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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의 행간
가을 숲에서 춤추던 낙엽은 누군가의 이름을 목 터지게 부르며 제정신 팽개친 체 뒹굴고 있습니다. 갈기갈기 찢긴 몸뚱이에 검불이 달려와 상처 난 구멍을 들락거리며 차라리 흩어져버리자고 독한기운을 뱉어냅니다. 혼미한정신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청초한 하늘을 단번에 삼키고 바람을 뿜어내며 고통스런 가슴앓이를 잠재우기 시작합니다. 아직 나는 존재감이 있다, 만만치 않은 내 삶은 호락호락 끝나지 않는다는 독백을 중얼거리며 대찬바람을 타고 정처 없이 휩쓸려갑니다. 휘리릭, 철퍼덕 주저앉은 곳은 빛도 들지 않아 어둠 가득한데 은은히 퍼지는 온기와 생명체가 버티기 좋은 습기는 도처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뜻밖의 안락한 환경에 서서히 긴장은 풀리고 난장의 여독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손 내밀어 더듬거리자 생사를 같이한 서로 이웃과 뜻을 모아 즐겨찾기했던 모습들이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니 앙증스런 굴속에 아담한 둥우리를 만들어 놓고 각자는 널브러지고 엎어지며 아주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흐리멍텅하게 앉아있는 짐승은 행색이 괴팍하고 절반정도 넋이 외출한 모습입니다. 눈빛만 매섭게 살아 금방이라도 살풀이하듯 지랄발광 할 것 같은 차림새로 어스름한 굴속을 헐렁하게 채우고 있습니다. 저 게 대체 무슨 짐승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실실 쪼개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슬쩍 비치는 꼬리와 뒤태를 보니 영락없는 늑대입니다. 식민지시절 왜놈들 횡포로 멸종되다시피 한 짐승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호흡을 정돈하는데 모두는 귀를 쫑긋 세워 짐승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입니다. 아마도 늑대가 무료한 이웃을 위해 심심찮은 썰을 풀며 쌀을 팔고 있었다는 그림이 순간 그려집니다. (이거 또 초장부터 의미심장하게 약을 팔아 독자여러분은 지극히 심난하겠지만 이게 다 원고를 채우기 위해 독수리발차기로 자판 찍는 수순이니 도통 어지러운 파리채는 한 쪽에 놓아두십시오.)
먹고살기도 어려운 요즘 형체 묘연한 병원체가 인간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어 매우 근심스럽다는 늑대는 다행히 요즘엔 날짐승이나 산짐승이 연루되지 않아 애꿎은 동물들이 살 처분 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지만 인간의 분풀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 모두는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도 외국에서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떠돌아 커다란 재앙이 있었고 동네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토굴에 모여 화를 피하였으며 그들이 이실직고하는 주접을 끌어 모아 보카치오라는 사람은 책을 만들어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지금 같은 문명시기에 그런 일로 인하여 집을 버리고 떠나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이 하는 일을 하찮은 짐승이 알 수 없으며 요즈음은 산신령도 발걸음을 하지 않으니 자세한 상황파악을 위하여 조만간 산신령초가를 찾아가 보겠다고 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늑대는 슬그머니 일어나 숲 속 계곡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풀숲에 몸을 숨기고 달을 응시하며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봅니다. 달동네에서는 재개발 붐과 맞물린 행정도시 이전으로 시끌벅적하고 때 마침 찾아온 호기를 놓치지 않는 토끼는 떡 방앗간 체인점을 형성하며 함부로 깝치고 있습니다. 태백형님은 우리 것이 제일이라며 그 좋던 양주를 내던지고 쌀 막걸리에 취해 아닌 밤중 연못에 뛰어들어 술아~ 술아~ 좋은 술아 삼삼하게 익은 술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차츰 시간이지나 모두는 졸려 눈을 껌벅거리는데 약삭빠른 토끼는 막걸리 한 통을 쌔비해서 주류백화점 안으로 들고 들어갑니다. 아무에게도 막걸리 만드는 비법과 상표권을 전수해주지 않자 특유의 도둑심보가 발동한 것입니다. 순간 밑에서 바라보던 늑대가 느닷없이 질러대는 소리에 깜짝 놀란 토끼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급기야 달동네 언덕을 굴러 숲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늑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쫓아가 단 번에 대가리를 후려갈겨 제압합니다. 마침 만만치 않은 시장기가 엄습해오던 터라 한입에 덥석 삼키려고 하자 토끼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외마디소리를 지릅니다. 넉넉한 아량을 베풀어 마지막 가는 길 잠깐의 숨통을 열어주자 토끼는 조그만 열쇠를 꺼내놓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늑대가 열쇠를 흘깃 쳐다보며 뭐하는데 필요한 것이냐고 물어보자 마녀계곡 선녀탕에 있는 찜질방열쇠라고 하면서 요즘 선녀탕에 온천이 개발 되었으며 그 효험이 하늘에 전해져 그믐날저녁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로 인하여 찜질방이 미어터진다고 합니다. 저 열쇠는 그곳 출입문열쇠이니 그믐날저녁이면 찜질방에 가득한 삼삼한 선녀들을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며 그 다음은 말이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일찍이 나무꾼은 그 효험을 얻은바있다는 얘기를 겻들이며 제발 마음 바꿔 현명한 판단을 해달라고 거듭 애원합니다.
늑대는 밑져봐야 토끼 한 마리이기에 산뜻하게 마음을 비우고 열쇠를 받아 목에 두른 후 산등성을 넘어갑니다. 늑대 계곡 지나칠 땐 지난날 나라를 빼앗겼던 식민지시절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조상들의 체취를 훔쳐보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더욱 괘씸했던 것은 철없는 인간들이 침략자의 얕은꾀에 넘어갔으며 몇몇의 인간들은 하수인이 되어 설레발이 치고 이웃을 농락했다는 것입니다. 근래 들어 그들의 잘못된 행적을 낱낱이 밝힌 인명사전이 발간되어 부끄러운 과거사가 재조명 되었건만 지금도 역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부류들은 해괴한 언행을 일삼고 있으니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있겠지요. 진실은 결코 퇴색하는 일이 없으니 쓸데없는 인간들의 지랄옆차기는 접기로 하고 발길을 재촉합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는 순간 귀에 익은 소리 들려 급히 달려가 보니 한적한연못가에서 산신령과 나무꾼이 심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꾼은 나무를 자르다 전기톱을 물에 빠뜨렸으며 산신령은 분명히 전기톱을 건져주었는데 나무꾼은 본래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입니다. 한술 더 떠 전기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본인이 원하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달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늑대는 나무꾼에게 다가가 그 톱은 충전식으로 되어있는 것인데 물속에 있는 동안 전지가 모두 방전된 것이니 다시 충전해서 쓰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기계의 특성상 물기가 있으면 안 되니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완전히 말린 후 사용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단단히 이릅니다. 아울러 어느 정도 상식이 있다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이니 괜히 고요한 숲속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라고 합니다. 나무꾼은 생뚱맞은 늑대 출현이 몹시 못마땅하였으나 더 이상 개겨 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슬그머니 자리를 비웁니다. 졸지에 개발리고 숲속을 빠져나가는 나무꾼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돌린 산신령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팡이를 끌어안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늑대를 바라봅니다.
모든 것은 소용이 있다더니 너를 두고 이르는 말이구나, 그런데 늑대야 그런 지혜를 어디서 배운 것이냐, 예전에 너는 산신령학당에서 배움을 다 마치지 못하고 야반도주 하지 않았느냐? 산신령님 그때는 지금 같은 문명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그곳에서 배우고 익힐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현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절이 아니랍니다. 산속식구 모두가 힘을 합쳐도 만들 수 없는 굴을 인간들은 삽시간에 뚫고 있으며 이곳저곳에 물을 가두어 놓기도 하고 물길을 잡아 돌리기도 합니다. 달동네에 있는 계수나무를 욕심낸 무리들이 수차례에 걸쳐 도벽의 손길을 뻗쳤으며 그 때마다 태백형님의 놀라운 기치로 물리치곤 하였답니다. 그들이 한 때 사용했던 전기톱은 아주 고전적인 수법중 하나이고 지금은 소리가 요란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요즘엔 스크루(나사)나 유압을 이용한 잭, 일명 쟉키라는 것을 이용하여 간단하게 들어 올리지요. 또 한 가지는 기중기가 있는데 이것은 유압을 이용한 튼튼한 쇠줄로 암소바위만큼 큰물체도 손쉽게 들어 올립니다. 빠른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서 네 발통 달린 양철 곽에 유압장비를 결합하여 사용하는데 인간들 서식지를 구성하는 건축현장에서 종종 눈에 띄기도 하지요. 이 쯤에서 지난 날 계수나무를 사이에 두고 손타기 자웅을 겨루던 달동네 지존 태백 형님과 도둑의 횡설수설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도둑의 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교교한 달 빛 어우르며 별 한 점 눈에 넣고, 구름 한조각 허리춤에 꿰차고, 달 빛 한웅큼 머리에 이고, 바람 가르며 움직이는 동작은 귀신도 못 따라하지. 체력은 국력이라고 허약한 몰골은 아예 이력서 쓰는 자체부터 안 되는 거야.
도시가스 배관이나 창문 옆 철 구조물 붙들고 기어오를 때에는 행여 모습 발각 날까 조마조마 하는 가슴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야. 얼굴에 스며든 밤이슬 훔치며 태연하게 주위를 살피기도 하지만 실상은 간이 오그라지는 긴장,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체력고갈의 고통 속에서 긴박한 찰나에 치고 빠지는 기술을 반복하는 호흡이 숨어있지.
어둠에 묻혀있는 사물을 확인하고 살펴 볼 때 방심은 금물이고 희미한 불빛을 살짝 천장구석에 띄워놓고 급하게 훑으며 기억한 후 순식간 빛을 죽여야 해. 한 번 더듬은 물건은 재차 확인할 필요 없으며 대충 챙겼으면 미련 버리고 자리 뜨는 의젓함을 보이고 돌아 나올 때 문득 욕심나는 것이 눈에 띄어도 가차 없이 털고 가는 거야. 진행되는 작업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어리버리 하는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 되고 한순간 욕심과 객기는 커다란 사고를 초래하는 것이지.
어디까지나 물건이 본래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위치이동 하는 것임을 명심하여 물건이외의 것과 마찰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방해를 받거나 모습이 발각되었을 때에는 신속히 자리를 떠야해. 모든 것은 때가 있음이니 이 건 아니라는 상황에 처했을 때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섣부른 탐욕과 타협하려는 마음을 다스려야지. 상대가 뭐라 하든 개의치 말고 나는 돌아가리라는 자세를 확립하고 확실한 의지를 은연중 내비치며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는 거야.
하느님도 모르게 움직이는 벌이수단이니 은닉한 장물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야하고 처분에 위험성이 따르면 즉시 용도폐기 하여 후환을 없애야 해. 설마 하는 서투른 판단에서 꼬리가 잡힐 수 있고 그깟 욕심 뿌리치지 못하고 추적의 발판을 만들면 결국 암울한 영어의 몸으로 붉은 벽돌 쳐다보며 고뇌에 찬 수도승이 되는 거야. 물론 먹여주고 재워주며 일하는 즐거움이 있고 노동의 품삯을 받긴 하지만 그 게 현실 생활과 전혀 다르고 품삯이라는 것이 궁극적인 삶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때에 따라서 하루가 백 년같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참담한 영내생활에 반항하며 담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에서 피터지게 몸부림치는 거야. 자유라는 것에 눈을 돌리게 되면 고통은 더해지고 주권을 상실한 수번(번호표)은 처절한 낙오자의 표시일 뿐이지.
차별화 된 전략이 있으니 독보적인 행동과 마음가짐을 흩뜨리지 말고 무엇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것을 명심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신체 간 접촉이 있어서는 안 되지. 직업의 특성상 많은 장물이 주위에 있으며 여건에 따라 그 것을 보존하는 개체가 있는바 수시로 작업 중에 상호간 마찰이 생기지만 본래 주인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며 슬그머니 빠져야하는 거야. 이것은 절도는 강도와 다르다는 확실한 작업방식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해. 강도는 일단 침입하면 사람부터 찾아 나서고 눈에 사람이 안 띄면 난리나지만 절도는 사람이 있으면 무척 곤란한 낭패가 따로 없음이지. 사람을 피해서 작업하려니 보통수고로 작업을 마무리하기 힘들지만 그 것이 절도의 특권이자 자부심인 게야. 강제로 빼앗는 방법과 잠시 위치이동을 한다는 것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지.
양심을 얘기한다면 마냥 부끄럽지만 위안되는 건 절대 가난하거나 불우한 이웃을 넘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살림살이 터져나가는 부잣집이 손 타는 것이야. 조금 나누어가져도 전혀 티 나지 않는 곳만 골라서 집중 공략하는 거지. 남의 눈에서 피눈물 빼면 결국 내 자신도 언젠가 괴로운 처지가 될 수 있음을 미연에 방지하는 거야. 뭐 가끔 대도라고 불리며 각종일간지 사회면에 커다랗게 실리는 것으로 명예를 삼는다고나 할까? 암튼 시간당 공임과 기술발휘, 최고의 이윤, 세금면제, 등은 타 업종 불문하고 고도의 부가가치가 있는 건 확실하지. 경제가 어려울수록 경쟁자가 많아지고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잡범들이 설쳐 되는 판에 자존심 무너지기도 하지만 다들 나름대로 버벅대는 행위를 함부로 막아 설 순 없지.
그리고 이 짓해서 잘 먹고 잘 살지 못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해 거두어들여도 쓰는 사람 따로 있고 노는 사람 따로 있기 때문이야. 일 끝나면 휴식도 잠시 다른 일거리 찾아야하고 일 할 곳의 위치와 은폐엄폐물, 유동인구, 가로등 개수와 위치, 감시카메라 및 도난경보기를 세심히 관찰 숙지해야 하고 일단유사시 튀어야할 최소거리와 파출소 및 방범초소위치를 훤히 꿰뚫는 암기력을 익혀야 해. 눈감고 대본을 줄줄 외워야하고 돌발변수의 각본도 채비해 두어야 하기에 도통 먹고 놀 팔자는 못되는 거야. 그렇지만 이 한 몸 움직여 주위 여러 사람이 잠시나마 때꺼리 연명할 수 있기에 부단히 희생정신을 갈고 닦는 것이지.
항상 하던 일이니 부지런히 할뿐이고 혹여 잘못됐을 때 주위사람 도움으로 변호사 선임하고 수형기간 필요한 의복 및 음식물 차입으로 간소하게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거지. 큰 집 문밖 나설 땐 사는 게 별거 아니고 죄와 벌을 손수 실행한 정신은 허탈하고 육신은 피폐하지만 처음 발을 디딘 이 길을 쉽사리 바꾸기 힘들다는 거야. 때로는 프로스트가 설파한 두 갈래 길에서 가지 않았던 길을 가보고 싶어. 저 산 너머 무지개 집을 들여다보고 파랑새가 되어 드높은 창공을 힘차게 날고 싶어도 막상 들이대는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더라고. 가끔 자주 고독에 몸부림 칠 땐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 프롬이 얘기하는 지식인을 동경하기도 해. 또 내가 가진 유산 중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것을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주고 싶어.
이거 알아? 산동네 늑대 굴 중간지점 좌측으로 두 번째 뚫린 통로 열다섯 걸음에서 우측 45도 다섯 뼘 위에 희미한 늑대문양이 있어. 그 곳을 한 자 정도 파면 대 부호의 금고위치와 침투방법 장물은닉처가 상세하게 적힌 설명서와 금고열쇠가 숨겨져 있는데 어때? 구미 당기지 손 타기 전에 어서 가 봐!!
산신령은 늑대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변화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산중식구들의 무지함과 이판사판 정신 줄 놓은 짐승의황당한 작태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산신령은 눈을 지그시 뜨고 늑대를 쳐다보며 말문을 엽니다. 그런데 한동안 보이지 않던 네가 오늘 웬일로 이 먼 곳까지 발길을 옮긴 게냐? 이젠 너도 산전수전 공중전 까지 치렀으니 헙수룩한 내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사태해결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지팡이효력 때문입니다. 요즘 인간 세상에 신종플루라는 병원체가 날아다니고 있으며 자칫 그 피해가 짐승들에도 닥칠 수 있으니 서둘러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병원체는 차가운 공기를 타고 움직이고 있으며 더운 곳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하니 그 지팡이로 번개 바람을 일으키면 순간적인 고열과 삼 파장 빛으로 간단히 궤멸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입니다. 벼락을 맞은 병원균이 정신 못 차리고 허덕일 때 구름을 걷어내고 뜨거운 태양을 끌어들여 지지고 볶아 마지막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지요. 어때요 제 생각이 아주 산뜻하지 않습니까?
산신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늑대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네가 언급했듯 지금세상은 옛날과 전혀 다른 세상이고 하다못해 나무꾼도끼가 전기톱으로 바뀐 시절이다. 요즘시세에 지팡이위력은 공중을 떠도는 전파와 수 많은 철탑 시시때때 변하는 기후, 천차만별 흩어지는 구름 등으로 인해 한 마디로 패자가 된지 오래이다. 그저 형식상 꿀리지 않으려고 들고 있는 것뿐이지. 등산객이 연못에 빠뜨린 핸드폰도 찾지 못해 조낸 개망신을 당했으며 가까스로 거북이를 만나 갖은 공갈과회유로 천신만고 끝에 건져낼 수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삼삼한 물맛을 본 거북이는 부킹을 하겠다고 허락 없이 용궁을 들락거리며 나이트클럽과 룸살롱을 휘젓고 다니던 중 모종의 암 거북과 눈이 맞아 잠수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노한 용왕은 연못의 물을 다 퍼내고 거북이를 붙잡아 내쫓았으나 연못을 비롯한 근처 계곡은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인간들 또한 피해가 막심하였다. 결국 인간들은 물길을 찾아 가두고 새로운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애꿎은 생물은 졸지에 집을 잃고 떠나는 신세가 되고 그 여파로 생태계 해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단다.
공연히 발품만 팔고 어지간한 소득도 없이 굴속으로 돌아온 늑대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늑대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급히 일어나 낙엽 몇 장을 걷어내고 바닥을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합니다. 뭔가를 확인한 후 가만히 숨을 불어넣는 시늉을 하더니 부드러운 흙으로 덮은 후 흩어진 낙엽을 끌어 모아 흔적을 감추어놓습니다. 늑대의 반복되는 행동이 이상하여 한 무리의 낙엽은 귀 기울여 흙속의 정체를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순간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땅속에서 가쁜 숨을 쉬는 기척이 있고 여러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 수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땅속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는 다름 아닌 낙엽들의 혈육인 것입니다. 벌써 몇 년 전에 자취를 감췄던 나뭇잎들이 늑대와 함께 지내던 중 자연스럽게 산화되어 보드라운 흙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윤회는 오묘한 것이라 그 어느 것도 시간이 넘나드는 공간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모든 개체가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움에 취해 모두는 잠시 숙연해집니다.
그때 바싹 말라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인 솔잎이 주저 없이 일어나 늑대에게 땅속의 궁금한 사연을 물어보게 됩니다. 늑대는 짐짓 딴청을 부리다가 모두가 쳐다보는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제법 조용한 음성으로 사실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물레방앗간에서 무술을 익혀 절간과 바위틈을 넘나들며 곤충계의 투사로 이름난 귀뚜라미와 단단한 턱과 뿔을 바탕으로 나무둥지에 서식하는 사슴벌레,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가벼운 동작으로 환상의 춤을 추던 호랑나비 등이 있으며 아직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곤충도 있다고 합니다. 가을이 오기 전 동굴 앞으로 한 무리의 곤충들이 찾아와 부디 자신들의 서식지를 인간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후 화려했던 우리의 삶을 이어갈 후세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새벽이슬 따라 먼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곳이지만 모두는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어 깊은 감동을 받았답니다. 그 뒤로 그들의 분신인 미세한 알갱이들을 애지중지 보살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는 각각의 알갱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으며 모두는 제법 튼튼한 외투를 걸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가쁜 호흡을 몰아쉬기도 하지만 심장박동은 대체로 고른 편이고 신체 각 부분에도 별다른 외상이나 특이할만한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동그랗게 몸을 감싼 통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 바깥을 알 수 없으며 밖에서도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촉촉한 수분과 적당한 온도 흙속에 녹아있는 미세한공기와 나무뿌리는 그 곁을 머물며 은은히 배어들어 그들이 원하는 양분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호간모습을 볼 수 없음으로 생김새 또한 알 수 없지만 독특한 주파수와 육감으로 생명의 느낌을 전하고 가끔 기분이 좋을 때는 더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나무뿌리가 무성하게 얽힌 둥지 밑에는 보기에도 흉측한 굼벵이 한 마리가 더딘 몸동작으로 뒤척이며 뿌리에 매달린 수액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알갱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덩치가 크고 피부도 상당히 노화되어 여기저기 각질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커다란 눈과 피부 곳곳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다리와 숨구멍이 매우 특이합니다.
좁은 공간에서도 부단히 움직이는 굼벵이기척에 알갱이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이 무척 두렵고 의심스러웠지만 조용히 반복되는 호흡과 은근히 뿜어내는 온기에 동화되어 차츰 경계의 눈빛을 거두어들입니다. 무리 중에서 목소리가 곱고 자태가 고운 배짱이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거기 계신님은 뉘시며 어인일로 누추한 곳을 방문하여 항시 같은 차림으로 문밖을 서성이나요? 귀한 손님을 밖에 두고 마음을 열지 못하는 처자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문고리 잡아채고 화들짝 달려 나가고 싶지만 곤충 계에 흐르는 시간약속에 갇혀 기약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면서 낭랑한소리를 읊어댑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무리들도 이구동성으로 합세하여 안부를 전하고 궁금한 사연을 전달하게 됩니다. 굼벵이는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나 역시 곤충임에 틀림없으나 여러분과 동행 못함이 항상 서운했는데 벌써 여러 해를 이곳에 머무르다보니 이젠 숨소리만 들어도 대충상황을 접수하게 되었다고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굼벵이는 적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그때마다 숱하게 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모두는 잘 참고 견디며 생명을 보존했고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을 간직한 채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알갱이는 자신모습이 무척 궁금하다며 혹시 나와 같은 생김새를 본적이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굼벵이는 물론 본적이 있으며 가만 보니 그대는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배짱이와 같은 풀벌레 종족이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 음계 높은음을 내는 여치가 분명하다고합니다. 기다란 수염이 매우 인상적인데 통통하고 약간 넓은 몸집으로 숲속 합창단과 어울리며 가끔 독창을 부르기도 하는데 조급하여 까칠한 성격은 아마 예술가의 공통된 습관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옆의 이웃은 곤충계의투사로 명성자자하고 한 때 수많은 개미군단을 초토화 시켰으며 겁 대가리 없이 엉 까고 버티던 바퀴벌레서식지를 급습하여 박살낸 아주 무서운 종족이라고 합니다. 발길 닿는 곳을 서식지로 삼아 때로는 인간과 매우 근접한 건축에서도 거리낌 없이 살고 있으며 먹먹한 가을밤에는 투박하지만 짧게 끊어 두 박자 단위로 곡을 이어 노래하는 특이함에 끌려 수많은 인간들은 곧잘 감상에 젖어 고독을 씹어대기 바쁘다고 합니다.
모두는 처음 들어보는 자신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앞으로 펼쳐질 나름대로의 삶을 간직하며 세상을 향한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숨소리마저 깊이 숨는 적막 속에는 희망이라는 보따리가 풀어지고 서로는 삶의 선물을 껴안고 의지하며 멀리서 다가오는 희미한 생명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바로 그때 나뭇잎이 들썩거리더니 살기등등한 한 무리의 생물체가 급한 몸짓으로 다가옵니다. 진즉 위험을 느낀 나뭇잎은 길을 비켜주지 않으려고 그들 앞을 막아서다 군데군데 찢기고 헤어져 두 번 다시 쓰지 못할 형체가 되었습니다. 망연자실 널브러져 위급한사태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굼벵이는 서둘러 알갱이들을 끌어 모아 미로 같은 나무뿌리틈새를 찾아 숨겨놓습니다. 그 앞에 흙을 쌓아 두툼한 울타리를 만들고 침입자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검은 외투를 걸치고 탄탄한 투구를 쓴 침입자는 하필이면 배짱이와 앙숙인 개미군단입니다. 한패거리로 몰려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뒤지던 중 예리한 눈썰미로 나무뿌리를 노려보더니 코를 가까이 갖다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은신처를 찾아낸 무리는 울타리 위로 기어오르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한 굼벵이는 무서움에 몸서리치는 알갱이들을 안심시키며 서서히 전투태세를 갖춥니다. 어느새 울타리 위로 올라선 개미가 굼벵이를 쳐다보며 한 쪽으로 물러서라는 손짓을 하며 투구를 좌우로 흔들고 있습니다. 고개를 살살 흔들며 까딱거리는 사이로 깻잎모양 머리카락이 보이는 걸로 봐서 왕년에 이름표 떼고 바닥에 침깨나 뱉어본 폼입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굼벵이는 뿌리수액을 힘껏 들이킨 후 개미가 선점한 위치와 움직이는 상태를 예의주시하며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자리를 지킵니다. 개미들은 굼벵이덩치가 커서 아무래도 일대일로는 감당이 될 것 같지 않자 수군거리며 대형을 갖추고 흔히 써먹던 다구리에 통뼈가 없다는 격언을 되새기며 한꺼번에 우루루 달려들기 시작합니다. 굼벵이는 숨을 몰아 쉰 후 최대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뱉어냅니다. 순간 폭풍 같은 바람을 타고 끈끈한 수액이 쏟아져 나오더니 급기야 개미들 머리와 팔다리에 엉겨 붙기 시작합니다. 졸지에 기습당한 무리는 수액에 젖어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상호간 부딪히고 거꾸러져 흙바닥에 나뒹굴기 급합니다.
졸지에 오합지졸이 되어 버벅거리는 무리를 내려다보며 굼벵이가 크게 숨을 들이쉬자 개미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키며 도망가기 바쁩니다. 얼기설기 찢긴 나뭇잎은 그 뒤를 쫓아 험한 욕지거리를 퍼부어대고 굼벵이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를 정돈합니다. 알갱이들은 잠시 조용한 적막을 깨고 안도의 숨을 돌리며 이제 침입자들이 물러간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굼벵이는 돌아가긴 했지만 집요한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진짜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으나 커다란 부상 없이 사태를 수습했으니 그다지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키고 제법 여유를 찾고 있습니다. 잠깐시간 흐르고 나뭇잎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침입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굼벵이는 재차 몸을 털고 일어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덩치가 크고 머리를 반듯하게 자른 걸로 봐서 뒷골목식구들 데리고 작업깨나 한 모습들이 어깨 힘을 한껏 주고 팔자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굼벵이를 쳐다보고 너는 먹지도 못하는 밥에 공연히 물 말지 말고 서둘러 밥그릇을 내 놓으라고 큰소리칩니다.
굼벵이는 가만히 내려다보며 여기는 내구역이니 몰상식하게 타동네에 와서 밥그릇타령하지 말라고 한 후 공연히 먹물 터지고 강냉이 부서지기 전에 찌그러지라고 의젓하게 얘기합니다. 마주보던 일행 중 하나가 정말 그러다 다치면 만수무강에 지장 있을 뿐더러 하마터면 저승 문 열게 되니 조심성을 갖고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는 일이 엎어진 놈 밟고 일어선 놈 재끼고 위에 있는 놈 걷어내는 것인데 손수 시범을 보여주기 전에 상부상조하는 지혜로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보자고 아주 싸가지 없는 말을 합니다. 그 중 참을성 없는 무리가 날아 차기와 돌려차기를 병행하며 달려드는데 굼벵이는 간단하게 팔을 흔들어 걷어내고 두툼한 배로 밀어치기를 하며 숭숭 뚫린 숨구멍으로 독한기운과 바람을 내뿜기 시작합니다. 주춤대는 무리에게는 수액을 뿜어대며 여러 개의 팔다리로 목을 때리고 허리를 내지르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춤을 춥니다. 나뭇잎은 더 높은 소리로 응원 겸 욕지거리를 퍼부어대기 시작합니다. 아수라장이 되어 결전이 펼쳐지는 순간 늑대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굴 속 환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애지중지 보살피던 낙엽둥지에서 소란이 일고 있음을 눈치 챈 늑대는 황급히 달려가 주위를 살피던 중 흩어진 낙엽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막힌 상황을 확인하고 눈 꼬리가 험상궂게 올라갑니다. 서둘러 낙엽을 걷어내고 악다구니 쓰며 몰려드는 개미떼를 사정없이 앞발로 내리칩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개미군단은 급하게 정차한 저승열차를 집어타고 하늘로 튀어 오르는데 아직 승차권을 구하지 못한 승객을 배려하여 뒷발로 후려치고 꼬리로 휩쓸어 모아 놓은 후 한 입에 덥석 물어 굴 밖에 있는 낭떠러지종착역을 향해 달립니다. 불시에 찾아온 손님에게 저승여행을 시켜준 늑대는 예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차표를 건네지 않고 무심히 돌아서는 고독한 짐승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굴속으로 돌아온 늑대는 주위 알갱이들을 소중하게 모아 흙과 낙엽으로 단장하고 군데군데 상처가 생긴 굼벵이를 내려다보며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알갱이들은 굼벵이의 숨결을 확인합니다.
알갱이들은 생사가 갈리는 처참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고귀한 생명을 안고 거친 호흡으로 맞서던 굼벵이의 활약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깊은 감동과 복받치는 흥분을 간직한 체 은혜의 조용한 호흡을 이어갑니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굼벵이는 만감이 교차하는 서로의분위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용한 음성으로 얘기를 시작합니다. 여러 이웃들은 지금경우가 무척 기쁘고 곤혹스럽기도 하겠지만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자신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에서 이웃불행이 곧 나의불행이 될 수 있으니 모두는 협력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특히 먹이사슬에 얽혀있는 곤충 사에서 잘나고 못남을 가릴 필요 없으며 자연이 정해준 흐름 따라 지체 없이 살다 때가되면 기꺼이 떠나는 비움의 자세를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들이닥친 개미들은 배짱이가 허구한 날 놀고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데 배짱이가 만들어낸 자연융합과 여름밤교향곡의 우수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둔함이라고 합니다. 생존경쟁 울타리 안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급하게 살아간다고 하지만 결코 먹는 것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며 자연의 윤회라는 밑받침에는 사랑과 배려, 기다리고 떠나가는 질서가 버티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굴 밖은 초록이 점차 물들고 있으며 늑대는 굴에 들어오는 회 수가 부쩍 줄었습니다. 예전 모습은 오간데 없고 부리부리한 눈과 탄탄한 체력으로 거침없이 산천을 휘돌아 치기 시작합니다. 알갱이들도 몸이 무거워지고 덩치가 커져서 이젠 답답한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슬부슬 보슬비가 내리는 초여름 밤 늑대는 또 한 건의 횡재수를 노리고 굴속에 젖어드는 달빛을 따라 숲 속 이곳저곳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구석에 있던 알갱이들은 힘겹게 껍질을 깨뜨리고 단촐 한 차림새로 줄이어 서서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며 기뻐합니다. 굼벵이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흙으로 둥우리를 만들어 놓은 후 커다란 몸을 비집고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알갱이들은 함께 숲으로 가자고 아우성치지만 아랑곳 않고 들어 누운 체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녹음 짙은 숲속에 한 무리의 곤충이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어디선가 띄엄띄엄 높은 곡조로 생명탄생을 기뻐하는 노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강하고 짧은 악보가 귀에 익지만 도통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두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궁금증이 발동하여 주위를 살피는데 나무줄기에 숨어 호흡을 이어가는 곤충은 다름 아닌 매미였습니다. 이별의 마지막 장에서 토굴을 짓고 은둔하며 배움과 깨달음을 얻은 곤충계의 고결한 선비는 은빛의 도포를 휘날리며 특유의 사설을 한참 읊어대는 중입니다. 그 옆에서 문제를 풀고 답을 적어나가는 이웃은 짙푸른 녹음 가득한 이파리였습니다.
기다리며 살아가는 소리 이 쪽 저 쪽에서 들릴 때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숨결을 알아차리곤 해
모두 그렇게 한 가지 씩 고운 정을 그리지
하늘 가로질러 기울어 질 때 걱정도 되지만
분명히 딛고 일어선다는 것을 알아
반듯하게 서서 욕심 없이 산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없다지만 누구라도 할 수 있어
모두 잊히고 영원히 살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서로 배려하라는 한정 된 시간의 약속이지.
*원고지 78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