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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오바댜 1장 2~4절
옵 1:2~4 보라, 내가 너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작게 만들었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는도다. 3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거주하는 자여,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하는도다. 4 네가 네 자신을 독수리처럼 높이며 네 보금자리를 별들 가운데 둘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말 1:2~3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떤 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주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광야의 용들을 위해 그의 산들과 유산을 피폐하게 하였느니라.
말라기는 구약에서 마지막 책이다. 여기 담겨있는 대언의 배경을 먼저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써 왕국을 바빌론의 침공으로 잃어버리다가 예레미야의 대언대로 70년이 찬 후 고레스왕의 칙령이후 고국으로 돌아가 스룹바벨의 지도아래 성전을 재건축하게 된다. 그러나 그 뒤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그 뒤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도 사랑도 없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주님은 말라기를 보내어 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셨다.
말라기를 통해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서 어떤 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대꾸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나 왕국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고 그들은 예전의 영화를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삶의 무게에 지친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사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열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런 어려운 시련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어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로 말씀하신 것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두고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 주님은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을까? 한번은 어떤 사람이 지금은 작고한 히브리 크리스천 지도자였던 Gaebelein에게 “선생님, 말 1:3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Gaebelein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도 그 부분에 큰 문제가 있네. 그런데 내 문제는 2절에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라네.”
나 역시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그 부분에만 초점을 갖고 있었으나 Gaebelein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사랑하셨는지 역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에서를 미워하셨는지 그것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의 지각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 큰 것이리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보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많은 유익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신 때는 말라기의 입을 통해서이다. 즉 야곱과 에서가 이미 사망했고 에서의 후손인 에돔을 통해 그들의 죄들이 이미 밝혀진 시점 이후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신 것이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그분의 미리아심이나 혹은 예정을 통해 미워해본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에서의 후손이 그들의 죄들로 인해 멸망한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야곱과 에서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창세기 25장으로 가면 우리는 두 사람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먼저 이 둘의 부모는 이삭과 리브가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사십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얻었다. 그러나 리브가가 수태하지 못하여 이삭은 자기 아내를 두고 간구하였고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하게 된 것이다. 이 아이들은 리브가의 태에서 함께 싸웠다. 그것은 리브가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쌍둥이를 임신한 것도 놀랄 일이지만 그 둘이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리브가는 주님께 이 두 아이에 대해 여쭈었다.
주님은 그녀에게 “두 민족이 네 태속에 있노라. 두 종류의 백성이 네 배 속에서부터 나누어지리라.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겠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라고 답변하셨다. 때가되어 리브가는 해산하게 되고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온 몸이 털옷 같아서 그의 이름을 “에서”라고 지어주었고 그 뒤에 나온 자는 그의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지어주었다.
이 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다른 기질을 지닌 쌍둥이였다. 에서는 밖에서 활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냥꾼이 되었고 반면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것을 더 즐겨하였다. 에서는 장자였으므로 아버지인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반면 야곱은 리브가가 하나님의 답변을 들었으므로 그녀에게서 더 많이 사랑을 받았다. 야곱은 에서에게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적인 분별력이었다. 한번은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지쳐 돌아와 보니 야곱이 붉은 죽을 쑤었다.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먹는 대가로 장자권을 그에게 팔았다. “야곱이 빵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더라. 에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장자권을 업신여겼더라.”(창 25:34)
생각해보면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 집에 먹을 것이 야곱이 만든 팥죽뿐이었겠는가? 야곱은 그에게 팥죽만 준 것이 아니라 빵도 주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만도 못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창 27장을 보면 야곱은 또한 에서가 받을 축복을 속여 빼앗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볼진대 “장자권”은 집안의 가장이 가져오는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집안의 가장은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져오고 또한 가족의 일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돌려한다. 그것은 한 가정의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쓸모없고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이 세상이 주는 복을 누리는 것이 참 축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에서는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야곱이 후에 자신의 축복마져 가로채자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죽은 후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어머니를 떠나 아내를 구하러 사촌인 라반에게로 갔고 그 뒤로 리브가는 병이 들어 죽게 됨으로써 그녀는 야곱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야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에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간구했고 또한 자신의 재물을 세 등분하여 차례차례 보내고 자신은 맨 마지막으로 갔다. 야곱이 에서에게 준 재물에 대한 선물로 그들은 일시적으로 화목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에서와 그의 후손들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 대해 반목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을 때 그들이 에돔을 지나쳐 가야 했으므로 에돔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그들은 그들의 지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주변 적들의 침공을 받을 때 그들은 적들과 함께 했고 바빌론이 이스라엘로 쳐들어 왔을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돔으로 피하고자 했으나 그들이 국경을 열어주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피난해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크리스천에게 영적인 진리에 대해 보여준다. 이것은 크리스천이 가지고 있는 두 본성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갈 5:16~17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믿는 크리스천 안에는 두 본성이 있다. 옛 본성 즉 육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진리와 의안에서 창조된 새 본성이 있다. 야곱과 에서가 모태에서부터 서로 반목하였던 것처럼 이 두 본성은 서로 반목하여 서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 두 본성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에서는 옛 본성인 육신을 상징하고 야곱은 영 즉, 새로운 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축복 즉 장자권은 멸시를 하였듯이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8 그런즉 이와 같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히 12:16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속된 자”란 표현이 있다. 이것은 “세상적이고 세속적”이란 뜻을 갖는다. 영어로는 “profane”이란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베벨로스”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신전밖에서”의 의미에서 파생되어 “신성을 더럽히는, 천박한, 세속적인, 세상적인”이란 의미를 갖게되었다. 장자권을 판 에서를 두고 “세상적, 신성을 더럽힌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에서가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단지 에서가 하나님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것들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에서를 미워했을까? 성경은 에서 즉, 에돔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작은 책인 오바댜를 펴보자.
오바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작은 분량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오바댜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 깊은 사고를 가져다 준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란 뜻이다. 그렇다면 오바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돔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에돔은 누구인가?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을 두고 말한다.
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지쳤으니 원하건대 그 붉은 죽을 내가 먹게 하라, 하더라. 그러므로 에서의 이름을 에돔이라 하더라.
창 36:8 에서가 이와 같이 세일 산에 거하였는데 에서는 에돔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바댜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들의 죄악을 말씀하셨다.
옵 1:3~4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거주하는 자여,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하는도다. 4 네가 네 자신을 독수리처럼 높이며 네 보금자리를 별들 가운데 둘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에서가 거한 곳은 “세일 산”이다. 그곳은 모든 곳이 바위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 호리 족속들이 살고 있었으나 에서는 그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자신의 거처를 삼았다. 에서의 후손 에돔의 거처는 집을 짓고 그 속에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절벽과 바위를 깍아 집을 만들고 그 안에 거하였다. 영화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가끔 등장하는 셀라 페트라가 바로 그 곳이다. 이들은 놀랍게도 바위를 깍아 내어 그들의 궁전과 모든 거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한 페트라라는 지형은 천혜의 요새였다. 그곳을 들어가려면 단 하나의 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길은 오직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길이었다. 그 길이 초승달 모양의 길로 수 킬로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에 접급하여 그들을 멸망케 할 나라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마음이 교만해졌다.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라고 그들이 자랑하며 외칠 때에 주님은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교만은 자기의 거처를 별들 보다 더 높이고자 했던 사탄의 교만과 비슷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 14:13~14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런데 에돔의 교만은 스스로를 속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으나 주님은 2절에서 “보라, 내가 너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작게 만들었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교만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자신을 더욱 크게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단지 마음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셔서 멸망하게 하셨다고? 그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우리는 교만이라는 죄를 작게 생각하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교만을 더욱 듣기 좋은 말들로 바꾸어 말한다. 자긍심이라든지 혹은 자신감이라든지. 교만이란 내가 스스로 한 무언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 없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교만에 대해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이 교회 내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인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경찰에 신고하고 그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낼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교회 회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 회원권을 박탈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다 걸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게 할 것이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려 한다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교회 회원이 되는 모든 권한을 상실하게 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술을 상습적으로 마셔 술주정뱅이가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이 교회 회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전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마찬가지로 그 사람 역시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회원으로써의 모든 자격은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이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범하는 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적이고 지속적이며 당사자가 그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행함으로써 이제 그것이 그의 습관이 되어버린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에 교만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높이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 그 사람은 감옥에 갈만한 죄를 범한 것도 아니므로 교회 징계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죄이며 때로는 담배나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가?
말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를 행복하다 하고 참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세워지며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도 구출을 받았다, 하였느니라.
말 4:1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나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다가오는 그 날이 그들을 불태우고 그들에게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교만은 세상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업적이나 많은 것들을 자랑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여 결국 교회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지식에 대한 자랑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로인해 논쟁과 말다툼이 일어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단순히 육체에 해를 끼치나 교만은 영적인 해를 끼친다.
딤전 6:4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 이로써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이 생기며
요일 2:15~16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인생의 자랑에서 자랑은 영어로 pride이다. 교만인 것이다. 육체가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자랑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려는 자는 주를 자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육체는 자신이 행한 많은 것들이 인정받고 높여지며 사람들의 이목을 사서 높여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받기를 원하는가? 자신의 수고를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칭찬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만든다. 그러나 나의 수고를 인정하고 칭찬해주기 위해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정말 감사하고 높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자랑의 대상은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어야지 내 자신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들을 용서받았고 하나님보시기에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은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자랑한 적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바울이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을 자랑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없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들 중에 괴수라 생각하였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 앞에 겸손히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기를 간구함으로써 얻은 것이다. 거기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는.
롬 3:27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오늘날 시대는 자랑으로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나는 어쩌다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랑한다. 그것은 이생의 자랑으로 교만인 것이다. 말라기 3:15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할 때가 되었다.
말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를 행복하다 하고 참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세워지며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도 구출을 받았다, 하였느니라.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에 핸드폰이나 혹은 전자사전 같은 것을 되도록 가지고 가지 않기를 바랬다. 거기에는 다른 학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다. 아이들에게 가끔 하던 말은 그거가지고 자랑하지 말라 는 것이다. 혹이라도 가난한 아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들을 배려하는 것을 아이들이 배우길 원했다. 이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교만으로인해 에돔이 멸망하였음을 잊지 말라. 오늘날 학생들의 말투는 자랑하는 말투를 배우는 것 같다. 겸손이 뭍어있기 보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말투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으로 가득한 말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잠 6:16~19 주께서 이 여섯 가지를 미워하시며 참으로 일곱 가지가 그분께 가증한 것이니 17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18 사악한 꾀를 꾸미는 마음과 신속히 해악으로 치닫는 발과 19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들 가운데 불화를 뿌리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약 4:6, 킹흠정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과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주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우리를 신실하게 여기시는 주님께 소망을 두며 묵묵히 주님을 섬겨나가길 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빌 2:3~8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4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겸손한 마음을 지니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이다. 설교하는 자로서 나는 항상 나보다 더 뛰어난 설교자들이 많음을 잊지않는다. 설령 나의 설교가 좋은 것이 나왔어도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감과 그들의 글이 바탕이 되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속된 자였다. 그의 관심에는 하나님이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들보다 세상의 것들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을 열망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한 그릇의 팥죽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에서는 또한 교만한 자였다. 에돔의 죄는 바로 그의 죄와 같았다. 그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에서는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자랑한다. 인생의 자랑은 이 세상의 것임을 잊지말라. 자랑하려는 자는 주를 자랑하라.
고전 1:29~31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