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력은 눈부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6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아이. 어려서부터 발레리나를 꿈꿨지만 딸이 학자가 되길 원한 부모님 뜻에 따라 꿈을 접고 뉴욕 명문 중학교에 진학했다. 좋은 성적으로 예일대에 입학해 3학년 때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현지 정부가 주는 마셜 장학생으로 선정돼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때도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법학을 공부하겠다며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뉴욕에서 검사로 일하다 2006년 하버드 로스쿨 조교수로 임명됐다. 그 후 4년 만에 종신 교수가 되면서 성공 스토리에 하이라이트를 찍었다. ‘종신 교수’란 재계약이나 정년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생 정교수직을 보장해 주는 제도다.
아시아 여자로는 처음이라니 축하한다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쁘다. 더 행복해졌다.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굉장한 선물이니까. 하지만 솔직히 내 모든 꿈이 실현됐다는 기분은 아니다. 그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을 뿐,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왔을 것 같다 아이들 가르치면서 틈틈이 연구 실적도 내야 해서 굉장히 바빴다. 하버드대는 교수를 평가할 때 논문이나 출판 경력, 아이들을 가르치는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강의 준비도 만만치 않은데 논문도 써야 하고 행정적인 일도 많고 학생들도 만나야 한다. 일반인이나 다른 교수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일도 있다. 마치 저글링을 하는 기분이다. 대개 임용 후 7년 정도 지나면 종신 교수직 심사를 받는데, 워낙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4년 걸렸다. 법대 교수가 100여 명이고 3분의 2가 찬성해야 되는데 반대표가 없었다고 하더라. 너무 자랑 같은가(웃음).
종신 교수가 되고 달라지는 건 뭔가 우선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다. 연구자에게 ‘자유’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다. 어렵거나 위험한 주제를 연구할 때 실패가 두려워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래도 안정적인 위치가 보장된다는 얘기다. 내 연구 중에는 논란을 일으킬 만한 주제도 있었고 때로는 비판도 받았다. 이런 경우 교수직이 종신 보장된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더 ‘위험한’ 연구들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얻은 자유로움을 더 많이 활용할 것이다.
논란을 일으켰던 연구를 소개해 줄 수 있나 예를 들면, 최근에 쓴『At Home In The Law』라는 책에서 가부장적인 미국의 법 제도를 다뤘다. 지난 40년 동안 법이 많이 바뀌었지만 ‘가정’을 바라보는 법적인 시각은 여전히 남자 위주고 그 사이에서 여자들은 소외돼 있다고 지적했다. 가정 폭력 같은 문제도 그런 시각 때문에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스탠퍼드대 교수 친구와 함께 썼던 논문에서는 ‘영화나 음악, 미술은 저작권 보호를 받는데 패션은 왜 보호받지 못하느냐’고 지적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석 교수가 말한 저서는 지난해 미국 법사회협회로부터 ‘올해 최고의 법률 서적’에 선정됐고, 그녀의 논문으로 시작된 논의 덕에 올해 미국 연방의회에서 ‘패션 저작권법’에 대한 법안이 상정됐다. 서른일곱 살의 한국 여자가 미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다. 요즘 그녀는 형사법과 가족법, 예술과 패션 분야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며 담론을 만들고 있다.
법을 사랑한 발레리나
석 교수는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재원이다. 그녀가 졸업한 뉴욕 헌터 스쿨은 미국 최고의 인재들이 다니는 곳이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이곳에서 보내고 예일대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영국 정부가 운영하는 마셜 장학생으로 뽑혀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9년에는 하버드 법대에 입학했다.
‘하버드대의 공부벌레?’ 아니다. 그녀는 발레리나를 동경하다 꿈을 접고 뒤늦게 공부로 성공한 케이스다. 석 교수의 부모도 엘리트다. 아버지는 서울대 졸업 후 뉴욕에서 개업하고 있는 위장내과 전문의 석창호씨고 어머니는 이화여대 출신으로 글로벌어린이재단 뉴욕지부 회장으로 재직 중인 최성남씨다.
어릴 때 얘기를 해보자. 뭘 제일 잘했나 말하는 것을 가장 잘했다. 친척들이 모이면 나는 ‘전설적인 수다쟁이’였다. 옛날얘기를 하든 엊그제 일로 수다를 떨든 나는 항상 말이 끊이지 않았다.
이민 2세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는데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내가 이민자라고 해서 학교나 주위에서 실망스럽게 대한 적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발레 학교(the School of American Ballet)와 뉴욕 유명 사립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사실 내가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다. 내 또래의 많은 아이와 비슷한 생활이었다.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특별히 부잣집 딸도 아니고 우등생도 아니었다. 다만 책 읽는 걸 좋아했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라면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깊이 빠져들었다. 어딘가에 한번 빠지면 생각을 멈추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어려서는 발레리나가 꿈이었는데, 도서관에 가면 하루 종일 발레에 관한 책만 읽을 정도였다. 비록 발레를 전공하지는 못했지만…
왜 꿈을 접었나 3년 동안 발레를 했고, 정식으로 발레리나가 될 뻔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발레와 공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발레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아마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분야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타의로 포기했으면 좌절감도 컸을 텐데 어른들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고 마음을 추스르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성적도 떨어졌다. 발레만 보고 살다 그걸 잃었으니 상실감이 오죽했겠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거기에 관심 갖고 재미를 느끼는 수밖에 없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원래 책을 좋아했을뿐더러, 발레에 대한 허전함을 달래려고 일부러 몰입한 면도 있다. 어쨌든 점점 재밌어지더다. 그렇게 조금씩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영문학과 불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다음 하버드 법대에 다시 입학해 본격적으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거다. 하버드 법대에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입학하기 때문에 내가 유난히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옥스퍼드대에 이어 하버드대를 거치고 특별하지 않다면 너무 겸손하다 남보다 유별나게 잘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하버드대에 입학해 공부하는 건 내게도 굉장히 어려운 과제였다. 지금 내가 하버드 법대생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웃음). 매일 테스트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수시로 시험을 봐야 하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요즘도 시험 앞두고 교실에 못 들어가는 악몽을 꾼다. 그런 면에서는 나도 남들과 다름없는 보통 학생이었다. 다만 법이 재밌어서 끈질기게 파고들었을 뿐이다.
법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 처음에는 어릴 때 TV에서 보던 법정 드라마 속 변호사들이 멋있어서였고(웃음), 두 번째는 예일대에 다닐 때 당시 법대 한인 교수였던 고홍주 선생(현재 미국 국무부 법률 고문)의 영향을 받았다. 인권 관련 사건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는데, 소외된 곳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도우미를 자처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법을 공부하면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문학을 전공한 법학도라니. 둘 사이의 공통점은 뭔가 실제로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문학과 법 모두 누군가 쓴 글을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문학은 글이 뭘 의미하는지, 왜 이런 단어들이 쓰인 것인지, 단어들이 어떤 구조에서 문장을 이루고 있는지 공부한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조인들은 법조문 판례 글로 된 법적 의견문 등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공부한다. 내가 하버드 법대생들에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법조문을 제대로 읽는 법이다.
그래도 두 가지를 다 잘할 수 있는 힘이 궁금하다 동떨어진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발레까지 연결해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음악과 춤은 굉장히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룰이 없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건 아니다. 분명 절제된 규칙이 있다. 법도 마찬가지 아닌가. 무조건 엄격하고 경직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사람에게 법을 적용하는 데도 따듯한 시선이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융합 교육이 트렌드라고 하잖나. 어떤 분야든 연결 고리는 있다. 그걸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다.
법률가 대신 교수를 선택한 이유는 졸업하고 맨해튼에서 잠시 검사로 일했다. 거기서 가난하고 교육 못 받은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범죄자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비록 범죄자지만 당장 도와주고 싶을 만큼 불쌍한 사람도 많았다. 유죄냐 무죄냐를 떠나서 법과 사람이라는 부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 식당에서 수프를 훔친 사람이 있었는데 검사 두 명이 아무렇지 않은 듯 징역이 6개월이냐 1년이냐를 두고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굳혔다. 사람다운 법률가를 내가 직접 키워보자고.
최고의 수재들을 상대로 수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준비는 어떻게 하나 처음 부임했을 때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1시간짜리 수업을 준비하는 데 8시간씩 투자했다. 다행히 지금이야 2시간 수업도 1시간이면 되지만(웃음). 학생이든 교수든, 모두들 준비가 철저하다. 수업도 단순한 강의보다 문답 형태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나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키우는 건 내게도 큰 도전이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의식을 깨우고 영감을 넣어주는 게 중요하다. 단순히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다. 강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벌써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
어떤 학생들이 인상 깊나 다들 똑똑한 학생이기 때문에 특별히 누구 한 명이 튀기는 힘들다. 대신 공부할 준비가 잘된 학생, 실수를 하더라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눈에 잘 띌 수밖에 없다. 여기는 누구나 도서관에서 미리 책을 읽고 수업을 듣는다. 다들 똑똑하고 열심히 한다는 얘기다. 그중에서는 실수를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학생에게 우선 눈길이 간다. 대부분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니 그래야 눈에 띌 수 있다.
동양인 최초 여성 종신 교수라는 타이틀에 부담도 있을 것 같다. 차별은 없나 다른 하버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내가 이민자라고 해서 학교 측에서 나를 실망스럽게 대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부모님이 내게 가르쳤던 문화는 이곳과 분명 달랐다. 한국은 물론이고 많은 아시아 가정에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인 가정에서 부모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자식은 드물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법대에 왔으니 변해야 했다.
두 가지에 몰입하지 못해 미안한 엄마
석지영 교수는 하버드 법대의 동료 교수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노아 펠드먼과 결혼했고 현재 다섯 살 난 아들과 세 살 된 딸을 키운다.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엄마로서의 역할은 뒤로 잠시 미뤄둔 터라 가족들을 보면 늘 미안한 마음이다.
두 자녀의 엄마와 교수 역할 사이에 갈등도 있을 것이다. 일과 육아를 어떻게 조율하나 아쉽게도 균형을 잘 맞출 수가 없다. 난 항상 일하기 때문이다. 최근 5년 동안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을 겨우 쪼개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고 집안도 돌보면서 틈틈이 사교 생활도 해야 한다. 아이들 재워놓고 부랴부랴 일하기 일쑤였고 주말도 늘 그랬다. 아이들은 대부분 보모가 대신 봐주고, 가끔 시간이 날 때도 남편이 7:3 정도로 더 돌보는 편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얼마나 쉬나 없다. 몇 시간 잠자는 것 빼면 대개 일한다. 원래 남보다 덜 자는 스타일은 아닌데 요즘은 그렇게 됐다
짬이 나면 뭘 하고 지내나 책을 본다. 주로 소설을 읽는다. 지금은 친구인 중국계 기스젠의 새 소설『World And Town』을 읽는다.
요리할 시간도 없겠다. 한국 음식을 할 줄 아나 학기 중에는 냄비에 뭘 끓일 시간 자체가 없다. 물론 방학 때는 가끔 요리도 한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너무 어렵다. 갈비탕과 매운탕, 비빔밥을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내가 잘만드는 건 스파게티다. 한식은 식당에 가서 더 잘 만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웃음).
아이들에게 한국어도 가르치나 평소 편하게 한국어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주말 오전에 한국학교를 보내고 오후에는 태권도를 배우게 한다. 아무래도 내 뿌리가 한국이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다. 부모님이 손자 손녀와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하니까. 다행히 아이들도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숙제가 많은 것만 빼면.
6세 때 이민을 왔는데, 한국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나 거의 없다. 어릴 때 이민 왔지만 부모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를 꼭 사용하게 했는데 그게 아니었으면 한국말도 잊어버렸을 것 같다. 하루 종일 영어만 하고 미국식으로 살다 보면 생각 자체도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혹시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싶지는 않나 그렇지 않아도 첫째 재민이가 지난해부터 발레에 관심을 갖기에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발레를 좋아했으니까 가르치는 건 아니고, 스스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발레를 포기하면서 그걸 느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 한동안 발레의 꿈을 포기한 아픔을 잊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아픔을 잊을 수 있었으며 그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았다.
아이가 그걸 찾으려면 부모의 역할도 중요하겠다 자녀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더 큰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억지로 피아노 연습도 시키고 수학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시키고 싶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뒤로 물러서서 아이들에게 여러 기회를 주고 싶다. 음악도 시키고, 발레도 시키고, 태권도도 하게 하는 등 내 아이가 여러 가지를 해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돌잡이 때 아기 앞에 여러 가지를 놔두고 뭘 잡는지 보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10년과 20년 뒤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운 빠지는 질문이다. 10년 뒤에도 하버드대 교수일 것이고 20년 뒤에도 교수 아니겠나(웃음). 난 아직 젊다. 교수로서 할 일이 많고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앞으로 많은 ‘챕터’들이 남아 있을 텐데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내 궁극적 목표는 좋은 교수와 스승으로 남고 싶다.
2011년 당신의 꿈은 뭔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성취하려고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내가 재밌어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야 행복할 것 같다.
기획_이한 취재_강이종행 사진_마이클 양
여성중앙 2011 01월호<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