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장 강해 / 이레교회 새벽기도회 20091215 火曜日 정인준 목사]
사도신경 찬송가 274(332)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말씀 봉독(출애굽기 32:1-35), 설교(15분),
◈ 출애굽기 32장의 주제는, ‘금송아지를 만들다’입니다.
32장부터 34장까지 석 장에 걸쳐서 이어지는 ‘황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이후 가장 큰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9절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고,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는 7절에서 “네 백성”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화가 나셨습니다.
◈ 1절을 다시 읽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지도자 모세가 40일간 자신들을 떠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참을성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몰려가서 모세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요구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빼 버리고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주체라고 규정하는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금 고리”들을 가지고 아론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내자,
4절 하반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기가 막힌 신앙고백들을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방금 전에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 여호와가 아닌 모세라고 말했던 그들이
이제는 ‘송아지 형상’이 그 역사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이 송아지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출애굽기 24장 3-11절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기념을 취한 행동들과 거의 정확하게 똑같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언약식을 치르듯 금송아지 앞에서 언약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24장에는 안 나오는 표현 하나가 6절에 쓰였습니다.
그것은 “일어나서 뛰놀더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성적으로 문란한 술잔치’를 뜻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정신없이, 흥청거리며 뛰놀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9장 14, 17절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희롱” 또는 “모욕”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희롱하며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우상숭배를 넘어,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제나 “내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가 “내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리켜 “네 백성”이라고 모세에게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9-10절에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0절 처음에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는 말씀은 “나 말리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 좀 말려주겠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11절에서 이렇게 반박을 합니다.
“…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나님이 “너 모세의 백성”이라고 표현하신 히브리어 [암에카]를
모세가 똑같이 사용하여 “하나님 당신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 백성”이라고 부르셨지만, 모세는 끝까지 “주의 백성”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이 변론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양보를 얻어냅니다.
우리에게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지도자 말입니다.
◈ 그런데 15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모세의 참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용서를 위해 빌었지만,
하나님의 대변자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냅니다.
돌판을 깨뜨리고, 자신의 목숨을 내건 중보기도를 다시 드립니다.
32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중보적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100% 남을 위한,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22-24절에서 모든 책임을 백성에게 미룬 아론의 변명과 비교가 됩니다.
우리는 참 중보자가 될 것인가, 거짓 중보자가 될 것인가?
선택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