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현 우에다3 - 난세에 가문보전을 위해 적이된 사나다 형제 유키무라와 노부시게!
2019년 4월 13일 쿠사츠온센 草津溫泉(초진온천)에서 버스를 타고 가루이자와 かるいざわ
軽井沢 (경정택) 에 도착해서 구가루이자와 (旧軽井沢) 와 쿠모바이케 호수 를
구경하고는 신칸센으로 나가노현 우에다(上田) 에 도착해 기차역 광장에서 사나다
(真田 진전) 가문의 상징인 육문전(六文銭) 과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동상 을 봅니다!
“전국무쌍” 시리즈에서 주인공 사나다 마루 인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시 도쿠가와
씨로 부터 우에다성을 사수해 사나다 3대 라 불리는데, 시조인 사나다 유키타카
(真田幸隆) 는 가이국(야마나시현) 의 다케다 신겐 밑에서 활약하였으나 특히
신겐이 함락시키지 못하던 토이시성을 지략으로 낙성 시킨 것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는 운노 무네쓰나 (海野棟綱)의 아들이니 사나다(真田 진전) 라는 성은 유키타카 때에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3남 사나다 마사유키 (真田昌幸) 는 센고쿠(戰國 전국)
다이묘로 우에스기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차례로 주군으로
섬기는 가운데...... 힘을 길러 지략으로 도쿠가와의 대군을 격퇴 시킨건 특히 유명 합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대군의 공격을 당한 제2차 우에다
합전에서 기적적으로 방어에 성공 했으나 서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지라 아들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 와 함께 고야산과 쿠도산(와카야마)에 유배당해 사망 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 (真田幸村 노부시게)는 마사유키의 차남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섬기
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신이 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에 가담하여
여기 우에다성에서 농성 하며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성공적으로 방어 하니
히데타다군 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했으니 아버지로 부터 죽을뻔 했습니다.
유키무라 는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 를 치는
오사카 겨울 전투 가 일어나자 히데요리 요청에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며 성 외곽에
사나다성 을 지어 도쿠가와 군과 격전을 벌였고 이듬해 여름 전투 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숨도 노렸으나 일보 직전에 중과부적 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사나다 유키무라 는 우에스기와 히데요시 밑에서 인질 생활을 보내야 했는데... 하지만
히데요시 밑에서는 인질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를 섬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으니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적대적인 관계 로 유명합니다.
마사유키의 차남 사나다 유키무라 는 1615년 초 벌어진 오사카성 겨울전투에서 오사카성
바깥에 견고한 사나다 성채 를 건설함으로써 이에야스군을 괴롭히는 대활약 을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인 요도도노(요도기미) 는 유키무라등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의 속임수에 걸려 화평조건으로 성의 해자를 메우는데 동의합니다.
성의 해자가 메워지자 이에야스는 약속을 저버리고 재차 공격해온 것이 1615년 오사카성
여름 전투 인데... 사나다 유키무라 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도쿠가와군을
공격해 이에야스가 절망한 나머지 자결을 하려고 생각할 정도로 강하게 밀어
붙였으나........ 도쿠가와군의 원군 이 도착하니 중과부적으로 후퇴하다가 전사 했습니다.
유키무라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 (真田信之)는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장남으로 아버지 및
동생과는 반대로 사나다 가문을 대표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협력 하였으니 끝까지
이에야스와 대결하다가 전사한 동생 사나다 유키무라 와는 정 반대의 인생 을 살았습니다.
노부유키 는 다케다 가문에 인질 생활중 1582년 다케다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멸망한후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사유키에게 우에다성
을 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이에 격분한 도쿠가와 군이 쳐들어오자
노부유키는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군과 싸워서 격퇴하니 제1차 우에다 성 전투 입니다.
그 후 마사유키 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신하가 되었는데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589년 이에야스와 화친을 맺고 이에야스 휘하의 가신이 되었으니 이에야스는 장남
노부유키의 재능 을 높이 평가해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인 혼다 다다카쓰 (本多忠勝)
의 딸인 이나히메(稲姫)를 자신의 장녀로 삼은 뒤에 노부유키에게 시집 을 보냈습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을 토벌 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고.....
노부유키는 오다와라 정벌에서 공을 세워 누마타성의 성주 가 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부유키는 침략군의 본영이 있던 규슈의 나고야성 에
갔는데....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권력 다툼 이 일어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가 거병하여 도쿠가와를 타도하자는 격문 을 보내자 사나다 가문도 선택
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으니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는 서군 에 가세했지만
장남 노부유키는 이에야스의 동군 에 참가했으니,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군
에 소속되어 제2차 우에다성 전투에 참가하여 아버지 및 동생을 공격하는데 앞장 섭니다!
마사유키와 아들 유키무라 가 이끄는 2천의 사나다군 을 상대로 3만 8천의 히데타다군
은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
기일을 맞추지 못하여 결전이 끝난 후에야 도착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노부유키는 아버지 마사유키의 영지였던 우에다와 누마타의 9만 5천석을 계승 하였습니다.
노부유키 는 서군에 속해 있었던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의 구명을 탄원 하여
사형 대신 기이의 구도 산에 유배되는 형벌 로 그쳤으니, 그 대신에 노부유키(信幸)
는 아버지 마사유키(昌幸)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노부유키(信之)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도 활약하여 1622년 13만석의 마쓰시로 로 영지를 옮깁니다.
1656년에 아들 노부마사에게 가독을 넘겨주었지만 1658년에 노부마사가 죽고,
노부마사의 아들인 손자 유키미치가 가독을 계승 하니 노부유키도 이
해에 죽는데 향년 93세라? 마쓰시로번 제6대 번주 유키히로(幸弘) 대에
에도 막부 다이로 이이 나오히데 井伊直幸 의 9남이 사나다 가문에 양자 로 옵니다.
이이 가문에서 온 양자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専) 라고 이름을 바꾸니 사나다
노부유키의 혈통이 끊기기는 했지만... 사나다 가문의 이름은 막부 말 까지
지속되어 사나다 유키모토 (真田幸民, 친부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대에는 메이지
시대 자작(子爵) 가문으로 존속했을 뿐 아니라 후에 백작(伯爵) 가문 으로 격상 됩니다.
동생인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 가 전설로 까지 추앙된 것에 비하면 노부유키 의
존재감은 크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혼란의 센고쿠 시대 말기를 주군인
이에야스와 아버지 마사유키 사이에서 가문을 혼란을 잠재우고, 그 탁월한 정치력
과 생명력으로 '사나다' 라는 이름을 지켜낸 것은 노부유키의 역량 에 의한 것 입니다.
그 공적은 동생 노부시게의 화려한 무용담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니 '정략(政略)으로
가문을 지킨다' 는 점에서 보면, 노부유키는 아버지 마사유키의 피 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동생 유키무라가
일본의 최고 무장 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곧잘 과소평가되곤 하는 인물 입니다.
박물관 을 나와 얕으막한 언덕으로 오르니 니시야구라(西櫓) 가 나오는데 여긴 성 내
에서는 비교적 고지대라 전망이 좋은데 원래 이 니시야구라 아래로는 치쿠마강
의 강물이 흘러 들어와 아마가후치(尼が淵) 라는 천연의 해자 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우에다 전투(上田合戦) 는 시나노국(信濃国)의 우에다성 (上田城, 현 나가노현 우에다 시)과
인접한 산성 주변, 우에다시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간가와(神川) 부근 등을 전장
으로 삼아 사나다 가문(真田氏)과 도쿠가와 가문(徳川氏) 사이에 벌어진 전투의 총칭 입니다.
여기 우에다성 지역에서는 사나다 가문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전투가 두 차례
벌어졌으니.... 덴쇼 13년(1585년) 의 전투를 제 1차 우에다 전투
그리고 게이초 5년(1600년)의 전투를 제 2차 우에다 전투 라 하여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에다는 동 시나노 지이사가타군(小県郡) 에 위치해 우에다성 축성 이전 부터 다케다
(武田)・우에스기(上杉)・호조(北条) 등의 국경으로 불안정한 지역이었는데
사나다 마사유키 (真田昌幸)가 다케다 가문 휘하에서 고즈케국(上野国) 아가쓰마군
누마타를 평정 하고 도쿠가와 휘하에서 지이사가타를 평정한뒤 우에다성을 축성 합니다.
이 전투에서 사나다 마사유키 는 우에다성에서 농성 했기 때문에...... 우에다성 전투
(上田城の戦), 우에다성 공방전(上田城攻防戦) 으로 불리는데 정확하게는 우에다성
뿐만아니라 도이시성(砥石城)과 마리코성(丸子城) 등 우에다 지이사가타에 소재한
산성들도 포함하는 총력전이었으니 우에다 전투(上田合戦) 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제1차 우에다 전투 는 1585년 시나노국(나가노현) 우에다성(上田城)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로 사나다군은 마사유키와 장남 노부유키의 1,200명 이 방어하는 가운데...
공격군은 7천명 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 무장인 도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다다요
등인데 사나다군 30여명이 전사 한 반면에 도쿠가와군은 무려 3,000여명이 전사 했습니다.
제1차 전투는 누마타 를 넘기라는 도쿠가와 가문의 요구를 사나다 가문이 거절한 것인데
사나다 가문은 다케다 가문의 가신에서 시나노(나가노현)의 독립 세력으로 인정 받기
위하여 이름을 알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 라 여긴 사나다 마사유키는 끝까지 양보
하지 않는지라 도쿠가와 가문과 전투를 벌여 격퇴하니 도요토미등에게 이름을 알립니다!
제2차 우에다 전투 는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받드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새로운 패자가 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의 일부로 3,500명 사나다군 은 사나다 마사유키와 차남 사나다 유키무라
(노부시게) 이고 38,000명 도쿠가와군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입니다.
시나노(나가노현)의 다이묘가 대부분 동군에 가세한 상황에서 마사유키와 노부시게가
굳이 서군에 가세한 이유는 마사유키의 다섯째 딸 이 서군의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의 처가인 우다 가문(宇田氏)에 시집 간데다가... 차남 노부시게도
미쓰나리의 친우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 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봅니다.
*** 전쟁을 앞두고 가문 보전을 위해 모인 아버지 마사유키와 노부유키 및 유키무라(노부시게)***
반대로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로 들어간 혼다 다다카쓰
(本多忠勝)의 딸 고마쓰히메(小松姫) 를 부인으로 맞아 동군에 가담하여 우에다성을
공격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군세에 속했는데 이 선택은 다이묘 가문의
가명 존속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서군과 동군 양편으로 나뉘어 가담한 것으로 봅니다?
두 전투 모두 사나다 가문이 성을 방어하는데 성공 했으며 히데타다는 성을 함락하지 못한
데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늦어 참전하지 못했으니 아버지 이에야스가
죽일려고 했는데 이 두 차례의 전투를 통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와 노부유키 그리고
유키무라라는 무장의 이름은“전투에 능한 자(戦巧者)”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에다성을 구경하고 나오면 도로 맞은편에 우에다시 관광회관 이 있는데 1층은 기념품
코너, 2층은 휴식공간 및 관광안내 코너로 꾸며져 있으며 사나다 유키무라와 관련된
촬영 스폿 과 전국무쌍 뿐 아니라 전국 바사라의 유키무라 도 보이는데 한 일족만을
떠 받드는 곳은... 다테 마사무네의 센다이 와 카토 키요마사의 구마모토 가 더 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길을 걸어서 우에다역 上田駅(상전역) 으로 돌아와서는 15시 41분에
신칸센 암사마 新幹線 あさま 호를 타고는 북쪽으로 달려서 불과
12분 만인 15시 53분에 나가노 長野(장야) 현의 주도 인 나가노시 에 도착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