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목. 쓰레기가 되다
오랜만에 용소마을 용소에 들렀다. 용소는 7~8미터의 벼랑에 폭포가 떨어져 깊은 소를 만든 곳인데, 하도 깊어 검고 푸를 뿐 아니라, 주변의 숲도 우거져 낮에도 어둑하다. 하지만 연일 이어지는 폭염으로 힘차던 폭포도 가늘어졌다.
그러나 나를 경악시켰던 것은 단연 쓰레기였다. 처음 용소의 쓰레기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말이 욕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폭포 옆에 아예 작정하고 수북이 쌓아놓은 쓰레기들은 말 할 것 없고, 여기저기 비닐이며 페트병, 수영복, 티, 모자, 튜브, 석쇠, 불판, 버너, 돗자리, 가위까지 없는 게 없이 다 버리고 갔다. 물에는 터진 튜브, 페트병, 버려진 튜브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챙이 넓은 등산모자를 하나 주웠다. 튜브는 물론, 가위나, 버너, 불판, 냄비, 집개, 돗자리, 옷 등 대부분 쓸 만한 것들이 많았으나 더 이상 줍고 싶지 않았다. 욕만 나왔다. 바닥엔 쌀이며, 숯, 음식물 찌꺼기로 파리들이 윙윙거리고, 숲 여기저기에도 휴지와 비닐과 각종 용품들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인간에 대한 혐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인간들에게 자연이 허용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다. 자연을 누릴 자격이 없다.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을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도 없다. 그저 돼지기름 지글지글 구워먹고 흥청망청 취해 떠들다가 가면 그뿐인가 보다. 이러니 동네 주민들이 용소 들어가는 길을 감추고 등산객들을 꺼리는 이유도 당연하다.
그들의 남긴 쓰레기들을 보면 대부분 가족 동반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어떤 가족일까?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란단 말인가? 기본적인 쓰레기를 가져가는 것을 왜 상상도 하지 못할까? 이토록 더러운 곳에 누가 다시 올 마음이 날까? 모두 자가용을 타고 왔을 텐데 쓰레기좀 챙겨가기가 그렇게 귀찮을까? 평소 내 트럭에도 주차해 놓으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데 한번은 누군가 똥기저귀를 버리고 갔다. 정말 화가 났다. 어떤 엄마가 이 따위로 소양 없을까? 도무지 쓰레기는 죽도록 버리려고 안달이다. 살만한데도 왜 이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극단적일만큼 무례할까?
용소 쓰레기를 보며 내가 가장 충격받은 것은 쓰레기들 중 상당수가 말짱하다는 것이다. 상품이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쓸 만한 새 상품들이 분명 일회용품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쓰고 버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도무지 물건 귀하고 아까운 줄 모른다. 싸구려 상품이 넘치니 한번 쓰고 버린다. 수영복도, 모자도, 튜브도, 티셔츠도 물에 젖었으니 귀찮다. 그냥 버린다. 버려도 부끄러우니 비닐에 담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속옷이고 뭐고 그냥 아무렇게나 내팽개친다. 상품이 곧장 쓰레기로 둔갑하고, 그것을 다시 공공이 즐기는 경승지에 함부로 버리는 용기, 참으로 대단한 무감각이다. 마비에 가까운 무감각이 일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인다.
쓰레기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쓰레기인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는 우리가 이미 극단의 자본주의사회를 지내고 있음을 입증한다. 점점 모든 것이 쓰레기 상품이 되고 있다. 물건은 물론 토지, 노동, 인간, 자연, 생각, 바다, 공기, 우주, 미래 등 모든 것이 쓰레기인 상품이 되고 다시 쓰레기가 되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해 생활의 필수품과 사치품도 모두 대량생산체제의 쓰레기인 상품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돈에 혈안이 되고, 쓰레기인 상품의 소비중독으로 살아간다. 계급이 만들어지는 것도 돈과 상품에 의해서고, 계급을 구분하는 것도 돈과 상품에 의해서고, 계급을 해소하는 것도 돈과 상품이다.
하지만 돈과 상품은 쓰레를 낳기 전에 먼저 극단의 폭력과 착취를 자행한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의 싸구려 노동력과 자원, 1차 상품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싸구려 상품이 횡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자원을 착취하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지금처럼 싸구려 상품이 횡횡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돈과 상품은 도무지 도덕적일 수 없다. 착취관계에 의해 돈과 상품이 만들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휴가철 그토록 소진하는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양계장이나 돈사를 가봐라. 요즘 인공수정 말고 수정하는 소는 없다. 신선한 풀을 뜯는 소도 드물다. 가장 끔찍한 것은 닭이다. 알 낳는 기계로 태어나 몸 하나 겨우 들어가는 우리에 갇혀 몇 개월 살다가 고기로 도살된다. 그러니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은 뭐란 말인가? 쓰레기가 되어버린 생명 아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란 근본적으로 부도덕하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살 리 없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의 폭압적 권력의 지배를 받으며 극단의 비합리성과 이기주의를 내면화하였다. 기본적인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을 만큼의 맥락적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록 길들여져 있다. 그러니 알고 보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열흘에 몰린 휴가에 발악하듯 전쟁하듯 온 나라 계곡을 들쑤시며 쳐들어가 점령하고 더럽힌 채 달아나듯 떠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 또한 쓰레기가 되고 있다.
자본의 명령대로, 폭력의 명령대로, 더 이상 쓰레기가 되지 말자. 이 따위 휴가를 살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