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전라 좌수사가 되다
1592년 정월 초하루, 새벽
맑고 찬 겨울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든다.
‘아직 동이 틀 시각은 아닌데….’
이순신은 몸을 뒤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인기척은 방 안까지 가득하다. 방금 실내로 들어온 냉기는 두런거리는 저 음성에 실려 문틈을 헤집었나 보다.
간단히 복장을 갖춘 이순신이 문 밖을 향해 묻는다.
“누가 왔느냐?”
그렇게 묻지만, 진작부터 이순신의 짐작에는 짚이는 얼굴들이 있다. 오늘은 설날이다. 벌써 두 해 연속 정월 초하루에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
어머니는 충청도 아산에 계시는 반면 이순신은 남쪽 바닷가 여수에서 지내고 있는 탓이다. 이순신은 대략 1년 전인 1591년 2월 13일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줄곧 전라 좌수영 관할 구역 내에 머물러 왔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에 보임되던 무렵, 정3품 수사水使는 조선 주사舟師(수군)에서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경상 좌 ‧ 우수사, 전라 좌 ‧ 우수사, 충청 수사 중 한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수사들을 총지휘하는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 1년 이상 해전을 겪고 나서야 수사들이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고, 그 결과 삼도 수사 모두를 통할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신설했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는 이순신이 1593년 8월 15일 취임했다.
전라 좌수사가 되기 직전 이순신의 직책은 종3품 가리포(완도) 첨사였다. 가리포 첨사 전에는 종4품 진도 군수였다. 그 전에는 종6품 정읍 현감이었다. 정읍 현감이 된 것은 1589년 12월이었는데, 그 무렵 정읍은 고부에 속한 작은 마을이다가 처음 현으로 승격되었다. 즉 이순신은 초대 정읍 현감이었다.
정읍 현감으로 14개월째 재직하던 이순신이 진도 군수로 발령을 받은 것은 작년(1591년) 2월이었다. 종6품에서 종4품으로 올랐으니 정6품, 종5품, 정5품의 세 단계를 확 뛰어넘은, 그야말로 파격 승진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진도 군수로 부임하지 못했다. 임지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는 중 가리포 첨사로 가라는 새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리포 첨사는 종3품이니 이번에도 종4품과 정4품의 두 단계를 단숨에 추월한 인사였다.
며칠 뒤, 이순신은 또 다른 교서를 받았다. 정3품 전라 좌수사로 가라는 왕명이었다. 종6품 현감이던 이순신이 2월 한 달 동안 세 차례나 실시된 인사 끝에 정6품, 종5품, 정5품, 종4품, 정4품, 종3품의 여섯 단계를 훌쩍 지나쳐 정3품 수사로 올라선 것이다.
본래 전라 좌수사에는 원균이 선임됐었다. 1월 29일 선조가 원균을 수사로 임명하자 사간원(현 감사원에 해당)은 즉각 재고를 요구했다.
“원균은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근무 평가에서 아주 나쁜 점수를 받았습니다. 불과 여섯 달 전의 일입니다. 원균에게는 다른 벼슬을 주고 전라 좌수사에는 출중한 군사 지혜를 갖춘 젊은 인물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격려와 징계가 목적인 근무 평가의 의의를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결국 선조는 2월 4일 사간원에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원균은 나흘 만에 낙마했고, 다시 유극량이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또 나흘 만인 2월 8일,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전라 좌수영은 직접 적과 마주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방어가 매우 긴요한 곳입니다. 수사를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유극량은 쓸 만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겸손해서 부하 장수들은 물론 무뢰배들과도 ‘너, 나’ 하고 지내는 통에 체통이 문란하고 명령이 서지 않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대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인물로 바꾸소서.”
뜻밖에도 선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벌써 바꿨소.”
원균을 임명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선조다. 그래서 유극량을 대체 인물로 내놓은 뒤에는 세간의 평가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시끄러웠다. 선조는 사헌부가 들고 일어나기 이전에 진작 ‘다른 인물로 교체해야겠구나.’ 하고 결심했다. ‘벌써 바꿨소.’라는 답변은 선조의 그런 속마음이 담긴 표현이었다. 다만 선조는 아직 유극량의 후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까지 확정한 바는 아니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신은… 이순신이 적임자가 아닐까 여겨지옵니다만….”
선조가 눈을 크게 뜨면서 반문했다.
“이순신?”
“전하께서도 이순신이라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렇소. 병조 정랑 서익과 마찰을 빚어 해미 읍성으로 내쫓겼던 사람이란 것부터 기억이 나
오.”
1579년 10월에 있었던 일이니 벌써 12년이나 흘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