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비
위치: 석촌동 289-3
면적: 2.849입방메다
규모: 총고5.7 비신고3.95 폭1.4
재료: 받침돌(화강암) 몸돌(대리석).
삼전도 비는 (대 청 황제 공덕비) 혹은 (한의 비)라고 불렀습니다.
받침 돌인 귀수와 머릿돌인 이수는 정교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나 조선시대 중기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비문의 오른쪽은 만주문자 , 왼쪽은 몽골 문자로 그리고 뒷면에는 중국어로 기록되어 당시 글자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비석이 풍화에 약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글자가 알아보기 어려워져 보호조치가 시급한 상황이다. 1982년 삼전도 수난 비 부조물이 조성되면서 삼전도비가 공식화 되었습니다.
인조14년 1636년 청 태종은 10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처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 가 삼전도의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므로서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고 삼전도비가 있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639년에 세워졌으며 내용은 청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와 조선이 부득히 항복한 사실 항복한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물러났다는 청황제(누루하치,홍타이지)의 공적을 기술하고 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짖고 글은 오준이 썼으며 제목은 여이징이 지었다.
조선 전기부터 조공을 받쳐오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조선을 침략하는등 압력을 가하고 관계가 원만치 못하더니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면서 조선을 신하국으로서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하자 양국관계는 단절 그해 12월에 침략하여 인조는 급히 남한 산성으로 피신하여 청군과 대치하였다.
왕족들이 피신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식량이 바닥나 1월 30일 항전을 그치고 항복하게된다. 정묘호란 후 50만이 끌려갔고, 25000명의 환향녀 이야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때 기후적인 조건과 지리적인 조건을 살펴보면,
시기적인 측면을 보면 이렇다.겨울철 압록강과 대동강 한강등이 얼어서 남진 하는데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겨울철인 1월이었다.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당시 인조 임금과 역대왕들은 겨울철 강물이 얼었을 때 북쪽으로 부터의 침략에 항상 노심초사하는 기록들을 볼수 있다. 계절에 의한 양호한 지리적인 조건은 6.25당시 14후퇴의 근세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강물이 녹으면 서로 피해가 예상되어, 항복을 얻어 내고 서둘러 회군 하여야하는 이유와 중국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이 회군을 앞당기게 하였다. 홍타이지의 야심이 숨어있었던 전쟁이었다.
일찍이 이율곡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고 국방을 소홀히 하더니 임진왜란을 맞고 그후 삼전도의 치욕을당하고도 세상일을 깨닫지 못한 조선은 그후 300년도 되지않아 일본에 국권을 잃게 되어 1945년 광복절을 맞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삼전도 비의 수난사를 보며는
1895년 고종은 청일 전쟁과 일련의 사건으로 한강에 매몰 하였다
1909년 한강 물줄기가 바뀌면서 민간인 밭에서 발견되고
1917년 일제에 의해서 다시 세워지고,1913년에 세워 졋다는 설도 있다.
1955년 11월4일치안국장의 요청에 의해 치욕의 비로 여겨 땅에 묻고 여러 설이 있다.
1963년 홍수로 비가 들어나 석촌동에 세워진다
1983년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현재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원 위치 부근인 샤 롯데 앞 서호변으로 옮길 예정이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비 이다.
첫댓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지난번 덕혜옹주 이야기 잘보았읍니다. 좋은 글 부탁드려요.
이렇게 자료를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거예요.
윤 선생님의 반짝 반짝하는 글을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3월 18일 현재 샤 롯데 앞 삼전도비가 옴겨질 장소 즉 송파 대로 변이라 하여야 정확 할듯 좌대가 완성 되었드군요. 헌대 조금은 축소된 느낌이네요. 아직도 치욕의 아품과 부끄러움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인식으로 다가옴은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