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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 기생 잡지 장한(長恨, 1927년)에 수록된 시조 중심으로-
1)신 현 규 *
<국문초록>
이 논문은 1920년대 기생 잡지 장한에 창작 수록된 시조 작품의 작자가 기생
이기에, 이를 기녀 시조문학의 전통성과 현대성의 한 양상으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것은 기녀를 작가군으로 가진 시조문학의 전통성
에서 연장선상에 있는 일제 강점기 기생의 시조 작품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논의는 1927년에 경성의 권번 기생들이 만든 잡지 장한에 창작 수록된 3편의
시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기녀 시조문학의 연구에는 자료의 부정확성이 연구의 한계라고 지적된다. 연대
불명의 작가가 전체의 절반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역사적 이해 자체가 거의 불
가능하고 연대를 알 수 있는 작자들조차도 거의 모두 조선 전기, 중기에 집중되
어 있다. 조선 후기 기녀시조의 역사적 양상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텍스트 역시 수록 가집마다 작가의 부정확성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는 누
구의 작품인지, 누가 몇 수를 남기고 있는지와 같은 원전의 확정까지도 거의 불
가능하다. 기생의 한시도 이 부분에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문집을 남기지 못
한 기생의 한시는 대부분 회자되어 전해졌다.
기녀의 시조문학도 남겨진 작품은 대부분 사대부 남성 편저자의 시선과 담론
화의 과정을 거쳐 취사선택된 것이다. 이에 반해 기생 잡지 장한에 수록된 시
조 3편은 작자가 분명하다. 아울러 출전도 명확하다. 일제 강점기 3편의 시조는
기녀시조의 전통성을 잇고 현대성을 구현한 작품으로 여길 수 있다.
주제어 : 기녀시조, 장한, 정금홍, 김은희, 방옥매, 1920년대, 기생잡지, 기생시조,
일제강점기
*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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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 제기
고전 여성 시조 작품에서 대표적인 작가군은 기녀, 즉 기생을 빼놓고는 논
할 수 없다. 반면에 고전 여성 한시 작품은 조선조 여성 전반에 걸쳐 두루 향
유된 문학이었다. 기녀를 작가군으로 가진 시조문학의 전통성에서 연장선상
에 있는 일제 강점기 기생의 시조 작품은 있지 않을까?1) 이에 대한 논의는
1927년에 경성의 권번 기생들이 만든 잡지 장한(長恨)2)에 창작 수록된
3편의 시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논문은 장한에 창작 수록된 시조 작
품의 작자가 기생이기에, 이를 기녀 시조문학의 전통성과 현대성의 한 양상
으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 제기이다.
기녀시조에 관한 연구는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다. 초창기 연구의 관점은
여류시조 작가로서 기생의 작품이 즉흥적인 시조가 많고 서민적인 구어체의
시조에 주목했다. 그리고 주제는 애정을 황진이, 송이, 매화의 시조에서 찾아
연관하여 고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한(情恨)의 주제로 시선을 돌려서,
상사(相思)의 자의식 형성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한다. 또한 기녀시조에 드
러나는 시적 감성의 특성을 시대의 흐름에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병행
했다. 최근에는 한(恨)의 정서보다 갈등과 몸부림으로서의 의지적(意志的)
태도에 의미를 부여한 논의에, 문학 치료적 효과와 기녀시조의 전개 양상을
기녀제도의 변화측면으로 접근한 논문이 발표되었다.3)
1) 1920-30년대에 활동을 한 기생 채금홍의 시조 3편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1954년 잡지에
채금홍의 시조 3편을 소개하는 글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醉吟散人
(1954), 「사상에 산 박명가인 채금홍」, 지방행정3(3)86~91쪽.
2) 연세대 소장본 長恨 1927. 1월호-2월호. 현재 1월, 2월호 두 권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
관 국학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물론 그 밖에 개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3) 이상보, 「여류시조 작가론」, 국어국문학14, 국어국문학회, 1956, 70~80쪽.
김함득, 「여류 시조문학고」, 국문학논집2,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1968,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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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을 검토해보면, 고려시대 기녀들은 당악․향악의 창(唱)과 무(舞)로
써 국왕의 사사로운 즐거움이나 궁중연회, 외교사절의 접대연희에 참석하였
다. 문종 때에는 팔관․연등회 같은 국가적인 의식과 그 외에 왕의 거둥이나
궁중의 여러 의식에도 정제(呈提)하였다. 고려의 기녀는 여악과 관기라는 형
태로 나타나는 데, 이는 교방 및 지방관청에 속한 관기로서 주로 관료만 상대
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기생(妓生)’의 어휘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이
확인된다. 여기서 ‘생(生)’4)은 ‘어떤 생업(生業)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것’을
뜻한다. 바로 ‘기업(妓業)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기녀’가 바로 ‘기생’이라 할
수 있다.5) 언제부터 정확하게 기생의 어휘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성리학
이 통치이념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은 조선 중기부터라 가늠된다.6) 조선
윤영옥, 기녀시조의 고찰」, 여성문제연구12, 1983, 177~205쪽.
김명희, 「기녀문학의 특질」, 시조학논총9, 한국시조학회, 1993, 105~142쪽.
성기옥, 「기녀시조의 감성특성과 시조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 2000, 75~98쪽.
이화형, 「시조에 나타난 기녀들의 존재의식 탐구」, 한국언어문학46, 2001, 125~139쪽.
안지영, 「기녀시조의 시조사적 의미」, 시조학논총17, 한국시조학회, 2001, 233~252쪽.
박애경, 「기녀시에 나타난 내면의식과 개인의 발견」, 인간연구9, 2005, 75~98쪽.
김상진, 「기녀시조에 나타난 문학 치료적 효과」, 한국언어문화 28, 2005, 69~93쪽.
조연숙, 「기녀시조의 전개 양상과 성격」, 아시아여성연구49권 2호, 2010, 218~220쪽.
4) 生의 甲骨文字는 자형으로, 설문해자에서는 “進也 象艸木生 出土上.”이라 하였
다. 즉, 풀(屮)과 흙(土)의 결합으로 초목의 새싹이 자라 땅위로 솟아나온 모양으로 보았다.
그 밖에 ‘-生’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처럼 사용된다. 그리고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敎生, 先生,
學生, 李生, 許生 등과 같은 경우이다.
5) 신현규, 「문헌에 나타난 ‘妓’의 기원 연구」, 한민족문화연구 제23집, 한민족문화학회,
2007, 399~421쪽.
6) 왜냐하면 성리학의 학통은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
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사대부와 기녀
의 관계는 밀접했기에 유사한 방식의 어휘와 소통되고 있다. 예컨대 ‘서생(書生)’은 ‘글을
써서 생계를 삼아 공부하는 사람’이고, ‘유생(儒生)’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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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기생의 유기체적 변천도 ‘조선사회의 겉과 속’처럼 성리학과 함께 같은
궤도로 맞물려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기생의 성격과 생활내용도 달라진다.
종래의 기생을 의미하던 기능직, 즉 여악으로서 국가에서 주도하는 연향에
참여는 약화된다. 차츰 기역(妓役)은 사대부나 변경지방 군사의 방직기(房
直妓) 역할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제도 문물을 답습하였지만, 도덕을 중시했던 조선왕조
의 유교 질서 속에서 창기폐지에 대한 논의가 태종·세종 때 활발히 제기되기
도 했다.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나 관기는
사실상 이미 고려 이전부터 제도화되어 내려오던 것이 고려의 기녀제도 연장
으로 이어진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기생의 문학 작품도 사
대부와의 소통한 산물이고 유학자들의 문집에 남아 있는 시와 산문에서 등장
하는 주변인물로 기생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발굴된 평양기생 67명을 묘사
한 녹파잡기(綠波雜記)7)도 사대부의 소품문(小品文)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을 이어 계급적 차별을 받아온 일제강점기 기생은 이제 자
유와 평등을 위하여 일어나자는 주장이 생긴다. 이처럼 단순히 넋두리로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기에 더욱 사회의 관계를 개선하고자하는 힘이 필요했다.
조선 전체에는 이미 수천여 명의 기생이 웃음을 팔고 있었다. 그들이 생활고
에 쫓겨 그 길을 택하기도 하였고 넘치는 개개인의 ‘끼’를 분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선택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생들은 그들만의 문화적인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 싶어 했고, 거기에 뜻을 함께 한 기생들이 적극적인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장한이라는 잡지의 발행이다.8) 기생
은 선비’라 지적할 수 있다.
7) 최근 발굴된 평양기생 67명을 묘사한 綠波雜記도 사대부 韓在洛의 小品文으로 근대
의 기생문화와 조선 후기 기생문화의 중간 단계에 위치한 주요 자료이다. 안대희, 「평양기
생의 인생을 묘사한 小品書 綠波雜記 연구」, 한문학보 14집, 2006, 273~308쪽.
8) 신현규, 「기생 잡지 ‘장한(長恨)’ 서지고찰」, 근대서지제1호, 근대서지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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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 혼란을 사회운동으로 극복해보자는 의식적으로 의도
된 발간이다.9) 1927년 장한에 창작된 시조 작자는 모두 기생이며 정금홍
의 「시됴」, 매헌 김은희의 「가신 님에게」, 방옥매의 「그대 그리워」 등 3편이
수록되어 있다.
2. 일제 강점기 권번(券番) 기생의 잡지 장한(長恨)
권번은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이다. 검번(檢
番) 또는 권반(券班)이라한다. 권번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
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리 집에 보내고 화대(花代)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
다. 권번에선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명단을 요리 집에 보내 단골손
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했다. 물론 예약도 가능했다.10)
기생조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09년 4월 1일 한성기생조합소11)가 함
경남도 문천군(文川郡)의 기근을 위로하기 위해 자선 연주회를 연다는 것이
었다.12) 한성권번은 한성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으로 바뀌면서 생겨난
241~253쪽.
9) 장한의 발간은 초반의 의욕을 채우지 못한 인상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
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대적 여성상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현
규, 파란만장한 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 ;꽃을 잡고, 경덕출판사. 2005, 264쪽.
10) 경성 소재 권번→4대권번 : 漢城券番, 大正券番, 漢南券番, 京和券番 / 평양(箕城券
番, 대동권번), 부산권번(동래권번), 인천권번(소성권번, 龍洞券番), 그 밖에 대구권번, 광
주권번, 남원권번, 개성권번, 함흥권번, 진주권번 등이 유명하다. 신현규, 「朝鮮美人寶鑑
에 수록된 唱歌 硏究」, 우리문학연구 27집, 우리문학회, 2007.
11) 송방송, 「漢城妓生組合所의 藝術社會史的 照明—大韓帝國 末期를 중심으로」, 한국
학보 113집, 일지사, 2003 참조.
12) 김영희, 「일제시대 기생조합의 춤에 대한 연구—1910년대를 중심으로」, 무용예술학연
구 제3집, 한국무용예술학회, 1999,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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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다. 퇴역 관기(官妓)와 그때 급상경하고 있던 남도 지방의 기생들을 포
괄하는 집단으로 재구성하면서 기예가 뛰어난 장안의 일류 기생들이 소속해
있었다.13)
1918년 경상도, 전라도 두 지방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창립되어, 남
도에서 기생 수업을 받고 경성 생활을 위해 올라오는 많은 기생들의 보금자리
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에 반해 대정권번은 다동(茶洞) 기생 조합이
권번으로 결성된 곳으로 평양의 무부기(無夫妓)들을 중심으로 기타 서울과
지방기생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특히 하규일(河圭一)에 의해 조선정악전습
소(朝鮮正樂傳習所)의 여악분교실(女樂分校室)이라는 명분하에 만들어졌
기에 주목된다. 하규일의 여악분교실은 안민영(安玟英)과 기녀의 관계와 같
은 “가객—기녀”관계의 부분적인 재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5) 1894년
갑오개혁의 노비 해방과 관기의 해방은 별개였다.16) 1895년 이후 궁중 관기
는 장악원 직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의원(太醫院)과 상의사(尙衣司)로 소
속되면서 관기 해방 기록에 혼동이 일어났다. 내의원(內醫院)의 의녀(醫女)
는 1907년에, 상의사의 침선비(針線婢)도 1907년에 폐지되었다.17) 따라서
13) 권도희, 「20세기 초 남도 음악인의 북진」,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2000, 91~92쪽.
14)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Ⅱ」, 한국음악사학보18집, 한국음악사학회, 1997
참조.
15) “19세기 風流房에서 歌客과 妓女는 모두 풍류계 음악의 主體者이며 동시에 享受者였
다. 그러나 20세기 가객과 기녀의 관계는 풍류계 음악의 주체자가 아니며 학습장의 스승과
弟子로만 기능하게 되며, 이들의 음악은 일정한 美的 趣向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향수되
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살 수 있는 불특정 다수가 享受者가 된다. 따라서 河圭一의 女樂分
校室은 명분뿐이었다 할 수 있으며 그나마 명분만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풍류방 마지막이
었다.” 권도희, 「20세기 기생의 음악사회사적 연구」, 한국음악연구 29호, 한국국악학회,
2001, 327쪽.
16) 신현규, 기생이야기, 살림지식총서297, 살림, 2007, 14~16쪽.
17) 김영희, 「조선 관기의 마지막 무대」,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 2006, 1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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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제 상 관기가 폐지된 것은 1907년이다. 그 후 기생조합이 생기고 이어서
권번이 생긴다.18) 기생들의 활동을 기록한 신문자료를 보면, 기생조합과 권
번은 한동안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1920년대 이후에는 권번의 명칭이 우위를
점유한다.
1920~30년대에는 여성 잡지의 발행이 양적으로 두드러지는 시기였다.19)
그중에서도 기생 잡지 장한(長恨)과 여성(女聲)을 들 수 있다.20) 이
잡지는 유흥업소 요릿집과 카페에 종사했던 직업여성들이 만든 것이기에 남
다르다. 1927년 기생 잡지가 2종이나 있었다고 한다.21) 그 중 세상에 알려
진 것이 바로 장한이다. 「매일신보」의 신간 소개에 등장하는데, “경성 4권
번 기생의 기관지”라 기사화되었다.22) 장한(長恨), 말 그대로 ‘오래된 한’
18)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 발판은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에 의한
전통춤의 전승은 券番과의 매개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성기숙, 「일제강점기 권번과
기생의 전통춤 연구」, 한국민속학회 추계학술대회, 발표3, 2001, 1~2쪽.
19)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9, 91~107쪽.
최덕교, 한국잡지백년-2, 현암사, 2004 참조.
김수진, 「1920-30년대 신여성 담론과 상징의 구성」,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5, 145~146쪽.
20) 서지영, 「식민지 시대 기생 연구(3) -기생 잡지 장한(長恨)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
구53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6, 349~350쪽. 서지영, 「식민지 시대 카페여급연
구 - 여급잡지 女聲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19권 3호, 한국여성학회, 2003 참조.
21) “文藝雜誌 筆頭-農村問題와 少年運動, 아츰에 생겻다 저녁에 업서지는 기생 잡지도
이 가운데 한목들어, 檢閱迅速과 出版界影響 이상은 일반출판물의 경향이거니와 신문지
법에 의지한 신문잡지는 일간이 4, 주간이 1, 월간이 6, 합계 11개이며 대구에 일간 1, 평양에
주간 1, 총계가 13가지가 있다하며 잡지는 문예 47, 사상 19, 농촌문제 4, 아동 33, 종교 5,
부인 4, 기타 29 로 총계 42건인바 부인 잡지 중에는 조출석몰의 기생 잡지도 둘이 있다고
하는 바 출판물에 대한 검열은 예전과 같이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이나 도서과에서는 일반의
비난을 올해부터에는 두달 씩 걸리든 것이었으나 지금은 할 수 있는 대로 신속히 검열을
하여줌으로 출판자까지 기일을 닦어 속히 제출하면 검열은 속히 되리라더라. 「朝出夕歿의
기생 잡지」, 동아일보, 1927.5.30, 2면.
22) “長恨(新年創刊號) 京城 四券番 妓生의 機關紙이니 創刊에 제하야(김월선), 지금부
터 다시 살자(김계현), 울음이라도 맘껏 울어보자(김은희), 외국인이 본 조선의 妓生,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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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난 오래 한(恨)에 찌던 기생들
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연되는 듯한 제목이다.
1927년 1월 10일 발간된 장한23)은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 190
1~1932)이 편집한 권번 기생들의 동인지 형식이었다. 최서해는 초기 프롤
레타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학은 계급 착취와 그로 말미암은 갈등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민족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봉건적 유물로 배척당하는 타자화의 대상으로서 당시
권번 기생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가난한 소설가였던 최서해는 이로 인하
여 지식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24) 편집 발행인인 ‘김보패’25)도 최서해
가 편집을 의뢰한 기생의 중심인물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26) 1927년
1월10일에 발간되었고, 발행소는 ‘장한사’였다.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각종 인쇄물을 선명미려(鮮明美麗)하게 인쇄하며 각종 장부와 제본을 신속하고 '저렴하게 만들어주어 이름이 높았다. 월간잡지도 직접 발행하여 「서울」, 「학생계」, 「창조」,
「학등」 등을 내었다고 한다.27)
책 크기는 23cm, 제1권 제1호(1927년1월)와 제1권제2호(1927년2월)로
생활의 裏面(김난홍), 長恨에 대하야(박녹주), 溫突夜話(김남수), 人命在天(김도심) 기
타 취미만재 정가 40전 발행소 경성 관수동 14의 1 장한사” 매일신보, 1927.1.15, 2면
23) 연세대 소장본 長恨 1927. 1월호-2월호.
24) “더 지저분한 잡지에까지 손을 대었는데 하다못해 기생들이 하던 잡지에까지 손을 대어
보았다. 다 먹기 위함이었다.”朴祥燁의 「感傷의 七月-曙海靈前에」, 매일신보, 1933.7.14, 29면.
25) 편집 겸 발행인은 김보패(金寶貝)로 되어 있고, 인쇄인은 노기정(魯基貞), 발행지는
경성이었다.
26) “판권의 정보를 미루어 보면, 정가는 40전이고 3개월 1원10전, 6개월 2원20전, 1년 4원
등 지속적으로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 8쪽에는 ‘지분사광고모집(支分社廣告
募集)’이란 사고(社告)가 있다. 지사와 분사를 공개모집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향후에도
발간할 의도를 밝힌 근거이기도 하다.” 신현규, 기생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살림,
2007, 89쪽.
27) 오영식, 해방기간행도서총목록(1945~1950, 소명출판, 2009, 262~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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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되어 있다. 본문은 110여 쪽에 달한다. 또한 10쪽 정도의 광고도 기재되
어 있다.28)
김월선(金月仙)이 장한에 쓴 “창간에 제(際)하야”29) 글을 보면, 발간
취지는 기생 제도의 폐지에 있다고 명확하다. 장한의 발견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기생의 화려한 이면에 어떤 아픔이 있었고, 또 그 설움을 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를 알려준다. 비록 가면을 쓰고 남성들에게 시중을 들
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과거의 억울함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서로 나눈다.
이 모습들은 단단하게 여문 한국 여성의 진보적 모습마저 볼 수 있게 한다.
1) 장한의 표지에서 엿볼 수 있는 성격 1920년대에는 소위 문화정치 표방으로 많은 잡지와 신문이 쏟아져 나왔다.
28) 반면에 창간호에 비하여 1927년 2월호에는 발간일이 2월 12일이었다는 것 밖에 다른 점은
없다. 이를 미루어 보면, 창간호와 2월은 편집 자체가 거의 같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몇 호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월, 2월호이다.
29) 김월선, 「창간에 제하야」, 장한 창간호, 1927. 1월호, “본래 사람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낳을 것이오. 다 같은 의무를 가지고 났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슬퍼하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정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조석으로 측량하지 못할 화복
(禍福)이 있고 하늘에는 시각으로 측량하지 못할 풍우가 있는 것이다. 슬픈 일, 좋은 일을
당하게도 되며 착한 것, 악한 것을 보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만한 변화가
있다고 모든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나 사회이나 불행하며 불리할 줄을
알면 없애 버려야 하며 아니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조선의 기생은 하루 바삐
없애야 하겠으며 아니해야 하겠다.
그것은 기생 자신에 참담한 말로를 짓게 되며 일반사회
에 많은 해독을 끼치는 까닭이다. 될 수만 있으면 기생 자신을 위하여 또는 일반 사회를
위하여 기생이란 부자연한 제도가 어서 폐지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현재 사회제도가 아직
이것을 허락지 않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니, 그대로 계속하여 있기로 말하면 모든
점에 있어서 향상되고 진보되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사회에 끼쳐지는 해독이 없도록 자신
에 돌아오는 참담을 면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와 같은 취지에 있어서 문화시설의 하나이
며 항상 진보기관의 하나로 잡지 장한(長恨)을 발행하는 것이다.”
18 第35輯
<그림 1> 장한창간호 표지
<그림 2> 장한 2월호 표지
1920년대에만 수십 종의 잡지가 발행되었다. 잡지의 표지는 잡지로서 독
자에게 맞닿는 첫인상으로서 잡지의 성격과 의도 등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장한의 표지에 나타난 여인은 프레임의 한 쪽에
치우쳐 있으며, 전체적 구도를 볼 때 제 3자의 시선에 있다.
이 여인은 심리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때 나타나는 웅크린 자세로 앉아있다. 한 손을 턱에 괴
고 물끄러미 응시하며 앉아있는 모습은 소외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 여인 은 새장 속에 갇혀있기까지 하다. 이것은 농중조(籠中鳥)의 이미지를 형성
한 것이다.30) ‘새장에 가두어 두고 기르는 새’처럼 자유 없는 신세를 비유하
고 있다.
동시에, 그 둘레로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 속의 이 몸을’이라는 말을
넣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으로서 사회에 속박된 자신들의 모습을 한 걸음 물
러나 제 3자의 시선으로 처리하였다. 즉 이 표지는 장한의 작자가 곧 기생
들 자신이며 장한의 제일 첫 번째 독자도 역시 기생들이 될 것임을 감안하
30) 영화 <농중조>(1926)는 1926년 6월.19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당시 감독은 이규설이
고, 주연 배우는 복혜숙, 노갑룡, 이규설, 나운규 등으로 여배우 복혜숙의 데뷔작이다. 복혜
숙은 그 당시 기생출신이었다.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19
여, 그들의 한과 의식촉구의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31)
2) 기생 기관지 장한의 가치 장한은 얼핏 목차를 훑어보더라도 상당히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
다. 권번 기생들이 일단 모여 동인지를 발간하였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단
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여성의 건강을 도모하는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나
름대로 사회에서 여성신장에 한 몫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장한에 실린 글들을 직접 읽어본다면 처음 가졌던 호기심과 전혀
다른 내용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사회주의 운동에 직접 뛰어들었던 정금
죽, 즉 정칠성과 같은 기생들을 제외한 내용들이 장한의 내용을 채워졌기
때문이다. 장한에 실려 있는 수기 및 애화 내용은 ‘체념’과 ‘푸념’의 경향이
강하다. 진보적인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지만 그 진보가 자신들에게 악영향
이라고 보는 관점은 현시대 우익단체나 수구파들에게 볼 수 있는 성향과 마찬
가지다. 대다수 기생들이 문학인들과 연이 닿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
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시각은 트이지 않았던 것이다. 장한 창간호는 총
51개의 글로 되어 있다. 기사의 형식을 분류해보면, 기생 필자의 글이 26편
이 수록되어 있다.
세부적으로는 논설류 20편, 수필(수기)과 애화 3편, 시
4편, 시조 1편, 동화 1편 등이다. 이중에서 논설류로 분류할 수 있는 20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 즉 자기 정체성의 불합리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아
울러 가지고 있다.
장한 2월호의 목차를 살펴보면 창간호와 유사하다. 이를 미루어보면 거
의 원고 수합과 편집을 동시에 이루어져 발간 날짜만 나눈 것이 아닌가 한다.
40여 편의 크고 작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생 필자의 글은 총 26편으로,
31) 신현규, 「기생 잡지 ‘장한(長恨)’ 서지고찰」, 근대서지제1호, 근대서지학회, 2010, 24
1~253쪽.
20 第35輯
논설류 11편, 수필 4편, 시 8편, 시조 2편, 애화 1편 등이 수록되었다. 여기
서 몇 가지 창간호에 비해 달라진 것은 시 편수가 많이 늘어나 있다는 점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창간호와 같이 기생의 사회비판적 논조를 지니고 있다.
창간호와 중복되는 기생 집필진은 김은희(金銀姬), 김계현(金季鉉), 김녹주
(金綠珠), 전난홍(田蘭紅), 전산옥(全山玉), 김난홍(金蘭紅), 박점홍(朴
点紅), 윤옥향(尹玉香), 김계화(金桂花), 김도심(金道尋), 이월향(李月
香) 등이다. 1920년대를 특징짓는 키워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회
주의’다. 1920년대 초반 소개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은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193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성공
이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던 ‘새로운 사상’이 조선 땅에서도 만개한 것이다.
장한 창간호에 수록된 「영춘사(迎春辭)」32)를 보면 기생 잡지에도 그 영
향을 끼쳤다. 물론 이것은 최서해의 편집 경향으로 보인다.
3. 기생 잡지 장한(長恨)에 수록된 시조
장한에는 古調, 즉 고시조라는 구분으로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장한
의 「영춘사(迎春辭)」에 수록된 시조의 작자는 梅花이다. 작품의 출전은 진
본 청구영언(珍本 靑丘永言)290, 악학습령(樂學拾零) 543에 보인다.
32) “철판에 붉은 피 흐르고 가슴에 심장이 살아 뛰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으로 더불어 변하게 되는 때에 어찌 탄식인들 없으며 눈물인들 없으오리마는 탄식과
눈물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못하나니라. 때로 흐르는 도다. 벗이여 한숨을 거두라.
눈물을 씻으라. 눈물과 한숨을 익히고 서서 우리는 우리의 밟은 길을 돌아보는 동시에 우리
의 존재를 찾아야 할 것이요. 동시에 우리와 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로다. 만물
이 다 자기가 있는지라. 자기가 산 것이니 자기가 없으면 자기는 죽은 것이라. 어찌 우리는
살아 뛰는 자기를 가지고 죽은 자기와 바꾸리오. 벗이여 일어나라.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새해의 새봄맞이를 나가려 하노라.”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21
이 시조는 「영춘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밝혀 놓았다. 그 덕분에 작품의 의도
를 파악하는데 용이하다.
梅花화 녯 등걸에 春節이 돌아오니
녜피든 가지에 피염직도 하다마는
春雪이 亂紛紛하니 필동말동 하여라.33)
위 시조에서 “우리는 봄을 맞을 때마다 이 노래를 생각하게 되나니 이 노래는
구천에 돌아간 평양 친구 매화의 슬픈 바이다.”라 하면서 소개되고 있다.
평양친구 매화는 당시 기생의 기명(妓名)이면서 시적 화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매화가 귀여운 청춘의 봉오리로 피지 못하고 차디찬 눈 속에서
시드는 것이 얼마나 아쉽고, 얼마나 애틋한가한다. 이처럼 고시조의 매화와
평양기생 매화를 감정이입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 기생들은 이 노래를 들
을 때마다 구천으로 돌아간 친구를 위하여 슬퍼하는 동시에 우리의 서러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이 시조의 매화와 처지를 같이하고 신세를 같이
한 까닭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탄식이나 눈물만으로, 혈관에 붉은 피 흐르고
가슴에 심장이 살아 뛰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를 해결
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숨을 거두고 눈물도 씻어, 이것을 이기내자고
이끌어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기생의 밟은 길을 돌아보는 동시에 우리
의 존재를 찾아내자. 더 나아가 우리와 사회와의 관계까지도 고려한다.
이제 장한에 창작 수록된 첫번째 시조인 정금홍의 「시됴」를 음미해보자.
정금홍은 종로권번 기생으로 1931년, 1940년 김추월, 백모란과 함께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34) 1934년 3월 31일에 <전조선일류명창대회
33) 「迎春辭」, 연세대 소장본 長恨1권, 1927.
34) 삼천리8권 8호, 「조선, 한성, 종로 삼권번 기생예도 개평」, 1936.
22 第35輯
(全朝鮮一流名唱大會)>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명창이었다.35) 또한 정금홍
은 「녯설음」36)이라는 시를 장한 잡지에 지어, 자신의 개인사를 토로한다.
시됴
정금홍
백로야 가마귀검다마라 속이붉긴 일반이라
유두분면 웃지말고 일편단심 보려무나
슬푸다 검은 옷이 일생의 한이로다37)
이 시조는 「녯설음」의 개인사를 이해하면 작품 감상에 도움을 준다. 천진
스러운 어린 금홍은 무슨 죄가 그렇게 중했는지를 한탄하면서 회고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마를 찌푸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지긋지긋이 미워한 태도 지
금도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치마를 붙들고 떨어 질까봐 둥글며 몸부림치든 옛날 일까지도 기억해내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흐느끼면 계집의 울음은 요망하다고 꾸짖던 쇠소리 같은 그 목소리를 지금도 오히려
35) 매일신보 1934. 4. 1 「來靑閣에 名唱大會 31일밤부터」 “藝劇同友會 주최 전조선일류
명창대회는 (중략) 금번 출연가수는 남북대명창대회를 이룰모양인데 출연자는 아래와 같
다한다. 신해중월, 박옥도, 정금홍, 서도 이진봉, 김옥엽, 백모란, 이진홍, 남도 정정렬, 오태
석, 박녹주, 김초향, 신금홍, 전조선일류남녀명창대회 김남수 박초월 주난향”
36) “두눈을 부릅뜨고 이마를 찌푸리고 얼골을 붉히면서 지긋지긋이 미워하든 xx의 태도
지금도 오히려 소름이 낏치노라 뎐진스러운 어린 나에게 무슨 죄가 그대지 중햇슬가? /
어머니의 치마를 붓들고 안떠러지랴고 둥글며 몸부림치든 녯날 긔억이 새로워지노나 뎐진
스러운 어린 나의게 무슨 죄가 그대지 중햇슬가? / 어머니가 그리워서 흑흑 늣기면 게집의
울음은 요망하다고 꾸지름하든 쇠ㅅ소리가튼 그목성 지금도 오히려 듯는 것 같고나 뎐진스
러운 어린 나의게 무슨죄가 그대지 중햇슬가? /어머니가 그리워서 몰내 갓다올제 大同江
맑은 물에 수건을 빨엇스니 목욕갓든 핑계는 되엿스나 西山에지는 해를 실음업시 바라보고
하염업시 흘으는 두줄기눈물에 옷깃이 저저 꾸지람당하는 녯설음이 새롭고나 뎐진스러운
어린 나의게 무슨 죄가 그대지 중햇슬가?” 연세대 소장본 長恨1권, 1927.37) 연세대 소장본 長恨 1권, 1927.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23듣는다고 처절하게 흐느낀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대동강 맑은 물에 수건을빨고 목욕한다는 핑계로 몰래 갔다 올 적이 많았다. 서산(西山)에 지는 해를
시름없이 바라보고 하염없이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에 옷깃이 젖어 꾸지람을
당하면서 설움도 커져갔다. 상흔(傷痕)으로 뼈아픈 기생의 삶은 일생의 한(恨)이 된다.
시적 화자는 까마귀로 보여 지는 기생의 모습을, 뭇 사람들이 백로가 되어
검다고 천시하더라도 붉은 가슴 속은 같다고 초장에 풀어놓는다. 이어서 기
생의 유두분면(油頭粉面)에 웃지 말고 일편단심을 보는 것이라 대구(對句)
가 된다. 종장에서는 기생의 검은 옷이 일생의 한이라 슬프다고 한다. 결국
기생으로서 살아가는 회한(悔恨)을 잘 그려낸 시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백로(白鷺)와 까마귀, 유두분면(油頭粉面)과 일편단심(一片
丹心) 등의 대립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검은 옷’은 ‘유두분면’와 같이 기생의
이미지를 뜻한다. 유두분면(油頭粉面)은 기름 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
로 여인의 화장(化粧)을 이른다. 특히 기생의 화장을 일컫는다.
이러한 작자의 담론은 전통적 기녀시조 창작에 차용한 모습이 돋보인다.
이직(李稷, 1362~1431)의 시조 작품에서 차용한 문구를 아래 같이 잘 드
러난다. 이 작품은 진본 청구영언(珍本 靑丘永言) 418과 악학습령(樂學
拾零) 716에 보인다.
이직(李稷)
가마귀 검다 고 白鷺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냐
것 희고 속 검을손 너 인가 노라.
이 시조는 풍자시로 개국공신의 결백성으로서 충절이 강렬하다. 이를 중요24 第35輯
한 제재로 까마귀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까마귀는 겉은 검을지라도 속은
희고 양심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겉은 희지만 속은 검은색인 표리부동한
백로와 대조되는 대상이다. 기생 정금홍의 시조에서는 “백로야 가마귀 검다마
라 속이 붉긴 일반이라”이라 하여 이직의 시조에 초장과 중장을 아울러 이끌
어낸다. 충절을 노래한 작품에 비해 정금홍의 시조는 ‘검은 옷’으로 ‘기생의
한(恨)’을 비유하면서 노래한다.
반면에 두번째로 창작 시조 「가신 님에게」는 기생 매헌 김은희의 작품으로
문학적 형상화의 양상이 다르다.
가신 님에게
매헌(梅軒) 김은희(金銀姬)
시됴
락동강 건널제와 달밤밥 고요할 때
깁히매즌 그언약을 어나듯 이즈섯소
느진달 달셩밤에 금오강 우러가니
이가삼 맷친눈물 뿌릴곳이 예뿐이라
나인강 이르거던 님께 전하소
창밧게 뿌리는비 소릴랑은 내지마라
구천에 가신님이 이밤에 오시리마
행여나 그인가하야 마음조려 하노라
x
이몸이 죽어가서 령혼이잇다하면
천산만수라도 넘어가서 또 넘어서
님게신 그곳에지 가보고야 말리라
x
갓든봅 도라오니 만물이 새업이라
사람은 어이하야 한번가면 못오는가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25
그님도 그리하야 못오신가 하노라
1927년 1월 14일 夜38)
이 시조에서 형상화된 시간은 달밤 고요할 때인 그믐날이다. 공간은 낙동
강이다. 님이 그 강을 건널 때 깊이 맺은 그 언약을 어느 틈엔가 잊는다. 이
시의 화자는 늦은 달성(達城)의 밤에 금오강에서 님이 그리워 밤새워 울러
간다. 이 가슴에 맺힌 눈물을 뿌릴 곳이 여기뿐이라 여긴다. 시적 화자가 있
던 강에 이르거든 님에게 전해주고 창 밖에 뿌리는 비 소릴랑은 내지 말라
애절하다. 이미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신님이 이 밤에 오시면 행여나 님인
가 하여 마음을 조이면서 기다린다.
이 몸이 죽어가서 영혼이 있다하면 천산만수라도 넘어가서 또 넘어서, 님
이 계신 그곳에 가보고야 말리라 간절하다. 그렇지만 갔던 봄이 돌아오니 만
물이 다시 살아나고, 사람은 어이하여 한번가면 못 오는 가 순응한다. 더구나
그 님도 그리하여 못 오신가 아닌가 하면서, 님의 죽음을 예시하기까지 한다.
시조를 창작한 시간은 분명하다. 1927년 1월 14일 저녁이다. 그 님이 ‘사랑
하는 님’일 수 도 있지만 시적 화자에 ‘희망의 님’이기도 하면서 잡지 장한
의 운명일 수 있다.
매헌 김은희는 1931년 12월 30일 영변에서 ‘재만동포 구제의 영변 기생연
주대회’를 출연할 만큼 사회의식이 있는 기생이었다.39) 김은희가 지은 또다
른 논설류의 글, “울음이라도 맘껏 울어보자”를 보면 그 사회의식이 뚜렷하다.
38) 연세대 소장본 長恨2권, 1927.
39) 매일신보 1931.12.30. 「화류계에 흐르는 동포애의 열성, 영변기생연주회-만주에서 우는
그들을 위하여, 29일, 30일 양일간에」 “<출연자> 강추월, 김산홍, 김계화, 김춘심, 장춘길,
조계화, 이연심, 방록주, 박금완, 박일선, 박금화, 한금화, 최옥희, 정선화, 정춘홍, 정금홍,
정금란, 김금주, 이홍도, 조용선, 홍옥란, 강산옥”26 第35輯
“거칠고 험악한 세상에서 잔인한 발길에 여지없이 짓밟히는 가련한 동무들
아, 아픈 가슴을 움켜잡고 세상을 얼마나 저주하면서 남다른 운명을 탄식하였
는가. 자기의 죄도 아닌 세상의 악풍으로 인연하여 아까운 청춘은 거짓 웃음
속에 보내고, 말로를 눈물로 맺는 우리의 애달픈 신세 옛날부터 오늘까지 앞으
로도 끝 날까지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온갖 설움 가진 천대는 우리의 세간이며 고통과 번민은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아! 참담한 생활 뼈에 사무치는 한을 어느 곳에 하소연하랴!
오로지 우리는 우리뿐이로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떠나고 말았다. 오직 조롱만이 남았을 뿐이로다. 홍
안이 이울도록 피가 마를때까지 이러저리 헤매이다가 알지도 못할 곳에서 참혹한 죽음을 할 것이다. 보
라 우리의 선배들은 천추에 원한을 머금고 다시 못 올 길을 스스로 취한 자
그 얼마나 되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기생이라는 이름을 주어 이생감옥에 종
신징역을 시킨다. 앞으로도 뒤로도 한 걸음에 자유를 얻지 못하며 소리 없는
눈물을 뿌릴 뿐이로다. 아! 우리는 어찌하면 울음이나마 마음껏 설움껏 목 놓아
울 수 있을까. 같은 운명에 처한 우리 동무들아!”40)
위의 글에서처럼, “보라 우리의 선배들은 천추에 원한을 머금고 다시 못 올
길을 스스로 취한 자 그 얼마나 되는가.” 문제의식이 강렬하다. 이어서 “세상
은 우리에게 기생이라는 이름을 주어 이생감옥에 종신징역을 시킨다.”문구로
비참한 기생의 삶을 ‘종신징역’으로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한성권번 기생 김은희는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1931년 6월 22일에는 ‘제6회 시민대운동회’에서 ‘팡먹는 경주’에서 1등
을 하고, 기생 400m 릴레이에서는 우승을 한다. 이어서 기생 200m 달리기
에서는 1등을 하고 기생 400m 달리기에서는 4등을 한다.41) 또한 1932일
40) 연세대 소장본 長恨2권, 1927.
41) 매일신보 1931.6.22. 「본사 주최 제6회 시민대운동회에서 참가선수의 입상자 명단에」
‘팡먹는 경주’에서 1조 1착 김은희(한성) 2착 김선옥(조선) 3착 최산월(조선) 2조 1착 박월
선(한성) 2착 전채선(조선) 3착 김월선(한성), ‘마라톤 경주’(청량리 왕복), 기생 50m 달리
기, 제등, 기생 스푼 1회, 기생 스푼 2회, 기생 400m 릴레이(1착 한성권번, 2착 조선권번),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27
4월 8일의 “朝鮮號 獻金納”에서 기부 명단에 버젓이 올라있다.42) 여기에 흥
미로운 기사가 발견된다. 매일신보 1933월 6월 21일 기사에는 언론사기
를 당한 내용이 나온다. 기사를 보면, 잡지 발행 간판을 빙자한 악덕 기자에
게 “축하 광고비라라는 구실아래 7원 50전을 사취”까지 당한다.43) 아마도 기
생 잡지 장한을 발간한 경험이 악덕 사이비 기자의 ‘축하 광고비’같은 술수
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4. 기녀 시조문학의 전통성과 현대성
기녀 시조문학의 전통성에서 황진이의 시조는 빼놓고 논의하기 어렵다. 조
선 전기에 활동한 황진이의 시조가 장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장한의
김녹주(金綠珠) 「사랑하는 동무여!!」에 수록된 시조의 작자는 유명한 황진
이(黃眞伊)다. 작품의 출전은 진본 청구영언(珍本 靑丘永言)286, 악학
습령(樂學拾零)539에 보인다. 이 작품의 수록된 의미는 일제강점기 기생
들에게도 기녀시조의 대표적 작품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작자의 표시도 명
기생 2인 2각, 기생 200m 달리기(2조 1착 김은희, 한성권번), 기생 運甁 경주, 맹아 경주,
기생 100m 달리기, 기생 400m 달리기(4착 김은희, 한성권번)
42) 매일신보 1932. 4. 8 「조선호 헌금납 국민협회 取扱」 10전 김은희 기부, 당시 ‘애국
조선호’라는 비행기 헌납을 말한다.
43) 매일신보 1933. 6. 21 「잡지발행간판 걸고 인치긔 기자 발호, 이 따위 가짜 기자를 엄중
단속, 本町署 솔선 대활동」 “최근 부내 각처에는 유명무실의 잡지기자들이 대발호를 하여
축하광고비라하는 명목아래에 거의 협박을 하다싶이 다수한 금액을 편취하는 사실이 비일
비재함으로 부내 본정서에서는 그 자들의 행동을 내사하고 있던 중 작19일에는 곡박형사부
장이 부내 길야정 2정목 (중략) 자칭 군산일보 기자 문양비(30세)는 특히 조선 사람측을
담당하여 부내 조선권번 기생 김은희에게 축하 광고비라라는 구실아래 7원 50전을 사취한
것을 비롯하여 수백원의 달한다는 것이라는 바 앞으로도 동서에서 그러한 악덕기자들을
철저히 중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28 第35輯
기한다.
古調 黃眞伊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 마라일ㅅ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어떠리44)이 시조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흐르는
시냇물에 비유한 솜씨는 뛰어나다.
‘벽계수(碧溪水)’는 종신(宗臣) ‘벽계수(碧溪守)’를 대유(代喩)하는 것이며, ‘명월(明月)’은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明月)’을 암유(暗喩)하고 있다.45) 산골 물은 임으로 비기고 밝은 달은 자기로 하였으나,
그 산골 물은명월을 버리고 빨리 달아난다. ‘수이 감을 자랑마라’고 끝없는 원망과 연모가
뒤섞인다. 그러나 한번가면 다시 오지 못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하고 부드럽게 달래본다.
여기서 남자를 흐르는 물에, 공산에 뜬 명월을 기생 황진이로비유는 뛰어나다.
신분의 계급이 뚜렷한 시기에 기생인 자기를 명월로 비기고, 왕실 종친의 한 사람을
산골물로 비유했다는 것만으로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녀시조문학의 전통성에서 연장되는 현대성은 현존하는 기녀 시조에서 찾
아야 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녀 시조는 정금홍, 김은희, 방옥매 등
을 들 수 있다.
당시 기생을 양성하는 평양에 ‘기생학교’가 있었다. 평양의 기생학교는 평양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 중 하나였다. 일본관광객은 그곳을 방문하고 상당히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대부분 평양의 고
분이나 유물, 고적지의 풍경 등을 감상하고 일본 국위의 위대함을 느꼈다거
나 기생학교를 참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내용이다. 평양의 기생은 조선의
44) 金綠珠, 「사랑하는 동무여!!」, 연세대 소장본 長恨1권, 1927, 58쪽.
45) 박을수, 시조시화, 서울, 성문각, 1979, 16쪽.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29
다른 여성과 비교하여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우위에 두었다. 실지로 일본인의 기생에 대한 취급은 창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관광객에게 유포된 기생에 대한 설명되는 말은 ‘교양을 갖춘 조선의 유녀(遊女)’였
던 것이다. 이처럼 기생을 새로운 제도로 탄생시키고 있었다.46)아래의 사진은 평양 기생학교 시조창
시간에 기생수업 장면으로 칠판에 씌어진 시조는 시가요곡(詩歌謠曲) 146 중의 113번째 내용이다.
시조는 노래의 가사다. 시조를 노래로 부르는 방식은 가곡창(歌曲唱)과 시조창(時調
唱)으로 나눌 수 있다. 기생은 주로 가곡창을 조선 전기까지 유행하다가, 후
에 시조창 중심으로 향유했다.
<그림 3> 일제강점기 평양기생학교 시조창 수업 장면
<그림4> 확대된칠판사진에적힌시조
“춘광(春光)이 구십일에 꽃 볼 날이 몇 날이며
인생(人生)이 백 년인들 소년행락(少年行樂) 몇 날인고
두어라 공화세계(空華世界)니 아니 놀고”
‘봄철의 볕이 구십일에 꽃을 볼 수 있는 날이 몇 날이며, 인생이 백 년인들
젊은 시절 재미있게 노는 날이 몇 날이겠느냐. 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
46) 서기재, 「전략으로서의 리얼리티-일본 근대 ‘여행안내서’를 통하여 본 ‘평양’」, 일본어문
학 16집, 한국일본어문학회, 2003, 86∼90쪽.30 第35輯치 꽃이 있는 이 세상을 아니 놀 수 있겠느냐’는
요릿집 주흥에서 권주가와함께 널리 불리던 시조창이었다.47)사진 설명은 “평양에 있는 조선 유일의
기생학교에서 기생의 수업중”이라적혀있다.
시조창을 가르치는 스승은 칠판에 시조를 적어 놓고 창을 가르친
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곡창이 아니라 시초창이다. 가곡창은 시조 전
체를 다 부르고, 시조창은 3장6구 중 맨 마지막 구는 부르지 않는다. 종장을
다 써놓지 않는 것을 미루어 보면 추측가능하다. 사진에서도 악기 반주가 없
이 무릎장단만으로도 부를 수 있는 시조창의 장면이다.
또 다른 평양기생학교 사진 중에 시조창 장면이 있다. 사진의 제목은 “교실
(敎室)에서 패(唄)의 계고(稽古)”이다. 즉 “교실에서 찬불가(讚佛歌)의 옛
일을 자세히 살펴 공부한다”고 표시되어 있다.
<그림 5> 일제강점기 평양기생학교 시조창 수업 장면 <그림 6> 확대된 칠판 사진에 적힌 시조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48)에 네 홀로 피었는고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47) 신현규, 파란만장한 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 ;꽃을 잡고, 경덕출판사, 2005, 34쪽.
48) 나뭇잎이 떨어진 추운 날씨를 말한다.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31
이 작품의 출전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된 이정보(李鼎輔, 1693
~1766)49)의 시조이다. 추운 가을에 홀로 피는 국화를 선비의 높고 곧은 절
개에 비유한 교훈적 성격의 시이다. 시적 화자는 국화는 왜 삼월 봄바람이 부
는 좋은 계절을 다 보내고, 나뭇잎 지고 하늘이 찬 이 가을에 너 홀로 피어
있느냐고 대구(對句)한다.
모진 서리의 세상 한파에도 굽히지 않고 외롭게
절개를 지키는 것은 너뿐이라고 맺는다. 이처럼 서리가 내린 싸늘한 가을날
이지만 홀로 피어 있는 국화를 예찬하면서 굳건한 절개를 노래한다. 결국 모
든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린 쓸쓸
하고 추운 늦가을에 홀로 핀 국화를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라
고 노래하며 지조 있는 삶에 대한 작자의 신념과 결의를 표현하고 있다. 이
사진에서도 시조의 종장을 써놓지 않았다.
장한 잡지에 세 번째 창작 시조 「그대가 그리워」는 기생 방옥매(方玉
梅)의 작품이다.50) “여러 형님께”51) 글에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면서 장
49) 이정보의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다. 대대로 고위관직이 배출된 명문가에서
태어나, 공조ㆍ이조판서와, 함경감사, 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음악에 조예가 깊어
악보와 가사를 많이 지었으며, 수많은 남녀 명창들을 배출했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음악에 전념하는 생을 보냈다. 김수장의 해동가요에 82수의 시조
작품이 전하며 이중 18수는 사설시조이다.
50) 이외에도 시 “우지 마라요”도 창작하였다. “오- 사랑하는 그대여/서러마러요/부드러운
처녀에/가삼에 검고쓴-/눈물을 흘니지말고요/꿈에드린그-/상아열쇠로 가만히/열어보세
요/세상이 모르는 비밀이/가삼속에 잇답니다/오- 그대는 가만이/열어보세요“
51) “아- 사랑하옵시는 여러 형님. 얼마나 그 동안에 골몰하고 바쁘셨습니까? 저는 「장한」이
라는 말을 듣고 그 잡지가 어서 낳으면 하고 많이 기다렸습니다.
그리하든 중 장한이라는 책이 발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옷을 입을 사이도 없이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책을드는 길로 모두 보왔어요. 여러 가지를 볼 때에 웃음보다도 슬픔이 많아지고 슬픔보다도
반가움이 많았습니다. 슬픔은 여러 형님에 과거를 생각할 때에 슬프고, 웃음은 이러한 것을
우리 같은 사람이 볼 때에 그 울적함과 정막함을 있고 웃는 것이 아니겠어요. 참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여러 형님께서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이 같은 외로운 동생을 위하여 소식을
듣기 위하여 얼마나 심려하시고 이같이 듣기에도 상쾌한 장한을 만드셨어요. 저는 여러
형님을 뵈올 낯이 없습니다. 많은 여러 형님께 감사를 올리나이다. 앞으로도 더욱 힘을 쓰시
32 第35輯
한 잡지의 발간을 생생하게 토로한다. 방옥매는 당시 나이 어린 기생으로 나
와 있다. 잡지 장한이 발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옷을 입을 사이도 없이 사
가지고 왔다는 것을 보면, 잡지 구독자는 대부분 기생이었다는 사실이다. 방
옥매는 장한을 읽으면서 웃음보다도 슬픔이 많아지고 슬픔보다도 반가움
이 많아 진솔해진다.
그 슬픔은 앞서간 기생의 과거를 생각할 때에 슬프다.
웃음은 이러한 것을 우리 같은 사람이 볼 때에 그 울적함과 정막함을 있고
웃는 것이 아니겠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반갑고 기뻐한다. 아래의
시조는 요릿집에서 손님의 지휘를 받으면서 겪은 체험을 형상화한다.
그대가 그리워
방옥매
술이란 취할수록
서름이 적어지고
애인이란 그릴사록
사랑은 깁허간다고
아모나 제격거 보지
못하고는 몰을까하노라.52)
손님과 아울러 술에 취할수록 설움이 적어지는 것이 마치 사랑하는 이를 그
리워할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진다고 노래한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는 모르니 애절하다. 그 시절에 사랑하는 이를 둔 기생은 ‘귀먹었다’는 은어적
표현으로 주변에게 알려졌다.
이 시조에서 초장 ‘술이란 취할수록 설움이 적
어지고’라는 표현에서 ‘적을 소(少)’와 중장 “애인이란 그릴사록 사랑은 깊어
어 영원한 장한을 만드심을 바라옵고 알지 못하고 시로 붓을 놓습니다. 1월 15일 옥매로”
연세대 소장본 長恨2권, 1927.
52) 연세대 소장본 長恨2권, 1927.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33
간다고”는 표현의 ‘깊을 심(深)’이 대구(對句)가 되면서 형상화에 탁월하다.
종장에서 ‘겪어보지 못하고는 모를까 하노라’로 맺고 있다.
1926년에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은 1927년 장한 잡지의 창작 시조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시조부흥운동은 악곡(樂曲)의 창사(唱詞)로서
의 시조가 아니라 한국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나타나는 단시(短詩)
로서의 시조가 가지는 중요성과 부활의 타당성을 강조하였다.
연시조(連時調)나 구별배항시조(句別排行時調) 등 새로운 시조를 선보였다. 이것은 앞
서 장한잡지에 창작시조 매헌(梅軒) 김은희(金銀姬)의 「가신 님에게」 시
됴의 경우는 연시조로, 방옥매의 「그대 그리워」는 구별배항시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의 관계에 기녀시조 창작에
미친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밖에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녀 시조로 채금홍의 시조 3편이 소개되어 있다.53)
채금홍(蔡錦紅, 1900-1936)에 대한 ‘취음산인’의 소개는 부정확한
자료에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54) 매일신보을 확인해보니 신문 연재
를 했다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55) 채금홍이 창작한 시조에 대한 자료도 찾
지 못했으며 그의 죽음도 사실과 다소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56) 결정적으로
53) 취음산인, 「사상에 산 박명가인 채금홍」, 지방행정3(3), 1954, 86~91쪽.
54) 조연숙, 「기녀시조의 전개 양상과 성격」, 아시아여성연구제49권 2호, 2010, 218~220쪽.
55) “이런 전화가 있은 후 이틀 만에 매일신보 지면에는 ‘黨에 生할가 孝에 生할가 斷髮娘
蔡錦紅의 悲話’라는 제목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실소설이 유려한 필치로 묘사되어
25회나 연재되었고 이 기사만의 흥미적 가치로 인하여 평양서는 불과 300부밖에 안 팔리는
매일신보가 일약 500부로 증가되었으니 이 일례로만 보아도 채금홍의 명호로서의 가치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취음산인(1954), 「사상에 산 박명가인 채금홍」, 지방행정3(3),
86~91쪽.
56) “휘발유 퍼붓고 자신에 衝火-돈과 사랑에 고민한 탓인가?”, 매일신보 1936.3.23 2면
<평양 前 명기의 말로> “[평양]모란봉 위에 춘의가 영룡하야 금수강산에 소생의 기본이
넘처 흐르는 이때 한 많은 세상을 뒤에 두고 끔직스럽게도 옷입은 자기의 몸위에 휘발유를
들븟고 거기에 불을 질러 놓아 산목숨을 태어서 자살하랴고 한 평양의 명기가 있다.
채금홍34 第35輯‘취음산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기녀 시조문학의 연구에는 자료의 부정확성이 연구의 한계라고 지
적된다.
연대불명의 작가가 전체의 절반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역사적 이해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고 연대를 알 수 있는
작자들조차도 거의 모두 조선 전기, 중기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 후기 기녀시조의 역사적 양상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텍스트 역시 수록 가집마다 작가의 착종(錯綜) 현상이심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는 누구의 작품인지, 누가 몇 수를 남기고 있는지 와 같은 원전의 확정까지도 거의 불가능하다.57) 기생의 한시도 이 부분에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문집을 남기지 못한 기생의 한시는 대부분 회자되
어 전해졌다. 주변 인물을 통해 회자되다가 시화집, 시선집, 야담, 소총 등으
로 정착된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졌다.58)
이라하면 사백여명 평양기생 중의 수기로서 가무 잘하고 접객에 능하고 마음좋기로 유명하
여 그의 기생 생활 20여년에 관서의 남아치고는 그의 이름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되었었다. 작년 10월에 돌연 기적에서 이름을 빼이고 평양의 황모씨와 살림을 시작한 이후
부터는 화류계에서 일시 소식이 잠잠하더니 그 살림에 조차 세상에 흔히 있는 말썽이부터
황모씨는 그리 재산이 없는 사람이오 채금홍에게는 평원군 순안 사는 모청년 재산가가
황모씨와 살지말고 자기와 같이 살자고 각금찾어다닌 일이 있어 미묘한 삼각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채금홍은 돈보다도 정과 의리를 따르고 채금홍의 모는 어찌하여 돈 많은 순안
청년과 살지 않고 돈 없는 황모와 살며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각금 의견을 말한 일이 있어
모녀간의 갈등이 날로 심각하여 가자 채금홍은 차라리 귀지않은 세상을 이저버리고 수일
전 어떤 날밤 채관리 자기집에서 자살을 결의하고 옷 입은 자기 몸위에 휘발유를 들부은
후 성냥을 그어 치마자락에 불을 질러놓아 온몸이 불길에 쌓이었는데
집안 사람이 이상한소리에 놀라, 채금홍방을 달려가 보니 전신이 불길에 쌓여있는 처참한 광경이라 곧 이불을
들씨워불을 꺼주었다. 그리하여 귀중한 얼굴과 기타 상반신은 보기에도 끔직스러운 중화상
을 당하여 목하 남문정 전화 의원에게 입원가료중인데 의식이 전혀 불명 때때로는 발광
증상도 나타내 생사지간을 방황하고 있는 중이라는데 의사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되면 생
명은 건질듯싶다고 하나 원체 중화상이라 폐인은 면하게 되지 못할 모양이라는데 채금홍은
당년 35세이다.”
57) 성기옥, 「기녀시조의 감성특성과 시조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 2000, 28쪽.
58) 박영민, 「기생의 한시, 사회적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서사」, 동방한문학33집, 동방한
1920년대 기녀 시조문학의 한 양상 연구 35 앞선 기녀의 시조문학도 남겨진 작품은 대부분 사대부 남성 편저자의 시선과 담론화의 과정을 거쳐 취사선택된 것이다. 이에 반해 1927년 창간된 기생
잡지 장한에 수록된 시조 3편은 작자가 분명하다. 아울러 출전도 명확하다.
이 기녀시조는 앞선 시대의 다른 시조들과 견주었을 때 보편성으로는 엇
시조, 사설시조 등의 장시조를 창작하지 않았다. 즉 평시조를 창작했다. 반면
에 특수성으로는 앞선 시대의 사대부 대신에 근대 남성 자본가의 시선과 담론
화 과정에 걸맞은 시조라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3편의 시조는 기녀시조의
전통성을 잇고 현대성을 구현한 작품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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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第35輯
<Abstract>
A study on the aspects of Ginyeo Si-Jo literature in the 1920's
Shin, Hyun-Gyu
This paper JangHan(長恨) author of works on the creative founders contained
Gisaeng, it's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literature Gisaeng is asked to discuss
the issues that'd be. It authors in the literature with the Gisaeng of the tradition
that is an extension made in Japan in the occupation of the Si-go literature work'd
be Gisaeng? For a discussion of this in 1927, hard-magazine created by the Gisaeng
Gwonbeon JangHan(長恨) His three founders contained in the original as a starting
point will host.
In the study of literature Gisaeng inaccuracy of the data indicated that the study's
limitations are. Half of the entire regiment of unknown writers even go beyond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itself is almost impossible to know the age and almost
all of the author even Choseon Dynasty, is concentrated in the middle. Founder
of the Choseon Dynasty Gisaeng, even historical aspects is difficult to gauge is bad.
Text also very more inaccuracy because of the author textbook. Not like this, whose
work is, if someone, such as leaving a few number of original textbook is almost
impossible to even confirm. In this area at all times be not free China poem of Gisaeng.
Did not leave because the China poem of Gisaeng was said to have remarked on
the most limited time.
The Si-go literature of Gisaeng of the founders of literary works most of the
remaining men Sadaebu compiler and The process of discourse through the eye need
to be selective about. In contrast, Gisaeng issue its first number 1927
JangHan(長恨) magazine, contained in three the Si-go literature author of works
is clear. In addition, exhibitors will be made clear. Made in Japan Occupation His
three Gisaeng founder of the the Si-go literature work'd be Gisaeng followed the
tradition of modernity can be implemented here to work.
Key Words : Si-go literature work'd be Ginyeo, JangHan, JeongGunHong,
KImEunHee, BangOygMae, 1920's, Gisaeng magazine, Japanese
Colonial Period
이 논문은 2011년 06월 30일까지 투고 완료되어,
2011년 07월 01일부터 2011년 07월 19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를 하고,
2011년 07월 23일에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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