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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천상병
갈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갈매기 천상병
갈매기&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
이제 파도(波濤)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 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강물 천상병
강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계곡 천상병
계곡(溪谷)
수락산(水落山) 자락에는
이상적(理想的)인 계곡(溪谷)이 있다.
여름에는 숱한 인파(人波)다.
물이 왜 이리 맑은가.
바위들도 매우 겸손(謙遜)하다.
나는 이것들로부터 배움이 많다.
산(山)자락의 청명(淸明)한 공기(空氣)여.
아취(雅趣)로운 절간이여,
푸르디 푸른 등성이의 숲이여.
주막에서, 민음사, 1979
계곡물 천상병
계곡물
평면적(平面的)으로 흐르는 으젓한 계곡물
쉼없이 가고 또 가며
바다의 지령(指令)대로 움직이는가!
나무 뿌리에서 옆으로 숨어서 냇가에 이르고,
냇가에서 아래로만 진운(進運)하는 물이여
사랑하는 바위를 살짝 끼고,
고기를 키우며
영원히 살아가는 시냇물의 생명(生命)이여!
주막에서, 민음사, 1979
광화문에서 천상병
광화문에서&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 그녀의 장례 행진을 본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메웠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 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문인(文人)들 장례식도 예총광장에서 더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커녕, 행진은 커녕 아주 형편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귀천 천상병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새, 조광출판사, 1971
그날은 천상병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새, 조광출판사, 1971
기쁨 천상병
기쁨&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 제킨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生色)이 나고 활기(活氣)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多情)한 누님 같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길 -1- 천상병
길 -1-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 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生態)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無人之境)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서
걸음을 빨리 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幸福)함이여.
주막에서, 민음사, 1979
길 -2- 천상병
길 -2-
길은 끝이 없구나
강(江)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港口)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旅客船)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壁)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引導)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永遠)하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나무 천상병
나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나의 가난은 천상병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데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새, 조광출판사, 1971
낚시꾼 천상병
낚시꾼
일심(一心)으로 찌를 본다.
열심히 보는 찌는 꽃과 같다.
언제 나비처럼 고기가 올까?
조용하디 조용한 강(江)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나는 정신(精神)의 호흡(呼吸)을 쉴 줄 모른다.
드디어 찌가 움찍 하더니
나는 고기 한 마리의 왕(王)
승리(勝利)한 양 나는 경치(景致)를 본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눈 천상병
눈&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 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傷處)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 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傷處)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憤怒)의
너를 부르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눈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다음 천상병
다음
멀잖아
북악(北岳)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 `다음'.
이 절대(絶對)한 불가항력(不可抗力)을
나는 내 것이라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變)하여
나의 희망(希望)은
노도(怒濤)보다도 바다의 전부(全部)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世界)에 줄 것이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달 천상병
달&
달을 쳐다 보며 은은한 마음.
밤 열시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萬事)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 듯 말 듯
저 달에 인류(人類)의 족적(足跡)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와진 곳.
어릴 때는 멀고 먼 것
요새는 만월(滿月)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있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덕수궁의 오후 천상병
덕수궁(德壽宮)의 오후(午後)
나무잎은 오후(午後), 멀리서 한복(韓服)의 여자가 손을 들어 귀를 만진다.
그 귀밑볼에 검은 혹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섬돌에 떨어진 적은 꽃이파리
그늘이 된다.
구름은 떠 있다가
중화전(中和殿)의 파풍(破風)에 걸리더니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잔디 위와 사도(砂道),
다시는 못 볼 광명(光明)이 되어
덤덤히 섰는 솔나무에 미안(未安)한 나의 병(病),
내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어리석음에 취하여 술도 못마신다.
연못가로 가서 돌을 주어 물에 던지면,
끝없이 떨어져 간다.
솔나무 그늘 아래 벤취,
나는 거기로 가서 앉는다.
그러면 졸음이 와 눈을 감으면,
덕수궁(德壽宮) 전체가 돌이 되어 맑은 연못 물 속으로 떨어진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동그라미 천상병
동그라미
동그라미는 여자고 사각은 남자다.
동그라미와 사각형을 두개 그리니까
꼭 그렇게만 보여진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꾸밈새없는
엄마의 눈과 젖
손바닥과 얼굴이 다 둥글다.
울뚝 불뚝하고
매서운 아버지의 눈과 입,
손목과 발힘이 네개나 된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동창 천상병
동창(同窓)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들국화 천상병
들국화&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새, 조광출판사, 1971
등불 천상병
등불
저 조그마한 불길 속에
누가 타 오른다
아프다고 한다. 뜨겁다고 한다. 탄다고 한다.
허리가 다리가 뼈가 가죽이 재가 된다.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어디서 만난 사람이다.
아, 나의 얼굴
코도 입도 속의 살도
폐(肺)가, 돌 모두가
재가 되어진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무명 천상병
무명(無名)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 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깎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무명(無名)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무제 천상병
무제(無題)&
모래알 사장(砂場)이 깔렸고
모래알은 너무도 지나치게 적다.
모래는 물결과 더불어 한군데로 몰려드누나.
큰 배는 항구(港口)의 바다로 직접 흘러 들어오고,
적은 물결이 실같이 가운데로 들고,
큰 골짜기는 근처의 계곡(溪谷)에 있었다.
사심소립(砂甚小粒) 사류일직(砂流壹直)
선입항입(船入港入) 파도극심(波濤極甚)
소파점중(小波點中) 대곡간계(大谷間溪)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미소 천상병
미소(微笑)&
□ 1
입가 흐뭇스레 진 엷은 웃음은,
삶과 죽음 가에 살짝 걸린
실오라기 외나무다리.
새는 그 다리 위를 날아간다.
우정과 결심, 그리고 용기
그런 양 나래 저으며…
풀잎 슬몃 건드리는 바람이기보다
그 뿌리에 와 닿아 주는 바람,
이 가슴팍에서 빛나는 햇발.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풀밭 길에서
입가 언덕에 맑은 웃음 몇 번인가는…
□ 2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언덕에서 언덕으로 가기에는
수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지만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새, 조광출판사, 1971
바다 천상병
바다&
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바다는 거의 맘먹을 수 없을 만큼 넓고 크다.
이 큰 바다에는 쉼없이 플랑크톤이 있고,
이 플랑크톤을 습격하는 고기들,
그 고기들이 많은 곳이다.
내일은 풍어기(豊漁期)를 맞는 배의 대군(大群)이
할 일 없이 나다닐 것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밤 하늘 천상병
밤 하늘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북극성(北極星) 가까이
그리고 은하수가 높디 높게
발(發)하는 빛으로 엄숙한 존재(存在).
쏟아져 내리는 별 빛 속에
억년전(億年前)과 현대(現代)가 공존하는 공간(空間).
도대체 밤하늘의 실재(實在)는 뭔가?
어릴 때 고향(故鄕) 하늘은 무궁했지만
오늘은 더욱 무궁하다.
고전(古典) 하늘과 현대(現代) 하늘이 달에서 만난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밤비 천상병
밤비&
밤비가 차갑게 내린다.
하늘을 적시고,
공기(空氣)를 적시고, 땅을 적시고―
내일도 내릴는지
모레도 다소(多少) 내리게 될지―
그것을 내가 어이 알리오?
차가운 밤비가 소롯이 내린다.
나는 저 밤비에
다소곳이 젖어보고 싶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변두리 천상병
변두리&
이 근처(近處)는 버스로 도심지(都心地)까지 가려면
약(約) 1시간(時間)이 걸리는 변두리.
수락산(水落山) 아랫마을이다.
물 좋고 산(山) 좋은 이곳,
사람도 두터운 인심(人心)이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고장이다.
오늘은 부실 보실 비가 오는데,
날은 음산하고 봄인데도 춥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 이곳이 좋아.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봄 소식 천상병
봄 소식(消息)
입춘(立春)이 지나니 훨씬 덜 춥구나!
겨울이 아니고 봄 같으니,
달력을 아래 위로 쳐다 보기만 한다.
새로운 입김이며,
그건 대지(大地)의 작란(作亂)인가!
꽃들도 이윽고 만발하리라.
아슴푸레히 반짝이는 태양(太陽)이여.
왜 그렇게도 외로운가.
북극(北極)이 온지대(溫地帶)가 될 게 아닌가.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불혹의 추석 천상병
불혹(不惑)의 추석(秋夕)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老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포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 간다.
새, 조광출판사, 1971
비 천상병
비&
□ 2
저 구름의 연연(連連)한 부피는
온 하늘을 암흑대륙(暗黑大陸)으로 싸았으니
괴묵(怪黙)은 그냥, 비만 내리니 천만다행(千萬多幸)이다.
지금 장마철이니
저 암흑대륙(暗黑大陸)에 저 만리장성(万里長城)이다.
우뢰소리 또한 있을만 하지 않은가.
우주(宇宙)야말로 신비경(神秘境)이 아니냐?
달과 별은 한낮엔 어디로 갔단 말이냐?
비는 그 청신호(靑信號)인지 모르지 않느냐?
□ 3
새벽같이 올라와야 했던
이 약수(藥水)는
몇 월(月) 몇 일(日)의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산(山)과 옆의 바위는 알 터이나,
하늘과 구름은 뻔히 알겠지만
입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약수(藥水)를 마시는 데는 지장(支障)이 없고,
맛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니
재수형통(財數亨通)만 빌 뿐이다.
□ 4
상식적(常識的)으로 비는 삼라만상(森羅萬象) 위에 내린다.
그런데 지붕뿐인 줄 알고,
내실(內室)의 꽃병은 아니 맞는 줄 안다.
생각해보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이 우주(宇宙)의 전부(全部)이다.
그러니 그 꽃병도 한참 맞고 있는 것이다.
생리(生理)는 그 꽃병을 안 맞게 하지만
실존(實存)은 그 꽃병의 진짜 정신(精神)을
지붕 위에 있게 하여 비를 맞는 것이다.
□ 5
물의 원소(元素)는
수소(水素) 두개와 산소(酸素)이지만
벌써 중학생(中學生) 때 익히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수소(水素)와 산소(酸素)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단 말인가…
공포할 만한 야수가 들어있다.
수소(水素) 뒤에는 수소폭탄(水素爆彈)이
산소(酸素) 뒤에는 원자폭탄(原子爆彈)이…
□ 6
나는 국민학교(國民學校) 때는
비가 오기만 하면
학교(學校)엘 가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천국(天國)에 가신 어머니에게
한사코 콩을 볶아달라고 하며
몸이 아프다고 핑게했었다.
이제는 나가겠으나
이미 나이가 사십(四十)이니
이 세계(世界)를 거꾸로 한들 소용(所用)이 없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비 7 천상병
비 7
8월(月) 장마비는 늦은뱅이다.
농사(農事)에는 알맞아 들 테지마는,
인간(人間)에겐 하찮은 쓰레기일 것이니…
먼데 제주도(濟州島) 생각이 불현듯 나니…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제주도(濟州島)여,
마치 런던 옆에나 있는 것이 아니냐.
애오라지 못 갈 바에야,
바닷가로나 가서 먼데까지 가야지…
그러면은 그 섬 향기(香氣)가 날지도 모른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비 8 천상병
비 8
백두산천지(白頭山天池)에는
언제나 비가 쏟아진다드냐…
단군(檀君) 할아버지께서 우산을 쓰셨겠다.
압록강의 원류(源流)가 큰 소리를 칠 것이니
정암(頂岩)이 소용돌이를 쳐
범조차 그 공포(恐怖)에 흐늘흐늘일 것이다.
백운(白雲)을 읊는 고전시(古典詩)는 있어도,
이 산(山)을 읊는 고전시(古典詩)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읊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비 9 천상병
비 9
나뭇잎이 후줄근히 비를 맞는다.
둥치도 맞고 과일도 그러하다.
표면(表面)이란 표면(表面)은 같은 운명(運命)이다.
냇물도 맞으니
이건 손자(孫子)가 할아버지하고 악수(握手)하는 격이다.
동내(洞內) 사람들이 보고 흐뭇할 수 밖에…
숲속 부락(部落)은 축제(祝祭)나 마찬가지다.
아낙네들은 내일 일을 미리 장만하고,
남편(男便)들은 아람드리 술 퍼먹기에 바쁘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비 10 천상병
비 10
이 비는 무적함대(無敵艦隊).
나는 그 사령관(司令官)인 양 바다를 호령(號令)하여,
승리(勝利)를 위하여 만전(萬全)을 다한다.
실지(實地)로는 우산을 받치고 길을 가지마는.
옆가의 건물(建物)들이 군함(軍艦)으로 보이고,
제독(提督)은 외로이 세상(世上)을 감시한다.
가로수(街路樹)들이 마스트로 보이고,
그 잎잎들이 신호기(信號旗)이니,
천하만사(天下万事)가 하느님 섭리(攝理)대로 나부낀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비 11 천상병
비 11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純眞無垢)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溪谷)물이 불어오른다.
죽은 김관식(金冠植)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眞理大王)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茂盛)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情趣)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삼청공원에서 천상병
삼청공원(三淸公園)에서
□ 1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 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도 없다고 되뇌이면서…… 이맘 때쯤이 그곳 벗나무를 만발(滿發)하게 하는 까닭을 사나이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벗꽃 밑 벤취에서 만산(滿山)을 보듯이 겨우 으젓해지는 것이다. 쓸쓸함이여, 아니라면 외로움이여, 너에게도 가끔은 이와 같은 빛 비치는 마음의 계절(季節)은 있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도 있다고, 말 전해다오.
□ 2
저 벚꽃잎 속에는 십여 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生前)의 가장 인자(仁慈)했던 모습을 하고 포오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새, 조광출판사, 1971
새 -1- 천상병
새 -1-&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정지(絶對靜止)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 없는 간격(間隔)을,
이어주는 다리[橋]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 위에 슬며시 깃을 펴고
피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다.
바람은 소리없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의
순수균형(純粹均衡)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마리.
새, 조광출판사, 1971
새 -2- 천상병
새 -2-&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靈魂)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情感)에 그득찬 계절(季節)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조광출판사, 1971
새 -3- 천상병
새 -3-&
최신형기관총좌(最新型機關銃座)를 지키던 젊은 병사(兵士)는 피비린내 나는 맹수(猛獸)의 이빨 같은 총구(銃口) 옆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병사는 그의 머리 위에 날아온 한 마리 새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산골 출신인 그는 새에게 온갖 아름다운 관심(關心)을 쏟았다. 그 관심(關心)은 그의 눈을 충혈(充血)케 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최신형기관총구(最新型機關銃口)를 새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새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수풀 속에 떨어진 새의 시체(屍體)는 그냥 싸늘하게 굳어졌을까. 온 수풀은 성(聖)바오로의 손바닥인 양 새의 시체(屍體)를 어루만졌고 모든 나무와 풀과 꽃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죄(罪)없는 자(者)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죄(罪)없는 자(者)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새, 조광출판사, 1971
서대문에서 천상병
서대문(西大門)에서
지난날, 너 다녀간 바 있는 무수한 나뭇가지 사이로 빛은 가고 어둠이 보인다. 차가웁다. 죽어가는 자의 입에서 불어 오는 바람은 소슬하고, 한번도 정각을 말한 적 없는 시계탑침이 자정가까이에서 졸고 있다. 계절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 새여…
새, 조광출판사, 1971
서울, 평양 직통전화 8 천상병
서울, 평양(平壤) 직통전화(直通電話) 8
밤 입구(入口)때에
밤버스를 타게 된 것도
예정보다 빨리 떠나주는 것도
차장들이 매우 인정스레 구는 것도
정류소마다 울타리의 승객이 소리없는 것도
동승(同乘) 여자(女子)가 한결같이 미인(美人)인 것도
같이 탄 아내가 오늘따라 예쁘장한 것도
아내가 내 손아귀를 만지는 것도
부끄럽지 않고 되려 떳떳한 것도
거지반 목적지에 가까와진 것도
뻐스 속력이 평소보다 빠른 것도
상계동(上溪洞)에 와서 서 주는 것도
모조리 요새야말로 들리기 시작한 굉장히 좋은 소식 덕분인가......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선경 1 천상병
선경(仙境) 1
이 풀의 키는 약(約) 일척(一尺)이나 된다.
잎을 미묘(微妙)히 늘어뜨린 모양은,
궁녀(宮女)같기도 하고 황후(皇后)같기도 하다.
빛깔은 푸른데 그냥 푸른 것이 아니고
농담미(濃淡味)가 군데군데 끼인 채,
긴 잎을 늘어뜨리니 가관(可觀)이다.
엷은 느낌이 날개 있으면 날 것 같고
유독히 그 자리에 자라난 것은,
흙 속에 뿌리박은 뿌리의 은덕(恩德)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선경 -1- 천상병
선경(仙境) -1-
이 빗물은 바위와 바위틈 사이로
흘러가는 이 물덩이는 진청미(眞淸味)한 소질액(素質液)―.
밑바닥 돌이 다이야몬드인 양 조명적(照明的)이다.
심산(深山) 골짜기 정치(靜致)에 물은 수정(水晶)같으니……
생명(生命)의 근원(根源)을 지배(支配)하듯 하는 것은
바다의 무게보다 더 중량감(重量感)이 있다
사람이 산보(散步)하듯 물은 아래로 흐른다.
바다의 무게보다 더 중량감(重量感)이 있다
사람이 산보(散步)하듯 물은 아래로 흐른다.
그 도중(途中)에 전시(展示)된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물이 그여히 영원(永遠)으로, 영원(永遠)으로 흐르는 것을 모른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선경 -2- 천상병
선경(仙境) -2-
이 새벽에 다람쥐는 왜 일찍 깨어나는가 -
엄마꿈을 꾸다가 불시(不時)에 깨어난 게 아닐까?
계곡(溪谷)가에 있는 것은 세수생각 때문이 아닐까?
옆의 아내 말에 따르면,
다람쥐는 알밤과 도토리를 잘 먹는다는데,
그건 식량(食糧)으로서가 아니라 진미(珍味)로서가 아닐까?
나뭇가지를 빨리 가는 동태(動態)는,
무구(無垢)한 작난(作亂)이요, 순진(純眞)한 스포츠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소능조 천상병
소능조(小陵調)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새, 조광출판사, 1971
수락산변 천상병
수락산변(水落山邊)
풀이 무성(茂盛)하여, 전체(全體)가 들판이다.
무슨 행렬(行列)인가 푸른 나무 밑으로.
하늘의 구름과 질서(秩序)있게 호응(呼應)한다.
일요일의 인렬(人列)은 만리장성(万里長城)이다.
수락산정(水落山頂)으로 가는 등산행객(登山行客).
막무가내로 가고 또 간다
기후(氣候)는 안성마춤이고,
땅에는 인구(人口).
하늘에는 송이 구름.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수락산하변 천상병
수락산하변(水落山下邊)
하늘은 천국(天國)의 멧세지.
구름은 번역사.
내일은 비다.
수락산(水落山)은, 불쾌(不快)하게 돌아 앉았다.
등산객(登山客)은 일요일의 군중(群衆).
수목(樹木)은 지상(地上)의 평화(平和).
초가(草家)는 농가(農家)의 상징(象徵).
서울 중심가(中心街)는 약(約) 한 시간(一時間).
여기는 그저 태평천하(太平天下)다.
나는 낮잠자기에 일심(一心)이다.
꿈에서 멧세지를 번역하고,
용(龍)이 한마리, 나비가 된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수락산하변 5 천상병
수락산하변(水落山下邊) 5
우리집도 초가(草家)요 옆집도 초가(草家)야.
우리집 주인(主人)은 서울 백성(百姓).
옆집사람과는 인사(人事)한 적이
길을 건너고 대하고 있으니,
옆집의 위치(位置)는,
아프리카대륙(大陸)이다.
우리집에는 주인(主人)말고도 세 가구(家口)가 있다.
그러니 인구밀도(人口密度)가 국제적(國際的)이다.
무려, 열네 사람이나 되니.
우리집은 한 마리 밖에 없는 개를 팔다니,
신문(新聞)에 나는 개발도상국가(開發途上國家)인가?
옆집은 TV안테나가 섰으니,
선진국(先進國)이다
나는 우리집 주인(主人)의 이름도 알고,
친절(親切)하기가 극진하지마는,
옆집 주인(主人)은 `예수―그리스도'인가?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시냇물가 2 천상병
시냇물가 2
풍경(風景)이 아름답게 펴진 것은 인류(人類)의 운명(運命)이다.
이 운명(運命)의 상한체(上限體)는 별이고,
하한체(下限體)는 지구(地球)의 한복판에 이른다.
강물과 계곡(溪谷)은 이 풍경(風景)의 핵(核)이며
유동(流動)하는 지구표면(地球表面)의 절색(絶色)이며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용기(勇氣)를 주어왔다.
별과 지구(地球)는 이 우주(宇宙)의 한 부분(部分)이고
강물과 계곡(溪谷)은 미색(美色)이고
바다는 이 지구(地球)의 철학(哲學)인 것을…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시냇물가 3 천상병
시냇물가 3
이 시냇물은
수락산(水落山)에서 발류(發流)하였으니
기어코 한강(漢江)에 삽입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서울의 혈로(血路)요 수류(水流)이다.
시민(市民)들이 모름지기 그 덕화(德化)를 입을 것이니
인격(人格)과 품성(品性)이 월등(越等)할 까닭이다.
기어이 바다에 들 것이니
세계(世界) 칠해(七海)는 서울 시민(市民)과는 무관(無關)하지 않다.
왜 수락산정(水落山頂)에 등산객(登山客)이 가는가…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시냇물가 5 천상병
시냇물가 5
시냇물이 세차게 흘러가며
심지어 파도(波濤)나 파도(波濤)를 쳤다.
바위에 부딪쳐, 물결이 거세게 화를 냈다.
어제와 지난 밤에 비가 억수로 왔으니
산(山)에 내린 물이 소나무 밑으로 헤메다가
드디어 계곡(溪谷)에 집합(集合)하여 이 꼴이다.
산세(山勢)와 지세(地勢)가 바다보다 높아서
자연히 밑으로 물이 흐를 수 밖에,
그렇지만 오늘같이 노도(怒濤)를 치는 것은 처음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심신록 1 천상병
심신록(心信錄) 1
신심(信心)이 보통인데,
나는 왜 가꾸로 심신(心信)인가?
유다른 까닭은 다음에…
믿는 마음이 아니고,
나는 마음을 믿는다.
마음을 굳게 굳게 믿는다.
내게는 믿는 마음밖에 없고.
천부(賤富)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바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약속 천상병
약속(約束)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黃土)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약수터 천상병
약수(藥水)터
내가 새벽마다 가는 약수(藥水)터가에는
천하선경(天下仙境)이 아람드리 퍼진다.
요순(堯舜)이 놀까말까한 절대미경(絶對美景)이라네.
하긴 그 곳에 벌어지는 사물(事物)은 평범(平凡)하지만,
나무, 꽃, 바위, 물, 등등(等等)이지만,
그 조화미(調和美)의 화목색(和睦色)은 순진(純眞)하다네.
반드시 있을 곳에 자리잡고 있고,
운치와 조화(調和)와 빛깔이 혼연일치(混然一致)하니,
이 세계(世界)의 극치(極致)를 이루었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어두운 밤에 천상병
어두운 밤에
수만 년(數萬年)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靑年)이 있어, 시(詩)를 쓰다가 잠든 밤에…
새, 조광출판사, 1971
역 천상병
역(易)&
대광(大鑛)하고 애오라지 격막(隔漠)하신 하느님의 나라에는
관건(觀建)하신 망법(望法)이 있느니라.
노자(老子)를 비롯하여 도학자(道學者)들과 그 제자(弟子)들은.
비로소 그 도학자(道學者)들은 그 술법(術法)을 가르쳤는지라.
중화(中華)의 여러 백성(百姓)들은
일깨우침이 다대(多大)하였는지라.
평태평(平太平)이 간간이 장구(長久)하였노라.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인생서가 2 천상병
인생서가(人生序歌) 2
인생(人生)이란 무엇이며,
인생(人生)이란 철학(哲學)은 어떻게 말하는가.
인생(人生)이란 궁극적(窮極的)으로 무엇인가….
개미는 땅을 기기 마련이며,
나비는 하늘하늘 날아다니기 마련이다.
자연(自然)은 그런데로 섭생(攝生)인 것이다.
기(旗)도 나부끼고 꽃도 나부끼고,
공명(功名)도 있고 폐가(廢家)도 있으니,
나의 영광(榮光)은 오직 고독(孤獨)일 따름이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인생서가 3 천상병
인생서가(人生序歌) 3
격언(格言)은 진리 이상(眞理以上)이야,
진리(眞理)는 합리주의(合理主義) 의존(依存)이고
인생(人生)은 진리(眞理)의 수박 겉핥기이다.
인간(人間)의 체험(體驗)만이 그것에 반역(反逆)한다.
경력(經歷)은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골짜구니.
모든 자리는 세월의 악세사리.
내 친구는 거의 모든 것에,
통달(通達)했지만 모습이 바보고,
인생(人生)은 바보까지 관대(寬大)하게 처분(處分)한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조류 3 천상병
조류(潮流) 3
동계여객(冬季旅客)이 밥을 못 얻어 먹고 건건이
어디론가 가듯 물결은 그저 느릿느릿이 전문(專門)이다.
원기(元氣)가 있으면 역도산(力道山)같이 달리겠구만.
올봄에는 어느 편지(便紙)를 받을 모양인가.
노모고독(老母孤獨)을 잊지 못한 큰아들의 작란(作亂)같이
젊은 장년(壯年)은 미혼(未婚)인 채 초열(焦熱)에 허덕인다.
젊은 장년(壯年)놈은 이 때 마침 동양사(東洋史)도
책(冊)이라고는 최근(最近)의 것이 있을 뿐이라서
고초(苦楚)가 많구만 다만 조류(潮流)의 느림보를 닮아간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주막에서 천상병
주막(酒幕)에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너머
슬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새, 조광출판사, 1971
촌길 천상병
촌길
아스팔트로 포장 안된 길을
나는 매우 좋아 한다.
돌이 울뚝불뚝한 길바닥,
시정인(市井人) 집이 옹기종기 붙은 길.
흙냄새 그윽한 시골길.
이 촌길을 걷고 있으면
나는 고대인(古代人)의 후손(後孫).
정서(情緖)는 옛사람이 더 풍부(豊富)했다.
고대문명(古代文明)으로 천천히 가는 길.
주막에서, 민음사, 1979
편지 천상병
편지&
□ 1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 새 시인(詩人)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 주십시오. 이름은 조지훈(趙芝薰) 김수영(金洙暎) 최계락(崔啓洛)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 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전세계(全世界)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왔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푸른 것만이 아니다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三月) 사월(四月) 그리고 오월(五月)의 신록(新綠)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한 가지 소원 천상병
한 가지 소원(所願)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새, 조광출판사, 1971
한 낮의 별빛 천상병
한 낮의 별빛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새, 조광출판사, 1971
행복 천상병
행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내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 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답게, 1991
회상 1 천상병
회상 1
아름다워라, 젊은 날 사랑의 대꾸는
어딜 가?
어딜 가긴 어딜 가요?
아름다워라, 젊은 날 사랑의 대꾸는
널 사랑해!
그래도 난 죽어도 싫어요!
눈오는 날 사랑은 쌓인다.
비오는 날 세월은 흐른다.
새, 조광출판사, 1971
회상 2 천상병
회상 2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수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 되어 도도히 흐른다.
새, 조광출판사, 1971
희망 천상병
희망(希望)&
내일의 정상(頂上)을 쳐다보며
목을 뽑고 손을 들어
오늘 햇살을 간다.
일시간(一時間)이 아깝고 귀중하다.
일거리는 쌓여 있고
그러나 보라 내일의 빛이
창(窓)이 앞으로 열렸다.
그 창(窓) 그 앞 그 하늘!
다만 전진(前進)이 있을 따름!
하늘 위 구름송이 같은 희망(希望)이여!
나는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四方)을 이끌고
발걸음도 가벼이 내일로 간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
흰 구름 천상병
흰 구름
저 삼각형(三角形)의 조그마한 구름이,
유유히 하늘을 떠 다닌다.
무슨 볼 일이라도 있을까?
아주 천천히 흐르는 저것에는,
스쳐 지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구름은 어김없이 간다.
희디 흰 구름이여!
구름에게는 계절(季節)이 없다.
어느 계절(季節)이든지,
구름은 전혀 상관(相關)않는다.
오늘이 내일이 되듯이
구름은 유유하게 흐른다.
주막에서, 민음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