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전도
신 권사의 평생소원은 남편을 전도해서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남편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말을 잘 들어주고 일생의 동반자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교회에 나가자는 데는 수십 년간 “싫다”라고 분명 선을 그은 일이다.
“내가 당신 새벽기도에 나가는 것, 철야 기도하는 것, 교회 봉사하는 것, 무엇 하나 반대한 적이 있었어요? 나에게 교회 가자는 말은, 내가 당신에게 교회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 부부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 이해해 주고,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고등학교의 물리 선생이었는데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성경의 경전을 믿고 매달려 사는 게 자기 생리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권사는 교회의 권사로서 남편 하나 전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평생의 치욕이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남에게 교회 나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전도란 전도하는 사람의 열심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인도받는 상대방이 마음 문을 열고 주를 영접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전도 받을 사람이 문을 안 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남편 김 선생은 기도해도, 아양을 떨어도 문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믿음이란 자기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순종의 본을 보이는 것인데 자기는 남편 전도해서 교회에 데려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이 남편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보아야 하는데 성급하게 남편 전도하겠다고 안달하는 게 남의 눈에 잘 보이려고 하는 잘못된 자기 과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남편은 두 형제가 있는데 장남인 형이 아버지 집에서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독자인 아버지가 불신자였기 때문에(어쩌면 제사 때문에 불신자인지도 몰랐다) 매년 제사를 지내며 지내왔다. 그 집도 아내가 신자여서 제사 때문에 늘 문제였다. 그런데 최근 그 시숙이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자 제사는 부부간에 큰 문제가 되었다. 큰동서는 도저히 시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따로 집을 얻어 살겠다는 것이었다. 큰 시숙이 “나는 교회를 안 나가고 여기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겠다”라고 선언을 하면 되는데 자녀들도 다 교인이요 아내의 권유를 따라 모처럼 자기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여서 그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 안 되겠어?”라고 동생인 신권사의 남편에게 상의해온 모양이었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부모를 버린다는 것은 유교 전통을 떠나 상식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김씨 문중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문중 호적에서 파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신 권사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을 때 하루는 남편이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 부모는 꼭 장남이 모셔야 한다는 이유가 없잖아?”
신 권사는 어리둥절하였다.
“왜 그래. 아버님 모시고 싶어 그래?”
이이가 웬 변덕이야 하는 생각으로 신 권사는 물었다.
“아니야. 아버님이 너무 나이 드시기 전에 나도 한번 모시고 싶어서. 그 집은 애들도 많고 형수가 직장에 나가잖아?”
“나는 집에서 피아노 교습이나 하고 딸 하나뿐이어서 편해 보이는 거야?”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제사는 꼭 장남이 지내야 한다는 법이 없대. 유산 상속도 이제는 자녀는 남녀 구분 없이 1:1이어서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경우도 많대. 아버지 제사는 아들이, 어머니 제사는 딸이 지내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아버지 모시고 살면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제사를 지내자는 거야?”
그러나 늦게야 이것이 큰동서의 농간인 것을 알고, 신 권사는 큰동서가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교회의 권사인데 나는 시아버지 모시고 제사 지내도 된다는 거야?” 이런 생각으로 처음엔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식으로서 신앙 문제로 형제가 아버지를 외면하는 꼴이 되어 모른 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자기는 불신자이기 때문에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애원하였다. 제사 음식도 자기가 준비하고 자기가 제주도 되고 집사도 되어 향도 피우고 술도 따르고 절도하고 다 할 테니 신 권사는 그때 밖에 나가 모른 체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저자세가 되어 신 권사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자기가 신 권사 교회 나가는 걸 반대하지 않는 것처럼 신 권사도 자기가 집에서 제사 드리는 일을 반대하지 말고 자기가 하는 대로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성균관 상차림 간소화 표준도 있어 간단하게 지낼 수 있으며 아버지도 다 이해하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려면 그럴 수가 없다. 성경에도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9:3)라고 했는데 부모를 외면하고 제사 때 밖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맡겨서 제주 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남편이 향을 피우고 술을 드리고 절을 하면 다음엔 가족 모두가 함께 절해야 하는데 이것은 돌아가신 조상 신께 절하는 것이고 우상 숭배다.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골 5:5)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제사를 돌아가신 어른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차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유교의 제사는 남쪽 문을 열어놓고 신을 맞이하며(迎神), 상을 차리고 신이 내려오기(降神)를 기다리고, 그 신에게 인사하며(參神), 그 신이 가정을 잘 보살펴달라고 비는 거라면 이건 분명 우상 숭배다.
신 권사는 교인들이 흔히 명절에 지키는 추도예배라는 걸 드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제사 대신 기일에는 음식을 차려 놓고 고인을 기억하고 생시에 하시던 덕담을 기억하고 생시에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을 이야기하고 지낸다면 오랫동안 고인을 마음속에 담고 함께 사는 일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사가 아니라고 받아드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이제는 불신자인 동생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게 현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자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동거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 가정에서 둘이서 오래 같이 사려면 불간섭주의로는 안 되고 이제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관용해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위로부터 난 자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라고 서경은 말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그렇게 자기를 이해하라고 할 수 없고 자기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 날을 기도한 뒤 신 권사는 시아버지를 모시자고 남편에게 말하였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되 꼭 절을 해야 한다면 절도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 남편을 사랑해서 화평하고 관용하는 모습일 뿐이다.
그래 큰동서네가 떠난 시아버지댁으로 들어가 살 결정을 하였다. 필요한 짐만 옮기고, 살던 집은 피아노를 한 대 더 넣고 낮에는 애들 교습을 위해 신 권사는 지금까지 살던 집으로 출근하였다. 시아버지는 알고 보면 일찍 상처하고 홀로 사는 외로운 분이었다. 그러나 평소 외로움을 잘 극복하고 계셨다. 시에서 운영하는 노인 종합복지관을 다니며 익숙하게 잘 활동하고 계셨다. 자녀들 괴롭히지 않겠다고 아침에 나가면 거기서 제공하는 싼 점심도 드시고 친구를 사귀어 바둑도 두고 컴퓨터나 핸드폰도 기초반 활용 반을 거쳐 잘하시는 편이었다. 제사 문제도 아들을 제주로 삼고 물러나서 시할아버지의 제사 하나로 모든 조상의 제사를 대신한다고 하셨다.
출근하는 직장도 없는 신 권사는 시아버지를 극진히 공양했다. 복지관에서 단체 여행을 간다면 과일 한 상자씩 사서 같이 나누어 드시라고 보내기도 했으며 제사 때는 제사 음식을 불평 없이 준비했고 제상 앞에서 절하는 일도 제사 중 한 형식이라고 생각하고 잘 따라 했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음식을 제사 때 참여한 조상신과 같이 나누어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밥 먹으러 오는 조상신은 없으며 그것은 허상이고 미신이다. 만일 죽어서 갈 데가 없는 조상신이라면 그 신이 무슨 힘이 있어 가족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조상이 세상을 떠나 편히 쉬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일이다. 음식이 무슨 잘못인가? 마치 베드로가 땅에 네발 가진 것을 먹으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럴 수 없다고 항변했던 베드로의 율법주의와 같은 태도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지 삼 년째 제사 때였다. 갑자기 시아버지가 전 가족회의를 하겠다고 큰댁의 식구까지 모두 불렀다. 제사가 끝난 뒤였다. 시아버지가 모인 자손들 앞에 공표하였다.
“내가 죽은 뒤에는 제사는 지내지 마라. 나는 이미 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였다. 그래서 내 장례식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묘소도 마련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안 낳고 묘소를 돌볼 후손도 없는 때가 되었는데 묘소관리는 어떻게 하겠니. 이제는 씨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도 없어지고 반상도 없어진 지 오래며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무슨 제사냐?”
다시 계속했다.
“족보도 이제는 종이책을 없애고 인터넷으로 사이버 공간에 띄워놓기로 했다. 내용을 내가 다 수정해 놓을 테니 너희들은 URL에 링크해서 가끔 확인해 보아라. 무엇보다도 가족이 화목해서 사는 것이 좋다. 그래 제사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주관할 테니 둘째도 교회에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된다.”
이것은 마른하늘에 천둥 치는 소리였다.
“아버지, 저는 제사는 그만둘지라도 교회는 안 나갑니다.”
신 권사 남편의 대답이었다.
“그래 학교 퇴직하고 방안에 앉아 카톡으로 거짓말 같은 이웃 사람들 이야기나 전달하고 살래?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 듣고 어려운 사람 돕고 사는 것이 천 배는 낫다.”
그런지 삼 년 만에 신권사의 남편은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 권사는 평생소원이던 남편 전도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