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입에 밥 먹이려고 시작한 남의 밥 짓기 삶 덕분에 지금 자식들은 제 몫을 하는 삶을 산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얻어다 먹을 데도 없는데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밥에 기대어 산다. 그날 저녁, 김치를 담가야 할 배추가 숨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었듯이 뻔뻔하게 나이를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태 어머니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받아든 푸른색 노트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눈물도 있고, 잃어버린 하늘색 꿈도 있을까. 노트에 담길 어머니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푸른 노트 - 장미자
집을 나서며 여기저기서 받은 칸 넓은 노트 몇 권을 주섬주섬 쌌다. 새 연필을 깎고 새 지우개를 챙겨 필통에 넣었다. 그중 맑은 바닷빛 표지 노트에 ‘7학년 6반 안복순’이라고 크게 썼다. 어머니께 얻어먹고 미처 챙기지 못한 김치통에 잘 익은 감을 가득 채웠다. 지난 토요일에 친정 식구들 모임이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제안을 했는데 마침 오빠 생일날이라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친정에 도착하자 짐을 풀어놓고 어머니께 필기도구를 건넸다. “엄마 이야기 써서 책으로 내 달라고 했으니 엄마도 뭔가 해야 할 것 아니야? 노트에 쓰고 싶은 것 쓰세요. 알았지?” 했더니 어머니는 “알았다.”고 하셨다. 못 쓴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겠다고 하니 좀 놀랐다. 어머니는 이번 달 말일이면 ‘남의 밥 짓기 인생’을 은퇴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서른여덟 때부터 일흔여섯 될 때까지 남의 밥을 지어 자식들을 건사했다. 보육원에서 28년간을 밥 짓고 빨래하시다 예순 살에 1차 은퇴를 하셨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막내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식사 보조 일을 하셨다. 40년 가까이 남의 밥 짓는 삶을 사신 것이다. 최근 막내딸이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한 개 정리하면서 밥 짓기 삶에서 해방된 것이다. 어머니는 요리사 자격증은 없어도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내는 솜씨가 있다. 먹는 사람들마다 다들 맛있다고 할 음식 맛을 내신다. 아이들 음식은 간을 싱겁게 하고 어른들만을 위한 밥상은 간을 맞춰 뚝딱뚝딱 차려 내셨다. 고생스러웠을 텐데 그 세월이 금방 가버려 시원섭섭하다고 말씀하셨다. 일을 그만두시고 남은 시간이 적적할 것 같아 내가 어머니께 은근슬쩍 숙제를 낸 것이다. 하루에 20분씩이라도 자기 생각을 손으로 쓰면 치매예방도 되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 하기에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을 하셨으니 기초 자료가 되는 글은 넘겨줘야 하지 않느냐며 약간의 부담을 드린 것이다. 어머니의 남의 밥 짓기 인생이 시작될 때 큰딸인 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워야만 했다.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집안 살림에는 큰딸이 이리저리 쓰일 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손끝도 야무지지 못했고 일도 잘하지 못했다. 다만 맡겨놓은 일을 겨우 흉내만 내면서 책임을 완수하였다. 어릴 때는 몸도 약해서 공부하며 집안일을 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동생들 숙제 봐주며 돌보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집안일 안 하고 공부만 하면 좋겠다고 짜증도 내며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침에 배추를 절여 놓으라며 바삐 일하러 가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까지도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는 숨이 하나도 죽지 않았다. 소금물에 자박하게 절여야 하는데 배추에 소금만 뿌려 놓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배추가 살아서 밭으로 가게 생겼다.”며 혼내셨다.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없을 때라 냄비 밥을 했는데 불 조절을 잘못하여 밑은 타고 위는 설익은 삼층밥을 해서 혼도 났다. 세탁기도 없었으니 고생하는 엄마의 일손을 덜고자 빨래는 항상 내 차지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김치나 된장 고추장 같은 전통음식은 만들지 못한다. 김치는 몇 번 담그려고 시도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아 일찍이 포기했다. 어머니가 김치 담그는 것을 배우라고 몇 번 말씀하셨지만 나는 “나중엔 사먹을 거야.” 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딸은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닮는다는데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못하는 것은 빨리 포기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는 내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다. 자식들 입에 밥 먹이려고 시작한 남의 밥 짓기 삶 덕분에 지금 자식들은 제 몫을 하는 삶을 산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얻어다 먹을 데도 없는데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밥에 기대어 산다. 그날 저녁, 김치를 담가야 할 배추가 숨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었듯이 뻔뻔하게 나이를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태 어머니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받아든 푸른색 노트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눈물도 있고, 잃어버린 하늘색 꿈도 있을까. 노트에 담길 어머니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처음 글을 배우게 만든 분은 어머니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는다는 넋두리를 들으며 자랐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 어느 날 불현듯 가족들 앞에서 책을 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얼토당토않은 실수지만 그것도 하나의 용기였다. 약속을 한 이상 내 책임이 뒤따르는 행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수필반에 오게 된 이유였고 그 다음은 후회였다. 글을 쓰는 내내 어머니의 이야기는 쓰지도 못하고 내 넋두리만 나왔다. 결국 어머니는 돌멩이 투성이인 딸의 마음 밭을 고르는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신 교수님과 문우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등단의 기회를 주신 수필과비평사에 감사드리며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또한 나의 이야기 속에 함께한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식들 입에 밥 먹이려고 시작한 남의 밥 짓기 삶 덕분에 지금 자식들은 제 몫을 하는 삶을 산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얻어다 먹을 데도 없는데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밥에 기대어 산다. 그날 저녁, 김치를 담가야 할 배추가 숨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었듯이 뻔뻔하게 나이를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태 어머니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받아든 푸른색 노트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눈물도 있고, 잃어버린 하늘색 꿈도 있을까. 노트에 담길 어머니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푸른 노트 - 장미자
집을 나서며 여기저기서 받은 칸 넓은 노트 몇 권을 주섬주섬 쌌다. 새 연필을 깎고 새 지우개를 챙겨 필통에 넣었다. 그중 맑은 바닷빛 표지 노트에 ‘7학년 6반 안복순’이라고 크게 썼다. 어머니께 얻어먹고 미처 챙기지 못한 김치통에 잘 익은 감을 가득 채웠다. 지난 토요일에 친정 식구들 모임이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제안을 했는데 마침 오빠 생일날이라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친정에 도착하자 짐을 풀어놓고 어머니께 필기도구를 건넸다. “엄마 이야기 써서 책으로 내 달라고 했으니 엄마도 뭔가 해야 할 것 아니야? 노트에 쓰고 싶은 것 쓰세요. 알았지?” 했더니 어머니는 “알았다.”고 하셨다. 못 쓴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겠다고 하니 좀 놀랐다. 어머니는 이번 달 말일이면 ‘남의 밥 짓기 인생’을 은퇴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서른여덟 때부터 일흔여섯 될 때까지 남의 밥을 지어 자식들을 건사했다. 보육원에서 28년간을 밥 짓고 빨래하시다 예순 살에 1차 은퇴를 하셨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막내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식사 보조 일을 하셨다. 40년 가까이 남의 밥 짓는 삶을 사신 것이다. 최근 막내딸이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한 개 정리하면서 밥 짓기 삶에서 해방된 것이다. 어머니는 요리사 자격증은 없어도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내는 솜씨가 있다. 먹는 사람들마다 다들 맛있다고 할 음식 맛을 내신다. 아이들 음식은 간을 싱겁게 하고 어른들만을 위한 밥상은 간을 맞춰 뚝딱뚝딱 차려 내셨다. 고생스러웠을 텐데 그 세월이 금방 가버려 시원섭섭하다고 말씀하셨다. 일을 그만두시고 남은 시간이 적적할 것 같아 내가 어머니께 은근슬쩍 숙제를 낸 것이다. 하루에 20분씩이라도 자기 생각을 손으로 쓰면 치매예방도 되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 하기에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을 하셨으니 기초 자료가 되는 글은 넘겨줘야 하지 않느냐며 약간의 부담을 드린 것이다. 어머니의 남의 밥 짓기 인생이 시작될 때 큰딸인 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워야만 했다.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집안 살림에는 큰딸이 이리저리 쓰일 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손끝도 야무지지 못했고 일도 잘하지 못했다. 다만 맡겨놓은 일을 겨우 흉내만 내면서 책임을 완수하였다. 어릴 때는 몸도 약해서 공부하며 집안일을 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동생들 숙제 봐주며 돌보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집안일 안 하고 공부만 하면 좋겠다고 짜증도 내며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침에 배추를 절여 놓으라며 바삐 일하러 가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까지도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는 숨이 하나도 죽지 않았다. 소금물에 자박하게 절여야 하는데 배추에 소금만 뿌려 놓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배추가 살아서 밭으로 가게 생겼다.”며 혼내셨다.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없을 때라 냄비 밥을 했는데 불 조절을 잘못하여 밑은 타고 위는 설익은 삼층밥을 해서 혼도 났다. 세탁기도 없었으니 고생하는 엄마의 일손을 덜고자 빨래는 항상 내 차지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김치나 된장 고추장 같은 전통음식은 만들지 못한다. 김치는 몇 번 담그려고 시도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아 일찍이 포기했다. 어머니가 김치 담그는 것을 배우라고 몇 번 말씀하셨지만 나는 “나중엔 사먹을 거야.” 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딸은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닮는다는데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못하는 것은 빨리 포기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는 내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다. 자식들 입에 밥 먹이려고 시작한 남의 밥 짓기 삶 덕분에 지금 자식들은 제 몫을 하는 삶을 산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얻어다 먹을 데도 없는데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밥에 기대어 산다. 그날 저녁, 김치를 담가야 할 배추가 숨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었듯이 뻔뻔하게 나이를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태 어머니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받아든 푸른색 노트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눈물도 있고, 잃어버린 하늘색 꿈도 있을까. 노트에 담길 어머니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처음 글을 배우게 만든 분은 어머니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는다는 넋두리를 들으며 자랐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 어느 날 불현듯 가족들 앞에서 책을 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얼토당토않은 실수지만 그것도 하나의 용기였다. 약속을 한 이상 내 책임이 뒤따르는 행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수필반에 오게 된 이유였고 그 다음은 후회였다. 글을 쓰는 내내 어머니의 이야기는 쓰지도 못하고 내 넋두리만 나왔다. 결국 어머니는 돌멩이 투성이인 딸의 마음 밭을 고르는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신 교수님과 문우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등단의 기회를 주신 수필과비평사에 감사드리며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또한 나의 이야기 속에 함께한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