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울음 이야기 - 구구타와 까께꼬오 사이
- 산스크리트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꼬꼬댁(구구타:矩矩咤)과
伊勢神宮 천궁제사 의식의 닭울음 '까께꼬오' 사이 -
"꼬꼬닭아 우지마라 우리 아기 잘도 잔다"라는 우리의 전통 자장가에 나오는 '꼬꼬닭'은 산스크리트어에서 kukuta이었고 그것은 신라를 의미하였다. 오늘의 신화이야기는 을유년의 닭의 해를 맞이하여 닭울음 소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닭이라고 하면 단연 신라의 닭 이미지가 가장 강하다. "암탉이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려한 것 같이.."라는 비유를 한 바이블의 닭에 대한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 비교를 넘어 닭이 가졌던 고대 사회의 거룩한 숭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미 마복자 문화와 예수탄생의 과정에 대하여 본 시리즈글의 앞선 글들 가운데 <예수는 신라의 마복자였을까>라는 관련 글들에서 신라 화랑도와 중동의 기독교문화와의 연결 개연성에 대해서 논한 바가 있다.
1. 바이블의 암탉과 병아리 비유와 신라 계룡과의 관련
바이블에는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동물 이야기가 별로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약전서에 닭에 대한 표현은 가히 신라인들이 그 많은 동물들 중에 닭을 중요하게 국호로까지 내세운 것 만큼 이색적으로 등장하는 일치성이 있다.
닭울음은 신라인들에게서 나라 이름까지 계림(鷄林)이라 했던만큼 해뜨는 새벽의 의미로 어두운 밤을 물리치는 의미를 지녔다. 바이블에서도 밤은 어둠의 세력으로 보았고 해뜨는 새벽은 깨우침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깨우침은 닭울음 소리와 함께 표현되고 있다.
예수가 붙들려가기 전 베드로를 향하여 "닭울기 전에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했고 곧 베드로에게 다가가 "네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거짓말로 피하기를 세번 한 뒤에 닭이 우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깨우치는 내용은 닭이 가지는 의미가 대단히 종교적인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다른 동물들보다 닭에 대한 의미부여는 신라인들의 그것만큼 따로 두드러지는 면이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장면이다. 닭이 울고 베드로가 깨우치는 것과 닭이 울고 김알지가 발견되는 것은 그 어떤 숨은 고리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바이블의 닭울음을 단순한 새벽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우연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예수의 또다른 비유에서도 닭은 더욱 의미있는 신성한 그 무엇으로 나온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나래 아래 병아리를 품으로 했듯이 내가 너희를 얼마나 품으려 했더냐"라는 예수의 표현은 예수 자신을 암탉으로 비유하기까지 했다.
신라와 중동의 바이블 문화는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이 단순한 닭울음에 그치지 않는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마복자 탄생의 과정은 사가랴 집안에 3개월간 머문 마리아와 예수 탄생의 과정이 그대로 일치한다. 낭두가 요셉이라면 산중의 대제사장 사가랴 집으로 들어가 3개월간 머문 마리아는 상랑이 머무는 선문에 들어가 몇달간 머문 낭두의 처에 해당된다.
이때 낭두의 처들은 꿩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꿩 대신에 닭"이라고 하듯이 예수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라고 한 비유는 어쩌면 마복자 문화에서 상랑이 낭두 가장을 상징적 잉태를 시키는 은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화랑세기>의 그 부분을 다시 옮겨보자.
신라에서는 낭두의 처들이 임신하면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
상랑·상선 등이 머무는 곳)에 들어가 몇날 또는 몇달 간 머물렀다.
이들은 상랑이나 상선의 총애를 얻으면 물러나곤 했는데, 그 때
남편들은 예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를 ‘사함’이라 하였다.
마리아가 잉태한 뒤 산중 사가랴 집안에 들어가 몇달간 머문 것, 그 '처녀잉태'를 기꺼이 받아들인 요셉의 태도는 '사함'으로서 <화랑세기>의 마복자 문화와 유사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중동의 카스트 문화에서 본다면 요셉은 마굿간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 낮은 계급이었다면 대제사장 사가랴 집안은 화랑도 제도에서 상선만큼 높은 계급이다. 낭두는 자신의 자식이 한급 높은 계급인 마복자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산중의 상선의 거처에 임신한 자신의 처를 몇달간 머물게 해야 했다. 옛부터 산중 제사장의 거처에 자식을 파는 행위(구약성서 사무엘의 어린 시절 묘사 등에 보임)와 더불어 임신한 여자가 선문에 들어가 머무는 과정은 바이블의 마리아 잉태와 그 행보에 일치하는 점이 많다.
고대 해양 실크로드가 홍해와 낙동강이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라에 들어온 인도의 불교문화만큼 화랑도의 마복자 문화는 유대민족과 신라인들 사이에 함께 숨쉬고 있었던 문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라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고 하였다. 신국에서 불국(佛國)으로 전이된 신라의 문화적 변화는 더 주목받아야 한다. 신라의 신국시대의 내용을 많이 연구할수록 일본의 신궁과 신사를 중심한 신도사상과의 연관을 보다 깊이 파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논했지만 그 신국에는 ‘신국의 도(神國道)’라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신국사상은 고대 초기 기독교 사상의 하나인 성 어거스틴의 신국사상과 그 어떤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의 포석정이 박혁거세 시조를 모시는 신궁으로서의 포석사였다는 것과 거기에서 행한 길례의식이 바이블의 할례의식과 관련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앞선 마복자에 관한 글에서 상세하게 다루어 여기에서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마복자를 낳는 선문의 신사는 '신선의 피'를 이어받는 의미도 지니면서 마복자가 태어난 뒤에도 다시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선문은 신의 은총으로 태어난 아기를 하늘에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기도 했다. 예수가 태어나서 성전에 데려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화랑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복자가 태어난지 석 달이 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삼았다. 이를 ‘세함’이라고 하였고, 다시 몇 날이나 몇 달
만에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을 하여 맞이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총애'란 '은총'으로 볼 수 있고, '세함'은 '사함' 뒤에 다시 받는 상선의 축복으로 볼 수 있다. 이 <화랑세기>의 이야기는 신약성서 누가복음 2장 22-40절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산중에서 제사장 집에 석달 머물러 은총을 받고 물러나와 예수를 출산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으로 가서 시므온이라는 나이 든 인물을 만나는 이야기에 포개진다. 태어난 예수를 신이 계시는 성전에 데려가서 신의 총애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신라의 계룡과 바이블의 닭 사상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도의 마복자 문화 속에서 그 어딘가가 조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신라문화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모신 성모사(聖母祠)에서부터 박혁거세 부부의 묘를 쓸 때 나타난 뱀을 포함하여 아담 이브의 '시조묘'에 해당하는 에덴동산과 연관하여 기독교 문화에 연결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 '꼬꼬댁 꼬꼬'도 신라와 관련하여 나온 역사적인 닭울음이라면 계림숲의 닭만이 아니라 닭울음 소리 표현 그 자체도 이미 신라의 닭 울음에 깊이 연관한 것에서 신라의 닭에 대한 의식은 예사롭지 않은 '계룡'의 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신성한 새로 숭배된 닭
인도의 불전에 나오는 닭은 상서로운 새로서 상반신은 보살형 불신이고 하반신은 계신(鷄神)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라와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던 발해의 닭에 대한 중국의 기록에도 닭은 신성하다. <산해경>에 "발해에 새가 있는데 닭과 비슷하나 오채(靑,百,赤,黑,黃)의 새가 있어 봉황(凰)이라 부른다. 모의 무늬를 德이라 하고 깃의 무늬를 義라하며 등의 무늬를 禮 가슴의 무늬를 仁 배의 무늬를 臣이라 하였다. 위와 같은 새가 나타나면 천하 태평 안녕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봉황은 '계룡'의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닭 그림이 봉황이냐 닭이냐고 혼동하는 것도 닭이 상상의 봉황을 대신하는 실제의 동물이기 때문이며 그만큼 신성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의 계림 이후 고려 때 기록을 보면 수탉이 새벽에 때를 알리는 울음은 시보용으로 애용되었다. 당시 왕궁에서 '일명계'라 하여 자시(자정)에 우는 닭 축시(밤 2시)에 우는 닭 인시(새벽 4시)에 우는 닭을 함께 길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신라시대의 닭에 대한 문화가 생활화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년월일시에 대한 칭호는 12간지의 동물들의 날이었다. 그 12지간지 중에서 열번째에 해당하는 해가 닭의 해(유년)가 된다. 열번째이니 10진법으로 보면 닭은 중요한 맺음 동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닭의 날, 이튿날을 개의 날, 사흘날을 돼지, 닷샛날을 소, 엿샛날을 말, 이렛날을 사람(원숭이), 여드렛날을 곡식의 날로 쳐왔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닭은 새벽의 의미 뿐 아니라 한 해의 시작의 의미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통 혼례식에서 결혼의 시작으로 암탉과 수탉을 청-홍보자기에 각각 싸서 놓고 식을 올렸다든지 폐백 때도 밤 또는 닭을 던져준 것도 새출발의 신성한 닭에 대한 의미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3. '꼬꼬댁 꼬꼬'와 '까께꼬오' 사이
신라는 고대 인도에서나 일본에서도 닭의 나라로 받아들여졌다. 대구의 옛 명칭인 달구벌의 그 달이 산스크리트어의 닭인 tak에서 왔고(지금도 접두사가 있으면 리을음이 탈락하면서 수탁 암탁 등의 탁이다), 달구벌의 '구'는 矩矩咤(구구타)의 '구'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달구벌의 벌은 벌판이고 달구는 tak-ku(달구)에서 왔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신화 이야기> 시리즈 앞선 글들에서 일본 천황가의 제사 전통과 깊이 연관이 있는 일본 신궁 특히 이세신궁과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신궁에 대한 연관성을 설명했다. 박혁거세의 거세(居世)는 그대로 이세신궁의 그 이세(伊勢)의 발음과 같은 발음인 '이세(居世)'로 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날도 그렇듯이 일본의 신사 신궁 등 한반도와 관련된 명칭들을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한반도 유래를 숨기기 위함인지 한자를 뒤집어 다른 한자로 바꾼 경우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세신궁의 제사 의식에서 중요한 과정의 하나가 이른바 신계(神鷄)의 울음이다. 천궁제사에서 이세신궁의 의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세신궁의 신계가 우는 소리를 흉내내어 "까께꼬오 까께꼬오 까께꼬오" 세번 소리내어 닭울음 소리를 낸다. 이것을 게이메이산세이(鷄鳴三聲)라고 하는데 '까께꼬오'는 물론 우리나라의 닭울음 표현인 '꼭끼오'의 꼭'의 받침을 늘어트린 일본식 표현의 울음이다.
이세신궁에서 전통적으로 키워 온 신계는 <古事記>와 <日本書紀>에서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하늘의 바위에 숨어 있을 때(이것은 태양이 밤을 지나 닭이 울면 새벽으로 나오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우는 "도꼬요 노 나가나끼도리(常世の長鳴鳥)"라는 새로 신궁의 새로 숭앙되어 왔다. 신라신궁에서 건너간 이러한 이세신궁의 제사에서 닭울음 소리는 그대로 신라의 박혁거세 신궁과 알영부인의 계룡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김알지의 닭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계룡입술에서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천황이 머무는 오늘날의 황거(皇居)는 닭울음 소리 '꼬끼오(꼬꾜)'와 유사한 '꾜꼬'로 발음된다.
3세기 중엽의 三國志魏志東夷傳韓傳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긴 꼬리를 가진 닭이 있다고 했다. 그 꼬리의 길이는 무려 5尺을 넘는다고 했다(出細尾鷄其尾長五尺餘). 이러한 긴 꼬리 닭을 세미계(細尾鷄)라고 하는데 신라의 닭은 이미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준 이른바 계림(鷄林)의 나라라 했을 만하다. 신라4대의 탈해왕(脫該王) 9년(서기 64년)에 金閼智(김알지)가 태어날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고 하여 신라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지금도 경주에 가면 계림 숲이 있다. 왜 닭인가. 해돋는 동쪽나라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나 그리스에서는 닭을 태양신의 누이동생으로 숭배하였다고 했을만큼 닭은 태양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춘분 때의 해돋는 방향으로 배치된 부석사 대웅전 본존불이나 석굴암의 방향은 신라인들의 태양사상에 깊이 연관하며 그것이 그대로 해돋는 방향을 따라 가면 감은사를 거쳐 문무왕의 해중릉에 연결된다. 그방향은 다시 일본열도의 주요 신사들을 거쳐 이세신궁의 방향에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70년대말 일본 NHK 방송에서 방송 다큐멘타리로 방영된 바도 있을 정도다.
석굴암의 본존불 정면으로 나 있는 채광창은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이기 이전에 태양사상과 고대 신라불교의 접합이라는 미학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주장한다.
신라말 가운데는 순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이두형 이름들이 많다. 이름만 들어도 거친 느낌이 드는 '터프가이' '거칠부'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지철로 왕'은 '저절로 왕'이 되었다는 순 우리말과 그 어떤 연관성은 없을까. 더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경주 남산에서 도를 닦은 노힐부득 달달박박은 각각 부드러운 수도자 '노힐부들'의 노힐부득과 '딱딱하고 빡빡한' 달달박박'이 그러한 이름으로 '아무개' 처럼 사용되었지는 않았을까. 아직 고대 신라인들의 한자표기 이름에 대한 연구는 별로 깊이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미 '박혁거세'가 '뻐꾹새'의 음차일 수도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뻐꾹새가 신라 신궁 즉 '국궁'이었을 가능성은 뻐꾹새를 오늘날까지 경상도에서는 '국궁새'라고 하는데서도 유추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국궁새란 신라 신궁의 새 즉 나라의 신궁의 새라는 의미에서 국궁(國宮)새로 부른 것이라 보기 때문이며, 다른 지방에서는 신라가 망하자 그냥 박혁거세로만 남아진 것이어서 '뻐꾹새'로만 부르고 경상도에서는 지금까지 '국꿍새(국궁새)'로 불려왔다고 생각한다.
고대 신라말에는 이두나 구결의 표현 이상 재미있는 우리말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닭울음 소리 '꼬꼬댁 꼬꼬'는 산스크리트어 꼬꼬댁(矩矩咤) 꼬꼬(矩矩)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해 준다.
이러한 표현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신라를 칭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는 것은 신라는 '꼬꼬댁의 나라' 즉 닭의 나라라는 것이 일찍부터 인정되어 왔던 셈이다. '계림'과 '달구벌'은 그대로 이미 닭의 나라 신라의 국호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닭을 불상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고대 인도에서 보자면 닭 울음 '꼬꼬댁 꼬꼬'는 또 하나의 신라의 이미지를 가진 계룡의 나라 국호였던 셈이다. 이세신궁의 제사에서 신계의 울음 "까께꼬오"는 이러한 구구타의 울음이 신라라는 의미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4.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만남은 뻐꾹새와 꼬끼오의 합류
박혁거세 신궁이 일본의 신궁에 영향을 미치고 박혁거세 신사는 19세기까지 일본에 2천 7백 개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이세신궁의 제사의식에 동원되는 "까께꼬오" 이상의 깊은 역사적 연원이 스며 있을 수 있다.
신라는 김알지의 닭울음 소리 이전에 이미 박혁거세 부인의 태생에서부터 닭부리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신라의 건국과 닭과의 관계는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배필인 알영 부인은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고 그 태어났을 때 알영의 입에 닭부리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알천에 씻었더니 닭부리가 떨어져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신라시조는 이미 닭(鷄龍)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꼭끼요(또는 꼬끼요)" 외에도 "꼬꼬댁 꼬꼬"란 울음 표현은 지금도 닭울음 소리에서 표현되는 소리다. '꼬꼬댁 꼬꼬'가 신라 때 꼬꼬(矩矩)였다 할 때, 가수 이름 '컨츄리 꼬꼬'의 꼬꼬는 한자가 있었던 셈이다.
"꼬끼요"가 수탉의 울음이라면 "꼬꼬댁 꼭꼭"은 암탉의 울음이다. 특히 암탉이 달걀을 낳은 후에 우는 울음이 "꼬꼬댁 꼬꼬"이다. 이 꼬꼬댁 꼬꼬는 구구타(kukuta) 구구(kuku)가 산스크리트어에 나오는 말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시골에서 닭을 부를 때 지금도 '구구!'라고 부르는 것은 '구구타'(구구닭 = 꼬꼬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6년 홍이섭은 Sanskrit English Dictionary의 해석을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닭을 인도어로 Kukuta에서 기원하였음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우리말 닭(鷄)의 발음이 산스트리트어의 tak에 그 어떤 맥락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홍이섭의 kukuta 해석에 앞서 1942년 최한기(崔漢綺)는 인도인이 우리나라를 "矩矩咤(구구타) 예設羅"(kukuta israra)라고 부르고 이 나라는 닭을 경배하여 신과 같이 존귀하게 여긴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구타'는 한자 읽는 발음이지 실제는 '꼬꼬닭'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인도에서 kukuta israra와 함께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라고 하였다는 것도 같은 산스크리트어에서 구구타=계(鷄), 에스바라(esvara = 貴)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矩矩咤(kukuta)란 닭을 뜻하고 예設羅(israra)는 貴하다는 뜻으로 신라를 귀한 닭(鷄貴)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까께꼬오'가 일본 신궁의 신화에서 수탉울음으로 새벽을 알리는 소리로 이어져 왔다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표현하는 신라의 의미로서의 矩矩咤(kukuta)는 분명 암탉의 울음과 관련한다. 우리말 표현에서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우는 소리로 '꼬꼬댁 꼬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뻐꾹새는 '음부(저승)의 새'로 받아들인 반면에 닭은 새벽을 알리는 신궁의 신계(神鷄)로 받아들였다. 닭은 해를 불러 일으키는 새다. 日本이란 말은 새벽을 알리는 닭이 없이는 해석되지 않는 국명이다. 신국(神國)이란 신의 나라를 말함이며 사후의 나라이면서도 신으로 모시는 신궁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말하는 뻐꾹새=음부의 나라 라는 의미는 신으로 모시느 신궁의 의미에 연결된다. 닭의 나라는 그만큼 현실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에 음택의 신과 양택의 신이 모두 하나로 한 시에 태어난 박혁거세외 알영부인(계룡부인이라 할만하다)의 만남은 그들의 태어난 시기가 같은 것만큼 뻐꾹새와 닭의 만남이 신의 나라와 신국의 나라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혁거세는 뻐꾹새의 음차라면 알영부인은 닭에 연관하여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만남은 뻐꾹새와 닭의 조합이다. 알영이란 어쩌면 알과 같은 해를 의미하지는 않았을까? 朴赫居世(뻐꾹새)와 알영부인의 이미지를 가지는 矩矩咤(꼬꼬댁:구구타)는 닭의 나라 계림이 이미 고대 아시아에서 신라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주먹시 풍경방에서 <2005 乙酉年 꼬끼오 꼭25!>라는 제목으로 신년줌시수필을 올렸지만, 닭의 해 을유년(乙酉年)은 어쩌면 '까께꼬우'로 우는 일본의 욘사마의 한류 열풍과 함께 새로운 닭의 긴 울음으로 새로운 해를 뜨게 하지 않을까. 북미주를 카버하는 재팬계 방송이 1월 15일부터 <겨울연가>를 방영하는 것과 더불어 이집트에서 겨울연가가 아랍어권 전체에 방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다시한번 동쪽 '구구타'의 나라의 닭이 '꼬꼬댁' 우는 인도와 서역 끝까지 울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구타와 까께꼬우는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은 을유년의 닭울음 소리로 들려온다. 오두방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