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和年豊(시화년풍)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008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시화년풍(時和年豊)을 선정했다. 그동안 대학교수나 재야 지식층에서는 해매다 국정과 국민의 분위기를 사자성어로 표현하여 왔다.
시화년풍(時和年豊)은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의미로 조선시대에 “국정 화합의 시대를 열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시화년풍(時和年豊)을 사용한 기록이 총 12건 이 검색되며, 그 대표적인 것의 예를 들면,
세종 120권, 30년(1448년) 5월11일 을미 3번째 기사에 (우찬성 김종서(金宗瑞)가 가뭄을 당하여 왕께 고하기를
“근래에 여러 차례 한재(旱災)를 입어, 변경(邊警)의 성식(聲息)과 군정(軍情)의 긴급한 일 외에는 바쁘지 않은 국가사업은 모두 정지하여 천견(天譴)에 답하고, 시화년풍(時和年豊)한 것을 기다려서 거행하소서…
※참고
한재(旱災)-가믐
변경(邊警)-국경에서 일어나는 적의 침입 따위의 사변(事變)에
대한 경계
성식(聲息)-소문
군정(軍情)-군대 내의 정세나 형편
천견(天譴)-천벌
★시화년풍(時和年豊)이란 말은 황해도지방 민요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개성난봉가(박연폭포)에도 이말이 나온다.
박연폭포 노래는 아래와 같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에 - 에 - -에루화 좋고 좋다 어럼마 디여라- 내 사-랑-아
박연폭포가 제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네 양인의 정만
못 하리라,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하니
산심야심객수심(山深夜深客愁深)이로다
슬슬 동풍에 궂은 비 오고 시화년풍(時和年豊)에 님 섞여
노잔다』
참고로 신문에 발표된 가까운 연도별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지난 6년간의 사자성어가 전부 부정적인 내용으로 국가를 책임진 정부지도자들이 얼마나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는가를 말하여 주고 있다.
★2008년 光風霽月(광풍제월)
올해의 희망을 담은 4자성어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뽑혔다.
교수신문은 지난해 12월 15일부터 20일까지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주요 학회장, 전국국공사립대교수협의회 회장 등을 대상으로 ‘2008 희망의 4자성어’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응답자 340명 중 32%의 추천을 받은 광풍제월을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광풍제월은 ‘맑은 날의 바람, 비 갠 후의 달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송의 시인 황정견이 유학자인 주돈이의 인품을 표현한 말로 훌륭한 성품이나 잘 다스려진 세상을 표현할 때 사용됐다. 이화여대 정재서(중문학) 교수는 “그동안의 갖가지 난제와 의문이 씻은 듯 풀리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며 추천 이유를 밝혔다.
목원대 이정호(금융보험학) 교수도 “대선 과정의 갈등과 어려운 경제 상황 등을 잘 극복하고 더욱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광풍제월을 뽑았다”고 말했다.
★2007년자기기인(自欺欺人)
이글의 출전은 ‘朱子語類’ … 진실 잃은 세태 풍자에 나오는 그로서 그대로 옮기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까지 속이는 사람을 풍자한다. 이 말에서 기(欺)는 속인다는 뜻이다.
옛 경전인 대학(大學)에서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毋自欺)”고 했다. 이 말에 덧붙여 주자(朱子)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남을 속이는 것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짓이 심해진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이 매사에 진실해야 한다는 윤리를 강조하는 말로 쓰였다.
이 말은 불가에서도 많이 사용했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는 “망언(妄言)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고 또한 남을 속인다.
망언하는 자는 일체의 선한 근본이 없어 자기를 바보로 만들어 좋은 길을 잃게 만든다”라고 했다.
★2007년 한천작우(旱天作雨)
2007년 한나라당 대선 주자 이명박은 한천작우(旱天作雨)를 선정한 바 있다. 이 뜻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가뭄이 크면 하늘이 비를 내려 준다는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이 계속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늘이 길을 열어준다든 뜻이다.
국가가 어려움이 계속되면 하늘이 어려움을 타개할 방법을 열어 줄 것이라는 것이다.
★2006년 밀운불우(密雲不雨)
2006년에 교수신문에 여러 정치인과 학자들이 국가정책이 답답하고 사회전반에 걸쳐 희망을 잃고 있을 때 밀운불우(密雲不雨)란 사자 성어를 내어 놓았다. 구름만 잔뜩 끼고 비가 안 오는 상황, 뭔가 이뤄지지 않아 답답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주역(周易) 소과괘(小過卦)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짙은 구름이 가득 끼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아 스스로 서쪽 교외에 간다. 공은 줄을 매어 쏘는 화살로 굴 안에 있는 그를 취한다(密雲不雨 自我西郊 公弋取彼在穴)”
★2005년 상화하택(上火下澤)
이 뜻은 불은 위로 오르려 하고 물은(못)은 아래로 처지려는 성향을 가진 것처럼 서로 이반(離反-민심이 떠나는 것)하고 분열한다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의 본래의 뜻은 주역의 64괘중 38번 괘인 화택규(火澤睽)괘로 괘사(卦辭)는 “분열, 반목한다는 뜻이다. 즉 위에 불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으니 불도 물도 각자 제갈 길로 가는 형국인 것이다.
★2004년 당동벌이(黨同伐異)
뜻이 맞는 사람은 한 패가 되고 아니면 배척한다는 뜻이다.
옳고 그름의 여하 간에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2003년 우왕좌왕(右往左往)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며 나아갈 방향을 결정 못한다는 뜻이다.
★2002년 이합집산(離合集散)
헤어졌다 모였다 한다는 뜻이다.
★2001년 오리무중(五里霧中)
안개가 짙게 끼어 앞길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의 장래를 알수 없어 일의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뜻이다.
-농월-
원조대경(元朝對鏡)새해 아침 거울 앞에
忽然添得數莖鬚(홀연첨득수경수)-문득 바라보니, 턱수염은 늘어났는데
全不加長六尺軀(전불가장육척구)-이몸키 한껏 자라 여섯자 이구나
鏡裏容顔隨歲異(경리용안수세이)-얼굴이야 세월따라 늙었다지만
穉心猶自去年吾(치심유자거년오)-어릴 적 마음은 예나 제나 같구나
박지원(朴趾源)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후기(정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한 실학자 겸 소설가다.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사도세자를 배척한 당파)로 몰려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하였다가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 열하(熱河)를 지나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이롭게 사용하여 생활을 풍부하게함)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강조한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고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여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1.실사구시(實事求是)-18세기 추사 김정희등이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개혁사상
2.이용후생(利用厚生)-18세기 북학파 박지원등이 청나라의 경세 사상으로 풍요로
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는 개혁사상.
3.실용주의(實用主義)-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실제 결과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 이라고 주장하는
철학 사상으로. 행동을 중시하며,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한
다는 주장으로, 제임스, 듀이 등이 대표적 으로 주장하는
개혁철학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제창하고 있는 실용주의(實用主義)는 위의 1.2.3.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고 볼수 있다.
-농월-
매불매향(梅不賣香) 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아름다운 가락(소리)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선지)
버들가지는 백번 꺽여도 새가지가 돋아난다
신흠(申欽)
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명나라 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학자(程朱學者)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 장유, 와 함께 한문학의 태두(泰斗-태산과 북두칠성)로 일컬어진다.
매불매향(梅不賣香)!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야언(野言)에는 “동천년로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글이 있는데,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가면서도 항상 거문고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安樂)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의 한시로서 옳지 않은 속세와 타협하지 않는 오동과 매화의 절개와 지조, 그리고 결백을 예찬하는 글로서 매우 유명하다. 명색이 고고하고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줏대 있는 인사들은 이한시를 인용하여 외우기를 즐겨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외워두고 멋을 부려 보세요!
보신각 마지막 종소리를 뒤로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부푼가슴을 안고 일출을 맞이한지도 벌써
4일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새 세상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치고 매화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2008년의 현실의 봄을 맞이할 때입니다.
새해 1월은 이미 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희망이 오는 신호입니다.
이 봄이 시작되는 벽두(劈頭)에 우리의 머리를 냉정하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전령(傳令)은 “매화”입니다.
동각설중매(東閣雪中梅) !
해 뜨는 정자앞 눈 속의 매화 !
입춘(立春)이 될 때까지 눈 속의 매화를 소개할 생각입니다.
-농월-
梅花塢坐月(매화오좌월)매화핀 언덕 달밤
靜坐月明中(정좌월명중)
달 밝은 밤 조용히 앉아
孤吟破淸冷(고음파청냉)
홀로 읊조리는 소리에 서늘함이 출렁이네
隔溪老鶴來(격계노학래)
개울 건너 늙은 학이 찾아와
踏碎梅花影(답쇄매화영)
매화꽃 그림자를 밟아 부수네
옹조(翁照)
옹조(翁照)
중국 청나나라때의 시인으로 연대나 작가의 자료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정보가 확보되는대로 별도로 소개드리겠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맑고 청아(淸雅)한 느낌을 줍니다. 시를 읊조리는 소리에 청랭(淸冷)한 공기가 출렁이고, 학이 성큼성큼 내딛는 발에 매화 그림자가 부서진다는 표현은 매우 감각적입니다.
-농월-
月夜詠梅(월야영매) 달밤에 매화를 읊다
獨倚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불수갱환미풍지)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향만원간)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시대의 학자며 문신이다. 본관 진성(眞城) 경상북도 예안(禮安) 출생으로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퇴계 이황은 조선 성리학 철학자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으며 조선조 유학을 대표하는 4대 사상가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을 선정하고 있으며 2008년 7월 30일∼8월 5일 동양에서 최초로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에 크게 소개 될 계획이다.
퇴계학문은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고, 주자(朱子)의 주장인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 설명하여,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理)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승)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호남의 학자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율곡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지금의 영남과 호남간의 대립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堂)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농월-
早梅(조매) 일찍핀 매화
一樹寒梅白玉條(일수한매백옥조)
백옥 같은 가지에 한 그루 매화
逈臨村路傍溪橋(형림촌로방계교)
마을길 저만치 다리 옆에 피었네!
不知近水花先發(불지근수화선발)
물이 가까워 먼저 꽃핀 줄 모르고
疑是經冬雪未消(의시경동설미소)
아직도 녹지 않은 겨울눈인가 생각했지
장위(張渭)
당(唐)나라 시인 장위(張渭)의 정보를 갖지 못했습니다.
새해들어 눈속에서 피는 매화를 한매(寒梅)라 하여 이른 봄 가장 빨리 꽃피우는 매화입니다.
한매(寒梅)보다 매서운 님의 향기여
풍란(風蘭)보다 그윽한 님의 체취여 !
한자의 이름은 매화수(梅花樹), 고매(古梅), 오매(烏梅), 춘매(春梅)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꽤 오래 전에 도입되었으나 향과 꽃을 관상하는 미적인 의미보다 약용으로써
실용적으로 매실나무라 했던 것 같습니다.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없고 한자의 매(梅)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서민의 나무였다기보다 선비의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동설한에 은은한 향을 풍기며 피어나기 때문에 한매(寒梅)또는 동매(冬梅)라 하며 차가운 흰눈속에서 가지마다 봉긋봉긋 꽃망울을 틔우므로 설중매(雪中梅)라 합니다. 동지섣달 모진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찍 피어나니 군자(君子)의 덕으로 비유하고, 백옥 같은 꽃에서 풍기는 청아한 향과 고고한 자태는 맑고 청렴한 선비의 자세와 칼날같이 매서운 정조를 지키는 조선의 여인을를 상징합니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시를쓰는 시인묵객(詩人墨客)의 시와 그림의 작품소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5∼6월에 덜 익은 청매(靑梅)를 따서 술에 담그면 매실주가 되고 은근한 불에 쪼여서 햇볕에 말리면 검게 변합니다. 이것을 한약명으로 오매(烏梅)라 합니다. 매실(梅實)은 구연산 호박산 사과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시큼한 산맛이 많습니다. 뿌리는 매근(梅根), 가지는 매지(梅枝), 잎은 매엽(梅葉), 씨는 매인(梅仁)이라 하여 나무의 전체를 한약용으로 이용합니다.
해열, 진해, 거담, 설사, 이질, 인후종통, 식중독, 복통에 효과가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매실의 항균작용, 면역증진, 노화방지 등의 효과가 밝혀지면서 주요한 건강식용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궁궐에 매실나무와 살구나무와 앵두나무가 과실수로 꼭 있는 것은 관상용과 더불어 속을 다스리는 약용으로 심었다고 합니다.
-농월-
雪中梅(설중매) 눈속의 매화
有梅無雪不精神(유매무설불정신)
매화 있고 눈 없으니 산뜻하지 못하고
有雪無詩俗了人(유설무시속료인)
눈 있고 시 없으니 사람 속되게 하네
日暮詩成天又雪(일모시성천우설)
해질녘 시를 짓고 하늘에선 또 눈이 내리니
與梅幷作十分春(여매병작십분춘)
매화와 어울려 격을 갖춘 봄이로세.
방악(方岳)
방악(方岳)
중국 송(宋)대 시인으로 자는 거산(巨山) 호는 추애(秋崖)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출신이다. 벼슬이 이부시랑에 이르렸고 시(詩)에 능했는데 농촌생활과 전원풍경을 즐겨 노래했고 자연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저서에 추애집(秋崖集)40권과 추애사가 전한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핍니다. 그래서 설중매(雪中梅)라고 부르고, 일 년 중 제일 먼저 피므로 “봄의 전령사”라고 합니다. 매화는 눈 속에 피어 있어야 제격입니다. 정월달 매화는 눈이 없으면 뭔가 모자란 듯 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또 매화 있고 눈은 있으되 시(詩)가 없으면 세상에 흔해빠진 범속(凡俗)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매화(梅花) 있고 눈(雪) 있으며 시(詩)까지 겻드렸으니 새해의 정취(情趣)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술이 있고 다정한 벗이 함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농월-
눈속의 매화
梅花如雪雪如梅(매화여설설여매)
매화는 눈 같고 눈도 매화 같고
白雪前頭梅正開(백설전두매정개)
흰 눈 내리기에 앞서 매화가 피네.
知是乾坤一淸氣(지시건곤일청기)
알지니 하늘과 땅의 맑은 기운임을
也須踏雪看梅來(야수답설간매래)
모름지기 눈 밟으며 매화 보러 오리라
서거정(徐巨正)
매화가 흰 눈에 비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시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본관 달성(達城) 호는 사가정(四佳亭)또는 정정정(亭亭亭)이다.
조선 성종조에 주로 활동하였던 문인이다. 육조(六曹)의 판서를 지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성종때 왕을 잘 보필하여 정치를 잘 하였다는 공으로 내린 명칭)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한의학서)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과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어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여덟 살 때
외조부 앞에서 다섯 걸음 걷는 동안에 지은 시가 있다
하늘(天)
形圓至大蕩難名(형원지대탕난명)-모양이 지극히 둥글고 커서 이름 짓기 어렵고
包地回旋自健行(포지회선자건행)-땅을 안고 돌면서 절로 힘차게 다니는구나.
覆燾中間容萬物(복도중간용만물)-지상을 덮은 중간에 만물을 포용하고 있는데
如何杞國恐頹傾(여하기국공퇴경)-기(杞)나라 사람은 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단 말인가?
※참고
“기(杞)나라 사람은 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단 말인가”
에서의 기(杞)나라는 염려한다는 뜻의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긴 나라로서 기인지우(杞人之憂)의 준말로 고대 중국에 소국(小國)인 기(杞)나라의 백성 한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음을 걱정한 나머지 침식을 전폐하였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를 보아도 서거정은 시의 신동(神童)이라 할 만하며 그는 소년 시절에 산사(山寺)에서 삼 년 동안 책을 읽어 스스로 조세공부만권서(早歲工夫萬卷書-어린나이에 만권의 책을 읽다)를 자랑할 만큼 해박(該博)하였다.
그는 재능과 해박함으로 평생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지어 자신의 말로는 만수가 넘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시만도 5,000여 수에 이르는 다작(多作)의 시인이다. 다작은 어떤 면에서 좋은 시를 양산(量産)하지 못한 결과가 되어 대가(大家)로 인정은 받았으나 속 깊은 정감(情感)의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평자들에게 외면당해 온 면도 있다.
다음의 시는 서거정이 얼마나 시를 좋아하고 많이 지었는가를 알려주는 시 한편이다.
一詩吟了又吟詩(일시음료우음시)-시 한 수 읊고 나면 또 한 수 읊고
盡日吟詩外不知(진일음시외부지)-종일토록 시 읊는 일밖엔 아는 게 없네.
閱得舊詩今萬首(열득구시금만수)-지금까지 지은 시 만 수나 되는데
儘知死日不吟詩(진지사일불음시)-죽는 날에 가서야 읊지 못하겠지
하루에도 서너 편, 심지어 병중에도 무려 10여 수를 지었다고 한다. 습관처럼 시를 지은 것이다. 그는 살아서는 그만둘 수 없고 죽어야 시를 읊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는 연회에서의 소재거리도 늘 시(詩)가 되었으며, 평소 술을 좋아한 서거정이 과음으로 인해 수창(酬唱-술좌석에서 시를 서로 주고 받는 것 )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동석했던 이들에게 보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평생에 제작한 시를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결국 장독 덮개가 될 줄 알면서도 미련하게 시작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내용의 시도 있다.
-농월-
매화
縱在人間非俗(종재인간비속)
비록 인간 세상에 살아도 속되지는 않아서
却從林下爲生(각종임하위생)
숲 속에 묻힌 것처럼 맑게 살아왔네.
不恨終身寒苦(불한종신한고)
한 평생 구차하고 괴로워도 한탄하지 않았으니
自知稟性孤情(자지품성고정)
우뚝한 뜻을 지닌 그 품성을 스스로 알고 있네.
홍세태(洪世泰
홍세태(洪世泰1653~1725)
조선 후기 숙종때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에 능하였다. 본관 남양(南陽). 호는 유하(柳下)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시를 보고자 할 때 천민계급 여항시인(閭巷詩人)인 홍세태를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시를 지어 보여 큰 칭찬을 들었다.
홍세태는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유명하다.
※참고
여항시인(閭巷詩人)
조선시대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하층계급의 문인들이다. 이들은 비록 사회적 계급은 낮아도 민중 속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양반계급들과 문학적으로 교류하였다.
대표 인물로는 임준원(林俊元), 정내교(鄭來僑), 이언진(李彦眞) 등이 있다.
이시는 추위 속에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피어난 매화이지만 아무런 원망과 불평 없이 오직 자신만이 간직한 품성을 지닌 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조, 절조를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내용으로 여항인(閭巷人)들의 정서를 대변한 시로 볼 수 있다.
-농월-
설매헌(雪梅軒) 눈속에 핀 매화가 있는 집
臘雪滿空來(납설만공래)
하늘 가득히 내리는 섣달 눈발
寒梅花正開(한매화정개)
엄동의 추위에도 매화꽃 막 피어난다.
片片片片片片(편편편편편편)
조각조각 또 조각조각
散入梅花眞不辨(산입매화진불변)
흩어져 들어오는 매화꽃 분간을 못하겠노라.
倚欄終日看不足(의란종일간부족)
난간에 기대어 종일 바라보아도 싫지 않아
命使畵工親筆硯(명사화공친필연)
화공에게 명하여 직접 그리게 하여
移數枝於屛風上(이수지어병풍상)
몇 가지 병풍 위로 옮겨오게 하였어라.
六月火雲間(육월화운간)
유월달 폭염하늘 구름 사이에도
令人神氣爽(영인신기상)
사람의 신성한 기운을 상쾌하게 하는구나.
보우(普愚)
보우(普愚, 1301~1382)
고려말기 선종(禪宗)의 승려로서 불교계 통합사업을 전개했다. 호는 태고(太古)이며 13세부터 회암사(檜巖寺)에 종사 하였다.
46세때 1346년(충목왕 2)에 원나라에 들어가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의 제18세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밑에서 수학 후 귀국한후 왕사(王師)로 책봉 받았다. 신돈(辛旽)의 집권기에는 그와 대립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신돈이 제거된후에 국사(國師)로 책봉받았다. 나이 82세에 입적(入寂)하다
우왕은 그가 입적하자 이색(李穡)으로 국사의 비를 짓게 하였으며 이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에 있다. 그의 제자로는 혼수(混修)와 찬영(粲英) 등의 대선사(大禪師)외에 당대의 조정대신인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농월- | |
瑞雪(서설)-새해 함박눈
瑞雪民豊殖(서설민풍식)-이 함박눈에 농사 풍년이었으면
民食吾亦食(민식오역식)-백성들이 잘 먹어야 나도 같이먹지
又此隆寒時(우차륭한시)-또 이렇게 차가운 날씨에
貧者何以衣(빈자하이의)-가난한 자는 옷이라도 제대로 입는지
고종황제(高宗皇帝)
서설(瑞雪)
어제(1월 11일)아침에 눈을 뜨니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새해들어 첫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매화(梅花)시를 잠깐 쉬게 하고 고종황제의 서설(瑞雪)시를 소개 드립니다.
세월이 변해서 전국적으로 대설 피해가 속출해서 눈이 재앙처럼 느껴지지만
자연(自然)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었는데 어떤면으로 보면 인간이 자연에 불순응한데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서설은 "스스로 그러한"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설(瑞雪) !
너무나 기분 좋은 눈입니다.
서(瑞)자는 상서(祥瑞)서 자(字)로서 최상급의 좋은 글자입니다
상서(祥瑞)라는 뜻은 경사(慶事)롭고 복스럽고 길(吉)한 징조(徵兆)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서설(瑞雪)은 새해(무자년)에 풍년이들어 경제가 좋아질 징조가 되는 눈이고 온국민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미리 전하는
백의(白衣) 천사(天使-white angel)입니다.
서(瑞)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전부 좋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서광(瑞光)-상서로운 빛
서기(瑞氣)-상서로운 기운
서몽(瑞夢)-상서로운 꿈
서운(瑞雲)-경사서러운 징조의 구름
서조(瑞兆)-상서로운 징조
서조(瑞鳥)-봉황(鳳凰)등 상서로운 새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연초에 내리는 눈을 서설이라 하여 한 해 동안 상서로운 일이 있을 조짐으로 받아들이면서 순백(純白)의 하얀 서설위에 올 한 해의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제 어릴 때 기억으로 아버님께서 새해초에 눈이 내리면 “올해는 특히 보리 풍년이 들겠다” 고 하시면서 입춘날 아침에 보리뿌리를 뽑아보시고 뿌리가 3개 이상있으면 풍년이 들것이라 점치셨습니다.
오늘 서설속에 웃고 있는 매화를 촬영하여 한시위에 “이미지”로 사용할려고 보라매공원 낙성대를 헤매었지만 눈속의 매화를 만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그러나 은세계의 아침에 서설한시를 읽고 있는 여러 벗님들이 행복하게 웃는 얼굴로 하얀 눈위에 올해의 설계도를 그리는 상상을 하여 봅니다.
건강하시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항상 즐거운 마음 갖는 새해가 되세요.
농월-
매화 섣달 눈이 녹지 않으니
臘雪孤村積未消(납설고촌적미소)
마을에는 섣달 눈이 녹지 않았으니
柴門誰肯爲相敲(시문수긍위상고)
누가 즐겨 사립문을 두드릴손가
夜來忽有淸香動(야래홀유청향동)
밤에 그윽한 맑은 향기 풍겨오니
知放梅花第幾枝(지방매화제기지)
매화나무 몇 가지에 꽃이 핀듯 하구나
유방선(柳方善)
유방선(柳方善, 1388~1443)
조선 세종때의 학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 호 태재(泰齋)로서 일찍이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세종은 그의 높은 학문을 알고 정사에 자문을 구하였고, 그를 크게 등용하려던 차에 병사하였다. 학문과 시문에도 능하였고, 산수화도 잘 그렸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되어 유배후 풀려났다. 그의 문하에서 서거정(徐居正)·이보흠(李甫欽) 등 이름 있는 학자가 배출되었다.
매화는 여름철에 뜨거운 햇살을 많이 받고 자라서, 늦서리까지 맞고, 추운 겨울을 스스로 이겨 내는 인내로 눈 속에서도 감탄스러울 만큼 꽃을 피운다.
작자는 눈이 녹지 않은 시골 마을에 누가 찾아와서 사립문을 두드릴리 없고. 그럼에도 한 밤중에 향기가 퍼지는 것을 보면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음을 알수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참고-역사를 찾아서
민무구 4형제의 옥사(獄事)사건.
새해 1월 5일부터 KBS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대왕 세종』에 등장하는 태종 이방원의 처남이며 왕비 원경왕후의 친정동생들의 외척세력에 대한 옥사(獄事)사건을 살펴본다.
민무구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맏아들이며,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등극할 때까지 여장부로서 이방원이 왕이되는데 내조를 잘하였으나 왕위에 등극한 태종이 잉첩(媵妾-왕의 귀인) 들만 가까이 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불화가 잦아졌다.
이러한 와중에 민무구 4형제는 외척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배경으로 권세를 휘두르다가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궁중에 들어가 왕의 종친에게 무례할 뿐 아니라 종친간에 이간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이방원이 왕이되는데 공신인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 등 삼공신들의 탄핵을 받게 된 것이다.
태종은 장인인 민제의 면목을 생각하여 민무구 형제의 죄를 처음에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제가 죽자 정부 및 삼공신들이 다시 민무구, 무질 형제들의 처형을 강력히 청하고 나서자, 태종은 민무구, 무질 형제를 해도(海島)에 귀양보내 였다.
그 뒤 태종은 민무구, 무질 형제를 자진(自盡-자살)하도록 하였다. 16년에는 민무휼(閔無恤),무회(無悔) 형제도 사약을 내려 죽게하고 옥사가 끝이 났다. 이들은 태종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외척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파동에 희생당한 옥사이다.
-농월-
매화월영(梅花月盈) 둥근 달아래 핀 매화
窓下數枝梅(창하수지매)
창 아래엔 매화나무 여러 가지 뻗어 있고
窓前一輪月(창전일윤월)
창 앞에는 둥근 달이 둥실 떠 있네.
淸光入空査(청광입공사)
맑은 달 빛이 빈 사립문에 흘러드니
似續殘花發(사속잔화발)
남은 꽃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듯 하네.
박제가(朴齊家)
박제가(朴齊家)의 매화월영(梅花月盈)에서는 창밖에 핀 매화와 달, 달빛의 어루만짐에 의하여 계속 피어나는 매화꽃을 읊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북학파(北學派)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초정(楚亭)이다.
출생 때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시(詩)·서(書)·화(畵)로 명성을 얻어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학문을 배워 선진 문물을 본받아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역설하였다.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읽고 정약용등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었다.
무려 네 번의 청나라 갔다 왔으며 돌아오자마자 흉서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곧 죽었다.
그의 글씨는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의 문인화풍으로 산수 및 인물화로 생동감 넘치는 꿩과 물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참고-박제가의 매화 한시로 다시 보는 역사기록
지금 MBC에서 절찬리에 방송되는 드라마 이산(李祘-조선 22대왕 정조의 이름)은 조선조 27명의 왕중에서 가장 개혁을 주장한 임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재임 24년 만에 할아버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절후(癤候-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 등창의 일종)병으로 고생했는데 그날도 병을 치료를 받은 후 바로 죽은 것이다. 수은(水銀)중독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의술로서도 등창은 쉽게 죽을병이 아닌 것이다.
영조와 정조 때에는 벽파(辟派)와 시파(時派)의 두당파가 있었다. 벽파는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반대파이고 시파는 친 사도세자파인 것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인 탕평책(蕩平策)썼지만 벽파(辟派)의 술책에 넘어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처럼 벽파는 계속하여 세손인 정조까지 죽여 정권을 잡으려는 모략을 꽤한다. 정조의 첫 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는 천성이 착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정조의 어머니 혜빈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고.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지만 슬하에 소생이 없어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1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자 2남인 이공(李玜)이 왕위에 오르니 23대 순조임금이다.
그리고 정조를 독살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가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 사회는 세도정치의 탄압으로 경직되어 백성들은 경제 불황속에 허덕이게 된다. 현재 우리정치사회와 비슷하다.
그해 시파(時派)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사교(邪敎)인 천주교 신자들 200여 명을 처형하는 사회 혼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한다.
이에 도탄에 빠진 민중들은 각종 유언비어에 현혹하게 되고 불안이 팽배하게 되어 커다란 사회 갈등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1811년 12월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대규모의 반정부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제주도에서 양제해(梁濟海)가 난을 일으키고, 1815년에는 용인에서 이응길(李應吉)의 난, 등 소규모의 민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1817년 유칠재(柳七在) 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 (凶書事件)과 1819년 액예(掖隷) 원예(院隷)들의 반란과 1826년 청주 괘서사건(掛書事件)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필자가 박제가(朴齊家)의 매화 한시 한편을 소개 하면서 이렇게 긴 역사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이유는 근래 1961년부터 2007년사이의 우리나라 정치가 역사의 좋은 면은 닮지 못하고 국민을 현혹시키는 나쁜 면만 본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군부시절에는 휴전선 전쟁을 이용하여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가까이로는 북한의 북풍과 김대업의 병풍사건에 이어 김경준의 BBK사건으로 까지 이어지면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조선조의 당파싸움과 서양정치의 고전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본다.
이글을 쓰는 2008년 1월 8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에 병풍사건 본인 김대업이 자기가 년말 특사면을 못받았기 때문에 병풍사건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한다. 조선조의 왕조정치보다 더 유치한 정치 놀음이다. 이런 유언비어에 국민은 절대로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특검을 통해서 BBK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이제 국민은 고향을 교묘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에게 자기 지방 사람이라고 무조건 투표하는 유치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온나라 온 세계가 정보사회로 변화되는 이때 더욱 성숙되고 세련된 국민이 되어야 한다.
-농월-
閨情(규정)임을 기다리는 마음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오신다고 기약하고 왜 늦으시나,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뜰에는 매화도 떨어지려 하는 때인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홀연히 들리네 가지위의 까치소리,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만 그렸구나.
이옥봉(李玉峯)
이옥봉李玉峰)
작자인 이씨(李氏)는 호가 옥봉(玉峯)인데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봉(逢)의 서녀(庶女)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인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조원(趙瑗)은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옥봉(李玉峰)의 한시는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등에 작품이 전해졌고 한 권의 시집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 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새해 들어 설이 가까이 오면 누군가 기다리는 마음이 생긴다.
사랑하는 정인이든, 멀리 외국에 나가있는 친구, 친척, 때로는 어떤 사정으로 감옥에 있는 가족, 혹은 동호회 모임의 친구까지도 가을과 다르게 은근히 기달려지는 시기이다.
이옥봉의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한 이 시는 상당한 절창(絶唱)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멀리 떠난 임이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소식 하나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 규방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여인네의 애타는 마음이 절제된 표현 속에 잘 녹아 있다.
헤어질 때 임은 매화가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매화가 다 질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마음은 날마다 애가 타기만 한다.
어느날 아침 문득 매화나무 가지에서 까치가 울어댄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에 불현듯 다시 희망을 가져본다. 혹시라도 기다리던 임이 오지 않을까.
들뜬 기대감에 거울을 들여다 보고 그 속에 비친 눈썹을 곱게 단장한다.
그러나 시 속의 주인공은 까치 소리 때문에 행여나 임이 오실까 생각해서 화장을 하면서도 사실은 오늘도 오지 않을 줄을 알고 있다. 올 것 같았으면 약속대로 매화가 필 무렵에 왔겠지, 다 시들 때까지 오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올 리가 있겠는가.
정월은 기다리는 마음의 달이다.
그래서 까치가 등장한 것이다.
-농월-
|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을 피웠네
雪擁金橋凍不開(설옹금교동불개)
금교엔 눈이 쌓이고 얼음도 풀리지 않아
鷄林春色未全廻(계림춘색미전회)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완연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可怜靑帝多才思(가령청제다재사)
예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先著毛郞宅裏梅(선저모랑댁이매)
먼저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을 피웠네!
普覺一然(보각일연)
일연(一然,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 및 학자로 운문사(雲門寺) 주지로 있으며 왕에게 불법을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속성은 김견명(金見明)이며 자는 일연(一然) 시호 보각(普覺)이라 한다. 경북 경산(慶山) 출생으로 고려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아 승려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불법을 강론하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매화가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기록은 3천년전에 쓰여진 시경(詩經)에 이미 매화를 노래하였다 한다.
그러나 매화가 우리에게 실제 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24년(41년) 8월에 “매화꽃이 피었다”라는 기록과, 중(僧)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3권 아도기라(阿道基羅) 즉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의 기초를 닥다”라는 기록의 맨 끝에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을 피웠네”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후기의 고승인 일연이 지은 이 시의 내용은 아도(阿道)는 고구려 사람으로 신라 21대 비처왕(毘處王) 때에 사자(使者) 3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에서 여러해 동안 살았고 그 이전에 묵호자(墨胡子)도 모례의 집에서 숨어 살면서 불교(佛敎)을 전파하였다. 따라서 이 시에 의하면 일연의 시대에 시문학이나 일상생활에서 매화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4세기 후반 경에는 모례와 같은 신라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매화를 사랑하고 정성껏 키웠음을 짐작케 한다. 이시는 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서라벌(신라)은 불교의 나라(佛國)가 되기 이전의 신라를 뜻하고 봄의 도착은 불교의 전파됨을 뜻하며 모랑의 집 매화나무만이 봄의 신(神)이 조화(造化)를 일으켰다는 것은 모례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도움으로 아도가 신라에서 불교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는 즉 불교전도(佛敎傳導)를 은유(隱喩)한 것으로 해석한다.
※참고
모례(毛禮)-신라 사람으로 눌지왕 때 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 를 숨겨준 사람으로
이후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가 되었다.
묵호자(墨胡子)-고구려의 승려로 신라땅에 들어와 굴을 파고 살 면서 신라 공주의 병을 고쳐 주어 왕으로부터 불교를 전파도록 허락받았다.
한국인으로는 불교경전을 처음 배워온 아도(阿道) 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농월-
|
思鄕韻(사향운)고향을 그리는 노래
白雲天末是吾鄕(백운천말시오향)
흰 구름 뜬 저 하늘 끝이 바로 내 고향인데
處處登樓客恨長(처처등루객한장)
여기저기 누각에 오르니 나그네 시름만 길어진다.
最憶南江煙雨裏(최억남강연우이)
남강의 물안개 너무 그립고
釣船終日泛滄浪(조선종일범창랑)
낚싯배 종일토록 푸른 물결 위에 띄웠었지요.
권근(權近)
권근(權近, 1352~140)
고려 말 우왕(禑王)때와 조선 초의 문신 학자로 호는 양촌이다. 친명정책을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새 왕조인 조선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개국 후 각종 제도정비에 힘썼다.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사상은 퇴계 이황의 사단 칠정론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 개국 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장에 뛰어났고, 문학을 존중하여 실용을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에 밝아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다.
-농월-
오늘 아침 7시가 영하 11도예요 감기 조심하세요 | |
매화
看盡百花正可愛(간진백화정가애)
어여뿐 온갖 꽃 모두 보았고
從橫芳草踏煙霞(종횡방초답연하)
안개 속 꽃다운 풀 모두 밟았네.
一樹寒梅將不得(일수한매장부득)
그래도 매화는 찾을 수가 없는데
其如滿地風雲何(기여만지풍운하)
땅에는 눈보라만 가득하니 이를 어쩌랴.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
호는 만해(萬海·卍海), 속명은 유천(裕天)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다.
독립운동가며 승려시인으로 일제강점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이 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만해(萬海) 한 용운(韓龍雲)의 매화 시는 일제의 침략과 만행으로 온 나라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있으며, 매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설음과 압박에서 구해줄 구원자를 나타내고 있다.
-농월-
대낭군(待郎君)임을 기다리며
郎云月出來(낭운월출래)-달 뜨면 오신다고 임이 말했는데
月出郎不來(월출낭불래)-달 뜨도 임은 오시지 않으시네요
想應君在處(상응군재처)-생각건대, 틀림없이 임 계신 그 곳은
山高月上遲(산고월상지)-산이 높아 달이 늦게 떠서이겠지요
능운(凌雲)
능운(凌雲)은 조선후기 기생으로 전하고 다른 자료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여기 실린 기생들의 한시들은 모두 1패(牌) 기생들의 시입니다. 기생들의 급수는 1패(牌) 2패(牌) 3패(牌)로 분류되었는데 3패 기생은 “들병이-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 라 불리우는 최하층의 기생들로서 일반 평민들에게 조차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2패 기생은 대부분 관기(官妓)들로서 지방 관리들을 접대하는 부류였습니다. 1패 기생은 그야말로 재색(才色)을 겸비(兼備)한 기녀들로서 그녀들 대부분은 양반들 첩의 딸들이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인형처럼 생긴 예쁘기 만한 여자 스타들과 비교가 안되었습니다. 언문은 물론이고 한자와 고서(古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소리 춤 시 서예 가야금 등 모든 예능 방면에 능통하였고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과 정치를 논하여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다방면의 지식은 물론 미모까지 뒷받침 되어야만 비로소 1패 기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1패 기생이 황진이와 이매창입니다. 뭇 남성들의 우상이었으며 만인의 연인이었으나 태생(胎生)의 한계로 평생 한(恨)에 묻혀 살아야 했던 1급 기녀들의 애환과 사랑이 한시 속에 담겨 있습니다.
-농월-
|
매화
年將知命病相催(년장지명병상최)
이제 겨우 쉰 살이 되려는데 병이 드니
屋角悠悠楚些哀(옥각유유초사애)
지붕 모퉁이 아득하고 마음은 아리고 서글프구나.
梅蘂不知人事變(매예부지인사변)
매화는 사람에게 병고가 생긴 것도 알지 못하고
一枝失發送香來(일지실발송향래)
한 가지에 먼저 꽃을 피워 향기를 보내오네.
이정(李定)
이정(李定)
조선 전기 종친(宗親)중에 강양군(江陽君 )이정(李定1545-1597)이라는 사람은 매화를 얼마나 사랑하였던지 일생동안 매화를 항상 가까이 두고 살았다고 한다.
이정(李定)이 죽음에 이르러 화분에 있는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코에 가까이 대고 향내를 맡으면서 매화시 한수를 짓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어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에서 임종(臨終)을 지켜보던 사위에게 절명시(絶命詩-죽음에 마지막 쓰는 시)를 받아쓰게 한 후 이 시를 다 받아쓰고 난 뒤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가 일생동안 가까이 두고 사랑하며 길러왔던 분매(盆梅) 하나가 주인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지 하나에 몇 송이의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선사하고 있지만,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는 이정(李定)은 “매화가 사람에게 변고가 생겨 죽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하면서도, 결코 매화는 자신을 모른 체 하지 않고 그의 죽음 앞에 꽃을 피워 향기를 보내주는 아름다운 보은(報恩)의 정을 느끼게 하는 시다.
이정(李定)은 매화뿐만 아니라 거문고와 술을 좋아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그가 죽을 때 세 가지 물건을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遺言)에 따라 거문고와 자치통감 그리고 술항아리 하나를 묻어주었다고 한다.
매화는 우리와 같이 그 많은 세월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옛날 시인의 마음처럼 매화의 그윽한 향기를 느끼며 대화를 나누던 때를 잊고 산지가 오래다. 그냥 꽃으로만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야박해졌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연과의 진실된 교제가 단절된 이유일까 다만 몸에 좋다며 매실(梅實)로 가공한 술로 그 옛날 매화를 대신하고 있으니 세상이 삭막하기만 한 것 같다.
※참고
사마광이 편찬한 중국통사(中國通史-중국역사)를 세종임금의 명령으로 윤회, 권제 등이 교정하고 주석을 덧붙이거나 빼서 1436년에 간행한 고문서(古文書)이다.
-농월-
|
대한(大寒)추위
大寒漢高祖(대한한고조)
대단히 추운 방(邦-漢高祖)에
陶淵明不來(도연명부래)
잠(潛-陶淵明)이 오질 않네.
欲擊始皇子(욕격시황자)
부싯돌(扶蘇-始皇子. 부싯돌을 말함)을 치고자 하나
囊無項將軍(낭무항장군)
주머니에 깃(羽-項將軍)이 없구나.
요로원야화기
오늘이 대한(大寒)입니다.
대한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운지 영상 1.1도에서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대한 추위의 한시 내용은 잠자리가 하도 추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시를 꺼내 불이라도 붙여 몸을 녹이고 싶은데 깃(불 붙이는 솜)이 없으니 불을 붙일 도리가 없다는 타령입니다.
대한(大寒)은 24계절중에 마지막 절기이며 음력 섣달로 매듭짖는 절후입니다. 겨울철 추위는 입동(立冬)에서 시작하여 소한(小寒)에 이를수록 추워지며 대한(大寒)에 으르러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때 태양의 황경(黃經)이 300도 일 때입니다.
새해가 들어 오늘로서 벌써 21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마지막 절기 대한(大寒)을 보내므로서 일년을 마감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설을 맞이하고 뒤따라 입춘이 올것입니다.
세월은 이렇게 빠릅니다.
이시간 이추위에서도 우리들의 아들들은 이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전선에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참고
“요로원야화기”는 조선 숙종 때 박두세(朴斗世1650~1733)가 지었다고 하는 수필형식의 단편산문집을 말하며 그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아래의 내용을 읽어보면 위의 "대한 추위 한시"를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한시에는 유희적(遊戱的-장난기) 시가(詩歌)성분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구사한 작품들이 있다. 그것은 시가(詩歌)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기법이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만 탐닉(耽溺)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속에서 뜻밖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발견할수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금일손(金馹孫)이 젊어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띄운 편지 한 통이 장인에게 배달되었는데, 편지의 사연이 야릇하였다.
文王沒(문왕몰)-문왕(文王)이 돌아가시자,
武王出(무왕출)-무왕(武王)이 나오셨네.
周公周公(주공주공)-주공(周公)이여 주공(周公)이여!
召公召公(소공소공)-소공(召公)이여 소공(召公)이여!
太公太公(태공태공)-태공(太公)이여 태공(太公)이여!"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문왕(文王)이 돌아가시자,
무왕(武王)이 나오셨네.
주공(周公)이여 주공(周公)이여!
소공(召公)이여 소공(召公)이여!
태공(太公)이여 태공(太公)이여!"
고대 중국 은(殷)나라가 임금 주(紂)의 포학한 통치로 혼란에 빠지자, 제후였던 문왕(文王)은 어짊으로 백성을 다스려 모든 제후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주(紂)의 포학한 정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이에 그 아들 무왕(武王)이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 주(紂)왕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이때 무왕(武王)의 수레를 막고 출병(出兵)의 불가함을 막았던 이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다.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이와는 달리 무왕(武王)을 보필하여 주(周)왕조의 기틀을 다진 세 공신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이다. 후세는 이 세 사람을 삼공(三公)으로 기려 높였다.
다시 이런 역사 배경을 알고 다시 위의 편지를 읽어 보면, 어진 임금이 어진 임금의 뒤를 잇고, 다시 충직한 신하가 보필하는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찬탄이 된다.
그런데 산사(山寺)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던 사위가 뜬금없이 장인에게 보낸 편지치고는 웬지 괴이쩍다. 김일손은 과연 “장인 어른! 저 요즘 이렇게 열심히 중국 역사 공부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편지를 띄웠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문왕(文王)은 이름이 발(發)이고
무왕(武王)의 이름은 창(昌)이다.
주공(周公)은 이름이 단(旦)이고
소공(召公)은 석(奭)이다.
태공(太公)의 이름은 망(望)이다.
이것을 음독(音讀) 훈독(訓讀) 섞어 독(讀)을 하게 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신발) 창(昌)이 없어 발(發)이 나왔으니,
아침(旦)마다 저녁(奭=夕)마다
바라고 바랍니다(望).
쉽게 말해 장인 어른! "신발 한 켤레만" 이 위 편지의 진짜 사연이다. 맹랑한 편지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윽고 무릎을 친 장인은 두 말 않고 가죽신 두어 켤레를 산사(山寺)로 보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로원야화기”에도 이와 비슷한 장난시가 실려 있다.
大寒漢高祖(대한한고조)-굉장히 추운 한고조(漢高祖)에게
陶淵明不來(도연명부래)-도연명(陶淵明)은 오지를 않네.
欲擊始皇子(욕격시황자)-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을 치고자 하나
囊無項將軍(낭무항장군)-주머니에 항장군(項將軍)이 없고나.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웬 때 아닌 추위에 떨고 있으며,
시대도 다른 도연명(陶淵明)은 왜 그에게 오질 않는가.
진시황의 아들과 주머니 속의 항장군(項將軍)은 또 무슨 관련이 있는가?
위 시는 이런 식으로 읽어서는 설명이 안되는 내용이다.
앞서 김일손의 편지를 읽는 것과 꼭 같은 독법(讀法)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고조(漢高祖)의 이름은 방(邦)이고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은 잠(潛)이다.
시황(始皇)의 아들은 부소(扶蘇)이고,
항장군(項將軍)의 이름은 우(羽)이다.
이를 풀어 다시 읽으면 위 시는 아래와 같이 설명이 된다.
大寒漢高祖(대한한고조)-대단히 추운 방(邦: 漢高祖)에
陶淵明不來(도연명부래)-잠(潛-陶淵明)이 오질 않네.
欲擊始皇子(욕격시황자)-부쇠(扶蘇-始皇子. 부싯돌을 말함)를
치고자 하나
囊無項將軍(낭무항장군)-주머니에 깃(羽-項將軍)이 없구나.
잠자리가 하도 추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부시를 꺼내 불이라도 붙여 몸을 녹이고 싶은데 깃이 없으니 불을 붙일 도리가 없다는 타령이다.
-농월- | | 37 http://cafe.daum.net/470403/M5hc/60
정매(庭梅)뜨락에 핀 매화
練艶霜輝照四隣(연염상휘조사린)
비단처럼 고운 서리 빛으로 주위를 비추니
庭隅獨占臘前春(정우독점납전춘)
뜨락 구석에서 섣달의 봄 홀로 하고 있구나,
繁枝半落殘粧淺(번지반락잔장천)
번화한 가지 반쯤 지니 고운모습 거의 스러진 채
晴雪初消宿淚新(청설초소숙루신)
갠 눈이 갓 녹아 눈물 새로 머금었네
寒影低遮金井日(한영저차김정일)
차가운 그림자 나직이 우물의 해를 가리웠고
冷香輕鎖玉窓塵(냉향경쇄옥창진)
싸늘한 향기는 가벼이 옥창(玉窓)의 먼지를 잠갔구나
故園還有臨溪樹(고원환유임계수)
내 고향 시냇가 몇 그루 나무는
應待西行萬里人(응대서행만리인)
서쪽으로 만리 길 떠난 사람 기다리리.
崔匡裕(최광유)
최광유(崔匡裕)
본관 경주(慶州)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다. 숙위학생(宿衛學生-지금의 국비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신라에서 당나라 국비유학생중에서 당나라 빈공과(賓貢科)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58명이며 최광유(崔匡裕)는 학문이 깊고 시(詩)에 능하여 당나라에서 최치원(崔致遠) 박인범(朴寅範) 등과 함께 신라 10현(賢)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간행된 십초시(十抄詩)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 유학생중 최고의 벼슬을 한 사람은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선생이며 당나라의 도통순관(都統巡官)이라는 벼슬에 올라 황제로부터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중국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난 대농민반란인 황소의 난(黃巢─亂)때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한 최치원선생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글로서 난을 평정한 유명한 기록이 있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아마 당나라 유학 시절 (대략 890년전후) 지은 위의 최광유(崔匡裕)의 시가 우리나라 시인으로서는 최초로 읊은 매화시일 것으로 전한다.
-농월- | |
강물에 부서진 달
胡孫投江月(호손투강월)-강 속의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波動影凌亂(파동영능란)-물결 따라 달 그림자 조각조각 흩어지네.
飜疑月破碎(번의월파쇄)-오호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引臂聊戱玩(인비료희완)-팔을 뻗어 달 조각을 만져보려 하였으나.
水月性本空(수월성본공)-물에 비친 달은 본디 비어있는 달이라
笑爾起幻觀(소이기환관)-우습구나, 너는 지금 헛것을 보는 게야.
波定月應圓(파정월응원)-물결 갈앉으면 달은 다시 둥글어 질것이고
爾亦疑思斷(이역의사단)-품었던 네 의심도 저절로 없어지리.
長嘯天宇寬(장소천우관)-한 줄기 휘파람 소리에 하늘은 드넓은데
松偃老龍幹(송언노룡간)-소나무 늙은 등걸 비스듬히 누워 있네.
강희맹(姜希孟)
강희맹(姜希孟1424~1483)
본관 진주(晋州) 조선세종~성종 시대의 문신이며 세종과 이질이고 화가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남이(南怡)의 옥사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익대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겸손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과 (예종신록)을 편찬하였다.
관료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을 자졌다. 아들에게 훈계하는 내용의
훈자오설(訓子五說)과 두 나무꾼의 이야기 승목설(升木說)이 유명하다
-농월-
|
고향생각
年來世故隔妻兒(년래세고격처아)
해를 넘겨 세상 일로 처자식과 떨어져
每憶舟從故里移(매억주종고리이)
언제나 배를 타고 고향 갈 생각했지.
風雪滿城孤燭夜(풍설만성고촉야)
성 가득 눈보라 외로운 등불 타는 밤
寸心唯有道人知(촌심유유도인지)
내 마음 아실이 정녕 그대뿐이리라.
백광훈(白光勳)
백광훈(白光勳1537~1582)
조선 중기 시인으로 본관은 해미(海美)이며 호는 옥봉(玉峯)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명나라 사신에게 시와 글을 지어주어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받았으며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린다.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백광훈의 고향을 그리는 사향시(思鄕詩)는 사람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눈보라가 치고 문풍지가 우는 밤, 낯선 땅 하숙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오도카니 앉아 있다. 처량한 이 마음을 그대는 아는가.
뜬금없이 떠오르는 아내 생각, 자식 생각. 고향 길, 닻을 달아 배 띄울 날 그 언제려나, 잠들면 꿈속에나 가볼 수 있겠지만, 꿈길에도 안쓰러운 모습, 가슴 아파 앉아 있는 타향의 나그네----
곧 이세상을 살가는 네 모습이고 내 모습이다.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모태와 같다. 가고 싶어도 못갈 때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차라리 기갈(飢渴-배고픔과 목마름)에 가깝다.
-농월-
|
유자음(遊子吟) 나그네의 한탄
遊子久未返(유자구미반)
객지에만 떠돌아 다니는 자식 돌아가지 못하니
弊盡慈母衣(폐진자모의)
어머니 주신 옷도 다 해어져 버렸구나.
故山苦遼邈(고산고료막)
고향은 아득하고 멀어 마음만 아픈데
何時賦言歸(하시부언귀)
어느 때에나 고향 돌아갈 노래 지어보려나.
人生不滿百(인생불만백)
인생은 백 년도 채우지를 못하니
惜此西日暉(석차서일휘)
오늘 서편으로 지는 햇빛을 아쉬워 하노라.
변중량(卞仲良)
변중량(卞仲良 ?~139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 밀양, 호 춘당(春堂)이다. 조선 이원계(李元桂-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이며 정몽주의 문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密直使)를 지냈다.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의 독직을 비판하다가 관직이 박탈되었으나 그 해 복직되었다.
지금 KBS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태종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 후에 왕이 되기 위해 많은 건국공신을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잠시 형인 이방과(정종)를 왕으로 추대하였지만항상 정종의 세력은 미리 제거할 필요를 염두에 두었다. 정종의 왕비인 충주 지씨의 친정으로 가까운 변중량과 변남룡은 그래서 죽임을 당하였다. 훗날 이방원은 자기 처가와 아들인 세종대왕의 처가도 모두 몰살시켰으니 그 전주곡이었다.
지금의 중랑구, 중랑천, 중랑교 등의 어원은 중량포(中良浦)였다. 군자교 일대 및 장안평 주변이다. 변중량(卞仲良)의 이름에서 인(人)자를 뺀 것이다.
동생 변계량이 형의 시신을 장단(지금의 황해도 장풍)에 있는 선산으로 몰래 옮겨 장례를 치렀다. 운구하기 위해 사용한 이름 없는 나루터를 이용했는데 이 나루터의 이름을 중량포(中良浦)로 적은 것으로 연유가 되어 지금의 중랑천으로 이어 온 것이다.
변중량은 고려 시인 20여인 중의 한사람이다. 조선 건국시 스승인 정몽주를 시해하려는 이방원 일파의 계획을 처가를 왕래하다가 우연히 알고 정몽주에게 미리 알린 사람이다.
시(詩)에 능하였으며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춘당공 변중량의 족보는 변효생과 변예생 대를 거쳐 명문 거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의 최대 갑부 변승업과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와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로 이어지는 조선의 천재 집안이 이어지는 것은 선대의 춘당공의 음덕(陰德)일까.
-농월- |
나그네 발길 어디로 가야 할까
節序忽云暮(절서홀운모)-시절이 홀연히 저물었는데
客行何所之(객행하소지)-나그네는 어디로 가야 할까
一身長作梗(일신장작경)-이 몸은 언제나 떠도는 신세로
雙鬢已成絲(쌍빈이성사)-뒤 귀밑머리는 이미 흰 실이 되었구나
短帽風聲緊(단모풍성긴)-짧은 모자에는 바람소리 세차고
疏燈夜影遲(소등야영지)-성긴 등잔불에는 밤 그림자가 더디구나
昨非今始覺(작비금시각)-어제의 잘못을 오늘에야 깨닫으니
事事不如期(사사불여기)-일마다 기대하던 것과 같지 않구나
박의중(朴宜中)
박의중(朴宜中1337∼140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밀양. 호는 정재(貞齋).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으로 등용되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들이 옛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설치한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창왕 때 공신에 봉하여졌다.
철령위(鐵嶺衛)란 고려 시대에, 중국 명나라가 설치하려던 70개소의 병참 군영으로. 우왕 14년(1388)에 함경도 철령에서 중국 요양(遼陽)에 이르는 곳에 설치하려고 하였다.
공양왕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음양에 의한 지리설의 허황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1392년(태조 1)에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박의중의 일화중 공민왕때 철령 이북 땅의 반환을 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고려의 토산물을 가지고 가서 중국의 비단과 바꾸어왔다. 이러한 물물교환으로 얻은 이익이 적지 않았는데, 여비를 충당하고도 남아
재물을 축적하는 사신들이 많았다.
이런 일이 빈번하자 명나라 관리들은 고려 사신들을 아주 우습게 여기며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박의중은 사신으로 가면서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가 명나라에 도착하자 요동의 관리로 있던
서현이 그에게 옷감을 요구하였다. 그동안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물물교환의 대가로 그 지역의 관리에게 노물을 바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박의중은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털어 보이며 자기가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주었다. 서현은 그의 청백함에 감탄하여
예부 관리에게 이를 알렸다.
명나라 황제가 그를 접견하고 특별히 대우하였으며,
결국 철령위를 설치하려던 계힉을 거두었다. 박의중이 고려로 귀국 하려 했을 때 서현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만난 고려 사신들이 많았으나 박의중처럼 황제에게 대우를
받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했다.
어느 시대에나 탐욕과 청빈은 항상 같이 존재하지만
물질을 중요시 하거나 탐내는 사람은 소인배 로 취급되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 없지만..
청빈하는 사람은 많은 세월이 지나도 후세사람의 귀감 이 되는 게 아닐는지?
-농월-
억향산(憶鄕山) 고향 산천 그리워라
苦憶峨嵋山上月(고억아미산상월)-보고파라 고향의 달
苦憶峨嵋山下雲(고억아미산하운)-그리워라 고향의 구름
隨處無非雲與月(수처무비운여월)-어디인들 달과 구름 없을까마는
最是峨嵋無垢氛(최시아미무구분)-티없이 맑은 고향산 달과 구름
이태서(李台瑞)
이태서(李台瑞1614~?)
본관(本貫) 성주(星州) 인조(仁祖)23년(1645년), 별시(別試) 병과7(丙科7)에 합격하다. 소과(小科)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다.
-농월- | |
낙중우회(洛中寓懷) 고향 생각 나그네
千里思歸客(천리사귀객)-천리 먼 고향을 생각하는 나그네
孤燈半夜心(고등반야심)-깊은 밤 외로운 등불 바라보는 심정
長懷少年事(장회소년사)-긴 회포 젊을 때의 일 생각하니
明月故山林(명월고산림)-밝은 달이 고향산의 숲에 떠있다
오건(吳健)
오건(吳健1521~1574)
본관 함양(咸陽) 호 덕계(德溪)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등에게 수학하였다.
선조 때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문하생으로 1572년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인근의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남명의 장례식에 참석한 제자들은 당시를 대표할 만한 학자들이었다. 장례 절차중 남명선생 신주에 칭호를 쓸 때,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제자 대표로 동쪽에 서고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이 그 다음으로 서쪽에 서고 나머지 제자들은 각각 차례대로 섰다. 이때 덕계의 학식과 덕망은 제자 대표로서 손색이 없었다. 당시 벼슬 또한 인재등용을 맡아보는 이조정랑을 지냈으니 남명 제자들 중 으뜸이었다.
남명이 세상을 떠난 후, 남명의 제자 대표로 유림의 추앙을 받아왔다.
-농월-
|
靈巖石刻 勉僧看病(영암석각 면승간병)-영암산 석벽에 새겨진 글 병든 비구
四海無家病比丘(사해무가병비구)
사방에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병든 비구(比丘)여,
孤燈獨照破牀頭(고등독조파상두)
외로운 등불만 파손된 침상을 홀로 비추고 있네.
寂廖心在呻吟裏(적료심재신음리)
적막하고 쓸쓸하여 신음소리 처량한데
粥藥須人仗道流(죽약수인장도류)
죽 한 그릇 먹으려 해도 도반(道伴)에게 간청한다.
病人易得生煩惱(병인이득생번뇌)
병을 앓는 사람은 슬픈 생각 더욱 많고
健者長懷惻隱心(건자장회측은심)
성한 사람들은 측은한 마음뿐일세.
彼此夢身安可保(피차몽신안가보)
피차가 모두 꿈같은 인생이라 어찌 오래 보전하랴.
老僧書偈示叢林(노승서게시총림)
노승은 이 글을 써서 총림에 보이노라.
영암석각 면승간병(靈巖石刻 勉僧看病)
이글는 경남 합천군에 있는 합천팔경에 속하는 황매산(黃梅山-일명 영암산靈巖山)의 한 암벽에 새겨진 글씨로서 이 글의 원래 제목은 영암석각 면승간병(靈巖石刻 勉僧看病)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옛날 어떤 스님이 병을 앓으면서 몸의 아픔보다 더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 있었다고 하여 스님들의 병간호에 힘쓰라고 부탁한 글이라고 한다.
출가 한 스님들은 동서남북 그 어디를 돌아보아도 가깝게 아는 사람 하나 없다.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친구)도 병을 앓으면 모두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에서는 상여가 나가면 그때에야 “그 사람 언제 아팠던가.”라고 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참으로 모진 생각을 하지 않으면 중노릇하기 어렵다. 또 어쩌면 이 외로운 맛에 중노릇을 하는 지도 모른다.
사람은 아프면 누구나 슬픈 생각만 더 들게 마련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온갖 번뇌가 다 일어난다. 성한 사람들 눈에는 그저 측은할 뿐이다. 알고 보면 누구나 이 몸뚱이 무상(無常)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가 머지않아 다 경험할 일이다.
아픈 사람은 설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이 더 처량해진다. 특히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심정은 더 심하다.
그래서 어느 노스님이 석벽에 새겨두었는지 모른다.
-농월-
|
和杜初月(화두초월) 나그네 잠잘곳 정하지 못하여
羈鳥棲未定(기조서미정)
나그네 새 둥지 아직 정하지 못하여
難爲一枝安(난위일지안)
한 가지의 안식을 얻기도 어려워라
林月初生影(림월초생영)
숲 속 이제 막 달 그림자 생기고
纖細掛雲端(섬세괘운단)
희미하게 먼 구름 끝에 걸려있네
流光入懷袖(유광입회수)
흐르는 빛 품과 소매에 들고
中宵覺微寒(중소각미한)
밤 깊어 으스스한 추위가 감도네
遠客愁夕永(원객수석영)
먼 길 떠난 사람 때문에 긴 밤이 괴로워
坐看松陰團(좌간송음단)
홀로 앉아 소나무 둥근 그림자만 바라본다
서령수각(徐令壽閣)
서령수각(徐令壽閣)
서령수각(1753-1823)은 조선 영조 때의 여류시인(女流詩人)이다. 문신(文臣) 홍인모(洪仁模)의 부인으로 령수각(令壽閣)은 그녀의 아호(雅號)이다, 령수합(令壽閤)이라고도 한다. 시(詩)에 뛰어났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길주(吉周) 현주(顯周) 등 세 아들과 역시 탁월한 여류시인 홍원주(洪原周)의 어머니다.
영수합 서씨(1753~1823) 홍인모의 부인으로 차(茶)를 사랑하는 차인(茶人)이었다. 자녀들 모두 차를 즐겼고 그의 다시(茶詩)도 여러 편이 전한다고 한다. 남편 홍인모(1755~1812)는 우부승지를 지냈고 경사, 음약, 의약에 통달했으며 역시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고 한다.
영의정 홍낙성 승지 홍인모로 이어지는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집안은 대표적인 노론집안이다. 홍석주(洪奭周)의 아우 길주 현주 3형제는 학문과 문장으로 뛰어난 천재인데다 홍석주(洪奭周)는 좌의정 현주는 정조의 외동딸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남편으로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진 해거도위(海居都尉)였다. 당시 남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비록 당파는 달랐지만 높은 학식을 갖인 이들 3형제와 고전(古典) 서경(書經)에 대한 많은 논쟁으로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우정이 깊은 사이로 변했다.
홍길주가 다산의 부음(訃音)을 듣자 “만권의 서고가 무너졌도다” 라고 탄식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이처럼 깊이 알아주는 학우들이 있었기에 다산의 노년은 행복했다고 한다. 학연과 지연을 뛰어넘고 당파까지 초월해서 학문과 문학으로 만나고 사귀던 그런 삶이 부럽기만 하다. 서령수각은 이처럼 훌륭한 자녀를 둔 어머니다.
-농월- |
나그네 잠자리에 기러기 소리
客枕破鄕夢(객침파향몽)-나그네 잠자리에 고향꿈 깨어나
五更風雨深(오경풍우심)-깊은 밤에는 비바람 심하였도다
數聲南去雁(수성남거안)-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소리
千里北歸心(천리북귀심)-천리 먼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
구봉령(具鳳齡)
구봉령(具鳳齡1526~1586)
본관 능성(綾城) 호는 백담(栢潭) 조선 중기 명종때의 문신이다.
부제학·대사성·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사람이 죽어서 장사 지낼 때까지의 절차)에 있어서 어른을 능가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545년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천체의 운행기록)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집에 백담집(栢潭集)이 있다.
-농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