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가 일반화 되지 않던 시절에 누나들은 종종 봉숭아물을 들여 주었습니다.
그땐 뭣 모르고 손톱을 덥석 맡겼다가 빨간 손톱 때문에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기
일쑤였는데 왜 그랬는지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는 해마다 새끼 손가락 한 개라도
꼭 봉숭아물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
봉숭아물을 들이는 이유도 딱히 없었는데 오행에서는 적색이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있었고 속설이긴 하지만 소녀들이 봉숭아물을 들이고 첫눈이 올 때까지
빨강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파우스트와 성경은 여러모로 닮은꼴이 많아요. 하나님께서 까닭모를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달게 하려는데 있는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난 가운데서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버티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넘어지고 자빠질 듯 위태위태해도 끝끝내 버티다가
손톱에 아름답게 부활하는 봉숭아처럼 말입니다.
-
어제 골목길 담벼락 밑에서 잘도 견딘 봉숭아 이파리를 정성껏 땄습니다.
분홍, 주황 그리고 흰색 꽃잎조차 한 움큼, 이윽고 긴 시간 냉장고 귀퉁이에 짱
박힌 백분을 꺼내 꽃 속에 파묻고 망치로 손 방아를 찌었습니다.
-
언니가 수련회 가는 날 유치원도 방학을 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위층에 맡겨진
예주가 안쓰러워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딸기 아빠를 욕하지 마시라. 조심조심
부드러운 비닐이 딸네미의 흰 손톱에 씌워질 때마다 무척이나 오지고 기쁩니다.
"예주야, 느낌이 어때" "응, 손톱이 차거 워"
2006.8.1.mon.헤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