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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19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그가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며, 죄인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제 독서에서 보았던 것을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소란한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무엇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거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실천한 율법과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면 그의 집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발을 닦아 드린 여자는 선행도 공로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많이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남아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죄가 사라지고 나면, 예수님께 보여 드린 그 사랑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라는 말씀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큰 사랑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지 않고,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순전히 인간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사랑하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 지금의 자신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신자들이 자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 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에 상처나 흠결, 과오나 흑역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 그 흠결이나 과오가 너무 깊고 커서 걱정합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내가 과연 주님 나라에 합당하기나 할까?
그런데 요즘 와서 드는 생각,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깊이 아로새겨져 문신처럼 사라지지 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나의 결핍과 약점을 상기시키기에 나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나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인해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 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 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해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많이 용서받아서 많이 사랑한다면, 많이 사랑받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머리로 닦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덜 탕감받은 사람보다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많이 지어서 더 많은 죄를 탕감받아야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바리사이인 시몬은 억울합니다. 사실 모태 신앙인이어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기가 그리 어려운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이 사랑받으려면 많이 용서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이 용서받지 못하면 많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복지법인 들꽃마을 창설자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던 최영배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들꽃마을 후원회 전담)가 2024년 5월 20일 병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 신부는 생전 ‘부랑인의 대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고 40년 가까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몸소 실천했던 ‘천사 같은 사제’였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과 장애인들과 범죄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참아낼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 어떤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천사처럼 사는 분이라 성당에서도 천사란 별명을 지닌 분이신데, 요즘에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자기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사람을 10년 만에 길가에서 보고는 온몸이 마비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은 천사라 다 용서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런 나쁜 마음이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람 모든 마음에 악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과 같아서 그 물병이 쓰러지기만 하면 병 안의 모든 물을 더럽힙니다. 자매님이 천사로 불렸던 것은 지금까지 그 오물이 가라앉아 있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 어느 날 한 남자분이 외도하다가 들켜서 간통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용서해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민 자매가 잠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는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여 욕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자기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는데 이런 창피한 고통을 준다고 빨리 이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교사였는데 어떻게 교사 입에서 그런 말과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고, 남편은 기가 죽어서 계속 무릎을 꿇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눈에는 그 자매가 마귀처럼 보였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신학생 때 직접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도 중 가슴 속에서 수많은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들이 당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죄들이었음을 알고는 5년 동안 밤마다 방에서 울었습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품을 받고 첫 미사 때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셨습니다. 남자 4백 명, 여자 2백 명이 넘는 복역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데 자신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래서 천사처럼 제의를 입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들켜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차이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미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분이 신부님과 함께 울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교만, 성욕, 욕심이라는 세 가지 죄를 누구나 다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고 누구는 터뜨릴 뿐이지, 같은 죄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 용서받읍시다. 나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님께 청합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저도 제가 바리사이였지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한 마디로 무너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한순간이라도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죄입니다.
자녀를 부모만큼 용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모처럼 사랑받기 위해 모든 이를 자녀처럼 용서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4일에 성가대에서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습니다. 합창곡으로 ‘바람의 노래와 다시 살아나신 주’를 준비하였고, 9명의 단원이 독창을 준비하였습니다. 합창이 멋진 화음과 넘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면, 독창은 내면의 깊이와 영혼의 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지휘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잘 따르는 단원들이 만들어낸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였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행성이 빛을 내듯이, 지휘자를 중심으로 9명의 단원이 위로와 용기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그날에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19명의 어린이가 고운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아모르 성가대가 현재의 빛이라면,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은 미래의 빛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가대가 아름다운 노래로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그것 또한 복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뜻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가져오는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승리한 전쟁으로 평화가 지켜지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냉랭하던 여인이 마침내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마음 졸이던 남자에게 복음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이의 울음도 엄마에게는 복음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다가온 제대의 날은 복음입니다. 서류 미비자에게 마침내 주어지는 그린카드는 복음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깨어난 환자의 미소는 가족들에게 복음입니다. 제게도 복음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벽보에 쓰여 있던 저의 이름이 복음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이름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이 복음일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3가지 의미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복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것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야누아리오(Januar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베네벤토(Benevento)
활동연도 : +305년경
같은이름 : 겐나로,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젠나로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미세노(Miseno)의 부제이던 성 소시우스(Sosius)와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야누아리우스는 황급히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는 부제 성 페스투스(Festus)와 함께 체포되어 캄파니아(Campania)의 관리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맹수들에게 던져졌으나 동물들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 일부는 나폴리로 옮겨졌고, 현재 나폴리 대성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굳어진 피가 유리용기 속에 모셔져 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특정 시기에는 딱딱하게 굳은 피가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한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도 그 이유는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인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젠나로(Gennaro)로도 불린다.
성 소시오 (Sosius)
활동년도 : +305년경
신분 : 부제, 순교자
지역 : 미세노(Miseno)
같은 이름 : 소시우스, 쏘시오, 쏘시우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미세노의 부제이던 성 소시우스(또는 소시오)와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야누아리우스는 황급히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는 부제 성 페스투스(Festus)와 함께 체포되어 캄파니아(Campania)의 관리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맹수들에게 던져졌으나 동물들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야누아리우스의 유해 일부는 나폴리로 옮겨졌고, 이곳에는 야누아리우스의 마른 피가 유리병 속에 모셔져 지금까지 18회에 걸쳐 공식적으로 전시되었다. 그런데 그 딱딱하게 굳은 피가 시대에 따라 묽은 피로 변한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도 그 이유가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간주한다.
성 알퐁소 데 오로스코 (Alphonsus de Orozco)
활동년도 : 1500-1591년
신분 : 수도원장, 설교가
지역 :
같은 이름 : 알폰소, 알폰수스, 알퐁수스
16세기 에스파냐 교회에서 가장 엄격하면서도 위대한 신심가로 손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자인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Alfonsus de Orozco, 또는 알퐁소)는 1500년 10월 17일 톨레도(Toledo) 지방의 오로페사(Oropesa)에서 태어났고, 불과 6세 때에 사제가 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는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를 다녔다. 이때 빌라노바(Villanova)의 성 토마스(Thomas, 9월 22일)의 유명한 설교를 듣고 수도생활에 큰 매력을 느껴 22세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서원 후 30년 동안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는 교육과 설교 일에만 전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고해신부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는 4차례나 각기 다른 지방의 장상으로 지냈고, 1554년에는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2년 뒤에는 궁중 설교가로 임명받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즉시 귀족을 상대로 설교하여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세빌라의 원장으로 있을 때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이때 성모님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을 위한 펜으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의 모친께 대한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는 또 장상의 명에 따라 “고백록”을 썼다. 그는 1882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