떨어진것이다. 이 점을 두고 사학자 이이화씨는 국가 차원의 성모와 민간에서의 성모를 구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민간에서는 성모신앙의 맥이 국가적 차원의 성모신앙과는 아랑곳없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는 얘기가 되고 또 그 소구(訴求)대상인 성모상이 별도로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간혹 천왕봉의 성모석상을 우리나라 무당시조설의 상징물로 혹은 무속의 대상물로만 바라보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번짓수가 틀린 얘기가 아닐른지.한편 제왕운기의 기록과 김종직의 언급처럼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고려왕실에서 도선(道詵)으로 하여금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설도 있고 또한 도선선사가 지리산에 선암사, 운암사등 삼암사(三岩寺)를 세우면 삼한의 통일을 이룬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고 이 세 절을 지리산에 세운 후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천왕봉 정상에 세웠다는 얘기가 있다. 성모상의 제작자로 도선선사가 첫 등장하는 얘기지만 어디까지나 속설에 불과하다.
또 하나의 얘기가 있다. 신라시대 때 풍수지리설을 전래시킨 도선선사는 이미 신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불심이 돈독한 계성태수 융의 처(위숙왕후)에게 지리산 천왕봉의 마야성모에게 기도하도록 권하였다. 만약 아들을 얻으면 난세를 맞아 나라를 구하는 위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이 권유에 따라 위숙왕후는 천왕봉에서 일심으로 기도하여 왕건을 낳아 삼한을 통일하게 된다. 왕건은 고려를 창건한 후 도선을 국사(國師)로 봉하고 명산대천에 절을 세워 후삼국의 시대적 갈등과 민심을 불력으로 통일 수습하고 부모의 공덕을 널리 알리고자 위숙왕후를 성모로 추앙하여 지리산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얘기다. 이들 모두 고려 왕계를 신성시하려는 의도와 후삼국 통일 후의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로 압축된다.
시지프스 신화와 같은 수난의 역사
결론적으로 볼 때 성모상에 관한 뚜렷한 정설이나 구체적 근거는 없다. 이처럼 복잡하게 엉크러진 속설들만 난무하기 때문에 성모상을 어떤 것이라고 단정내릴 수는 없다. 만약 위숙왕후상이라 해도 언제부터 천왕봉에 실재했는지에 대해 알 수 없어 더욱 난감할 따름이다. 고려 우왕6년(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인월대첩)에서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성모상이 공식적으로 첫 수난을 겪게 되는 걸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는 천왕봉에 존재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후 성모상은 시지프스 신화와도 같은 수난의 역경을 거듭 당하게 된다. 일제 때는 민중들의 무속적 신앙의 지주가 되자 일제 당국자가 사당을 철거하고 성모상을 벼랑 아래로 굴러버렸다. 한 산청의 처녀가 굴러 떨어진 성모상을 자기 집에 모셔놓고 있었는데 성모의 신통력을 입었는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천왕봉으로 올라온 성모상은 1945년 11월경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이불과 짚가마니 등으로 보쌈을 당해 사라져버리고 이듬해 가뭄이 들어 지리산 마을마다 소동이 일어났는데 성모상을 수소문한 끝에 삼장면 내원리의 최기조(崔基祚)라는 한 농부의 집에서 발견된다. 당시 최씨의 말이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서 제발 옮겨 달라고 간청하기에 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최씨는 내원사 (內源寺)를 중수하고 성모상을 법당에 모시려 했다고도 한다.
그후 천왕봉으로 다시 올라온 성모상은 1960년대초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대로 사당채 건물 속에서 숱한 기도객들의 염원을 들어주며 천왕봉을 지키며 남아 있었다. 그후 사당 건물의 목재들이 등반객들의 불쏘시개감으로 해체되고, 사방을 둘러친 노천돌담 안에서 비바람을 맞아가며 지리산 개발시대의 안타까운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급기야는 지리산 횡단도로가 뚫리기 시작하자 성모상 신변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다. 1972년 5월경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모 교인들이 석상을 훼손하여 다시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우상이라고 생각했는지 혹은 교파가 다르다고 훼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당시 성모상은 숱한 칼질과 추락으로 인해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이유만으로 과연 그들은 몇 백년 아니 천여 년의 세월을 내려온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해꼬지할 수 있는 권리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진주까지 피신해야 했던 성모상의 부활
그런데 신비하게도 성모상은 그간의 수난 속에서 자기나름의 자위권(?)을 발동한 예가 많다. 고려 우왕 때 성모상 머리를 칼로 내려친 왜병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던가 또 일제시대 때는 다시 왜인이 성모석상의 팔을 칼로 베었을 때 석상에서 피가 나고 왜인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앞서의 내원리 최기조씨도 성모상을 운반하다가 석상의 허리를 다쳤는데 그 때문인지 그후 최기조씨는 횡사했다고. 지난 1960년대쯤일까 당시 덕산(德山)의 어느 고등학생이 천왕봉을 등정했다가 성모상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그 학생은 써리봉 코스로 하산하다가 왕벌에 쏘이고 급기야 하산해서는 옆구리에 심한 통증과 불치의 상처가 생겼는데 당시 쌀 세 가마를 시주돈으로 공양하고 그의 부모가 성모상 앞에서 신벌을 사해 달라는 기도를 며칠간 한 후에야 겨우 상처가 회복됐다는 얘기도 있다.
1986년 6월 2일 진주 남양석물에서 봉합작업을 끝낸 성모상이 시천면 중산리 785번지 천왕사(天王寺)라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실로 10여 년 만에 모습을 나타낸다. 이 절의 주지 혜범스님(본명 성기룡, 38세)이 1986년 1월 12일 진주 비봉산 과수원 밭에서 성모상의 두상부분을 그리고 5월 9일에는 몸통부분을 천왕봉 남쪽 500m 통신골에서 찾아내 대수술을 거쳐 천왕봉이 아닌 중산리 서쪽 중심골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혜범스님은 발견하게 된 과정을 다소 믿기 어려운 현몽발견설로 설명한다. 성모석상을 찾아야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던 중 꿈속에 천왕할매로부터 현몽을 받아 각기 두상과 몸통부분을 찾아냈다고 하는 것이다.
높이 약 1.2m 너비 50cm의 앉은 자세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성모상은 밑부분이 많이 훼손당한 듯 시멘트로 기단석에 봉합되어 있다. 과거 영욕의 세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왕봉을 등진 피난살이를 이곳 천왕사에서 몇 년간 하고 있는 셈이다. 천왕사 우측 평지에 마치 등받이 의자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기암에 안치되어 있는 성모상은 천정을 차양막으로 씌운 가건물 안에 좌우로 이곳에서 그동안 불공을 드린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작은 등잔들이 빽빽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위안으로나마 삼으려는 듯 처연한 감마저 들게 한다.
성모상의 천왕봉 복귀는 실현되어야
천왕사에서는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성모상을 위한 제를 올린다. 그리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기도회도 갖는데 이때는 상당수의 신도들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988년 7월 17일경에는 이곳에 안치되어 있던 성모상을 누군가가 훔쳐가기도 하였는데 마침 근처 대밭에서 다시 찾았다고. 그런데 천여 년 동안 천왕봉을 지키며 내려온 성모상이 하필이면 천왕봉이 아닌 천왕사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마침 지리산 인근 주민들과 덕산 두류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성모상 천왕봉 복귀운동이 강력하게 일고 있어서 주목된다. 성모상은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모실수 없으며 천왕봉이 아닌 그 어떤 곳에 모셔서는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당연한 얘기이다. 또 반드시 그렇게 실현되어야 하는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듯하다.
혜범스님은 그동안 성모상의 숱한 수난사례를 들면서 어렵게 찾아낸 성모상이 다시 누군가에게 훼손당하는 것을 결코 방치할 수 없다고 천왕봉 복귀에 반대를 하고 있다. 사실 천왕봉에 올려놓았을 때 누군가에게 또 다시 굴러 떨어져버린다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성모상의 신변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 시설물로 등장한 것이 철책이다.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성금을 각출하여 강력한 철구조물을 만들어 천왕봉 서남쪽 공터에 설치 완료한 바 있다. 옛 성모사터에다 시멘트 바닥에 어른 키 높이의 사방 1.5m 정도되는 철책을 만들어 그 속에다 성모상을 모신다는 것이다. 미관상 보기도 좋지 않고 성모상의 신성함을 해칠 수밖에 없는 어쩌면 필요악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물론 혜범스님측에서 강력히 반발해 급기야는 법정싸움으로까지 번진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궁금하다.
무관심과 편견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놓고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문화재 관리 당국의 처사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무속적 치성, 경배의 대상물이 라는 현상적 이유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고증이 확실치 않다는 이유인지. 그러나 천왕봉에서 수백 년을 내려온 민족신앙의 소중한 유산이 이런 이유로 해서 홀대받아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우리 무속신앙의 1번지라 할 수 있는 천왕봉에서 최소한 500년간 확실히 존재해왔고 또 성모상에 어린 민족적 애환과 수난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면 가히 보물급 문화재로서 손색없는 것이 아닐까?
어떤 형태로든 성모상은 보호 유지되어야 할 우리의 귀중한 정신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국립공원 관리공단도 결코 소관 밖의 일로 둘러댈 수는 없다. 성모석상이 지방민속자료에도 지정되지 않은 현실정에서 공원내 제반 시설물을 보호 관장해야 하는 주무 부서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기 때문에 국립공원내의 돌이나 나무 한 그루 캐내는 일까지 단속을 명문화한 현행법 속에서 어찌 성모상이 법률적 보호대상이 아니겠는가?
관계당국의 관심을 새삼 촉구하며 아울러 성모상을 훼손하고 개인적으로 점유하려는 사람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현재 성모상을 안치하고 있는 천왕사가 발전한 덕택(?)도 성모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찾는 부녀 신도들이 많아서라는 많은 사람들의 냉소적인 지적을 혜범스님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할 듯하다. 만약 천왕사 때문에 성모상을 고집한다면 이 역시 비난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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