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서에 한자 병기하겠다는 것을 막아내다: (jabo.co.kr)
공문서에 한자 병기하겠다는 것을 막아내다
[한글 살리고 빛내기 65] 한자와 싸운 문자전쟁(4)
리대로 | | ㅣ 기사입력 | 2023/07/03 [01:48] |
이 땅별에 제 나라 말글을 제 정부가 못살게 굴고 국민이 제 글자를 지키려고 정부와 싸우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김대중 정부 김종필 총리가 그 우두머리요 문화부 국립국어원 심재기 원장이 그 앞잡이였다. 이 한글 헤살꾼들은 국회에서 한글전용법 폐기법안을 내면서 국어정책을 다루는 문화부(장관 신낙균)와 국립국어원(원장 심재기)이 앞장을 서서 공문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한글로만 만들기로 한 주민등록증에 한자를 병기하고, 일본 관광객이 불편하다고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함께 쓰겠다고 했다. 일본인이 한국에 오면 불편함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고 사라져가는 일본 식민지 교육 세대가 한글로만 말글살이를 하면 불편하다고 한글과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앞서 1999년 2월에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이런 정책을 펴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어 한글단체는 한자병용 반대 집회를 열고 거리시위도 했으나 정부는 눈 하나 깜박하지도 않고 그대로 강행할 기세였다. 일본식 한자혼용 파들은 정부, 국회, 언론, 경제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자신들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넘었는데도 이 한글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기에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30여 년 동안 그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길 자신이 있었고 일본 식민지 때에도 선열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지킨 우리 글자인데 반민족 친일 앞잡이들에게 밀릴 수 없어 그렇게 나선 것이다.
그렇게 1년이 넘게 거리 시위도 하고 수없이 건의했기에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듣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2000년 4월 국무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자병기 정책을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래서 한글단체는 더 강력하게 나가기로 하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에 있는 한글사랑 모임 젊은이들과 함께 여론전을 펴기로 했다. 6월에는 국어운동대학생회 지도교수인 최기호 교수가 앞장서서 수백 명 교수들 이름으로 정부 정책 반대 성명서도 냈다. 그리고 7월에 전국 한글단체와 피시통신 젊은이들까지 참여해 한자병용 정책 반대 홍보단을 만들고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가서 구호를 쓴 만장과 팻말을 들고 더 크게 반대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한글단체 대표들이 김종필 총리를 만나자고 총리실로 들어갔다. 미리 김종필 총리 면담 신청을 하고 갔으나 김용채 비서실장이 대신 만나주겠다면서 다른 일로 좀 늦는다고 기다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김종필 총리 오른팔인 강태룡 민정수석을 만났다. 그는 내가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 때에 도와주기도 한 친한 충청도 고향 후배이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김종필 총리는 일본으로 가라고 외치느냐.”라고 따졌다. 김종필 총리는 동국대 국어운동대학생회 김성배 지도교수의 조카 항렬이고, 김 총리와 가까운 이희균 교수가 내 아버지 항렬인 친척임을 잘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연 혈연을 떠나서 한글을 망치게 되면 나라 망치게 한 이완용처럼 역사에 남기에 그러는 거다. 내가 강 수석보다 김총리를 더 잘 모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자병기 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정권 퇴진 운동으로 나갈 것이며 더 문제가 커질 것임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니 한글운동가들을 가볍게 보지 말고 김 총리가 세상 흐름을 잘 알도록 직언하라고 말했다. 그는 안기부에 20년 넘게 근무하다가 퇴직해 김 총리가 자민련을 만들고 일어나도록 도와서 김 총리가 아주 믿는 사람이기에 김용채 비서실장보다 총리에게 잘 보고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때 동국대 대 선배인 이상보 교수도 함께 만나서 설득을 했고 총리실에 근무하고 있던 그분 사위인 정두언도 불러 만났었다. 그 뒤 정두언은 국회의원이 되어 나와 함께 한글국회 만들기에 힘쓰기도 했다. 그날 그 자리는 남다른 인연에서 이루어진 만남이었지만 한글운동에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아무튼 그날 투쟁이 있은 뒤에 정부는 공문서 한자병기 정책은 포기했고 그 싸움은 우리가 이겼다. 그런데 나는 그때 문자전쟁은 일본이 직접 한 짓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다음으로 내부에서 일어난 친일 세력이 일으킨 문화왜란이라고 보았고 연산군 시대 다음으로 한글 위기였다고 봤다. 우리는 적은 숫자요 세력이었지만 이순신 장군 정신으로 뭉쳐서 싸웠기에 이길 수 있었다. 만약이지만 그때 그 싸움에서 우리가 졌다면 연산군시대 뒤에 한글이 피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 뒤 한글은 기운을 잃고 시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함께 애쓴 오동춘, 최기호 한글학회 이사, 고운맘 스님과 원광호 전 의원 들 한글운동 뜻벗들과 특히 피시통신에서 함께 애쓴 젊은 뜻벗들이 고맙다. 그때 일본은 한글과 우리 자주세력이 대단함을 알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