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 철원 출생설이 있다.
최영(崔瑩, 1316 - 1388)장군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던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고려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崔元直, ? - 1333)이며, 5대조 문숙공(文淑公) 최유청
(崔惟淸, 1095 - 1174)은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냈던 인물로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분이
며, 4대조 예숙공(譽肅公) 최석(崔奭, 1026 - 1121)은 문종, 선종, 순종의 세임금을 섬기며 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곧 선조 대대로 무인으로서가 아닌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
이 뛰어난 가문이었다.
장군의 출생 관련 사실은 논란이 많다. 그러나 철원(鐵原) 출생설을 비롯해서 홍성(洪城) 출생설
은 각각 관련 기록과 유적 그리고 설화 등을 남기고 있다.
최영장군은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하갈리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철원 출생설은 우선
기록에 근거한다. <고려사 절요> 권 33 우왕 14년 12월 초에는 "崔瑩을 斬하였다."는사실을 말하
면서 출생지역과 함께 성품을 말하고 있다.
최영을 베었다. 영은 본관이 철원인데, 유청(惟淸)의 5세손이다. 풍신과 용모가 괴걸'위대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 났으며, 강직하고 충성하고 청백하였다. 매양 군진에 나아가 적을 상대 할 때면
신기(神氣)가 안정되고 차분하여 화살과 돌이 좌우에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한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전사는 모두 베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워 한 번도 패한적이 없어서, 나라가 힘입어
편안하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일찍이 瑩의 나이 16세 때에 아버지 원직(元直)이 죽으면서
훈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였다. 영이 유훈(遺訓)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생업을 일삼
지 않으니, 사는 집은 비습하고 좁으며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차림한
자를 보면 개돼지 같이 여겼다. 비록 오랫동안 장수와 정승으로 중한 병권을 맡고 있었으나 청탁이
그에게 이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무민공 최영장군의 아들 즉 목숙헌 조열대부 순천부사 대호군휘담(苜蓿軒 朝列大夫 順天府使
大護軍諱潭)의 묘가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에 현존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철원도호부 항목에는 "인물은 문하시중 철원부원군 무민공
(武愍公) 최영이다.(고려말에 벼슬하였다.)" 라고 하여 철원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국가에서 공식
으로 간행한 역사서에서 최영을 철원 출신으로 인식하였던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인
의 시각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최영장군을 철원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원역사 연구가 최종철(47. 동송읍 이평7리)씨의 제언에 의하면 요동백 김응하 장군 사적을 편찬
한 충렬록에는 1621년 11월 영의정 박승종이 광해군에게 올린 진충렬록전(進忠烈錄箋)에 " 收弟奉親
全孝友於所性, 人言方慶之後裔傳世錄風, 身出崔瑩之苦鄕" 아우를 거두고 어버이를 봉양하여 효도와
우애를 천성으로 온전히 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방경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여풍이
있고, 그 몸은 최영의 고향인 철원에서 났다.
고양문화원 주관으로 <고양의 최영장군 이야기> 학술발표회를 2017년 12월 2일(토) 고양문화원
대강당에서개최하였다.
주 제 : 최영장군 생애와 그 문화사적 의미
발표자 : 정재규/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시조(俊邕) 2세, 3세, 5세 제단비
4세 譽肅公(崔 奭) 墓(鐵原郡 東松邑 觀雨里)
11世 苜蓿軒 潭의 墓(鐵原郡 東松邑 下葛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