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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 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으로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때문에 박정희를 불교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 12월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계기로 천주교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후 신부들을 연행과 구속이 되는 종교탄압이 시작됨.)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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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성격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박정희의 유사 파시즘적 체제는 1972년 민주제도를 파괴하고, 영구집권 기반을 확립한 '10월 유신'으로 성립했다. 박정희식 유사 파시즘은 '민족성 개조'라는 이름의 국민의식 개조운동과, 공포와 폭력이라는 물리적 탄압의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실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서 유사 파시즘 체제의 시동을 걸었다. 유신헌법은 그 유사 파시즘 체제의 법적 표현이었다.
의식개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이순신 성웅화' 작업이 표본이다. 농촌 새마을 운동에서 시작해 도시-공장-학교 새마을 운동으로 번진 이 운동은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 수단"이자 "유신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이었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은 "'나'는 없고 '국가'와 '민족'만 있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
이 유사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거나 의심을 품으면 돌아오는 것은 고문과 죽음이었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범죄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게 됐다. 애국심과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기주의적인 발상으로 매도되어 규탄과 매장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그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히틀러를 쓸만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가 윤보선, 장면 등으로부터 '제대로 된 민주주의자인가?' 하는 사상을 의심받기도 했다. 박정희에 의해 창시된 한국 파시즘 체제는 그가 암살된 1979년 10월에 붕괴된다. 이후 출현한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는 국풍 21 등을 잠시 장려하다가 중단된 바 있다.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직업훈련원을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박정희는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했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직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에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상황에서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정부의 엇박자 행보도 한 몫 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전철 수요가 많았던 강북을 제치고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한 것은 물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
외교관계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정책으로 베트남전쟁포기와 중국과의 관계개선,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박정희는 집권 초부터 미국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했다. 군사 정변 초기부터 공산주의자 라는 의혹을 받았고 이 의혹은 1960년대 내내 박정희를 국내외에서 괴롭혔다. 1961년 11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12월에도 거절당하였다. 1962년 11월에 가서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만날 수 있었다.
1968년 초부터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군사지원에 계속 의존 한계를 인식하여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협상요청을 완강히 거부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까지는 주한미군 전력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닉슨 행정부는 한국군 현대화 지원을 조건으로 1971년 6월까지 주한미군 지상군 1개 사단 병력 약 2만명을 철수시켰고 이후 인권정책을 도덕외교의 핵심으로 내세운 카터 행정부는 이를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시키면서 박정희 정부를 압박했다.
1977년 1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포함한 한반도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안보관련 부서에 지시했고,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초기에는 반발하다가 뒤에는 할테면 하라는 투로 응대하였다. 1977년 1월 말 지미 카터는 월터 먼데일(Walter F. Mondale) 미국 부통령을 일본에 파견하여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직접통보하는 성의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직접통보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먼데일은 한국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외교적 무례는 박정희와 한국정부를 심히 분노하게 만들었다. 2월 15일 지미 카터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지미 카터는 스나이더 대사와 존 베시(John W. Vessey) 주한미군사령관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재확인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인권정책의 개선도 함께 촉구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굴욕이나 하대로 간주하고 응하지 않았고, 한미관계는 1970년대 말에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1961년 겨울 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이는 경제개발을 하는 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는 의미도 있었으나,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1965년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1965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를 6.3 사태라 부른다. 6.3 사태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17대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각계의 반발이 있었으나 박정희는 한일 외교를 재개해 나갔다.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1965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를 6.3 사태라 부른다. 6.3 사태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17대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각계의 반발이 있었으나 박정희는 한일 외교를 재개해 나갔다.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필리핀은 14억 달러를 받았다. 한편 북한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과거사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1970년 6월에는 제주도 남쪽 8만km²를 제7광구로 정하고 한국령으로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1972년 당시 정설이었던 자연연장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유리한 처지에 있었으나 박정희는 공동개발하기로 합의하였다. 1972년 일본이 “한일간의 중간선에서 일본 쪽으로 넘어온 부분은 양국이 50%씩 지분을 갖고 공동개발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현재 일본은 공동개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계속 지연시키면 2028년 대륙붕협정이 만료하는 날 자연연장설 대신 UN의 새 해양법이 적용되어서 일본에 유리하게 된다. 한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이 맺어진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제주도와 중국 대륙에 붙어있는 7광구의 해저지형 때문이었다. 일본과 7광구는 깊이가 8000m에 이르는 ‘오키나와 해구’가 갈라놓고 있다. 당시까지 지배적 이론이었던 자연연장설로 볼 때 일본이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아르헨티나와 외교를 시작했으며 아르헨티나의 국토가 넓다는 것을 활용하기 위해 1971년에 국가예산을 들여 아르헨티나에 땅을 구입한 뒤 국민들 중 일부를 엄선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 구매한 아르헨티나 땅으로 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가 완전히 다른 데다가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구입한 상당수의 땅이 황무지였으므로 파견된 대한민국의 농부들은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의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박정희가 구입한 아르헨티나의 땅 중 산 하비에르는 농업에 적합한 땅으로 훗날 박정희는 산 하비에르에 한해서 아르헨티나로 파견된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시켜줬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아르헨티나와의 외교관계는 현재도 돈독해지는 추세이며 현재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는 상호 비자면제 협정을 할 정도로 준우방국이 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 사이에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가 핵무기개발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의 핵개발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초 미국 대통령 닉슨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국의 광둥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찾으려 고심하였다. 1974년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박정희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지미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미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 1978년 11원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咸秉春)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각서를 써주었다.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H. Rumsfeld) 미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박정희는 몹시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인한 군인정신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도 없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속성에 익숙한 이상 그것은 약소국과 그 지도자가 함께 겪어야만 하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비애였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한국의 핵무기개발이 미국의 강압에 의해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1972년을 전후하여 박정희의 핵개발에 자극받은 북한의 김일성도 핵 미사일 개발을 추진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이휘소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반미는 미국에 저항해서 민족 자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차원의 반미가 아니다.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측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70년대 중반에 핵개발이 취소되었지만, 박정희는 핵보유국들의 압력 속에서 이후에도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했다. 박정희는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도 그해 10월에 김재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군사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었고,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당시 한일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 6.3 학생운동 ' 으로 불렸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1965년 일본과 체결한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결렬되어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않던 한일 협정을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를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같이 어업문제 , 문화재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일본 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과 일본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나 긍정적 평가의 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으나 이와 함께 한일 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가 받은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개인 피해자들의 몫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경제개발 자금으로 전용한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977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 백지(白紙 ) 상태에서 계획을 수립하겠다”며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첫 구상을 밝혔다. 당시 충남 공주군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백지계획’은 1979년 10월 초 완성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당하고 난 이후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임 대통령이 되자 곧 백지화됐다.
월간조선 전 대표인 조갑제는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고 보았다. 또한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초정 박제가의 ‘상업국가론’이며 이를 꽃 피워 국가발전의 틀을 닦은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1999년, 조갑제와 대담한 노태우 전대통령에 의하면 박정희 주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박정희가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민주화 운동시에는 박 전대통령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비판을 했었다”면서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功)을 알게 됐다”고 말하였으며 이어 “근대화와 민주화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된 나라가 없다. 그래서 사고의 균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박 전 대통령은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분이자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장기집권이 문제였지만 박 전 대통령은 굉장히 소탈하고 청렴했다. 부정부패에 대해 철두철미했고 가족과 측근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 점이 재평가를 받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하였다.
자주국방 정책을 통한 국방력 강화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형 전차 흑표의 개발자인 조남태는 박 대통령의 전력증강 8개년 계획으로 "소총, 미사일, 전차 등이 국산화 되었고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결국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
경영인인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지만 이 시대(당시)에 열심히 엔진을 돌려놓았기 때문에 엔진이 꺼진 지금도 관성에 따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배 이상 늘어났는데 이런 수치를 두고 어떻게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박 대통령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준공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기업활동과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며 여타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지적했다. 윤 부회장은 또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을 ‘정치적 목적이 있다’며 이후 정권에서 없애버린 것도 개인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당선자 워크숍에서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며 의원 당선자들에게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의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소신발언을 토해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베트남, 네팔, 라오스등의 개발 도상 국가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 개발지상주의자로 평가받는 박정희 정부의 그린벨트 정책과 조림사업은 양대 환경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3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빈곤ㆍ질병 퇴치를 위한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그룹 회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접근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인 한국에서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이 성공한 데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유엔 일부 직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 성공사례를 배울 것이 없는지에 관해 얘기해왔다"며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홍준표는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체제를 선택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도 좌파정책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라고 주장하였으며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한편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을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만주 군관학교와 만주군 장교 시기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에 등재시며 그 근거로 박정희의 만주군 1939년 만주군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작성하였다는 신문기사를 공개하였다. 이에 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박정희가 쓴 혈서를 보도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으나,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 라고 밝혔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주의 탄압에 관련된 비판이 있다.
강준만, 서중석,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바로 볼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김영삼은 미화가 심하고 제대로 된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도 평가하였다.'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정(중앙정보부)을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미화가 심해요.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라 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하였다. 또한 김영삼은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김영삼은 개인적으로 박정희에게 '멀쩡한 총재를 총재가 아니라고 해서 내쫓고, 나를 죽이려 백주 대낮에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얼마나 탄압하고 죽이지 못해 온갖 짓을 다하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했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나는 이미 다 풀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 경쟁자인 4대 대통령 윤보선의 비서관을 지낸 언론인 김준하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와 윤 대통령과의 면담 과정 등을 지켜보면서 아주 영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며 "박정희는 민정 이양 등에 관해 수시로 말을 바꿨다"고 진술하였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고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과 구 소련을 모방한 공산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관치경제를 띠고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
미국은 제2공화국 정책과 비교하면서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을 공산주의적이라며 반대했다.노회찬은 박정희가 사회주의자라며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장기화 되면서 사회주의적 관치경제가 만연하게 되었고 한국경제를 자립화 시킨다는 당초 목표와 달리 대외의존형 경제로 고착되었으며 특히 미국과 일본에 대한 종속이 심해 국민의 정부 경제개혁 이전까지 국정 전반적으로 영향에 미쳤다. 대외무역에서도 국민의 정부 이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한 정부 모두 수입이 수출보다 훨씬 많아 무역적자가 심했다.(참조:대한민국의 무역수지)또한 미국이 공산주의적 경제정책이라며 반대하자 지원을 거절하자 한일회담에서 일본에 굴욕적인 자세로 외교하고 독도밀약을 체결해 국민들이 6.3시위 등으로 저항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지도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혹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세계주의와 국수주의 등을 가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친일 의혹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보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들이 있다. 흔히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관심을 쏟은 지도자라고 평가되지만, 당시 정책 가운데 국가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다고 평가하였으며 “예컨대 의료보험 정책에서 시장지향적이 아닌 국가주도적 체제를 도입했으며, 교육분야에서 중·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한 것은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적인 시도였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대학 류석춘 교수는 “‘박정희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며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도덕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류 교수는 “당시의 리더십은 “‘잘 살기 위해 부정부패 안 하고 열심히 할테니, 국민도 잘 따라오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반적으로 국가와 기업의 유착도 있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동의를 얻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당시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점은 인정해야 한다”면서도‘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우리 국민에게 자신감을 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때문에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긴 측면도 있다”고 다른 해석을 내놨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심인데도, 결과 위주의 정치·사회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IMF 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고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
한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단지 내에 KIST의 설립자인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업적에 대한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김영삼은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 정권으로도 가능했으며 5·16 군사정변이 없었으면 장면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라고 평가했다.
한나라당 친이계에서는“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부과천청사를 만든 것은 잘못“이라며 비판했다.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러 언론의 여론조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2009년 8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서 국가발전에 가장 높게 기여한 대통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1위로 박정희 전 대통령(53.4%), 김대중 전 대통령(25.4%), 3위엔 노무현 전 대통령(12.4%)이 올랐다. 이어 전두환(2.2%), 윤보선(1.8%), 이승만(1.6%), 노태우(1.3%), 김영삼(1.3%), 최규하(0.5%) 전 대통령 순으로 집계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경북(64.0%)과 대전충청(64.5%) 지역에서 많은 응답을 얻었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50대 이상에서 65.5%, 40대 59.4%, 30대 44.8%, 20대 36.7% 등 응답자의 연령이 높을수록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영남대학교에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6%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답했으며 이어 김대중(12.9%), 노무현(4.4%), 이승만(0.6%), 전두환(0.6%), 김영삼(0.5%) 전 대통령 순으로 나타났으며 응답자 중에서 72.8%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해 ‘아직 때가 아니다’(16.8%)를 크게 앞섰다.
2008년,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153.6%를 기록한 박정희 정부를 대한민국 선진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정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정권초 선진화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정권 말에는 253.6를 달성했다는 의미로서 박정희 정부에 이어 전두환 정부 44.3%, 김영삼 정부 42.7%, 노태우 정부 36.5%, 김대중 정부 28.1%, 노무현 정부 23.8% 순이었다.
2010년 9월에 실시된 역대 대통령 신뢰도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34.2%로 1위로 나타났다. 2007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52.7%, 2009년에는 41.8%로 나타나 눈에 띄게 하락세를 보였다. 시사IN은 신뢰도 조사 결과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발전 방식이 ‘박정희 향수’를 상당히 소진시킨 것으로 분석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계층별로도 차이가 컸다. 40대 이상, 대구경북,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지지층에서 평가가 높았으며,20~30대 젊은층, 진보성향, 화이트칼라, 대학교 재학 이상의 고학력층을 중심으로 평가가 낮았다.2011년 리서치뷰가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전현직 대통령들 중 가장 호감가는 사람을 1명 선택해달라"는 질문에 박정희를 선택한 사람은 31.9%로 노무현 30.3%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국부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을 벤치마킹한 결과였다고 한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2009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박 전 대통령 모델을 가장 많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 2006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와 면담하며 “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깊이 공부했다”고 발언하였다.
이밖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99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대 총장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가 대기업을 키우고 경제발전을 주도했던 한국 경제의 발전 방식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을 통해 “한국어 책이든 외국어 책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제3공화국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발생된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과 1967년에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암살 미수, 윤보선의 지원유세를 하던 장준하가 박정희를 친일파, 밀수 왕초로 비판했다가 구속수감되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 암살 의혹 역시 제기되고 있다.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현역 육군중령을 시켜 그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박정희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윤보선암살계획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1972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1975년 10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비난했던 김옥선의원에 대한 공화당 등의 국회 강제축출(김옥선 파동), 1979년의 김영삼의 의원제명 파동 사건 등이 있었다.
1963년 선거에선 윤보선과 경쟁하면서 호남지역에서 높은 지지율을 받았으나, 1971년 대선에서 상대 후보였던 정적인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비판하면서,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지역감정을 조장한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구체적인 사례로는 1971년 대선 때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영남 지역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전단지가 나돌았으며, 1971년 대선 연설에서 공화당 찬조연사는 "경상도 사람치고 박대통령 안뽑을 사람있느냐"의 발언하는 한편,또 다른 연사는 "이런 사람(김대중)이 전라도 대통령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만약 박 전 대통령이 지역 균형발전 철학을 갖고 있었더라면 박정희 정권 시절 영호남 갈등이나 지역 차별 논란이 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1966년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는 당시 방첩부대장인 윤필용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윤 장군님, 이건 절대로 여자의 시샘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하께 여자를 소개하면 소개했지 왜 꼭 말썽날 만한 탤런트들을 소개합니까?"
한 중정부 직원은 박정희의 시중을 들기 위한 '마담'이 200명 가량 있었다고 증언했다. 안가에서 술자리 모임이 생기면 이 중에서 면접을 통해 접대 여성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의 여인' 중 수십 명이 1980년대에도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을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선호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박선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고 평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변호사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접대하기 위한 여성의 수가 200명을 넘었으며, 그 중 가수 심수봉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주색에 빠져 향락에 젖은 박정희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고 한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등이며,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하며 박선호와 한 중앙정보부 직원 등이 같이 증언하였다.
영화배우 문병옥(문일봉)은 1991년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1962년 만찬장에서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나 딸 하나를 낳았고,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관계를 유지, 서울 중구 순화동 집에서 딸 둘을 더 출산했으며 친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박대통령의 친필 편지 3통이 있다"고 말했다. 1995년「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숭모회」 상임부회장 이순희가 『각하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문병옥을 찾아나서 한 암자에서 스님이 된 문씨를 만나 기사내용이 허위라는 각서를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이순희는 법정에 제출한 각서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불명예스런 기사를 싣게 한 것을 속죄하는 뜻으로 숭모회에 순화동의 23평짜리 땅을 기증하겠다』고 썼다. 문병옥이 승려가 된 탓에 비어있던 순화동 집을 차지한 이순희는 1995년 문병옥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냈다. 1997년 6월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숭모회」 상임부회장 이순희가 문병옥을 상대로 낸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고발사건에 대해 서울지검 동부지청이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문병옥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 1999년 대법원은 "문병옥의 각서는 친필로 볼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들은 증언을 근거로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을 제기하였다.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 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한홍구는 그런 주장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 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한홍구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한홍구는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김일성으로부터 증금강산 선녀도와 동봉된 김일성 친필 명함, 청자목문(靑磁牧文)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 박정희는 이를 애장품의 하나로 소장하였고 2009년 1월 공개되었다.
경북 구미시가 박정희 기념 행사를 열어 논란을 일으켰다. 하순봉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핵 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사무라이 마니아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박정희는 집안의 강요에 의해 김호남과 결혼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혼했고 그 이후 육영수와 결혼했다. 이 당시 박정희의 슬하에는 14살의 딸 박재옥 한명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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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朴成彬 1871 -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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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의 白南義 1872 - 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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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남 金好南 1920 - 1990 1950년 박정희와 이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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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朴正熙 1917 -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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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陸英修 1925 - 197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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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옥 朴在玉 19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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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朴槿惠 19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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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朴書永 19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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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만 朴志晩 1954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