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조 중종 22년 음력 11월 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니, 그와 논쟁을 벌인 퇴계(1501-1570)보다는 26세 연하인 셈이다. 고려말, 절의 파계열인 사림의 가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고봉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수학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그의 숙부인 복재 기준이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고봉의 의식 속에는 당시의 사람이 지니고 있었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에 입각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외에 그가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이전의 학문적 경향이라든지 두드러진 행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봉의 나이 31세 때에 「주자문록」을 편찬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저서는 「주자문집」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발췌요약하여 재정리 한 것으로 이 즈음의 고봉이 주자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자신의 견지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견지를 바탕으로 하여 32세 되던 해에는 하서 김인후와 일재 이항 등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를 하여 태극설 등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31세를 전후로 하여 고봉의 생에는 하나의 큰 획을 그으며 유학사의 전면으로 보상하는 듯 하다. 우선 32세 되던 해 고봉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며 바로 그 해에 정추만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보고 거기에 퇴계가 수정해 준 부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한국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칠론변(四七論辯)의 발단을 열었던 것이다. 이 ‘사칠론변’ 속에 드러나는 고봉의 사상이야말로 핵심주제인 만큼 이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아직 정론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지만, 고봉과 퇴계가 약13년(1558-1570)에 걸쳐 교환하고 있는 서신을 학파간의 논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세나 문안, 그리고 일상생활에 관한 것들은, 물론 개인적인 것이라 하겠지만, 사칠논변 등 심오한 학술명제를 다루면서 주변의 강우 및 사재 그리고 지인의 자문이나 비평을 구하고 서로 토론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고 이를 정리하여 세계화하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봉과 퇴계가 중심이 되어 서신을 내왕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 이면에는 호남지역의 장성학파와 영남지역의 안동학파가 중의를 모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와 같은 학술논쟁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퇴계와 고봉 사이의 사단칠정에 관한 논변에 대하여는 이미 진행된 선행연구가 많아 더 이상 따질 수 없을 만큼 상세히 분석해 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들이 주로 퇴계의 학설을 살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고, 고봉의 학설은 퇴계의 설을 촉발시키는 정도로 피상적인 입장에서 고찰된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고봉의 학설과 사유체계를 중심으로 기술되어진 성태용의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고봉의 주요학술사상과 논점을 검토하면서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1) 고봉 기대승 사단칠정론 : 문제의 제기 - 남아 있는 고봉의 첫 번째 편지에서 제기한 것들은 대충 다음과 같다. ①사단은 칠정 가운데서 선한 것만 추려서 말한 것이다. ②사단과 칠정을 理와 氣에 나누어 귀속시킨다면, 이는 理와 氣를 완전히 다른 두 사물로 나누는 것이 된다. ③그렇게 되면 칠정은 性 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며 四端(사단)은 氣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④사단이란, 성이 발할 때 氣가 주도적으로 작용하지 않아서 본래적인 성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天理의 發이지만, 七情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七情이 發하여 절도에 맞는 것일 따름이다.
⑤天理는 氣의 주재이고 氣는 理의 재료이다. 개념적으로는 나누어지지만, 현상적인 사물에서는 함께 섞여 있어서 나눌 수 없다. ⑥기의 작용에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어서 성의 분체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악이며, 기의 작용에 그런 차질이 없어 본성이 완전히 실현되면 그것은 善이다.
이 편지에서 고봉의 기본적인 입장이 드러나고 있으며, 논변의 끝까지 이 입장이 원칙적인 점에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고봉의 理氣에 대한 관점은 그것이 개념적으로는 나누어지지만, 현상적으로는 늘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고봉은 다른 곳에서는 이기가 하나의 사물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별개의 사물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분명히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분명히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기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나머지의 주장들이 성립하고 있다. 현상적인 사물들은 기의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기의 작용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리가 완전히 실현되느냐, 아니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즉, 四端과 七情은 氣의 작용이 理를 완전히 실현시키느냐, 실현시키지 못하느냐를 기준으로 구분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사단과 칠정 모두 이기의 합임에는 차이가 없다. 즉 사단과 칠정의 구분은 기의 작용에 의한 리의 실현 정도에 따른 구분이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보아 이러한 것들이 고봉의 입각처인 듯하다.
2)<고봉 답 퇴계론 사단 칠정서>에 드러나는 고봉의 주장 -고봉의 두 번째의 편지에 나타나는 주목할 만한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퇴계와의 논변은 이기의 문제가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心性의 개념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한 점이기 때문이다. ②고봉은 사단칠정의 문제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에 비교하여 이해하는 틀을 제시한다. 즉, 본연지성은 天地七 그 근원이 되는 理만을 말한 것이요, 기질지성은 理가 氣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理에서 발한 七情 속에도 理가 들어와 있다. 따라서 四端이 理之發이라고 한 것은 바꿀 수 없지만, 七情이 氣之發이라고 한 것은 오로지 氣만을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③七情은 비록 氣와 관계되어 있지만, 理가 또한 그 가운데 있다. 따라서 그것이 발하여 절도에 맞은 것은 바로 천명인 성의 ‘本然之體’로서, 맹자가 말한 四端과 내용은 같으면서 이름만 다를 따름이다. ④퇴계의 주장대로 한다면, 사람마다 두 개의 정을 인정해야 하고 또 두 가지의 선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리에서 발하는 선, 다른 하나는 기에서 발하는 선이다. ⑤천지가 사물을 생성하는 원리는 理이고 사물을 생성시키는 것은 氣와 質이다. 사람과 사물이 이 기질을 얻어 모습을 이루는데, 理가 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이것이 바고 性이다. 이리와 기는 개념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잇다. 그러나 성 위에서 논한다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은 이리가 기 가운데 떨어져 들어와 있는 것이지, 따로 한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을 논할 때 본연지성, 기질지성을 말하는 것은 천지와 인물을 논하면서 그 원리로 리와 기를 나누어 각각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며, 하나의 성을 있는 것에 따라서 분별하여 말하는 것이다. ⑥본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 리에서 발하는 것이 있고, 또한 기에서 발하는 것이 있어 나누어 발한다. 해도 안될 것이 없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문제가 있다. 더욱이 사단칠정일 이기에 나누어 귀속시킨다면, 칠정은 오직 기 뿐이라는 것이 된다. ⑦정은 모두 이, 기를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니, 사단이 리에서 나와 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 ⑧칠정은 형기에 감응하여 나오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사단도 마찬가지이다. 즉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그것에 감응되어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⑨발하지 않았을 때는 성이라 하고, 발하면 모두 정이다. 거기에서 화와 불화의 차이만 인정할 수 있다. 정이 발하지 않았을 때는 온전한 리이지만, 곧 기의 작용에 의지한다. 그런 점에서는 사단도 정이며, 따라서 기이다. ⑩미발인 상태는 리이지만, 발하면 곧 기를 타고서 행하여 지는 것이다. ⑪사단만 선한 것이 아니라, 칠정도 본래는 선한 것인 ‘선악미정’의 것이라 할 수 없다. ⑫리의 본체는 형상이 없으니, 기가 행하는 것에서 징험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⑬기가 자연스럽게 발현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 리의 본체라는 자신의 견해는 이기를 한 사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⑭사단을 기가 자연 발현하여 지나치고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발하는 所以然(소이연)은 리이기에 리에서 발한다고 할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이서 사단을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해도 된다. ⑮나정암의 설은 본 일이 없어 알수 없다. 퇴계가 지적한 대로라면, 잘못이 심하다. 자신은 이기를 한 사물로 여긴 적도 없고, 이기가 다른 사물이 아니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16 사단칠정이 所從來(소종래)가 다르다는 것은 근원에 있어서 발단이 다르다는 것이니, 모두 성에서 발하는 사단칠정을 소종래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17 사단의 발도 또한 절도에 맞지 안흔ㄴ 것이 있다. 따라서 무조건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상과 같은 고봉의 논변은 대략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심성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 두 부분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고봉이 말하듯 퇴계와 고봉의 논변이 이기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심성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은 퇴계의 화살을 피하려는 수사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은 나누어 고찰하여 보고 다시 그 두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따져 보는 길을 밟는 것이 좋을 듯하다.
3)<고봉 답 퇴계재론 사단칠정서>에 보이는 고봉의 견해 - 이 편지는 퇴계가 고봉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단은 리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는 처음의 견해를 ‘사단은 리가 발해서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해서 리가 그것을 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으로 고친 다음 거기에 대하여 고봉이 다시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고봉의 입장은 두 편지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일관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 고찰하려고 하는 <답 퇴계 재론사단칠정서>에서도 그 근본적인 입장은 변함없는 듯 하며 어느 점에서는 강화된 듯한 구석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또한 퇴계의 견해를 수용하여 본래의 입장을 바꾸는 듯한 점들도 보이고 있다. 과연 고봉이 퇴계의 설을 이렇게까지 수용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수용이 본래의 주장의 정합성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이 편지에 보이는 중요한 관점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天地之性은 天地上에서 총체적으로 설한 것이요, 性質枝性은 人物이 품수한 것 위에서 설한 것이다. 천지지성은 하늘의 달에, 기질지성은 물속에 비친 달에 비유할 수 있다. 물속의 달을 물이라고만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②사단칠정은 리가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는 뒤의 일이다. 즉, 기직지성에서 발한 것이다. 물 속의 달이 빛나는데 그 빛이 칠정에 있어서는 어두고 밝은 바가 있는 것에 해당하고 사단은 단지 밝기만 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칠정이 어둡고 밝은 것은 불의 맑고 흐림에 기인하는 것이요, 사단 가운데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음은 물질의 움직임이 있음을 면치 못한 데 해당한다. ③주자가 ‘사단은 리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고 한 것은 對說(대설)이 아니고, 因說(인설)이다. 대설이란, 좌우를 말 할 때와 같이 서로 상대가 되는 경우이고, 인설이란, 상하를 말할 때와 같이 포섭관계에 놓여있는 경우이다. 이런 관계에 놓여 있는 사단, 칠정은 함께 성에서 발하는 것이므로 어디서 발하느냐에 따라 나눌 수 없다. ④사단에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발현할 때 천리의 본체가 순수하게 드러나, 조금의 빠짐도 없이 마치 기를 볼 수 없는 듯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못에 달이 비치는데 못이 맑고 고요하면 달이 더욱 밝게 드러나 표리가 분명하게 투영되어 드러남으로써, 마치 물이 없는 듯한 것과 같은 것이니, 그래서 리에서 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가 리를 따라서 발하여 털 끝 만큼의 장애도 없는 것이 바로 리의 발이다. 그 밖에 다시 리의 발을 찾는다면 아무리 찾아도 더욱 견강부회가 될 뿐이다. ⑤퇴계가 ‘이발기수’나 ‘기발리승’을 말한데 대하여 고봉은 그것을 ‘정이 발함에 있어서 어떤 경우는 리가 움직이는데 기가 갖추어지고, 어떤 경우는 기가 감응하는데 리가 탄다.’고 고쳐 말하는 것이 옳겠다고 본다. ⑥이기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해와 운무와의 관계와 같다. 해는 본래 그대로이지만, 운무의 가리움에 의하여 흐리고 갬이 있는 것이니, 흐리고 맑음은 오로지 운무에 달린 것이며, 운무가 활짝 걷히면 해의 본래 모습이 완연히 드러나되, 그 본래적인 모습 그대로일 뿐 더하고 보탠 것이 없다. 이제 이기가 서로 발한다고 하면 이는 곧 리의 정의 계도 조작을 인정하는 것이 되며, 리에 그러한 것이 없다는 주자의 말과 어긋난다.
위의 요액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고봉의 입장은 앞의 전지의 주장들에서 분명하지 않았던 점들을 밝히고 있는 점이 있다. 우선 ⑤에서 볼 수 있듯이, ‘기가 리를 따라서 발하여 털끝만큼의 장애도 없는 것이 리의 발이다.’는 말은 앞의 편지에서 ‘리의 발이라고 말해도 된다 .’라는 식의 표현의 의미를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이를 바로 해석하면, 발하는 것은 언지나 기이다. 그런데 그 기의 발함이 리를 출실히 따라 리를 은폐함이 없으면, 바로 이것을 일러 리의 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리의 발을 인정하는 것이 이러한 의미라면 고봉은 여전히 퇴계의 주장, 즉 리의 운동성을 인정하는 측면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기의 작용이 리를 은폐하지 않고 거의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리를 실현하여 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 이것을 고봉은 리의 발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 속에 비친 달의 빛을 비유하여 사단칠정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칠정은 물의 맑고 흐림에 의하여 선악이 있고 사단은 물에 파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순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사단도 물도 바유는 氣적인 요소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단과 칠정의 차이는 물의 맑은 정도에 있는 것이지, 기적인 것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분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4)<四端七情後說(사단칠정후설)>과 <四端七情總論(사단칠정총론)> - 조식이 물 뿌리고 소제하는 범절도 모르면서 천리를 입으로만 떠들어 이름을 도적질하려 한다며 논변의 중지를 권하고 퇴계도 일없이 한가하게 논쟁할 것이 아니다, 하여 고봉의 편지에 답하지 않았다. 고봉이 이에 <후설>과 <총론>을 보내고 논쟁은 마무리 된다. 퇴계는 고봉과 자신의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점을 발견하였다고 여겼으나, <후설>과 <총론>을 살펴보면, 고봉의 근본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퇴계가 만족을 표한 만큼 퇴계의 주장에 접근하는 측면도 있다. <후설>과 <총론>의 내용이 대동소이하기에 합하여 요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맹자가 말한 사단은 정으로서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 위에서 리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추려서 말 한 것이다. 맹자가 성선을 논하면서 사단으로 증거를 대고 사단을 논하면서 나에게 있는 사단을 확충시킨다고 한 것을 보면, 사단이 리의 발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②칠정은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어, 그 발한 바가 오직 기는 아니더라도 기질의 혼잡이 있는 까닭에 기의 발이라 할 수 있다. 정자가 칠정을 논하면서 칠정의 동요를 단속하여 중에 합치시킨다는 것은(리를 방해하는 기를 중심으로 하여) 악으로 흐르기 쉬움을 말한 것이니, 이를 기의 발이라 할 수 있다. ③위와 같이 본다면, 사단칠정을 이기에 나누어 귀속시킨 것과 사단칠정의 명의가 각각 소이연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④칠정 가운데 발하여 마한 조건에 맞는 것은 곧 리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에 해당하니 애초에 사단과 다를 것이 없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지만, 리가 본래 그 가운데 있으니, 칠정으로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천명으로서의 성이며, 본연의 체이니, 사단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⑤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와 같다. 기질지성이 리와 기가 섞여 있다고 하는 것은 본연지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 기질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질지성 가운데 선한 것은 바로 본연지성으로 따로 하나의 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틀에서 본다면 칠정 가운데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위의 요약에서 ④와 ⑤만이 이전의 편지에 나타난 고봉의 주장을 일괄성 있게 유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두 항은 함께 리는 기의 발현 속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입장과 또한 사단이 칠정이 포섭된다는 고봉의 견해를 재확인하고 있다. 단지 ddkv의 편지들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단이 칠정 가운데 포섭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대신에 칠정 가운데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을 달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표현상의 차이가 실은 적어도 이 편지 내에서 어느 정도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방편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위의 ①,②,③ 세 항을 살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이상의 고찰에서 볼 수 있듯이 고봉과 퇴계의 논쟁은 철저히 성리학의 틀 속에서의 논쟁이며, 퇴계의 철저한 주리론적 입장과 주기적 경향을 띤 고봉사이에서의 논쟁이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흔히 그러하듯 서로의 견해를 용납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공격에 방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길을 걷고 있다. 끝까지 고봉은 자신의 근본적인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퇴계도 고봉의 설을 받아들여 수정설을 내 놓았으나, 그것은 주리론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형이상학적 입장들이 논쟁을 통하여 가다듬어진 것 자체가 바로 이 논쟁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리에는 체용이 있는데, 체로 보면 운동이 없으나, 용으로 보면 스스로의 발이 있다’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 놓은 것은 분명 고봉과의 논쟁에서 얻어진 산물로 보아야 한다. 고봉은 이에 비하면 그 당시까지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았던 주기적 입장에 서서 과감하게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와 논쟁을 벌임으로써 주기적 입장에서 인간의 성정을 설명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고, 결국 후대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한국 성리학계의 큰 흐름을 연기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후대에의 영향이야말로 고봉의 학설의 타당성과 정합성 여부를 떠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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