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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10년 송도 선생이 조정으로 부터 효자상을 받은 이래 효문동으로 불려 온 동네는 무룡산 치맛자락 안의 비옥한 토양과 풍요로운 산의 넉넉한 품안에서 안정된 삶터를 일궈 왔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급속한 인구의 증가에다 수많은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산업수도 울산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마을은 온통 도시형으로 변해 옛 정취는 기억으로만 남았다. 효문공단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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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종10년(1428년) 조정으로부터 연안 송씨 효자 송도(宋滔)가 효자상을 받고 난 후, 효의 고장으로 전국에 이름이 난 것은 거의 600여년전, 그때부터 불려온 효문동이다. 행정동인 효문동 안에는 또 다른 전설에 얽힌 동명(洞名)을 가진 연암동이 있다.
고려 27대 충숙왕9년(1322년), 무룡산 서쪽기슭의 낮은 구릉에 마치 사람처럼 바위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 아래에 옥처럼 맑고 푸른 물이 고인 옥정(玉井) 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그 바위에 백련의 무늬가 수놓은 듯 피어나 있어 사람들은 이 바위를 백연암(白蓮巖)이라 불렀다.
조선조 중종 27년(1532년) 가을에 핀 이 연꽃이 겨울을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이 신비한 꽃을 구경하기 위한 길손들이 줄을 이었다는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오며 동명이 된 연암동이다.
효문동, 연암동은 민족정기가 흐른다는 국토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끝자락, 동대산의 무룡산 치맛자락 안의 비옥한 토양과 풍요로운 산의 넉넉한 품안에서 삶터가 된지 천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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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정초등학교 제4회 졸업생 기념사진. |
효문, 연암, 명촌, 진장동을 합쳐서 효문동이라는 행정동 사무소가 열렸고, 자연부락 두부곡, 상방, 상연암, 원연암은 행정편의상의 구별일 뿐 온통 도시형으로 변해서 옛날의 정취는 기억 속에만 살아있다.
그 옛날 왜구의 침입을 막던 경계 방책(防柵)이 있어서 방책의 방(防)을 따서 상방(上防)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필자는 8·15 해방이 되기 3년 전 연암동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던 일제의 식민지배 마지막 기간이었다. 서민생활의 고초가 극도에 달했던 시절이었다는 것도 실제 그 고난들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했던 어른들의 이야기나 기록들을 통해서 안다.
해방이후, 나라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의 환경 속에서 얻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그저 몹시도 배가 고팠던 일, 궁핍으로 인한 생활의 단면들, 암울한 시대에 오로지 생존만이 목표였던 시절의 애환들이 강한 기억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걱정과 고통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철없는 우리들은 그저 놀기에 바빴던 어린 시절이었다. 겨울날 꽁꽁 언 논바닥에서 손발에 동상의 티가 박혀도 스케이트 타는 재미에 해가 지는 줄 몰랐고, 귀한 책을 찢어 만든 때기치기(딱지치기)는 기본이요, 수박, 참외서리에 가난한 세월의 아픔 같은 걱정들은 모르고 지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큰 동네도 아니면서 경계를 지어 패를 나누고 어느 동네 아이가 싸움을 더 잘하느니 하며 철없이 젊은 혈기를 자랑하던 기싸움의 이야기는 지금도 유쾌한 화제다.
상방의 친구 근이, 두북곡의 현이, 상연암의 S, 원연암의 K, 등과는 지금도 그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면 시간이 흐름을 멈춘 듯 재미있어 한다.
봄철 하교 길에 언덕에 앉아 씹었던 띠 뿌리의 달콤한 맛, 소나무 햇순의 속껍질, 송기를 맛보지 않은 우리세대 촌놈도 있을까. 설 명절이면 떼 지어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다닌다고 시끄럽던 골목길 아이들의 목소리는 추억 속 깊이 입력되어 언제고 들리는 듯하다.
보리쌀만으로 지은 밥이 어쩐지 부끄러웠고 하얀 쌀밥 도시락을 사오는 아이들을 부러워했건만, 지금은 보리밥에 채소와 나물들이 무공해 웰빙 식품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됐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지금과 비교하면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아프고 쓰라린 추억들 이지만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이 옛날 고향 이야기의 특징인가보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추억을 함께하며 자랐던 마을 친구들, 객지로 흩어져 간 친구들도 있지만 일찍이 이승을 하직하여 기억 속에만 있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급속한 인구의 증가에다 수많은 공장들, 빽빽이 들어선 도시풍의 집들로 사방이 트인 시원한 전망은 볼 수 없는 답답한 도시 마을로 변했다. 옛날 고향마을 연암, 효문은 사라지고 없다.
일부 남은 토박이들 외에는 같은 마을에 산다는 유대감, 결속력, 인정을 나누는 활동이나 행위는 없어진지 오래됐다.
그러나 옛날의 기억들이 가슴을 따뜻이 데워주는 옛 고향의 모습을 영원한 향수로 간직한 우리세대는 그래도 행복한 세대가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든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떤 추억의 고향마을이 있을 것인가는 흥미보다 걱정이 앞선다. 초가집과 오솔길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많은 소회(所懷)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국민소득의 기준이 계산도 되지 않을 만치 가난했던 후진국의 작은 소읍, 울산의 한 구석 연암동에서의 어린 시절이 끝나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절대빈곤의 가난을 벗어나 전화, TV, 세탁기, 자동차를 갖추고도 안달복달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그 지긋 지긋하던 가난의 주술(呪術)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적 빈곤이나 공황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효문초등학교 3학년 때는 6·25동란이 일어나 한 학년이 한 반씩이었던 학교의 교실은 군인들의 막사로 징발돼 봄부터 가을까지 인접한 야산의 묘지나 잔디밭에서 수업을 받았고 겨울에는 마을 동사(洞舍)의 마룻바닥이 교실이 되었다. 신입생들의 입학에 밀려서 학년이 올라가는 가운데에 전쟁의 기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포항지역, 안강전투에서 들려오는 떼죽음의 흉흉한 소문들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생기를 앗아갔고, 피난 식량으로 준비한 미숫가루를 숨기며 하루하루를 넘기는 긴장과 걱정에 질린 얼굴의 눈빛에는 공포가 어른거렸다.
처절한 생존의 절박감으로 범벅이 된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당시에는 들어도 잘 몰랐던 살기어린 이념의 갈등이 지금도 모두 씻겨갔다고 볼 수 없는 현상들이 종종 일어나니 언제 쯤 이 민족적 난제가 풀릴지 하는 걱정은 제발 노친네의 기우(杞憂)로 끝났으면 좋겠다.
여름날 저녁, 모깃불의 연기 냄새 향기로운 동내마당 평상 마루에 모여 앉아 밤 깊도록 주고받는 전쟁소식들은 라디오의 생중개 방송과 같은 정보채널이었다.
그런 험난한 고통의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없는가?
가난과 절대 빈곤의 경험이 우리를 일벌레로 만들었으며 한강의 기적에다 산업수도 울산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음을 잊어버린 지금의 우리 사회가 아닌지 하는 회의감을 지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쓰라린 역사의 경험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힘을 얻을 것인가? 우리가 살았던 옛날 고향 마을에 겹쳐 떠오르는 오늘의 우리 사회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