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내외가 늦게 휴가를 내는 바람에 나도 아내와 함께 늦은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어느 날 티브이를 보다가 안식구가 저기 너무 좋다며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함양과 거창의 접경지에 있는 안의 삼동의 명승지로 알려진 거북바위였다. 이름 하여 수승대라고 하는데 그림으로 보니 정말로 멋있고 아름다우며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럼 올 여름 휴가 때 거기를 가자고 마음을 정하고 아들내외의 휴가날짜만 기다리며 승우와 함께 1994년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덥다는 몹시도 무더운 올 여름을 묵묵히 참으며 함양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길게 느껴지고 더운 계절도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8월29일(금)부터 갑자기 전날 기온이 35도에서 29도 뚝 떨어지면서 선선한 날씨로 바뀌어 생기를 되찾는 기분으로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8월30일, 숙소를 한 달 전에 예약을 해 놓고 오늘을 기다리다가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10시경에 출발을 하였다. 날씨가 맑고 기온도 26~7로 여행하기에 딱 좋은 것 같다. 휴가철도 다 지나고 한 낮이라 그런지 고속도로도 대체로 한산하고 소통은 아주 원활하게 차는 거침없이 잘 달린다. 옥산 휴게소에서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신나게 달려 대전을 지나면서 대진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도로는 더 한가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대전을 지나서 한참을 가다가 내가 좋아하는 덕유산 휴게소에 들러서 순두부 백반(7,500원)과 쇠고기 미역국(6,000원)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뜨내기손님을 맞는 곳이라서 그런지 내용이 너무 부실하고 밥도 시원찮아서 먹고서도 뒷맛이 너무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제가 많았지만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도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시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일상자의 위에는 좋을 것을 담고 아래에는 찌질한 것을 담던 시대도 있었는데 아직도 완전하게 변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덕유산휴게소에서 함양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거연정이다.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화림동 계곡의 제일 첫 명승지에 자리 잡은 거연정은 뒤로는 바위가 완전히 물길을 만들어 푸른 계곡물이 시원스레 흐르는 높다란 바위위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다. 작고 아담한 거연정은 몇 년 전에 갔을 때는 공사 중이라 제대로 보지를 못했는데 깨끗하게 새롭게 단장을 하여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고려말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 선생을 기념하기 세운 거연정을 시작으로 동호정, 군자정, 농월정 등 멋진 정자가 계속 이어진 화림동 계곡은 계곡으로는 전국 어디에도 이만한 곳을 쉽게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넓고 평평한 바위가 바닥을 이루고 넓게 이어진 회색빛 바위 계곡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후련하게 하고 깨끗한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속세의 거품을 다 걷어가는 것처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다. 자종차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여건상 다른 정자는 보지 못하고 바로 농월정으로 갔다. 화림동 계곡의 제일 아래쪽에 자리 잡은 농월정 부근은 국민관광단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휴가철을 지난 8월 말은 가는 곳마다 한산하고 조용하여, 찬찬히 둘러보며 한결 여유롭게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으며 나는 항상 8월 중순을 지나서 여행을 하는 것이 여름여행의 노하우다. 사람이 적으니 여유가 있기도 하지만 어디를 가도 대우를 받으니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서 숲 속 길로 조금 걸어서 농월정에 도착하니 2003년 화재로 소실되어 빈자리만 있었는데, 2015.9월에 새롭게 지은 정자가 멋지게 서있는데 단청을 일부러 입히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연 그대로의 원목 기둥과 모습이 오히려 정감이 들어서 좋았다. 농월정은 선조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가 이은 농월정은 2층으로 된 정자로 앞에서 말한 다른 정자들보다는 규모가 크고 앞이 탁 트여서 시원하고 좋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정자보다는 정자 앞의 화림동 계곡의 널따랗게 펼쳐진 바위가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서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물길에 씻겨서 깨끗하고 넓은 바위에 들어 누워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과 새털구름이 지나가는 것이 초가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였고 한참을 누워서 하늘도 보고,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보다가 잠시 눈을 감고 모든 잡념을 비우며 무상무념을 해보았다. 안식구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다 날려 보내듯이 두 팔을 높이 벌리고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다시 신라 말 고은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성했다는 상림으로 갔다. 주변에는 갖가지 종류의 연꽃이 피어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제법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함양 도심에서 가까운 상림은 지역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써 너무 좋은 장소인 것 같다. 잠시 둘러보는데 옅은 노란색의 상사화가 이름에 걸맞게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있는 것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 편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져서 카메라에 담고, 천년의 약속인 연리목 앞에서 안식구와 사진을 찍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4시경에 용추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에 청계서원과 바로 옆에 있는 남계서원을 들러서 휴양림에 도착하니 5시경이다.
저물기 전에 미리 도착하여 예약한 2호로 들어가니 마침 서늘해진 날씨에 산속의 숙소는 너무 썰렁하여 바닥에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난방을 켜니 겨우 찬기는 면한 것 같았다. 물론 가장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협소하고 시설도 낡았으며 허술하여 편안하게 앉는 것도, 더구나 눕는 것은 더욱 곤란하여 어정쩡하게 서성거려야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니 깊은 산 속의 정막이 흐르는 밤에 티브이도 없고, 밖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니 너무 쓸쓸하고 약간 서글퍼지기도 하였다. 대충 씻고 안식구와 이야기하다가 일찍이 잠이나 자자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밤중에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에 잠을 깨니 나무가 부러진 것 같고, 바람소리와 세찬 빗줄기 소리가 편한 잠을 설레게 하였다. 일찍 잠을 깨서 밖을 보니 비바람은 여전하여 오늘의 여행이 걱정이 되었다. 비가 내리니 차라리 세차나 하자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니 바로 문 앞에 제법 큰 낙엽송 나무 가지가 문을 가로 막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집어 던지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걸레를 들고 차를 문지르는 중에 비가 그치고 구름사이로 간간이 푸른 하늘과 햇살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오니 찬란한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서늘한 날씨에 여행하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날씨가 안 좋은 날은 거의 없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를 드리며 10시경에 출발하여 용추계곡을 내려오다가 용추폭포를 둘러보았다. 시원한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지고, 제법 큰 소를 이루고 있는 폭포 아래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며 마지막 가는 여름의 아쉬움을 달래는 듯하였다.
나오는 길에 물레방아 마을입구에 꾸며놓은 공원을 둘러보았다. 조선 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가지고 온 물레방아를 이곳 함양에 설치를 하여 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던 물레방아는 아주 큰 물레에 물은 형식적으로 조금 흐르고, 기계로 움직이는데 제대로 돌지를 않고 그 자리에서 왔다갔다만 하는 것이 너무 보이기 위한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승대로 향했다. 원래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사신과 이별한다는 의미로 수송대라 하던 것을 이퇴계선생이 수승대로 고쳤다고 한다. 수승대는 행정구역으로는 거창으로, 안의 삼동의 중심지로 계곡의 푸른 물 중간에 거북이 형상을 한 큰 바위가 우뚝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퇴계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묵객들이 들러서 시와 음악과 춤을 즐기며 노닐던 명소로 정말 멋진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 싼 푸른 소나무가 한층 운치를 더하고, 요수 신권 선생이 지은 요수정과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구연서원과 관수루는 너무 잘 어울리며 커다한 백일홍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유구한 역사를 고스란히 몸에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세월을 빗겨갈 수 없는 흐름 앞에 숙연해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여정을 마치고 상림 근처의 늘봄가든의 한정식은 입에 착착 붙는 맛깔스런 22가지의 반찬이 구미를 당겨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도 역시 막힘이 없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기분은 여행의 뒷맛을 더욱 맛나게 하는 것 같았다.
네 번 째 갔지만 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와 멋을 발견하며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는 함양여행은 징그럽게 덥던 날씨가 갑자기 시원해진 덕분에 상쾌한 기분으로 멋지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고, 한 여름에 지친 심신이 다시 회복되는 것 같았다.
2016. 8.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