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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안동 신도청관계자와 신현수위윈장 이재업 안동상공회의소회장.최종철 영남일보 북부본부장 이하 28등이 전남도청방문하여 경북신도청의 미래를 고민하는자리에서 경북신도청의 명문가를찾아서 내용의 특강을 실시했다
상생발전포럼
예천,안동 경북신도청의 명문가 집성촌을 찾아서
혜명동양학아카데미원장 류 동 학
1.함양박씨 금당실 마을
예천은 야은 길재, 강호자 김숙자,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등이 활약한 선산과 더불어 퇴계 이전에 15세기 유학의 중심지였다. 예천 출신의 유학자인 송정 조용 16년, 별동 윤상 16년, 나암 이문흥〔1423(세종 5)∼1503(연산군 9)〕 20년 등 50년 이상 조선 초의 유학과 문묘의 관리를 맡은 성균관의 책임자인 정3품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이 되어 조선의 학문을 책임졌던 인물들은 모두가 예천 출신의 유학자였다.
조용은 조선 초 유학의 대이론가로 예천에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윤상은 조용의 제자다. 오로지 학문으로 군서기에서 대사성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종 때 성균관에 입학한 세자 문종을 가르쳤고, 왕세손인 단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사후 그의 비문에는 "저 중국의 구양수와 더불어 후세에 추모될 것"이라고 새겨져 있다. 용궁면 출신의 이문흥은 당시 유림에서 종지(宗之·유학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라 했다.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지기가 좋으면 인재를 낳는 법이다. 마을은 명문가와 인재를 낳는다고 함양 박씨의 용문 금당마을, 예천 권씨의 용문 죽림마을, 안동 권씨의 용문 맛질마을, 한양 조씨의 감천 산골마을, 진성 이씨의 호명 백송마을, 동래 정씨의 우망마을, 청주 정씨의 고평마을과 삼강마을, 축산 전씨 영궁 소천마을 등은 예천을 대표하는 가문들이다.
(1)금당실 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금당실이라는 마을이 있다.『정감록』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에도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예언가이자 풍수가인 격암 남사고(南師古,1509년~1571년)는 이곳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지만 큰 냇물이 없이 아쉽다고 하여 '금당맛질 반(半)서울'이란 향언도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용문 금당실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오미봉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약 0.8㎞의 울창한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이 장관을 이룬다.
마을은 600여 년 전 감천 문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입향조의 손자 사용교위 문억경(문과방목 기준)은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는데 각기 함양인 박종린(朴從麟, 1496~1553)과 원주인 변응녕(邊應寧, 1518~1586)에게 출가시켜 그들이 처의 고향에 자리를 잡으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상징인 오미봉 아래에는 고려후기의 문신 박충좌(1287~1349)와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의 아버지로 아들 5형제를 모두 대과에 급제시킨 박눌(1448~1528), 조선후기 성리학자로 안동의 대산 이상정, 대구의 백불암 최흥원과 더불어 영남3노(嶺南三老)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남야 박손경(1713~1782)을 기리는 금곡서원이 있다. 또한 원주 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모신 사괴당 고택, 숙종때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김복일의 후손 김빈이 살던 반송재 고택, 이유인의 99칸 저택터, 사괴당 변응령이 심은 느티나무가 유명하다.
(2). 함양 박씨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
함양 박씨는 조선 중기의 인재로 ‘향오린(鄕五麟)’과 ‘경팔립(京八立)’을 자랑하는데, 특히 예천과 관련되는 향오린은 공조전서를 지낸 박규의 증손인 박눌(朴訥)이 상주의 향리로 있으면서 모정(茅亭)을 짓고 후학에 전념하여 문과에 급제시킨 다섯 아들을 말한다. 박종린의 부친인 박눌(朴訥)은〔1448(세종 30)~1528(중종 23)〕호가 행정(杏亭)이다. 안동김씨 정헌공(正憲公)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창락도찰방을 지냈으며 사후(死後) 병조참판겸 의금부도사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중종이 묘(墓)에 사제(賜祭)하였다. 다섯 아들의 급제로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예천 금당실의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첫째 박거린(朴巨鱗)은 군수 장령을, 둘째 박형린(朴亨鱗)은 부사 참의를, 셋째 박홍린(朴洪鱗)은 대사헌을, 넷째 박붕린(朴鵬鱗)은 한림학사와 지평을, 다섯째 박종린(從鱗)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치른 과거에서 형제 5명이 모두 합격한 경우는 7번이 확인된다. 고려조에서는 우홍득(禹洪得)ㆍ홍수(洪壽)ㆍ홍강(洪康)ㆍ홍부(洪富)ㆍ홍명(洪命)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6번이나 있었다. 약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진기록이다. 물론 조선 인조 때 6형제 합격자를 배출한 원식(元植) 가문도 있다. 4형제 가문도 있다.3형제 가문,형제 합격 가문등이 다양하지만 5형제 합격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적으로 정조의 외가인 풍산홍씨 영의정 홍봉한 선조 홍수 가문은 형제 문과 급제 기록상 최고봉에 올랐다. 처음은 4형제 문과 급제라는 두 번의 영광을, 그 다음 3형제 문과 급제라는 세 번의 영광을 더 했다. 4형제 문과 급제의 첫번째 주인공은 홍이상[문과장원 관찰사]의 네 아들, 홍방[관찰사] 홍립[관찰사] 홍집[장령] 홍영[예조참판]이다. 두번째 주인공은 관찰사 홍립의 증손, 홍중정[지평] 홍중태 홍중현[교리] 홍중상[정자]이다.
3형제 문과 급제 첫번째 주인공은 관찰사 홍주삼의 세 아들, 홍만수[교리] 홍만통[저작] 홍만우[사인]다. 두번째 주인공은 홍현보[문과장원 예조판서]의 아들, 홍봉한[영의정 사도세자장인] 홍인한[좌의정] 홍용한[동돈녕]이고, 세번째 주인공은 홍봉한[문과 영의정]의 세 아들, 홍낙인[이조참판] 홍낙신[돈녕부사] 홍낙임[도총관]이다.
3형제 문과 급제 세번째 주인공 홍낙인은 역적으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홍낙임은 신유박해 때 사사되는 등 비운이 몰려 왔고 두번째 주인공 홍봉한, 홍인한도 시파, 벽파로 형제가 갈려 생사가 걸린 싸움을 벌였으며 전자는 극에 달한 고통을 겪었고 후자는 사사되는 비극의 최후를 았다. 그러나 홍이상의 네 아들의 영광이 다진 밑바탕이 원체 튼튼했기 때문에 풍산홍씨의 번성은 그칠 줄 몰랐다.
금당실 입향조 특히 종린(從鱗ㆍ1496~1553)은 자는 자룡(子龍)으로 눌(訥)의 다섯째 아들이며, 금당실 사람 문숙손(文叔孫)의 사위이다. 금당실에는 감천 문씨 문억경의 맏사위가 되어 이주했다. 박종린은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외사촌이며, 외조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다. 이후 금당실은 함양 박씨들이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면서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승문원 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 교리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겸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 이조정랑에까지 벼슬이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金安老)의 횡포가 심하여 벼슬에 뜻이 없던 차에 김안로가 사형되자 1538년 벼슬을 그만 두고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서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으며, 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入鄕祖)이며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파조(派祖)로 추원재(경상북도지정 민속자료 제82호))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감로루(感露樓)는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에 있다. 이 건물은 함양박씨 예천 입향조인 정랑공 박종린(朴從鱗)의 묘지 수호를 위하여 1600년대에 건립한 재실의 부속건물이다.
(3) 금당실 마을과 고평마을 출신 정승 정탁
정탁(鄭琢, 1526~1605)은 용궁면 하금곡리 금당실에서 태어나 예천읍 고평리 고사평으로 옮겨 살았다.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청주다.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 가서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에 힘썼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이 사형을 선고받자 상소를 올려 구제하였다.
정탁은 1600년(선조 33)에 좌의정에 올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등록되면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사평에서 머물 때 왕이 충훈부의 화사(畵師)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화상축을 하사하였다. 죽은 후 위성공신에 등록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호명면 황자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과 예천읍 서본리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고, 유품으로 영정은 물론 유고와 문서 12종류, 관, 벼루, 석금강산 등이 보물 제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0년에는 예천읍 고평리에 정충사(靖忠祠)를 창건하여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정탁은 성품과 기질이 맑고 밝아 신의를 지키고, 50년간 조정에 있으면서도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동인인 정탁은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어느 파에서도 모함을 하지 못하였다. 학문에서는 유학과 역사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법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여 박학다식하였다. 류성룡, 노수신과 더불어 ‘영남 3대가’라 불렸다. 매사 신중하였고, 국사를 논할 때는 언제나 큰 테두리를 바라보았다. 정탁은 예천읍 고평리에 터를 잡고 고평동계(高坪洞契)를 만들어 예천군민을 교도했으며, 새 질서와 새 생활 실천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하여 향토 주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에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3. 예천권씨(醴泉權氏)와 죽림마을
(1).예천 권씨의 유래
약 700 여년전 고려 29대왕 충목왕(1344~48 재위)시절부터 예천권씨는 시작한다. 예천권씨는 본래 예천지방 3대 토성(土姓)중 하나인 '흔(昕)'씨였으며, 흔(昕)'씨 가문의 선대(先代)는 예천지방의 호족으로 대대로 호장을 세습 하였다.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6세 '흔섬(昕暹)'대에 이르러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이 등극 하였는데, '충목왕'의 이름(名)이 바로 '흔(昕)'이었다. 이에 '국명(國命)'에 의해 '흔(昕)씨'도 성(姓)을 바꿔야만 했다.
이에 '흔섬'은 어머니의 성이자 흔씨 1세, 3세의 처가 성(性)이기도 한 '권(權)'을 새로운 '성(姓)으로 정하여 '권섬(權暹)'이라 하고 본관은 시조의 세거지인 '예천(醴泉)'으로 하였다.
권섬 이후 예천권씨는 관향인 예천에 터를 잡고 누대에 걸쳐 세거해 왔다. 4세 권맹손이 매우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다. 5세 '권선(權善)'대에 이르러 선대(先代)에 드물게 오행,오기,오복 , 오윤,오상 등5형제를 두었고, 이들 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는 '오복문(五福門)'이라 칭하며 모두들 부러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벼슬길에 나서며 모처럼 가문의 번성을 꾀하였으나,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예천권씨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많은 자손들이 안동권씨로 흡수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무오사화로 인해 중앙관직 에서는 잠시 멀어졌으나 선비의 기개는 후손들에게 이어져 8세 '권문해(權文海)'는 일찍이 퇴계 '이황(李滉)'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다시 '권문(權門)'의 명성을 널리 떨쳤다. 권문해선생이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시대 간행된 출판물 중 가장 가치있는 문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예천권씨는 예로부터 자손이 귀해 지금도 그 수가 많지 않으며, 특히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겪으며 후인들이 안동권씨로 살아가게 된 경우가 많이 있었다.
(2)죽림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예천읍에서 서북쪽으로 30리길. 용문사 길목에서 왼쪽으로 논두렁길을 따라 1 Km쯤 가면 소백산줄기의 동산아래 울창한 대나무숲이 나타난다. 마을이름 그대로 대쪽같이 곧은 조상의 기개가 스민 예천권씨의 5백년 마을이다.
5세손 권선이 5형제를 두어 "오복문"의 경사가 나면서 가문의 번창을 위해 이들 형제중 막내 권오상이 대대로 살던 하금곡리에서 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신선이 학을 희롱한다는 "신인농학"의 명당을 찾아 이곳 동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입향조 권오상이 세운 팔작지붕의 99간 종택은 임진왜란시 소실, 현재 57간이 남아 있는데 보물 제457호로 지정되어있다.
(3)가문의 번영
예천권씨은 득성초기부터 후손이 귀했다. 6세 권섬이 3 형제를 두었으나 첫째와 둘째가 후손을 두지 못해 권군보의 아들 셋째 권상(權群)이 대를 이었다.
그의 아들 권맹손은 고려 공민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당시의 문장가로 <대동시림>을 남겨 가문을 빛냈지만 그도 후손을 두지 못해 아우 권유손(權幼孫)의 두 아들이 대를 잇는다.
둘째 권선(權善)이 선대에 드물게 권오행(權五行), 권오기(權五紀), 권오복(權五福), 권오륜(權五倫), 권오상(權五常) 5형제를 두고 이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가문이 번창하여 조정에서는 예천권씨 집안을 오복문(五福門)이라 일컬었다. 이들 5형제중 권오복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권오복은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에 뽑혔다.
그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공명에 연연하지 않은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는 8세손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어졌다. 그는 일찌기 퇴계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주류로 예천 권씨의 명성을 일으켰다. 1552년(명종 7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정언, 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는 대구,공주,청주목사를 거쳤는데 가는곳마다 올바른 정사를 펴서 선정비가 세워 졌다.
그가 대구목사로 있을때 단군이래 조선 선조 때 까지의 우리역사와 문화예술풍속 등을 총망라하여 107가지 운으로 분류, 저술한 <대동운부군옥> 전20권을 편찬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오늘날 목판본 677매만 전해지고 있다. 권극중
① 권맹손〔1390(공양왕 2)∼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호는 송당(松堂). 섬(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보(君保)이고, 아버지는 목사 상(詳)이며, 어머니는 임경종(任敬宗)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역시 을과로 급제하였다. 한성부 판윤,예문관대제학,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세종대에 박연과 함께 아악정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외손의 현달과 소산마을
권맹손은 소산리 안동김씨의 김삼근과 사돈이 되었다. 김삼근의 아들이 바로 장동김씨의 김계권과 안동 김씨 최초의 문과 급제자 안동 묵계파의 김계행이다. 권맹손의 따님은 소산리 김삼근의 며느리이자 김계권의 부인이 되어 찬란한 장동 김씨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사실 외손인 소산리의 안동김씨를 중앙에서 크게 현달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권맹손이다.
김계권은 5남(영추,영균,영전,학조,영수) 6녀를 두었는데 모두 외할아버지 권맹손의 음덕으로 한양에서 확실한 기반을 닦았다. 이 가운데 김영수계는 김번-김생해-김대효(생부는 김극효)-김상용,김상헌으로 이어져 나중에 조선 후기에 정치와 학문에서 크게 현달한다. 김영수가 88세 되는 노모 예천권씨(醴泉權氏)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지은 정자가 소산리에 있는 삼구정이다.
김계행은 슬하에 모두 5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첫째 부인 서씨의 소생이고, 다섯 아들은 둘째 부인 남씨의 소생이다.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극인(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둘째 극의(克義)는 진사, 셋째 극례(克禮)는 생원, 그리고 막내인 극신(克信)은 무과에 합격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냈다. 찰방(察訪)을 지낸 박눌(朴訥)과 진사 류자온(柳子溫)이 각각 첫째와 둘째 사위이다. 류자온은 서애 류성룡의 증조부이기도 하다.(류자온-류공작-류중영-류운룡․류성룡)
이런 인연으로 후에 류성룡은 『보백당선생실기』를 간행할 때 「영모록(永慕錄)」이라는 추모의 글을 지어 문집에 싣기도 하였다. 김계행이 81세 되던 해 내외의 종친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 일이 있는데, 이 때 아들과 조카 가운데 대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명이고 관직에 오른 사람이 7명이나 될 정도로 자식 복이 다복하였다.
㉢권맹손 관련 유적
(1)인산서원: 1727년(영조 3)에 건립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예전리에 위치한 인산서원에 배향되었다.
(2)예천권씨병암정및별묘: 용문면 성현리 소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로, 원래는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毁撤)되자 사당만 이곳으로 이건하여 권맹손, 권오기, 권오복, 권용을 봉사하는 별묘로 사용하고 있다.
②권선
권선(權善, 1427-1509 , 자- 길보)은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이다. 성주 목사 권상의 손자이자. 권유손의 아들이며 대제학 이계전〔1404(태종 4)∼1459(세조 5)〕의 사위이다. 권선의 장인인 이계전은 한산이씨로, 이곡의 증손이자,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이종선이며, 어머니는 15세기 관학파의 거두이자 대학자였던 양촌 권근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참여해 정인지 등과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권선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아들 권오복이 사형을 당하자, 광양으로 귀양을 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사면되어 고향 하금곡리로 돌아왔으며, 무덤은 예천읍 생천리 제동(堤洞)에 있다.
권맹손의 조카인 별제(別提) 권선(權善)은 재주 있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과명과 문행(文行)으로 나란히 명성을 떨쳤다. 학사인 수헌공(睡軒公) 권오복(權五福)은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
②-1 권선의 처가 한산이씨
고려의 호장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한산 이씨의 중흥은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稼亭 李穀·1298~1351)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 이색의 아들대인 종덕, 종학, 종선대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들 3대의 업적이 후손들이 성장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한편 이곡-이색-이종덕.이종선,이종학의 한편 이들 3대의 이름에는 가문의 성장사가 숨겨져 있어 재미를 더해 준다. 먼저 이곡의 형제 이름은 가축이나 곡식을 재배하고 기른다는 의미의 배(培), 축(畜), 곡(穀)이다. 가정 이곡이라는 이름은 정자 부근에 곡식을 심는다는 의미이고, 아들인 이색은 거둔다는 의미의 색(穡)이다. 이색은 여기에 더하여 아들의 이름을 덕과 학문과 선을 베풀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씨를 뿌린다는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으로 작명했다. 이들 3대에 걸친 노력에 의해 한산 이씨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색의 장자 종덕은 4자인 맹진(孟畛, 판중추공파)의 계열에서 현달했는데, 이 가운데 17세기 초에 수은 이홍조(李弘祚)가 외조부인 서애 류성룡의 권유로 서울에서 낙남하여 안동에 정착하는데, 이홍조의 현손이 퇴계의 적통을 이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1711~1781)이다. 대산의 모친이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며, 밀암 이재의 따님이었다. 한산 이씨는 이색의 손자대에 13개파로 분파하는데, 이색의 3자 이종선의 셋째 아들이 이계전(李季甸)으로, 문열공파(文烈公派)의 파조이다. 이계전과 이개는 숙질 간으로 정치적인 운명을 달리하여 세조의 친구인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고 이종선의 장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자 이계전의 조카인 이개는 사육신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계전은 정란공신 1등과 좌익2등 공신이 되어 토지 300결과 노비35구를 받았다.현재 분당 중앙공원의 땅이 그것이다. 이개의 땅은 몰수되어 숙부인 이계전의 땅이 되었다. 정치는 이렇게 매정하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은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으로 이어지는 이색의 7세손이다. 토정의 형인 성암 이지번(省菴 李之蕃·1508~1575)의 아들이 선조대 대북파의 영수였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1538~1609)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한음 이덕형은 바로 이산해의 사위로, 이산해의 직계는 이산해-이경전-이구로 이어지면서 모두 문과 급제했다. 이후 19세기 말 고종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순국의사로 유명한 수당 이남규(李南珪·1855~1907)로 이어지면서 13대 동안 문과 급제자 7인, 사마시 입격자 12인을 배출하면서 기호남인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③오복문 이야기
권선(權善)은 권오행(權五行), 권오기(權五紀), 권오복(權五福), 권오륜(權五倫), 권오상(權五常)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을 오복문이라고 불렀다. 외가인 한산이씨 이계전의 후광을 많이 받아서 현달하게 된 것이다.
㉠권오행
권오행은 15세기 용문면 하금곡리 태생으로, 자는 제지(齊之), 본관은 예천, 선(善)의 맏아들이다.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 좌랑의 벼슬을 임금으로부터 직접 받고, 곧이어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올랐다.그러나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 동생 오복이 사형에 처해지자, 연좌되어 전라도로 귀양을 갔다.중종반정(1506) 후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무덤은 예천읍 생천리 못골에 있다.
㉡권오기
1463(세조 9)∼?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졸재(拙齋). 상(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손(幼孫)이고, 아버지는 별좌(別坐) 선(善)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계전(李季甸)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동생 오복(五福)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1499년에 봉교(奉敎)가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동생 오복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어 극형을 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귀양갔다.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고, 1511년(중종 6) 지평(持平), 1526년 경상좌도군적경차관(慶尙左道軍籍敬差官), 1530년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오복
1467(세조 13)∼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수헌(睡軒). 예천 출신. 상(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손(幼孫), 아버지는 별좌 선(善),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계전(李季甸)의 딸이다. 일찍부터 경서·사서에 접했으며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으로 당시의 청류(淸流)와 교분이 넓었고, 특히 김일손(金馹孫)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의 병과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 봉교·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향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향리에서 잡혀 올라와 같은 문하의 김일손·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아 성종 때의 문화 사업에 많이 참가했다. 필법이 굳세고, 문장이 맑고 강했다고 하며 시문을 많이 남겼다. 화를 입은 뒤 시문을 비롯한 유고들이 많이 불태워지거나 흩어졌는데, 형 오기(五紀)가 남은 것을 한 질의 책으로 엮어 보관했다.
종손 권문해(權文海)가 1584년(선조 17) 대구부사로 있으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수헌선생집』을 간행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구勳舊세력과 사림士林세력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때이다. 이런 시기에 수헌은 강직한 성품으로 평생 義理에 부합하는 삶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다. 수헌의 漢詩작품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忠’과 ‘孝’를 실천하고자 한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작품 속에 형상화된 忠義를 갖춘 官人으로서의 수헌의 면모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과 그것을 기반으로 구축한 신념을 자신의 삶과 정치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신진사인(新進士人)로서의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권문해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용문면 죽림리 출신이다. 본관은 예천,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다. 권지(權祉)의 아들로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동강 김우옹 등 제현들과 교유하였다. 입신하여 간간이 조정에 섰을 때는 절개가 우뚝하였으며 가정의 일에도 독실하였다.
1552년(명종 7)에 진사가 되고, 1560년(명종 15)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강, 1570년 영주군수, 1572년 정언, 1573년 안동부사, 1575년 청주목사, 1580년 공주목사, 1582년 사성, 1591년 사간, 집의, 동부승지, 좌부승지에 이르는 사이 당쟁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항상 청렴과 정직을 신조로 삼았다. 벼슬 수십 년에 충성을 다하고 멸사봉공하였으며, 불의 앞에서는 조금의 굽힘이 없었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그 뜻을 받들어 모셨으며 부인에게 당부하는 것이 엄격하였다. 한 아우와는 함께 살았으며, 누이가 죽은 뒤에는 어린 생질들을 길러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어 생업을 꾸리게 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하여 통달했으며 마을 뒤쪽의 초간수석(草澗水石)을 사랑하여 1582년(선조 15)에 초간정사(草澗精舍)를 창건하였다.
저서로는 수천 년 이래 모든 책을 참고하여 단군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역사적 사실, 인물, 지리, 문학, 예술 등을 총망라하여 이것을 운자에 의하여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내었다. 이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개인 저서로는 양이나 질에서 우수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을 아는 데 좋은 자료다.
또 보물 제879호로 지정된 『선조일록(先祖日錄, 1580~1584)』, 『초간일기(草澗日記, 1580~1590)』, 『신묘일기(辛卯日記, 1590)』 등 34권의 친필 일기를 남겼다. 친필 일기는 권문해의 개인 생활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여 당시 사대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고, 지방관을 지내면서 직장 생활을 통한 여러 문제를 다루어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과 당쟁에 관련된 인물뿐 아니라 정치•국방•사회•교육•문화•지리•풍속 등 전반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복고운동과 경세주의의 산문 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로 쉽고, 따뜻한 문장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권문해를 실학의 선구자라고 한다. 무덤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산에 있고, 봉산서원(鳳山書院)과 죽림사당(竹林祠堂)에 제향되었다.
가. 관련유물
예천권씨종가별당(醴泉權氏宗家別堂) 및 예천권씨종택(醴泉權氏宗宅)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다. 별당은 사랑채이고, 종택은 안채인데 모두 권오상(權五常)이 1589년(선조 22)에 건립하였다. 별당은 1967년 보물 제457호, 종택은 1984년 경상북도 중요민속자료 제201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대동운부군옥책판(부)교본(大東韻府群玉冊板(附)橋本)』, 『초간일기(草澗日記)』, 『예천권씨종가문적(醴泉權氏宗家文籍)』이 소장되어 있다. 권맹손, 권오복,권문해등의 전국적인 인물을 배출한 예천권씨는 전국에 약 5,000여명 있다.
4. 예천 용문면 구계리 의성김씨 남악종택(義城金氏南嶽宗宅)
(1)남악종택
중요민속문화재 제248호로, 조선 중기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문인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1541~1591)의 종택으로 인조 14년(1637)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이름난 불구당 김주(1606~1681)가 태어난 곳으로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1634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사봉 지맥을 배경으로 동남향하여 배치된 이 고택은 정면9칸, 측면7칸의 'ㅁ'자형으로 평면이 구성되었다. 안채의 상부구조는 5량가이다.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인 평면을 가진 공간구성으로 지형의 고저차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는데 각 공간마다 통풍과 채광이 원활한 쾌적한 공간 구성이 특징이다. 특히, 사랑채인 “가학루(駕鶴摟)”는 앞면의 경사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鷄子(계자) 난간을 두어 누각 형식의 품격 높은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처마곡선을 우아하게 처리하여 초가인 행랑채와 나란히 서서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2.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淸溪) 김진(金璡)의 아들 이야기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석(金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의성김씨족보』에는 김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 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 등의 문헌과『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남악 김복일은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나 예천 용문면 죽림의 예천권씨의 권지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자리잡았다. 『대동운부군옥』를 저술한 권문해는 그의 처남이다.
이곳에 정착한 남악선생은 의성 김씨의 오룡(五龍)이라 일컫어지는 인물로, 그의 형제들이 나란히 대과와 소과에 급제하여 당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오룡이란 청계(淸溪) 김진(金璡:1500~1580)의 아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1522~1585),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1528~1583), 운암(雲巖) 김명일( 金明一:1534~1569),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남악 김복일을 일컫는다. 극일, 성일, 복일 형제는 대과에 급제했으며 수일, 명일 형제는 소과에 합격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세거지는 맏이 약봉 김극일은 내앞 의성김씨 종택에 살았고, 둘째 귀봉 김수일은 내앞마을 귀봉종택에 세째 운암 김명일은 임하 신덕리 운암종택에 네째 학봉 김성일은 서후 금계리에 그리고 다섯째 남악 김복일은 예천 용문면 구계리에 분가하여 각 각 종택을 꾸렸다.
(3)남악 김복일 이야기
①김씨오룡:남악 선생은 1541년 안동 임하현 천전리 집에서 태어났다. 김진의 다섯 아들 중 오남으로 당시 형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김씨오룡(金氏五龍)’으로 불렸다. 김복일은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래로 평생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탐구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다고 한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학유, 전적을 역임하였다. 형조, 호조, 공조의 낭관을 지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전라도 어사로 나갔을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부린 전주부윤이 김복일의 소문만 듣고 스스로 벼슬을 그만둘 정도로,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이 알려져 있었다. 그 후 1584년에 강원도사를 거쳐 1587년에 울산군수로 부임 중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뿌리치고, 백성을 아끼고 멸사봉공하는 청백리의 모범을 보여, 울산 군민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울산향교 뒤뜰에 서 있다. 관찰사가 권세가에게 바칠 뇌물을 요구하므로 “어진 백성의 가난한 재물을 긁어다 살찐 세도가를 더욱 부자되게 할 게 무어냐”고 하였으며, 또한 관찰사가 울산에 사람을 보내어 토산품을 거둬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잡아 가두고, 그 이유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니, 관찰사가 겉으로는 좋은 척하고 속으로는 분히 여겨 최상위로 보고한 업무 평가 보고서를 다시 찾아와 최하위로 고쳐서 올리기도 하였다.
김복일의 화살처럼 곧고 대쪽같이 바른 마음을 모두 걱정하더니, 과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곤궁 속에서 지냈다. 한강 정구와 오리 이원익도 “지금 세상에 다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고, 선조 임금도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을 듣고 감탄하여 『문헌비고』, 『성리대전』 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김복일은 그 후 창원부사, 경주교수, 1590년에 지금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사예와 종3품인 사성에까지 벼슬이 오르고, 풍기군수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죽림리에는 가학루(駕鶴樓)라는 집을 짓고, 그 옆에 남악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부인은 죽림리 대수마을의 권오상(權五常)의 손녀이고 무덤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산에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과 다인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②문집과 비석:문집인 『남악선생일고』가 아버지 김진과 다섯 형제의 유문(遺文)을 정리한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문집 중 행장은 퇴계의 계문제자로서의 학자적 모습보다는 내외 관직 수행과 그 성과에 대한 해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사림적 관인으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산(龍門山)에 있다. 부사김공청직유애비는 창원부사로 재직한 김복일의 청렴하고 곧은 정사를 기려 세운 비로 창원 용지공원에 있다.
③후손:부인은 숙인 예천 권씨로, 증참의(贈參議) 지(祉)의 따님이신데, 제동(堤洞)에 장사하였으니 공의 묘소와 십리쯤 된다. 후취부인은 안동 권씨로, 현감 심언(審言)의 따님이신데, 공의 묘지 왼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맏아들 지는 선교랑(宣敎郞)이고, 둘째 아들 숙(潚)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딸은 감사(監司) 최현(崔晛), 정언(正言)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했는데, 모두 전 부인의 소생이다. 선교랑 김지의 아들은 참봉 시진, 시각이고, 감사의 아들 산휘(山輝)는 부사이며, 정언의 아들은 충망(忠望) 충량(忠亮)이다. 참봉의 아들은 언, 빈, 정, 노 이며 , 시각의 아들 빈은 문과에 급제, 참판을 지냈다. 이로써 공이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추증되었다.
④현달한 후손 김빈
김빈(1621~1694)은 용문면 죽림리 남악골(南嶽洞) 출신으로, 상금곡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본관은 의성, 시진(侍振)의 아들이다. 1651년(효종 2)에 진사가 되고, 1657년(효종 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조 좌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안간힘을 써서 1671년(현종 12)의 큰 가뭄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문경 사람들이 환송하며 슬퍼하였고, 선정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그 후 종2품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임금께 청했으나, 김빈의 인품을 아낀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겸손하고 부지런한 학자일 뿐 아니라, 벼슬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찬을 받았고, 남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한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정성을 다하여 소신대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이 매우 아끼었다. 김빈은 자비, 치밀, 청렴, 분별을 다스리는 원리로 삼았다.
류동학 프로필
고려대 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사상사 전공)
대전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수료(동양철학전공-명리학)
부산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불교사상사 전공)
단국대 법학과 졸업
전 건동대학교(안동정보대학) 공무원양성과 학과장
현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
현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문화트레킹 대장
현 동양학칼럼리스트
현 카페북에듀 공무원 한국사 대표강사
전 경북신도청 시대정신포럼 위원
전 대기원시보 한중인물열전 연재( 1년 연재)
전 매일신문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1년 연재
전 영남일보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 1년4개월 연재
전 일요서울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 칼럼 연재(1년 연재)
전 경북 북부 영남방송, 강원도 영동방송, 대구 큐릭스 대경방송
역학이야기(45분 24부),조선시대이야기(50분 42부) 3년간 방송 강의
각 대학교(경북대, 부산대, 창원대, 경기대, 안동대, 대구한의대, 중원대, 풍산고,영양여고 등)와 관공서(안동시청, 의성지청, 대구세관, 청송직업훈련원, 한국국학진흥원, 한나라당, 경북개발공사,봉화군청,영양문화원) 기업체(삼성생명, 남동발전, 서부발전, 금세기 개발 등)에서 특강 430여 회 강의
5. 하회마을과 풍산류씨
안동에는 양반이 많았던 특성상 그 어느 지역보다도 동성마을이 많다. 대표적인 동성마을로는 하회리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무실마을과 박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박실마을, 가곡리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 주하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주촌마을과 온혜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온계마을, 오미리 풍산김씨 집성촌, 망호리 한산이씨 집성촌인 소호마을 등이 있다.
도청이전지 인근의 명문가 집성촌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남쪽의 마을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은 처음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중심의 씨족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 두 집안은 떠나고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인 하회(河回)마을의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마을 주위를 감싸 안고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이 ‘회(回)’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는데, 풍수지리학적인 관점에서는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형상과 같다 하여 길지(吉地)로 꼽는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이 마을에서는 담장을 만들 때 돌을 섞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을이 물에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는 풍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100여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2채가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서민들의 놀이였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어 하회마을은 우리의 전통 생활문화와 건축양식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부용대에 올라 회(回)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 쌓아 안고 흐르는 낙동강과 그 안에 자리한 마을을 보는 것이 백미이다.
부용대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북쪽으로 강학(講學) 공간인 원지정사, 빈연정사가 있으며, 이 두 정사 앞의 강 너머로 부용대, 옥연정사, 겸암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요즘에는 풍천면 소재지에서 광덕교의 다리를 건너면 차로 이동할 수 있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부용대를 마주하고 있는 원지정사와 빈연정사는 류성룡과 류운룡(柳雲龍) 형제가 학문에 정진하며 많은 책을 남긴 장소로 동쪽과 서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류성룡의 강학 공간인 원지정사와 류운룡의 강학 공간인 반연정사의 두 정사는 모두 출입문이 협문처럼 작은데, 최대한 외부와 단절한 상태로 나만의 공간에서 학문을 닦고자 하는 선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원지정사의 창문 너머로는 부용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부용대의 꼭대기에 오르면 낙동강이 굽이치는 하회마을이 손에 잡힐듯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풍산 류씨는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 이후 관찰사 류중영과 아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에 의해서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특히 서애에서 시작한 9대에 걸친 벼슬길은 풍산 류씨 대종가인 겸암에서 분리하여 소종가를 형성했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과 소종가인 충효당(忠孝堂,보물 제306호)이 하회마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그의 맏아들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이 살던 집으로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대청 앞 처마 아래에 ‘입암고택’ 현판이, 사랑대청 안 북쪽 벽 바라지창 위에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의 이름인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이곳을 크게 중수한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柳泳)의 아호(雅號)에서 따온 것이다.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은 원래는 아흔아홉 칸이었으나 지금은 쉰세 칸만 남아 있다. ‘ㅁ’자형 안채에 행랑채와 대문채가 ‘一’자로 합쳐져 열세 칸의 3량 집의 긴 건물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다. 평면도를 그려보면 경상도 가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ㅁ’자형 안채에 대청 옆으로 ‘一’자형 별당을 이은 형태이다. 마을의 다른 가옥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사랑채의 높은 기단, 좌우로 뻗은 행랑채 등은 이곳이 대종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진당은 연화부수형(連花浮水形) 형국의 하회마을에서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다 하여 가장 명당자리로 꼽는다.
사랑채 옆으로 난 협문을 나서면 넓은 후원과 함께 다른 고택에서 볼 수 없는 양진당만의 특징으로 두 개의 사당이 은행나무 밑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이 집의 자랑거리로 류중영과 류운룡 두 불천위가 부자(父子) 관계이기 때문에 한 곳에 모실 수 없어 두 개의 사당이 세워진 것이다. 아버지인 류중영의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크기에 반 칸의 퇴를 두고 있고, 류운룡의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규모이며, 기둥의 간격과 규모 또한 아버지의 사당보다 작다. 이러한 부분에서도 위계질서가 건물로 표현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예의 나라로 만든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두 불천위를 모신 두 개의 사당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반가로 꼽히는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지금의 충효당의 모습은 류성룡 선생 사후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손자 류원지(柳元之)가 안채를, 증손자 류의하(柳宜河)가 사랑채를 확장 중수한 것으로, 류성룡이 낙향한 후 말년을 보냈던 소박한 생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옥이라 한다. 대문채는 선생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가 지었는데 일반 기와집과 달리 전면에 긴 행랑채와 함께 일자 모양의 독립된 건물로 배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가옥은 커다란 바깥마당을 지나 긴 행랑채인 대문채를 지나 끝나는 지점에 좌측으로 동선이 꺾이면서 솟을대문을 만나게 된다. 대문채의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사랑대청에 걸린 ‘충효당’ 편액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글씨는 류의하가 사랑채를 중수할 때 당대 명필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서(篆書)로 쓴 것이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짓게 된 연유는 서애가 임종할 당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절인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다(忠孝之外無事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사당 앞에는 서애 선생의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자리하고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서애 선생의 대표 저서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을 비롯해 많은 교지와 고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책은 (국보 제132호)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서애파는 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류원지로 연결되어 학봉파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6. 오미마을과 풍산김씨
신도청지역 북쪽에 위치한 오미(五美)마을은 풍산김씨(豊山金氏)들이 500년 동안 세거해 온 씨족마을이다. 학가산의 한 갈래인 대봉산 줄기가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내려 죽자봉(竹子峰)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아미산(峨嵋山)이 굽어 돌아 마을을 감싸며, 서쪽으로는 멀찍이 도인산(道仁山)이, 남쪽으로는 곱게 솟은 검무산(劍舞山)을 바라보는 아늑한 동네다. 학가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보문산과 대봉산을 거쳐 남쪽의 검무산으로 이어져 마을 앞을 서쪽으로 감싸 안고 가곡마을 앞산에서 멈추는데, 때문에 마을에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렸다.
그 후 한차례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가 의정공의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공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마을 이름으로 지금의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미마을이 되었다. 안동 하회마을과 소산마을, 가곡마을 등에 비해 오미마을은 예천-안동 간 국도에서 4km 넘게 더 들어가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 이곳까지 방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마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풍산김씨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銀說)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좌리공신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유를 시조로 한다. 김문유의 증손 김동성이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석릉촌에 옮겨 살면서 오릉동(五陵洞, 지금의 오미리)에 별장을 두었다.
후손들은 대대로 고려에 벼슬하면서 송도(松都, 일명 개경·개성)에 옮겨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하고 송도의 사족(士族)들을 정책적으로 한양에 이주시킬 때 직장(直長)을 지낸 김문적(金文迪)공의 8세손 김자순(金子純)이 한양 장의동(壯義洞, 지금의 삼청동)으로 옮겨 살았다. 김자순의 형 김자량(金子良)이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김자순은 화를 피하여 안동으로 내려와 오릉동에 숨어 살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손자 김휘손(金徽孫)은 진산군수를 지냈고, 증손 김양진(金楊震)은 참판을 지냈다.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金義貞)은 인종이 세자 시절 서연관(書筵官)을 지내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인종이 즉위하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 인종이 왕위에 올라 곧 승하하자 병을 칭하고 낙향하여 오릉동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잠암(潛庵)이라 하고 아들 이름을 김농(金農)이라 지어, 시골에 숨을 뜻을 굳혔다.
김의정의 손자 김대현(金大賢)은 현감을 지냈고, 김대현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는 오형제가 문과 급제를 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경상감사로 하여금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를 세우게 하였다.
김대현의 아들 중 맏이인 학호 김봉조(鶴湖 金奉祖), 넷째인 심곡 김경조(深谷 金慶祖), 막내인 운송 김숭조(雲松 金崇祖)는 오미동에 세거하였고, 둘째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셋째 장암 김창조(藏庵 金昌祖), 여섯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는 봉화 오록(梧麓)마을로 새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다섯째 광록 김연조(廣麓 金延祖)는 예천 감천으로 이거하였고, 일곱째 학음 김염조(鶴陰 金念祖)는 재종숙인 정헌공 김수현(靖憲公 金壽賢: 김양진의 둘째 아들인 순정(順貞)의 손자)에게 입양되어 김포로 이거하였다.
八蓮五桂 이후 문과 급제자 중 죽봉 김간(竹奉 金侃: 1653~1735), 독산 김종규(獨山 金宗奎: 1765~1830), 낙애 김두흠(洛厓 金斗欽: 1804~1877)은 심곡 김경조(深谷 金慶祖)의 후손이며, 왜적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추강 김지섭(秋剛 金祉燮)의사는 설송공의 후손이다.
현재 오미동에는 학호 후손이 10여호, 심곡공 후손이 40여호, 설송공 후손이 30여호가 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유연당 9父子가 글 읽던 죽암서당(竹岩書堂), 위패를 모신 추원사(追遠祠), 후손들이 공부하던 도림강당(道林講堂), 풍산김씨 종택(민속자료 38호), 영감댁(令監宅: 민속자료 39호), 참봉댁(參奉宅: 중요민속자료 179호), 죽봉사당(竹奉祠堂),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던 화수당(花樹堂) 등 많은 고건축이 남아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오미마을을 대표하는 문화재는 추원사와 도림강당이다. 추원사는 유연당 김대현을 위시하여 그 자제 八蓮五桂 등 모두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두고 선조의 공덕을 기리는 향사를 지내는 곳이고, 도림강당은 이 분들의 학덕을 숭모하여 후손들이 자제들의 학업을 증진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후손들은 이 둘을 아울러 ‘도림추원사’라 부르며, 집안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하고 있다.
오미마을은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천황이 사는 궁궐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金祉燮) 의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金萬秀) 의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전국의 사림들에게 알린 후 자결한 김순흠(金舜欽) 선생 등이 바로 오미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때문에 오미마을 언덕 위에 독립운동기념비와 정자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옆에 노송이 마을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내려다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가 켜켜이 묻어 있는 마을에는 풍산김씨 불천위 사당을 모시는 종가댁과 소종가, 참봉댁, 학남유거, 삼벽당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전통 마을의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오미리 마을로 가는 길
오미리 마을 동산
그 가운데 삼벽당(三碧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3호)은 조선 후기 안동지방 민가의 특성이 잘 보존된 건물로 꼽히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왼쪽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담장 없이 정침에 사랑채가 붙은 ‘ㅁ’자형의 건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곳이 삼벽당이다. 현재 이 집의 소유자는 김승현으로 그의 8대조인 김상구(金相龜) 선생이 분가할 때 건립한 가옥이라고 한다. 삼벽당이라는 당호는 김상구의 아들인 종한(鐘漢)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벽당 전경
안동 풍산김씨종택(安東 豊山金氏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은 선조 때의 학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선생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통훈대부 사헌부지평을 지낸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공이 선조 33년(1600)에 다시 건립했다. 이 종택의 윗사랑채는 유연당의 조부인 장암 선생의 당호를 따라 유경당(幽敬堂)이라 부르고 이 집 전체를 가리킬 때는 유연당종택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마을의 가장 위쪽 죽자봉 줄기 끝에 위치하고 있다. 양옆으로는 산에서 계곡이 흘러내리고 앞에는 오미동 참봉댁(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79호)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앞에 서 있으며 왼쪽 아래로는 ‘ㅁ’자형의 소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7. 소산(素山)마을과 안동김씨
(1)2상 3수 6창 배출 가문
안동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3斗)”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관자는 조선조 때 정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의 망건줄에 달던 옥(玉)과 금고리를 뜻한다. 따라서 안동김씨는 그만큼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세간(世間)에서는 안동김씨라고 하면 조선조 말 60여 년간의 외척세도(外戚勢道)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집안으로만 알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조선조 500여년을 통하여 15명의 상신(相臣)과 50 여명의 판서(判書),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출사(出仕)에 기반이 되는 문과 급제자가 172명, 무과급제자가 146명에 이르고 선비로서 유고(遺稿)나 문집(文集)을 남긴 학자가 175명에 달할 정도로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장령공 김영수(金永銖)의 둘째아들인 서윤공(庶尹公) 김번의 증손자로,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을 시종(侍從)하여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문루(門樓)에 폭약을 터뜨려 손자와 함께 자결(自決)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척화(斥和), 절의(節義)파의 거두(巨頭)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2~1652) 형제가 유명하고 소위 장동김씨(壯洞金氏)로 일컬어지는 안동김씨의 경파(京派) 가운데 청음의 손자인 수증(壽增:공조참판), 수흥(壽興:영의정), 수항(壽恒:영의정) 삼형제와 세칭 “6昌”으로 알려진 수항의 아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은 당대의 학자요 문사(文士)로 명성을 떨쳤다.
(2)소산마을
장령공의 맏아들인 강원관찰사 삼당공(三塘公) 김영(金 瑛·1475~1529)의 후예로서 고향 안동을 지키며 살아온 소산집들은 비록 서울집만큼 화려한 출사(出仕)나, 빼어난 명성을 갖지 못했더라도 이 고장에서는 어느 문중 못지 않은 문장(文章)과 가업(家業)을 잘 지켜오고 있다.
현재 소산마을에는 대종택 “양소당(養素堂)”을 비롯하여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 후 낙향 은거하며 배청(排淸)사상을 지켜온 “청원루(淸遠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90호)”와 장령공 김영수가 영천군수에서 물러난 후 87세의 노모(老母)를 위하여 지은 정자(亭子)인 “삼구정(三龜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13호)”, 동야(東埜) 김양근이 태어난 “동야고택(東埜古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93호)”, 소산 입향조(入鄕祖)인 비안공(比安公) 김삼근(金三近)의 구택인 “돈소당(敦素堂: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11호)”과 그 별채인 “묵재고택(黙齋古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85호)”, 상락김씨(上洛金氏) 지파(支派) 김용추(金用秋) 종택인 “삼소재(三素齋: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6호)” 등 7개의 도 지정문화재(指定文化財)와 일제(日帝)강점기인 1910년에 설립한 안동김씨의 신교육기관인 “역동재(驛洞齋)”와 성균진사(成均進士) 김정근(金正根)의 효자 정려문(旌閭門)인 “홍문(紅門)” 등 2개의 안동시 지정문화재가 소재하고 있으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김상헌의 시가 새겨진 “청음시비공원(淸陰詩碑公園)”과 최근에 안동시에서 조성한 “삼구정 생태공원”, 그리고 서울 청풍계(淸楓溪)에 있던 삼당공(三塘公)의 정자를 중건(重建)한 태고정(太古亭)이 소요산(素耀山) 자락,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 마을의 기나긴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잘 보존해오고 있다.
8. 가일마을과 안동 권씨
안동시 풍산읍에서 하회마을 방면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이 있다. 가일마을은 경북신도청 좌청룡에 해당하는 정산을 주산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공신인 권행(權幸)의 후손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600여 년간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 1403~1461)이 이곳의 부호인 류개(柳開)의 손자인 류서의 사위가 되어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아 정착함으로써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류개는 서애 류성룡의 5대조 유보의 아우이며 하회 마을 류씨 입향조인 류종혜의 숙부로서 고려말 인물이다. 권항이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가에 후사가 없자 사위가 처가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덕으로 같은 외손인 한 마을의 순흥안씨와 공동으로 외손봉사를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가일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버드나무 보호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수령 200년, 수고 12m, 나무둘레 5.7m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있고 그 너머 넓은 풍산들이 마주하고 있으며, 풍산들 건너에는 하회마을이 있으며,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인심이 좋기로 유명하며, 가일이라는 이름과 같이 산세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다.
가일 마을의 안동 권씨는 하회 풍산 류씨, 우렁골 예안 이씨, 오미 풍산김씨, 소산 안동김씨와 더불어 안동 서부지역 5대 가문의 하나로 꼽히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화산(花山) 권주(1457~1505)와 병곡 권구(1672~1749) 등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권오설(權五卨 1897~1930) 등을 비롯한 수십 명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가문이기도 하다.
가일마을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천고택(南川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은 권장(權璋)이 조선 철종(哲宗) 1년(1850) 그의 아들 권수(權綏, 1832~1901)에게 지어준 집이다. 권수의 택호에 따라 남천고택으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서당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안동 권성백 고택(權成伯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202호)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뜰에는 연못과 정원수가 조화를 이루어 양반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 명칭은 안동 권태웅 가옥이었으나 2007년 1월 29일 안동 권성백 고택으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고택은 숙박이 가능한 곳이다.
야유당(野遺堂)은 수곡 권보(1709~1777)의 증손자 야유당 권장(1802~1874)이 1844년에 매입하여 기거하던 집으로 그 후 1921년에 권원탄의 조부 권동진(1887~1961)이 개축한 것이라고 전한다.
가일 수곡고택(佳日 樹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6호)은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에 권조(權眺)가 조부 권보(權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고택이다.'ㄷ'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 '-'자형의 별당채와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4칸인데 이 중에 2칸은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이고 왼쪽 2칸은 안방이다. 사랑채는 8칸으로서 4칸은 큰 사랑방이고 왼쪽의 4칸은 작은 사랑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별당인 일지재(一枝齋)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에 걸쳐 일지재를 비롯하여 안채를 보수하였다.이곳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독립운동가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인 독립운동가 권오상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안동권씨 병곡종택(屛谷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8호)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병곡(屛谷) 권구 선생(1672~1749)의 종택이다. 선생의 7대조로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화산(花山) 권주(權柱)선생(1457~1505)이 살았던 집으로,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중건되었다.
멸실되었던 대청을 2011년 중건하였으며 보물 제549호 종손가문서와 보물 제1002호 종손가문적이 보관되어 있다.
당호는 시습재(時習齋)로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취하였다. 선비의 전형적인 삶을 지향하였던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성리학의 이론탐구에 그치지 않고 경전이 지닌 본래의 뜻을 익히고 몸소 실천하여 후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병곡 권구는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여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1728년(영조 4) 인인좌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사후 1859년(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저서로는『병곡집(屛谷集)』10권 5책이 전한다. 병곡종택은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다. 지금껏 양자(養子) 없는 적장 적통으로 종가를 잇고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수백년은 넘은 회나무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노동서사는 1770년 권구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 주민이 세운 서운으로, 사당이 없어서 서원이 못되고 서사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권구의 후손인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이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열어 민족교육 운동을 일으킨 유서 깊은 곳이다. 권오설은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채 순국하였다. 그의 무덤은 가일마을 부근의 풍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으며 묘 옆에 '권오설지묘'라 쓰여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는 2001년에 마을 들머리 저수지 옆에 세워졌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동서사 옆에는 노동재사가 있다. 노동서사는 유생들의 글공부하는 공간으로 쓰였고 노동재사는 유생들의 숙식과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가일마을은 34번 국도와 인접하여 있으나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지나치기가 쉽다.가일마을은 안동에 남아있는 많은 전통마을 중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가일권씨라 불릴만큼 안동권씨 가운데서도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온 마을이기도 하다.
9.. 경북신도청의 풍수지리적 인문학
2008년 6월 8일, 21세기 경상북도의 운명을 결정할 신도청 소재지로 안동시와 예천군 일원이 결정됐다. 그 이후 2년이 지난 2010년 4월 29일 마침내 사업시행자를 경상북도개발공사로 지정하고 5월 4일 개발예정지구를 고시함으로써 신도시 조성을 위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경상북도에서는 2014년 6월 도청 이전, 2027년 인구 10만의 신도시 완성까지 차질 없이 일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도청 이전으로 인해 안동·예천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 및 경북은 많은 변화와 번영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안동·예천 도청이전지를 풍수적 입지조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청이전지는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인 소백산맥의 봉화군 선달산(1,236m)에서 시작한 내성천(109.5㎞)이 예천군의 동쪽지역인 보문면·호명면·지보면을 따라 흘러 삼강리에서 낙동강과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황장산에서 발원하여 문경시 영순면에서 금천(錦川,42.85km) 과 합류한다.
동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영양군 일월에서 발원한 반변천(113㎞)을 안동시내에서 합류시키면서 도청이전지 앞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지역으로, 두 강과 백두대간의 두 지맥인 문수지맥과 보현지맥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면서 지형을 형성하는 지역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대간룡(큰산줄기)인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행룡하다가 태백시의 매봉산을 분기점으로 하여 한 맥은 동해안을 따라 뻗어 부산시 대대표 몰운대에서 끝나는 낙동정맥을 형성하고 , 다른 맥은 서남행하면서 태백산을 세운 뒤에 봉화군 옥돌봉을 거쳐 소백산과 지리산으로 향한다. 이 맥이 백두대간의 주맥이다.
한편, 옥돌봉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용맥이 문수지맥으로 머리를 틀어 축서사를 품고있는 문수산과 조골산을 기봉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의 학가산을 세운 후 현재 신도청의 본청 뒤의 주산인 검무산(劍無山·해발 332m)을 세우면서 멈추었다. 검무산은 서울의 진산인 북악산(342m)의 높이와 비슷한 331.6m의 높이로 문수지맥에 있다. 문수지맥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옥돌봉(1,244m)에서 시작되어 안동지역의 진산(鎭山)인 학가산(870m)과 검무산과 나부산을 지나, 낙동강과 내성천의 합수지점인 회룡포 부근의 비룡산에서 끝을 맺는 지맥이다.
검무산의 외청룡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가일마을의 주산 정산(井山, 289m)과 쌍봉이 동쪽을 호위하면서 하회마을의 주산에 해당하는 화산(花山, 328m)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감아서 강한 정기를 하회마을에 뿌린다. 검무산의 청룡에 해당하는 한 지맥이 다시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명당으로 유명한 소산마을의 주산인 소산을 형성한다. 검무산의 뒤쪽으로는 역시 명당으로 유명한 풍산 김씨 집성촌인 오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검무산의 우백호(右白虎)는 거무산(227m)과 호명면 산합리의 가일산(143.1m), 금릉리의 뒷산인 봉황산(200m)으로 연결된다. 검무산의 내백호는 거무산과 진천고개를 지나 마봉(173m)을 형성한다. 마봉과 옆의 시루봉(185m)이 검무산의 남쪽 주작인 안산(案山)에 해당한다고 본다. 남쪽의 조산(朝山)에 해당하는 지형은 검무산에서 낙동강 넘어 보이는 병산서원 앞의 병산과 봉화산(400.6m) 및 마늘봉(365m)으로 검무산을 멀리하여 병풍처럼 서있다. 바로 하회마을의 남쪽 산들을 말한다.
이 산들은 병풍을 펴놓은 듯 원형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연결되어 있는 문곡수성체(文曲水星體)의 산으로, 어병사(御屛砂)나 금장사(錦帳砂)라고도 한다. 문신이나 재상및 거부가 난다는 곳이다. 이 산들은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부산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약 370㎞의 낙동정맥이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다가 청송군·포항시·영천시 등의 경계를 이루는 보현산(1,124m)을 지나 석심산(石心山, 750.6m)에서 남쪽줄기의 팔공지맥과 갈라져 다시 북서쪽으로 향하여 위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의성의 비봉산(579.3m)에서 끝을 맺는 보현지맥의 한 갈래가 하회마을 쪽으로 갈라져 나간 곳이다.
이와 같이 도청후보지는 백두대간을 척추로 하여 북쪽과 서쪽으로는 문수지맥이, 남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지맥인 보현지맥이 자리하고 있고. 태백산 부근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으로 갈라졌던 산의 지세가 경북지역을 돌아서 다시 합쳐지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내성천과 낙동강 사이에 있는 산맥과 강이 어우러진 21세기 경북의 미래를 선도할 ‘웅도 경북’의 자존과 영광을 지켜줄 도청이전지로서 손색이 없는 명당지역으로 본다.
도청 이전지(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의 경계)의 5개 마을은 500여년간 동족부락의 생명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풍산읍의 가곡리는 안동 권씨·순흥 안씨·최씨, 갈전리는 한양 조씨·김씨·최씨, 도양리는 김씨·임씨·조씨의 집성마을이다. 예천 호명면의 산합리는 김씨·이씨·최씨, 금능리는 이씨·권씨·임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전해야 할 분묘가 가곡리(559기)·갈전리(562기)·도양리(630기)·산합리(574기)·금능리(364기) 등 5개 마을을 통틀어 2천689기나 된다.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자지’가 주산인 검무산과 명당터의 명당수를 머금어 주는 못(池塘)으로 음양이 상보하는 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