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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자락으로 치닫는 12월
정기산행 전날 흐릿하던 하늘에서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왜관 현장에 갔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도로는 온통 주차장을 연상케 하고
30분 정도면 올거리를 두시간 이상 거북이 운전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차는 회사에 두고 버스가 오지않아 집까지 10km이상을 뛰다가 걷다가...
새벽 차가운 바람에 눈만 빼꼼 내밀고 대구역으로 갑니다.
늘 그렇듯 호국산행은 기대가 크고 설래임과 턱밑이 얼얼하도록 감동이있는 산길이다.
그동안 좋은 산길을 두고 남들이 잘 가지않고 호응도 없는 호국산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했던가!
지난달 11월 괴산.영동.상주 혼자서 미친듯 유해발굴지역을 돌아 다녔다.
6월에 산 등산화 밑창갈이만 두번 했으며 나머지도 벌써 다 떨어져간다
대간이나 정맥 기맥 지맥...그리고 인기좋은 태극길이나 국립공원의 수려하고 웅장한 산들도 많지만
6.25전쟁 관련된 산들은 전부가 동네 야산이다 보니 길도 없다.
.......
왜관으로 가는 대구 기차역에서 훈아님과 꺼미님을 만나고
기차안에서 울산의 써니님을 만납니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 라도 있으면 서로 나누어 먹고 마실텐데...
잠시지만 그런생각을 마음속에서 펼쳐 봅니다.
왜관에 도착하니 악마님이 마중 오셨고
조금 있으니 바랭이 산행대장님이 서울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반가운 포옹은 늘 따듯해서 좋고 환한 미소는 그리움의 마음입니다.
희야님도 부산에서 호국산행에 동참 하시고자 올라 오셨고
왜관의 단호박님도 처음 산행에 오셨네요
반가운 인사로 대신하고 가까운 해장국 식당에 들러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산길로 올라가야죠
호국공원을 지나며 마음속으로 오늘 산행 안전산행을 기원드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건.곤, 감.리. 청홍백
하늘과 땅과 물과 불을 상징하죠
주역의 8괘중 4괘이며
청은 희망을
홍은 존귀를
백은 순수와 평화를 상징
백설이 내린 호국산길에 건곤감리 청홍백의 색이 유난히 돋보인다.
꺼미님 현수막으로 순식간에 치마를 만들고
헬기장에서
앞에 작오산이 보이네요
다른 시그널은 없고 호국산행 시그널만 눈에 보입니다.
다른분들이 호국산행 시그널은 훼손 안 하는가 봅니다.
눈길에 미끄럽고
언제나 처음 같으신 바랭이 대장님
누구나 대장님과 산행하고 나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기죠
작오산
한미 전몰 장병 추모비
북한군이 휴식중이던 미군포로 에게 집단학살 한곳
작오산 정상 아래 전몰 장병 위령비가 있음
장소는 그곳이 아닌가 생각함
어찌 되었건 포로에게 잡단학살은 ...
사진뒤로 멀리 영암산 자락이며 구미 약목 그곳은 B29 폭격기로 포탄 960톤이 투하된곳임
6.25전쟁 당시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작오산 일대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해발 303m 고지의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
작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이 미군 포로 46명을 전화선으로 묶어 집단 총살했다는곳이다.
멀리 유학산과
그앞으로 숲데미산 그리고 328고지
우측으로 기반산과 소학산이 보입니다.
유학산(837고지)전투
숲데미산전투.328고지전투 모두가 치열했던 교전장소이며 많은 국군 사상자가 난곳이죠
이곳 전투 지역은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눈길이 미끄러워 비료 포대기 가지고 왔으면 오릴적 동심으로 돌아가 잼나게 내려 갈텐데
아쉬움이 큽니다.
잠시 도로를 건너고
마루금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송정 휴양림으로 들어 갑니다.
휴식중
이곳 역시 낙동강 전쟁지역
낙동강 전투 1만명 이상 숨진 그곳이죠
눈이 와서 유해 발굴지역은 대부분 눈속에 묻히고
요술의고개로 갑니다.
요술의고개
이제 소학산 전투 지역으로 갑니다.
소학산은 양사방 모두 급 된바알입니다.
지키거나 빼앗거나 둘다 힘들게 올라야 하고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곳임
소학산
이곳에서 간단한 제를 지내고
조심조심
황학고개에서 버등재 황학산으로 갑니다.
바랭이 대장님.
등로에 눈이 좀 많죠
뽀족한 부분은 소학산
그리고 눈에 보이는곳 모두 거대한 전쟁터
이곳 다부동 일대에서 국군 만7천명 전투중 사망
좌측 멀리 평야 지대는 포탄 960톤 투하된곳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
을 실시하였다.
다부동 전투의 중심지 유학산
다부동 전투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죄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유학산 741고지 계곡 사이는 볼링장 전투 지역임(그림 우측)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잠시 휴식중
뽀족한 부분 바로 뒤산은 328고지 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328고지 전투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군은 1만7천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은 왜관 남쪽 기산면 노석리에서 도하를 시도하고 있던 제3사단 병력을 328고지 쪽으로
돌려 집중 공격하였다.
8월 12일 밤에 국군 제15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매남에 설치하고, 동명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 배정하고, 154고지를 방어 중이던 제3대대를 반계리에 위치한 270고지에 배정하였다.
국군의 방어선 변경으로 인한 틈을 노려 북한군은 154고지를 차지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다. 8월 14일 1시 무렵 북한군
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북삼면 오평리 (현 북삼읍 오평리) 마진나루터의 수중 가도를 도하하여 328고지로 접근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국군은 고지 후사면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인접한 3대대의 270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중과부적으로고지를 빼앗긴 제15연대는 3~4시간 교육을 받은 신병을 보충병으로 부대를 재편해 다시 고지를 빼앗는
1진 1퇴의 공방을 24일까지 지속하게 된다.
날이 밝아지자 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역습을 시도하여 오전 8시 무렵 고지를 다시 탈환하고
고지의 전사면7~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국군은 낙동강 건너편에서 북한군을 지원하는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포격을 피해 고지의 후사면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5연대는 철수와 동시에 특공대를 328고지 뒤쪽으로 침투시켜 두었다. 8월 15일 새벽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
는 특공대와 함께 협공해 들어가 제1대대는 328고지, 제3대대는 270고지를 탈환하였다.
오후 4시 무렵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강 건너 언덕의 북한군을 제압하였고, 328고지에는 네이팜탄에 의한 북한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날 밤 11시 무렵 국군은 북한군의 재공격을 막다가 제1대대는 망정리로 후퇴하고, 270고지의
제3대대는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16일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하였고, 미 공군은 B-29로 북한군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크게 둔화시켰다. 그렇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8월 17일에도 계속되었고, 8월 24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8월 23일 국군 제1대대는 미군 105밀리 곡사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면서 다시 역습하여 270고지·328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328고지에는 수습하지 못한 적군과 아군의 시신이 즐비했으며 전투 중에는 시신
을 방패삼아 적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8월 24일 새벽 국군 제1·3대대는 여세를 몰아 154고지를 협공하자 북한군이 154고지를 버리고 369고지로 도주하였다.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서울사단’이라 불리던 북한군 제3사단은 제15연대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328고지 전투는 고지의 정상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극히 치열하였다. 적 제3사단은 기간 중의 전투에서
미 공군의 부단한 공중 폭격과 그리고 아군의 포격 하에서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끈덕진 공격을 거의 일과와 같이 반복
하였으나 도리어 막대한 손실만을 입게 되어 그 사기는 급하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적은 제15사단이 영천 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의 지연과 탄약 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지속된 공격행동을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자랑이었던 전차도 미공군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었고 아군의 장비한 3.5인치 로케트포에 여지없이
파괴됨으로써 전차지원 없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반면 아군 제15연대는 2주일에 걸친 이른바 328고지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투와 육박전을 통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이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백운산-실봉산 오계산- 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이곳 모두 다부동전쟁 지역입니다.
시간은 지체되고 야간산행에서는 크게 볼것도 없고해서 더이상 배울게 없다고 판단되어 하산 합니다.
유학산과 647고지
다부동 전투 기념관
오신님들 진정한 애국자 입니다.
다음산길에서 안전 산행 하시고 나라위해 숨져간 그분들의 넋을 많이 알려 주십시요
이제 집으로
첫댓글 좋은길 보다 가시밭길이 많고 평범한 산인듯 하나 지나가면 사연이 많은 격전지
비록 인기없고 딱딱할수 있는 산행 이지만 잠시라도 걸으면서 느끼는 의미는 크다고 봅니다.
같이 하신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한해 기맥길 다니다가 시간나는데로 호국산행길도 열심히 찾아야겠죠^^
그분들의 나라사랑 모두다 알지는 못하지만 다니면서 생각은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호국산행도 어디하나 쉬운곳이 없는듯하네요.
이곳 낙동강전투지역은 이름이 있는산이 몇군데있어 그나마
재미는 있을것 같은데, 눈때문에 모두들
엄청시리 고생하셨네요.
찾아 주셨어 너무 고마웠습니다.
좋은길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많은 도움은 되셧을줄로 믿으며
다음 산행에도 오시면 고맙겠습니다.
의미있는 산행에 참가하지 못해 아쉬움이 큼니다..
없는길 눈길 다니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중부지방으로 올라가면 한번 오십시요
많은 공부가 되실것 같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호국산행에 참여하신 분들은 정말 애국자 입니다.
의미있는 호국산행 수고하셨습니다.
쉽지 않은길 참여가 어려운 길이죠
아직은 찾아야 할길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주 정맥길 무사히 마치시길 바라며...
조심히 다녀오세요
호국산행에 참석하신 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도권지부산행 보기 좋았습니다.
다음주 대간길도 잘 다녀 오세요
소학산 오름길이던가요? 녹은 눈이 아이젠에 붙어서 쉽지않던 생각이 납니다.
쉽지않은 호국산행 개척하시느라 고생많으십니다.
올한해도 수고많이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년말 대장님과 같이한 산행 너무 좋았습니다.
올 한해도 굵직한 산행 오시구요
변함없는 사랑 부탁 드립니다. 대장님 건강하세요
호국산행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 수고하셨고
숙연한 마음으로 산행기를 보고 갑니다.
글 감사합니다.
대간길 힘드시죠
하지만 누군가 꼭 지나야 한다면 바로 자신이죠
호국산행 관심 감사합니다.
호국산행 기획하고 개척하시느라 고생많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난번 용문산 전투지역 감사드려요
올한해 호국산행길 정하고 보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전우의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젊은시절에 부르던 애국의노래를 다시한번 불러보게 되는군요. 충성 -옹-
나중에 여하아산전투지역에 한번 오십시요
많은 공부가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