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방 후 예비내각’까지 짠 일진회, 15만원에 토사구팽
일진회와 이완용 등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매국 경쟁에 나섰던 이유는 망국 후에도 자신들에게는 권력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합방선언서, 합방청원서 등을 제기하면서 매국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일시적인 이용 대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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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가 1907년 일본 왕세자 방한을 기념해 세운 아치. 일제는 왕세자 다이쇼의 방한을 기념해 남대문 앞에 대형 아치를 세웠다. [중앙포토] |
한미한 가문 출신의 이용구·송병준이 일진회를 배경으로 노론(老論) 명가 출신 이완용과 매국 경쟁에 나선 데는 계산이 있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10개월 전인 1909년 12월 2일 조선통감부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는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한일합방(韓日合邦) 문제에 관한 건’(‘경비(警秘)’ 제4049호)이란 제목의 비밀보고서를 보낸다.
보고서는 “근래 세상에 퍼지고 있는 한일합방 문제의 경로에 관해 다시 탐문한 바에 의하면…”이라고 시작한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는 뜻이다. 육군대장 출신의 가쓰라 타로(桂太郞)가 총리인 일본 내각은 1909년 7월 6일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지만 그 핵심 내용은 비밀이었다. 비밀에 부쳐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날의 각의 결정을 적고 있는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鐵吉) 전 외무차관의 ‘각서 별지’는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했다고 전한다.
‘각서 별지’는 ‘부(附) 헌법의 석의(釋義)’에서 “한국을 병합한 이상 당연히 이 신 영토에도 제국헌법이 시행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에서는 신 영토에 대해서 제국헌법의 각 장을 시행치 않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므로 헌법의 범위 내에서 제외 법규를 제정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일본 제국헌법에서 보장하는 어떠한 권리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권이란 제국의회를 거치지 않고 일왕이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서 군사력에 의한 무단통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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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진회 관계 문서. 2 이용구 가족사진. 이용구는 1912년 일본 고베시에서 45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3 송병준. 매국의 대가로 귀족의 작위를 받았으나 기생 장사에 열중해 ‘색작(色爵)’이란 비아냥을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조선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1910년 7월 일본에 가서 동경제대(東京帝大) 법대 교수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1869~1965)에게 한국 점령에 대한 법률 자문을 요청했다. 야마다 사부로는 1910년 7월 15일 ‘병합 후 한국인의 국적 문제에 관한 의견서’에서 “한국 인민이 병합을 희망하고 안 하고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야마다는 경성제대(京城帝大) 총장, 동경제대 법학부장, 국사편수원(國史編修院) 원장 등을 역임하고 1943∼47년 귀족원 의원까지 되는 어용학자다.
그는 이 의견서에서 “만약 내국에서의 일본인과 한국에서의 일본인(한국인이었던 일본인, 즉 식민지 백성)과 공법상 어떠한 차별을 둘 것인가는 국법상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국 병합 후 한국민의 법적 지위는 제국헌법에 의해 적용받아 일본 국민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 그 하위법인 국법으로 차별을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한국을 착취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앞의 경시통감 와카바야시가 통감 소네에게 보낸 ‘한일합방 문제에 관한 건’이란 비밀보고서는 ‘송병준과 일진회장 이용구가 누차 교섭하면서 연방안(聯邦案)의 강목(綱目)을 결정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진회는 두 나라의 연방제 합병을 꿈꿨다는 뜻이다. 와카바야시는 이 비밀보고서에서 일진회의 연방안 강목을 “1. 대한국을 한국이라 칭한다, 2. 황제(순종)를 왕이라 칭한다, 3. 왕실은 현재대로 한국에 존재한다, 4. 국민권은 일본 국민과 동등하다, 5. 정부는 현재와 같이 존립한다, 6. 일본 관리는 모두 용빙(傭聘:고용인으로 초빙함)으로 하되 현재보다 그 수를 감소한다, 7. 인민의 교육, 군대의 교육을 진기(振起:떨치고 일어남)시킨다, 8. 본 문제는 한국 정부가 직접 일본 정부에 교섭한다”는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일진회는 한·일 두 나라가 연방제 형식으로 병합하면 자신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벼슬 내리기도 전에 일산(日傘)부터 준비’하는 격인데, 이보다 한 술 더 뜬 것은 일진회와 정치적으로 제휴관계에 있던 대한협회(大韓協會)였다. 실력양성론자들의 정치결사였던 대한협회는 1909년 10월 14일 일진회장 이용구에게 보낸 ‘선언서’에서 ‘누가 양회(兩會:일진·대한협회)의 제휴가 한일연방(聯邦)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가’라면서 “우리는 협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자치를 볼 것(‘경비(警秘)’ 제3237호)”이라고 주장했다.
대한협회는 연방제에서 더 독립적인 자치제를 꿈꾸었다. 대한협회는 자치제가 두 회(會)가 제휴할 때 협정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연방제를 성토하기 위해 정견협정위원회(政見協定委員會)를 개최하자고 요구했지만 일진회는 응하지 않았다. 대한협회 총무 윤효정(尹孝定)은 11월 26일 일진회장 이용구를 방문해 항의하기도 했지만 무위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경시총감은 “두 회는 분열의 위기에 박두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일본 각의는 한국을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식민지로 지배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진회와 대한협회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연방제’ ‘자치제’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일진회의 연방안 강령에 ‘5. 정부는 현재와 같이 존립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도 일진회원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섀도 캐비닛(예비내각)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인 출신 율학(律學) 훈도 송문수(宋文洙)의 아들 송병준이나 농민 출신으로서 동학 간부였다가 친일 행적 때문에 출교(黜敎)당한 이용구로서는 잘하면 이완용이 차지하고 있는 내각 총리대신 자리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완용이 이런 일진회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1909년 말부터 일진회에서 합방청원서를 통감 소네나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올리면 이완용이 이를 각하시킨 이유도 일진회의 청원으로 합방이 되면 자신의 공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1910년 7월 2일 즉각 합병론자인 데라우치가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다급해진 이완용은 비상수단을 사용했다. 혈의 누 저자인 비서 이인직을 8월 4일 밤 11시에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내 합방 협상에 나서게 한 것이다. 열이틀 후인 1910년 8월 16일 노론 당수 이완용은 일본의 호우 피해를 위문한다는 핑계로 데라우치를 방문해 30분 만에 매국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고마쓰는 1934년 11월 25일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일한병합(日韓倂合) 교섭과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수완’이라는 회고에서 이때 데라우치와 이완용 사이의 유일한 이견은 ‘고종의 칭호를 대공(大公: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자’는 이완용의 제의에 데라우치가 오히려 ‘구래(舊來)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후 대한제국은 불과 일주일 후인 8월 22일 사실상 멸망한다.
그런데 ‘매일신보(每日申報)’ 1910년 9월 13일자는 매국 후 정치적 지분을 가질 것으로 생각했던 매국 친일배들의 예상이 전혀 빗나갔음을 말해주고 있다. 9월 12일 경무통감부(警務總監部)에서 대한협회 김가진(金嘉鎭)·오세창(吳世昌), 일진회 부회장 김택현(金澤鉉), 정우회(政友會) 고희준(高羲駿)·김종한(金宗漢), 진보당(進步黨) 이희두(李熙斗), 평화협회(平和協會) 심일택(沈日澤) 등을 불러 모든 정치단체의 해산을 통보했던 것이다.
일진회보다는 덜 친일적이었던 대한협회뿐 아니라 일진회까지도 해산 대상이었으니 일진회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합방찬성회(合邦贊成會), 국민동지찬성회, 국민협성회(協成會), 진보당, 정우회, 유생협동회(儒生協同會), 평화협회, 서북학회(西北學會) 등의 정치 결사가 다 해산되었다. 일진회는 항상 100만 회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매일신보’ 1910년 9월 29일자에 따르면 일진회 회원은 총 14만725명으로 되어 있다. 일진회 등은 일주일 동안 잔무 정리 유예기간을 거쳐 해산되었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25일자는 조선총독부에서 합병 경비로 총 1900만6303원이 들어갔다고 발표했는데, 그중 1740여만원이 이 매국노들과 양반들에게 내려준 임시 은사금이었다. 이완용 개인이 14만 회원을 가진 일진회와 같은 15만원을 받았으니 일진회는 아무래도 이완용보다 한 수 아래였다. 게다가 일진회는 1910년 1월부터 9월까지 소요 경비액이 7만9845원이라고 발표했으니 겨우 7만원만 건진 셈이었다.(당시 쌀 1가마 가격은 5원이었다)
총독부는 일진회에 15만원, 대한협회에 6만원을 지급했다. ‘
그러나 이완용도 망국 후 일본인 정무총감이 의장인 중추원(中樞院) 고문이라는 명예직(?)에 만족해야 했으니 후세인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전범(典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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