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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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탄압의 서곡, 아버지의 퇴출
고향 밀양의 군민, 십만 민중이 모여 남북이 하나의 통일정부로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고 일제식민지지배에 의하여 가로막힌 조선인민의 자주적 근대사회의 창조라는 세기적 숙망을 이루려는 거대한 민중의 역량을 과시했으나,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와 그리고 일제에 복무하다가 새로운 주인으로 미제를 상전으로 복무하는 새로운 식미지 주구들은 거대한 민중의 역량을 파탄해내려고 엄청난 탄압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 첫 시도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방학 중에 민주역량의 강력한 한 부분인 청년학생의 역량과 자주적인 미래 조국을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교사로서의 지식인 세력으로 결집되고 있는 역량을 짓밟으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사립학교설치기준령」과 「교사자격규정」이라는 군정의 정령이라는 것이다. 우리민족만큼 후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우리민족은 자주적인 민족으로서 과학지식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여 일찍이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이어 고구려의 철기문화는 고구려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다. 경당(扃堂)제도로 국민개병과 교육의 의무로 문화와 국방을 함께 전수했으며 국민이 모두 기본적인 무예를 습득하여 도적들이 나라를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 백제의 태학제도는 과학기술문명을 열어 삼국 여러 나라와 중국 일본으로까지 문화를 전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이 국가적으로 고루 보급되었음을 말해 준다. 일제는 우리민족에게 우민정책으로 중등교육기관조차 좁혀놓아 부유층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고등교육기관은 식민지정책에 필요한 부문만 두어 식민지통치를 위한 고급관료를 양성하고 친일부유층의 지위를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 제한해두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에 그들의 최고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성제국대학에는 법문학부만 두고 사립교육기관으로서의 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두었으나 그들의 식민지통치의 하수인이 되는 지식인으로서 법관, 문인 등을 양성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에는 자연과학교육을 위한 수물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천문기상학과를 두었으나 자연과학연구를 위한 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의 식민지통치를 위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만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정책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을 조금은 자유로운 일본에 보내어 고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특히 조선여성의 자녀교육에 대한 노력은 어느 민족보다 강해서 밤잠을 자지 않고 길쌈을 하여 자녀의 학자를 마련하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이처럼 일제의 혹독한 우민정책으로 교육시설의 부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마을마다 교육에 관심을 둔 선비나 일찍 개명한 인사들이 야학을 열어 자라나는 가난한 후대들에게 글을 익히고 셈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나는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곳곳에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중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수탈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식량창고, 고치창고, 무명창고 등을 임시로 학교시설로 고쳐서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학교를 열었다.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면마다 적어도 중학교(3년제) 하나는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도 초등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는 교사들이 나섰고, 강의록으로 독학한 야학교 선생들도 나섰다. 이들은 모두 민족교육의 본질을 몸으로 받아 안고 있는 교사들이었다. 다시는 식민지 노예로 살지 말자는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었고 거의 모두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투쟁한 경력이 있거나 그 해방투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8.15해방을 맞이하자 「조선교육자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다시는 망국민이 되지 말자는 뜻을 가지고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주창했다. 그런데 미제는 군정을 실시하여 교육을 일제 식민지교육에서 저들 미제의 식민지교육으로 전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일어선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반제투쟁에서 단련된 선대 청년학생들의 빛나는 운동을 이어받아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받아 나섰다. 그것의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국대안(國立大學校設置案)반대투쟁”이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에 붙어 친일교육을 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고취하던 배족적인 친일교육자들을 등용하여 미제 식민지교육정책을 펼쳐나가자 애국적인 교육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이런 친일교육자들을 배척하는 등 미군정의 교육정책을 반대해 나섰던 것이다. 민족교육자들이 민족자주적 교육을 주창하고 학생들이 이 뜻을 받아들였으며, 미제가 일제를 청산하지 않고 공립・관립학교에서 친일반역의 교육자들을 교단에 내세워 그들의 식민지교육의 기초를 다져나가자 학생들은 이들을 규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제는 그들의 주구로 만들어놓은 친일 교사들이 학생들과 지역 민중으로부터 배척당하자 장래의 그들 식민지정책에 위기를 느껴 그들의 식민지 주구교육자의 양성과 그들 제국주의 문화의 전파를 위한 하수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고등교육을 틀어쥐려고 이른바 ‘국립대학교설치안(약칭 국대안)’을 내어놓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다.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국대안’이 나오자 대부분의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반대해 나섰다. 이 투쟁은 처음은 대학⋅전문학교에서 일어나더니 전국적으로 퍼져 모든 중등학교가 투쟁에 참가했고 나중에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맹휴학에 합세했다. 미군정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일단 이를 보류하고 수습하기는 했지만 애국적인 학생들과 교사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식민지교육정책을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고등교육기관에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교사들과 학생들을 폭력배를 동원해서 추방했다. 그리고 지방에 일어나고 있는 민족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사립학교설치기준령」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중등학교와 대학 등 교육기관의 인가조건을 어렵게 만들었고, 「교사자격규정령」을 정하여 교사가 되는 길을 어렵게 했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 일제 식민지시대에서도 지방에서 우리 청소년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애국적 교사들이 일제 황민화 교육을 위한 관제 교사자격에 걸려 추방당했다. 이리하여 명색은 해방이지만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황국신민교육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의 교육을 하던 자들이 미제의 식민지교육을 위하여 다시 교단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군, 도, 군정청 문교부의 장학사, 장학관, 편수관이 되어 우리 청년들을 친미, 숭미, 공미의 줏대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 그 역할을 다하도록 했던 것이다. 공립학교는 문교부와 도 교육당국자들에 의하여 이미 장악되어 있었으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설립기준령」이라는 것으로 옭아매게 되었는데, 사립학교는 이 ‘기준령’에 의하여 재단을 구성해야 했다. 재단구성은 종교단체와 경주의 최준을 제외하고는 거의 친일지주가 설립한지라 재단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방에 산재해 있는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중학교들이다. 이들 중 어떤 학교는 아예 탄압을 받고 폐교되기도 했고, 당시 고등공민학교로(성인교육기관의 명분을 가지고) 수준을 낮추어 당국이 지목한 교사들을 추방하고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재단을 구성하여 그 ‘기준령’에 따라 정식 중학교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재단의 구성이라는 것이 아주 묘했다. 당시 지주들은 정식으로 독립정부가 구성되면 토지개혁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주는 토지를 그대로 소유할 방도로 명목상 육영기관의 재단에 속한 토지로 해서 그 토지의 사실상 소유자로 하려는 지주들의 욕망과, 사립학교를 운영하던 교사들의 ‘설립기준령’에 따른 재단인가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이라는 이해관계가 묘하게 일치되었다. 그래서 학교운영을 맡았던 교사들은 친일 지주에게 몰려갔다. 재단이사장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주의 토지가 학교재단에 속해 있어도 그 지대(소작료)는 지주가 여전히 받아 챙기고 학교는 학부형들이 내는 학생들의 수업료 등 납부금으로 운영한다는 조건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지주에게는 토지개혁이 된다면 없어질지도 모르는 토지에 대해 지대를 그냥 받을 수 있는데다가 육영사업가의 명예도 생기게 되는 일이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학교운영은 당초의 민족교육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학교당국으로서의 교사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기부금도 받고, 정원초과의 보결입학도 시키고 해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어서 학교는 과시 모리의 수단으로 전락되고만 것이다. 한편 학교에 자기 토지를 명색만으로 기증한 재단구성자로서의 지주 이사장은 학교운영에서 상당한 수입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명색만의 이사장이 아니라 실권자로서의 이사장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교사 측 운영자와 갈등이 빚어졌고 학교분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분규는 결국 돈의 논리에 따라 대개 재단이사장이 이겼고 교사 측 운영자들은 추방되고 말았다. 교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남을 수탈하는 데 이골이 난 친일지주의 학교운영을 통한 치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자를 대는 학부모들에게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교육자나 육영사업가들이 가져야 할 도덕적 덕목이란 전혀 없는 수탈자의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학생모집정원의 몇 배나 되는 학생들을 모집하고 입학금, 기부금을 챙겼고 생계비도 안 되는 봉급으로 교사들을 수탈해서 엄청난 치부를 했다. 친일지주로서의 학교운영자가 수탈 치부한 재부는 당시 자금염출의 원천이 거의 없는 사회경제적 정황으로서 사기협잡의 정치판의 정치자금의 유일한 원천으로 되었으며, 친일지주 자신들이나 그들 자식들의 정치적 출세의 담보로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전쟁 중, 대학생 징집보류제도로 대학생들이 전선에 나가지 않게 되자 농민들은 땅 팔고 소 팔고 해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게 되어 아무 시설 없는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대학은 모리배들의 소굴로 되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 건물을 ‘우골탑’, ‘피골탑’이라는 새로운 말도 만들어 불렀다. 이런 것이 전쟁 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물질적 기초의 중요한 원천으로 되었고, 지금 이 사회의 사학교육의 보편적 형태로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들은 거대한 콘체른을 형성해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어서 법을 만들기도 하고 교육개혁입법을 막기도 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물질적 기초로 되고 있는 그 시초는 이미 1947년 여름방학을 기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바로 군정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나온 「교사자격규정령」에 걸려 수산에 있는 동명중학교의 영어선생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세울 간판이란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울에 사실 때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시다가 3학년 중퇴라는 것뿐이다. 할아버지는 동지들과 일으킨 「적박단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징역을 살고 나오시자 일제의 ‘보안법’인 「치안유지법」으로 고향 밀양에 ‘주거제한’이 되는 바람에 다니던 그 학교를 3학년에서 그만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처럼 열심히 가르치시고 보람으로 여기고 있던 몇 달 동안의 교사생활을 그만두게 되어 몹시 아쉬워하셨다. 8월 2일의 여운형 선생의 인민장의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안 되어 오전 11시쯤 되자 조그만 삼륜차에 보따리와 동자그릇 따위를 처싣고 밀양의 연계소 집으로 들어 닥쳤다. 내가 급히 뛰어나가자 짐칸에는 아버지가 삼남매를 데리고 있고 운전석 옆에 어머니가 내리고 모터 소리가 그치고 예림할아버지의 큰 아들인 병태 아재가 운전석에서 내려온다. 나는 아버지가 안고 있는 용아를 안아 내리자 재두와 향아가 짐칸을 넘어 내린다. 예림할아버지는 나의 고조부 삼형제 중에서 제일 끝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병태 아재는 그 맏아들이다. 항렬로는 내게 할배뻘이지만 나이가 내보다 4살 많아서 그냥 아재라고만 부른다. 일단 짐을 대청 툇마루에 올려두고 모두 대청으로 올라왔다. 마침 할매가 터실에 있는 뒷집 할배집으로 가셔서 내가 급히 거기로 가려고 나가자, 용아가 나를 부르며 따라나섰다. “형아, 나도 따라 갈레.” “그래, 함께 가자. 엄마, 나 용아 데리고 뒷집 할배집에 할매 데리려 갔다 올게.” “오냐, 갔다 오너라.” 용아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용아는 나를 쳐다보며, “형아, 우리 여기서 함께 살게 되나?” “응, 그래. 나는 네가 늘 보고 싶은데, 잘되었지. 작은형도 누나도, 엄마하고 아버지 하고 모두 우리식구 함께 살게 되었네.” 라고 하자 용아는 팔짝 팔짝 뛰면서 좋아한다. 뒷집 할배집 대문을 열고 뛰어들며 나는, “할매, 용아가 왔다. 수산에서 모두 다 왔다, 아이가.” 라고 소리치자, 용아는 어느 새 할매 무릎에 올라앉는다. 할매는, “이게 웬일이고. 모두다 왔는가베. 갑자기 어쩐 일이고.” 그리고 뒷집 할매들에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작은 어멈, 나 이만 가봐야겠네요.” “오냐, 그만 가보시게.” 그리고 급히 또 되돌아왔다. 할매는 집안에 들어오자 퇴청에 나와 있는 병태 아재를 보고, “병태 대렴이 웬 일인교?” “내 차에 이삿짐을 싣고 안 왔는교.” 아버지는 할매를 보자, “어메, 아버지는?” “그래 요즘은 바쁘시기도 하지만 좀 집에 안 계시는 날이 좀.....” “편찮으시지는 않는가 모르겠네.” “괜찮으신가 보더라. 그런데 너의 식구가 갑자기 웬 일이고?” 그 대답으로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사실을 말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사정을 잘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점심준비를 하러 밖으로 나가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