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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寺를 생각하면 '꽃창살이 예쁜 大雄殿'이 떠오른다
죽령 동쪽 100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四方에 佛像을 새긴 四面 10자 정도 되는 큰 돌이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王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禮敬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생략) -삼국유사-
대승사는 조선 후기 의 상주읍지에도 기록이 전하는 만큼, 1,500년 동안 맥을 이어온 고찰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전각들은 현대에 다시 세워졌고, 요지음에 일고 있는 절 구역 넓히기 바람이 이곳 대승사에도 불어닥쳐 고찰다운 맛이나 예전의 아담한 맛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깎아지른 사불산 봉우리들이 감싸안은 자리만은 매우 포근하다.
일주문 정면 일주문 측면
일주문을 지나 경사진 길을 오르노라면 1층 탑신에 감실을 가진 상처투성이 석탑 한 기와 탑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충직하게 서 있는 돌짐승을 만난다.
대웅전 (大雄殿)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고찰이나 그다지 고찰다운 옛 맛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1956년 화재로 절이 모두 불탄 후 다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꽃창살이 예쁜 대승사 대웅전은 오래된 맛은 덜하지만, 기단부 면석에 연꽃이 피어나는 형상을 민화처럼 아로새긴 옛 돌이 끼어 있어 옛날의 화사했을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앞마당의 노주석(露柱石)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석등이나 탑이 자리하는 것이 보통이나 문경의 대승사와 봉암사에는 특이하게 돌기둥 위에 넓은 판석을 올린 노주석이 2기 있다. 노주석은 한밤중 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올려 주변을 밝히는 조명 시설이다.
목각후불탱(木刻後佛幀)-보물 제575호
대웅전의 목각후불탱(길이 4m 폭 3m)은 판목 11매를 잇대어 붙여 조각 하나하나를 깊고 정교하게 새긴 후 금박을 입혔다 각 상(像)마다 명패를 달아 존명을 알 수 있게 하였다.
大乘寺木刻幀附關係文書
이 목각후불탱을 둘러싸고 부석사와 소유권 소송이 있었다. 1876년에 작성된 사찰 관계문서에 따르면 본래 이 목각후불탱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것인데 1862년 화재로 잃어버린 대승사의 법당을 새로 짓고 어쩐 연유인지 부석사에서 목각탱을 옮겨왔다고 한다. 뒤에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여 시비가 일게 되었고 1876년에 대승사에서 부석사 조사전의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소송을 마무리지어 이 목각탱은 대승사에 있게 되었다.
대웅전의 소슬국화꽃문
대웅전 앞문의 가운데 칸을 '어칸(御間)'이라 높여 부른다. 어칸은 대궐이면 바로 임금이 앉은 앞(御間)이 되고 절이면 부처가 앉은 앞 쪽이기 때문에 더욱 잘 짜고 잘 꾸미게 된다.
대승사 대웅전 전면 측칸의 창호는 4분합의 소슬국화꽃문, 어칸은 6분합의 소슬국화꽃문이다
측칸의 4분합 소슬국화꽃문
소슬무늬살이란, 날살과 씨살 그리고 빗살의 모든 문살을 다 넣어 짠 복잡화려한 무늬살을 말한다. 대승사 어간의 것은 그 중 날살과 빗살로만 이루어진, 한 점에 6살이 만나는 곳에 꽃무늬가 새겨진 소슬꽃문이다.
하나를 둔 '머름'에는 모란당초를 수다스럽게 그렸다. ('머름'은 미닫이의 문지방 아래나, 문의 아래 부분에 모양을 내기 위하여 대는 널조각)
옆문과 바라지(光窓)의 소슬모란꽃문
옆문과 바라지(光窓)의 얼개(짜임)도 앞문과 같으나 세 줄로 되었고, 국화 아닌 네잎으로 앙증맞게 새긴 모란꽃이다.
덤벙주초에 판벽, 꽃문살로 된 대웅전 측벽
덤벙주초란? 누각이나 정자 같은 건물을 세울 때 기단 위에 주초를 놓는 방법은, 초석 상면을 다듬어 동일한 수평면 위에 기둥을 세우는 다듬은돌 초석과 초석 상면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초석면이 동일하지 않은 막돌초석이 있는데 이를 덤벙주초(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는 뜻)라 한다.
초석을 수평고름질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초석 상면이 울퉁불퉁한데 그 모양에 맞도록 기둥뿌리를 깎아 맞추는 '그렝이질'을 한 다음 기둥을 세운다.
대웅전 좌측 추녀에 달린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참선에 힘쓰는 도량답게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용맹정진하라는 뜻이리라
1922년과 1956년에 있었던 큰화재로 대승사의 전각들이 거의 불탓는데 명부전, 극락전만이 17세기 후반 목조건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대승사 명부전에서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 바로 모서리기둥 창방 밑에 흔히 볼 수 없는 용머리 받침재가 그것이다. 아마도 뺄목 부분의 처짐을 방어하고자 이 기발한 발상을 했으리라.
명부전은 전면을 제외한 모든 벽은 판벽으로 되어있다 모두 홈파서 끼우고 2중으로 처리했다
명부전의 금강역사는 깜냥껏 무서운 표정과 자세를 취했지만...
명부전에는 모두 목조로 만들어진 지장보살과 금강역사, 시왕상 등이 죽은 사람이 간다는 명부의 세계가 무섭지 않은 곳으로 여겨질 만큼 친근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명부전앞 석등) 옥개석, 화창, 상대석은 옛것이되 간주석과 하대석 지대석은 최근에 문경의 모 불자가 기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 (極樂殿)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는 미타전, 무량수전이 있다 대승사 극락전은, 명부전과 함께 17세기의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의 막돌기단과 막돌초석... 그리고 땜질을 한 디딤목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삼성각 (三聖閣)
담쟁이덩굴을 두른 삼성각 측면 계단은 얼마나 정겨운가!
전각 모퉁이돌 틈에서 씀바귀 한 포기가 노랑꽃을 활짝 피워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있었다.
대승선원 (大乘禪院)
성철스님은 1944년 동안거와 이듬해 1945년 하안거를 대승사 쌍련선원(雙蓮禪院)에서 지냈다. 지금은 대승선원이라 한다. 여기서는 평생도반 청담스님과 같이 있었다. 스님은 당신 도반의 둘째 딸을 이때 발심 출가시켰다. 1945년 단오날이었다.
대승선원은 H자 모양으로 건축 되었으며. 흔히 볼 수 없는 이어내림지붕과 가구식기단을 갖추었다.
옆에서 본 이어내림지붕
신라 진평왕대인 587년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공덕봉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왕이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을 열심히 읽는 이름 없는 비구를 주지로 앉혀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설화다.
현대의 명필 시암(是菴) 배길기(裵吉基) 선생은 두 개의 현판을 각각 특유의 필체로 썼다. 天降四佛 (천강사불)-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고 地聳雙蓮 (지용쌍련)- 땅에서 쌍으로 된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991호
대승선원에는 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1호)이 모셔져 있다. 선당은 스님들이 참선수행하는 곳이므로 참배객의 출입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이 관음보살상을 직접 친견할 수는 없다.
사방불석(四方佛石)과 윤필암 사불전
대승사를 있게 한 사방불석은 높이 3m 폭 1m로 윤필암 위쪽의 바위에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다. 다만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는 불상들의 흔적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다 마모되어 사방불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윤필암의 사불전에는 따로 부처를 모시지 않고 사불산 정상의 바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리로 창을 마련해놓았다
기와를 정성스레 포개어 두른 담장 옆에는 보랏빛 붓꽃이 한창이더이다.
-* 대승사 미륵암 마애여래좌상 *-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가는 길 옆으로 언덕진 좁은 길 안에는 뜻밖에도 크고 넓은 바위면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 6m 폭 3.7m의 암석이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는데 바위 갓을 씌워서 비바람을 막아준 덕분에 상호나 모습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바위면을 편편하게 다듬어 비교적 얕은 돋을새김을 하고 광배는 선각으로 모양을 냈는데 두광 바깥쪽으로는 연꽃 모양처럼 꽃잎도 새겨 넣었다.
연화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명상에 잠긴듯한 표정인데, 얼굴이 갸름하고 귀가 길며 꽃을 꽂은 듯한 머리장식이 특이하다.
거대한 크기도 그렇거니와 이상미보다는 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磨崖巨佛은 고려시대에 중점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같은 문경 지방에서는 봉암사의 백운대 마애보살좌상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은, 대승사의 산내 암자인 윤필암과 묘적암 사이에 있다. 양촌 권근의 기문에 따르면 마애불이 있던 자리에 미륵암이 있었으며 미륵암 중창불사를 하던 1385년에 이미 마애불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으니 그로 미루어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마애불에서 가까운 묘적암은 나옹스님이 출가한 곳이며, 성철 스님이 가시철망을 두르고 정진한 곳이기도 하다.
- 2007년 사월 초파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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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여행 잘하고 갑니다. 대승사를 직접 가 보았던들 그런 눈으로 볼 수 없었을 거에요. 작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예전에 찍었던 꽃문 사진이 없어져서 작년 사월 초파일 문경의 사찰들을 순례하는 동인 답사회를 따라나섰어요. 딱딱하게 설명을 하지말고 멋진 글로 그려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파심(?)에...ㅎㅎㅎ... 나이 탓으로 돌려주세요.
감상 잘하고 갑니다. 그 곳에 가서 본듯 합니다.
문경의 대승사는 수수한 꽃문이 있어 좋아하는 절집입니다.
꽃창살 문 창호지를 폭폭 뚫고 들여다보는 몇 개의 눈이 보이는 듯 합니다.
동감입니다. 승미씨~
드물게 보는 꽃창살입니다. 그 꽃무늬가 떡살로 찍어 놓은 듯합니다. 그리고 전각 모퉁이돌 사이에 피어 있는 노랑 씀바귀 꽃이 추석 때 입은 점순이 저고리 색깔을 닮아 예쁩니다.
'떡살로 찍어 놓은 듯한 꽃무늬' '추석 때 입은 점순이 저고리 색깔'... 선생님의 표현은 신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 갑니다. 아무도 못 따라 갑니다.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보아도 예쁘고 귀한 꽃문양입니다.소슬무늬살은 단아하면서도 우아하고 기풍이 있어보입니다.
대웅전의 꽃문양과 꽃색깔이 단아하고 우아하여, 땀흘리고 올라온 나그네의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지요.
예쁜 꽃살문 만져도 보고 멀찌기 바라보기도 하면서 한나절 좋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절집의 소소한 느낌들까지 다 호흡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습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향남씨와 같은 마음입니다. '절집의 소소한 느낌들까지' 모두 호흡하고 싶은데, 답사팀에 묻어가면 시간이 빠듯해서 수박 겉 핥기가 되곤 하지요. 아쉬워서 뒤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떠나올 때가 많답니다.
구경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두 달동안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시월부터 가볼만한 절집들을 순례해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