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민초들은 버겁다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지은이 : 시오노 나나미
옮긴이 : 송태욱
펴낸날 : 2010-2011
읽은날 : 2017. 7. 25 – 8. 13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알고도 싶었고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냥 ‘십자군이 이슬람과 싸웠다’는 정도로 알고만 있었던 그런 이야기를 어쩌면 ‘꼭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여러 시간을 두고 머뭇거리다가 이번 여름방학을 앞두고 들른 도서관에 결국 손이 갔다. 고맙게도. 처음에 받아든 세권이 너무나 두꺼워서 도대체 읽을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다 들어와있다고 할 수도 없고 책을 읽었다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대충이라도 정리해야지 싶은 생각은 들어 뒤에 연표를 참조해서 간단하게나마 십자군 전쟁을 정리하고는 싶다.
1차 십자군(1096~1099)
1095 교황 우르바누스 2세,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결성을 호소함.
1096 은자 피에르 신부 ‘민중 십자군’을 조직해서 공식 출정일 8월 15일 이전인 봄에 출발하여 헝가리 등지에서 수탈을 거듭하며 겨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1098 소아시아의 니케아, 도릴라이움, 에데사, 안티오키아 점령,
1099 팔레스티나로 들어서서 7월에 예루살렘 함락. 로렌공작 고드프루아가 ‘성묘의 수호자’로 실질적인 왕이 됨
1100 고드푸루아 죽음 에데사 공작인 보두앵이 예루살렘 왕에 즉위
1118 보두앵 1세 죽음. 20년간 십자군 국가 확립, 사촌 형제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가 왕에 즉위
1118 템플 기사단 결성. 성요한 의료 수도사회가 ‘성요한 병원 기사단’으로 변모하여 활동함
1131 보두앵 2세 죽음. 사위 앙주 백작 폴크가 왕에 즉위.
1143 폴크 죽음. 아들 보두앵 3세(13살)와 어머미 멜리장드가 공동 왕위 오름
1144 이슬람 태수 장기가 에데사 함락하고 파괴
2차 십자군(1146~1148)
1148 프랑스왕 루이 7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3세가 십자군 결성.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했다가 이슬람 태수 장기의 차남 누레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날 군대를 철수함
1154 누레딘이 다마스쿠스를 제압하고 이슬람 전역의 지배자가 됨
1162 보두앵 3세 죽음. 동생 아모리가 즉위
1169 누레딘 수하 장수 시르쿠가 파티마 왕조 이집트를 제압. 시르쿠가 죽어 조카 살라딘이 이집트 재상이 됨
1170 이집트 파티마 왕조 멸망. 살라딘이 아이유브 왕조 창시
1174 아모리 죽음. 나병 환자인 아들 보두앵 4세가 왕이 됨
1185 보두앵 4세 죽음. 보두앵 5세(8살)가 왕이 됨
1186 살라딘이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됨. 보두앵 5세 죽음. 부모 시빌라와 기 드 뤼지냥이 왕위에 오름
1187 살라딘이 그리스도교 세력권 침입해서 예루살렘까지 함락. 88년만에 이슬람 지배로 돌아감
3차 십자군(1188~1192)
1188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가 군대를 이끌고 중근동으로 출발
1190 소아시아의 괴크스강에서 프리드리히가 물에 빠져 죽음. 독일군은 계속 가기로 한 일부만 두고 귀국. 영국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왕 필립 2세가 중근동으로 출발
1191 리처드 비잔틴제국령 키프로스를 닷새만에 정복. 필립 귀국. 독일군 지휘관 오스크리아 공작도 전선에서 벗어나고 독일인으로 결성된 튜턴 기사단만 남음
1192 필립, 리처드 지배지역 침입.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가 왕위에 오르나 암살당함. 상파뉴 백작 앙리가 왕위에 오름. 리처드와 살라딘 강화 성립(이슬람측 예루살렘 영유, 그리스도교도의 순례 안전보장, 그리스도교측 팔레스티나 항구도시 영유)
1193 살라딘 사망, 세 아들들과 다퉈 동생 알 아딜이 이슬람의 술탄이 됨
1199 리처드 사망
4차 십자군(1202~1204)
1202 4차 십자군 출발(프랑스 제후들). 수도사 단돌로가 주도하는 베네치아 해군이 해상 지원. 베네치아 요구로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 침략
1204 비잔틴 제국 황자의 요구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라틴제국 수립
5차 십자군(1218~1221)
1218 예루살렘왕 장 드 브리엔이 교황청 요구로 십자군 조직해서 이집트 다미에타 침공. 알 아딜 죽음. 이집트 통치를 맡고 있던 장남 알 카밀이 후계자에 오름
1220 다미에타 제압, 프리드리히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
1221 나일강 범람으로 십자군 철수
1225 프리드리히, 장 드 브리엔의 딸과 결혼해 예루살렘 왕이 됨
1227 교황 그레고리우스, 십자군 원정 요청에 불응한 프리드리히 파문
6차 십자군(1228~1229)
1228 교황 다시 파문. 프리드리히 십자군을 조직해 중근동으로 출발
1229 프리드리히와 알 아딜이 강화 체결. 전투 없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귀국
1244 시리아의 한 부족이 예루살렘을 점거 15년간 지켜온 강화가 깨짐
7차 십자군(1248~1254)
1248 프랑스왕 루이 9세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 요청을 받아 십자군 조직
1249 다미에타 상륙해서 만수라로 진군
1250 맘루크 군대와 전투에서 패하여 왕을 포함해 십자군 전체가 포로가 됨. 루이 왕은 막대한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됨.
1258 몽골제국이 바그다드 함락하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침공
1260 이집트 지배자인 맘루크 출신 바이바르스가 몽골군 격파.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 성립
8차 십자군(1270)
1270 프랑스에서 북아프리카 튀니지아로 출발(7.1) 루이 사망으로 끝남(8.25)
1291 맘루크 왕조 술탄 카릴이 마지막 남은 그리스도교측 도시 아코 총공격하여 함락. 그리스도교측은 중근동의 모든 도시를 잃고 키프로스로 피난
1303 로마 교황이 프랑스 왕의 병사들에게 일시적으로 붙잡힘
1306 템플 기사단, 프랑스로 본거지 옮김. 프랑스 왕 필립, 교황 클레멘스 5세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김(아비뇽 유수 시작, 70년동안, 프랑스 왕의 뜻대로 프랑스 태생 교황 7대째)
1307 템플 기사단에 대한 탄압 시작
1309 성요한 병원 기사단, 로도스 섬으로 본거지 옮겨 로도스 기사단 형성
1312 교황, 템플 기사단 해산 선고
십자군 이후
1453 투르크제국이 비잔틴 제국 함락.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이 됨
1492 스페인 그라나다 함락. 그리스도교측이 이슬람교도 일소.
1522 투르크 제국이 보낸 대군과 병원 기사단이 로도스 섬에서 전투. 투르크 군대가 이김
1529 빈에서 투르크 제국 군대가 져서 철수
1565 로도스 섬에서 지고 몰타섬으로 옮겨간 병원 기사단이 투르크 제국 군대를 물리침
1571 베네치아, 교황청, 스페인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와 그리스 레판토 앞바다에서 격돌해 그리스도교측 대승
1645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중해의 항공모함인 크레타 섬에서 25년 동안 투르크 제국과 싸워 버티다가 결국 크레타섬 지배권을 오스만 투르크에게 넘겨줌
1683 투르크 제국이 빈 싸움에서 지고 서진을 포기함
책도 두꺼웠기에 단순한 사실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이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하면서도 둘러보면 이런 자료들은 여기저기 널려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것은 ‘거기’에 널려있는 지식이고 이것은 ‘여기’ 그러니까 내 머리에 조금이나마 새겨두고자 하는 바람에서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했다. 나름 정신없는 역사적 기록들이 조금이나마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다시 돌아보면 또 언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게다.
이 기나긴 200여년 동안 벌어진 동서의 전쟁은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참혹함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참혹함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신성한 것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아니 어쩌면 뛰어든 것은 황제니 왕이니 제후들이니 영주니 기사니 수도사니 하는 몇몇 사람들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끌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모든 사람들은 내 생각으로 이리저리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하지 않으면 그 동서 전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은이에 따르면 권력 다툼에서 밀리던 교황이, 그러니까 정치권력에 밀리던 종교권력이 다시 권력을 되찾아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부르짖음이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
교황을 비롯한 종교지도자 아니 종교기득권층은 성지탈환, 성지해방이라는 일반인들이 입에 오르내리기조차 버거운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자발적 순종을 요구했고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아래 사람들을 명령으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했고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했던 그 방식 그대로 이 어마어마한 살육의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가지고 진흙탕 싸움을 이어갔다.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경제권력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가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이 권력의 우위에 서기 위해 이런저런 모양새로 당대 세계를 지배해갔다. 거기에 수많은 민초들은 버겁게 하루하루 삶을 연명해갔고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싸움터에서 기구하게 목숨을 이어갔다. 그렇게 비참한 죽고 죽이는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인 상황에서종교권력과 정치권력, 경제권력은 사람들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도록, 정신이 미치지 않도록.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거둬들이기 위해 예루살렘을 두고 프리드리히와 알 카밀 사이에 강화를 해도 그것은 불신앙의 무리들과 타협을 했다는 까닭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 전형적인 종교권력의 추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당시에도 그랬을까.
자신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걸 알아차린 프랑스 왕에 의해 이단재판에 넘겨져 숱한 폄하와 고문에 내몰린 템플 기사단, 기나긴 전쟁 통에 성립을 승인했고 오로지 교황청에 만 통제를 받도록 했고 그러기에 숱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교황청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템플 기사단의 모습에서 바로 권력 다툼의 너저분함이었다. 이교도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무참히 살인을 자행했던 모습도 종교의 이름으로 인정받고 또 그보다 더한 보상까지 받는 그런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십자군 전쟁을 굳이 여기서 ‘동서 전쟁’이라 한 것은 십자군 전쟁 또한 유럽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의 이름일 뿐, 이슬람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이름은 그와 다를 것이기에 이렇게 붙인 것이다. 물론 이슬람이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전쟁 또한 그저 참혹한 전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지은이는 이제 그 당시처럼 더 이상은 성전(聖戰)은 없고 지금 정전(正戰)만이 남았다고 한다. 동서 전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오늘날도 여전히 전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한 사람들의 참혹한 삶도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 때는 거룩한 이름을 빌어 했다면 지금은 ‘옳음’을 빌어 전쟁을 하는데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는 바로 그 전쟁을 일으킨 자가 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생선을 고양이한테 맡긴 것인데 너무나도 참혹한 결과를 일으킬 일이라 가슴이 답답하다.
아직도 권력을 둘러싸고 종교권력, 정치권력, 경제권력은 서로 우위에 서려고 으르렁거리고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민초들은 너무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