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와 예식장에서
김대중은 상처한 지 3년여 만인 1962년 5월 10일 이희호와 재혼하였다.
조향록 목사가 주례를 섰다. 이희호와는 부산에서 사업을 할 때 독서서클 ‘면우회’모임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이희호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의 국제국장으로 일하다가 휴전 뒤 미국으로 건너가 4년간 유학하고 귀국하여 YWCA 전국연합회의 총무이사를 맡고 있었다. 아직 미혼이었다.
1962년 5월 10일에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지금껏 내 반려가 되어주고 또한 정치적 동지이며 친구이기도 한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사업상 부산에 이주해 살고 있을 때, 독서서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성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녀는 부산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의 국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업가였지만 뜻있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나가 독서한 내용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하고 전쟁상황이나 국가장래 등에 대해 활발히 의견교환을 하곤 했다.
그녀와는 의견일치가 되는 때가 많아서 더 가까이 지냈던 게 사실이다. 더러는 얘기에 취해서 부산 교외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휴전 직후 그녀는 미국에서 4년간 유학하고 귀국해서 YWCA 전국연합회의 총무이사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우연히 다시 만나 무척 자연스럽게 지내다가 그해 5월에 결혼했다. (주석 8)
다음은 이희호의 증언이다.
우리는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 나는 살아온 환경과 행로가 판이했다. 대한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김정례씨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와 김정례씨는 구면이었다. 해운업을 하는 그의 배로 피란민을 소개시켰다고 했다.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목포에서 임시수도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이후 그를 연우회 모임에서 또 만났다.
고향사람 소개로 회원이 된 그는 토론에서 늘 조용히 듣는 편이었다. 운명의 힘이었던가, 아니면 지금 말로 코드가 맞았는지, 누구에게나 친절한 내가 누님 같았는지 나와는 말을 잘했다. 가끔 교외 감천을 걸으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 소동과 정치파동을 함께 분개하기도 했다. 항상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답게 그는 해박했다. 그때 나는 내 진로를 두고 와병 중인 사람과 유학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재회하게 된 것 또한 우연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인 1959년 여름 끝자락이었다. 길을 가다 종로에서 그를 만났다. 6년만이었다. 근처 다방에 들어가 잠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시 헤어졌다. 풍문으로 그동안 정치에 입문했다고 들어서 그런지 다소 힘들어 보였다. 그해 9월 나는 YWCA에 총무로 멕시코 세계YWCA 대회 참석차 떠나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 지구를 한 바퀴 돌고 1960년 2월 초에 돌아왔다. 6월쯤 그가 4.19 이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기사와 함께 그 사이에 부인과 사별했음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름다웠던 부인과 어린 자식들, 그리고 혼자된 그가 참 안 됐다고 생각했다. 민주당이 압승한 선거에서 그는 근소한 차이로 또 낙선했다. (주석 9)
이화여고시절의 이희호 여사
1922년 서울 출생인 이희호는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과 졸업(2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육과 졸업,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 수학, 스케렐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석사학위)
해방 뒤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 외교국장을 시작으로 사단법인 여성문제연구원 발기인 및 상임간사, 이화여자대학 강사, 대한YMCA연합회 총무, 세계YMCA협의회 한국대표, 미국 YMCA 시찰, 한국연합봉사회(KUSO)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한국적십자사 조직위원,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계와 기독교계의 중견 지도자였다.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친구들과 이희호 여사(뒤쪽 왼쪽에서 4번째)
이희호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한다.
내가 결혼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놀랐다. YWCA 동료이사가 놀랐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사람하고 하느냐?”며 결사반대했다. 분명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모험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그 당시에는 정치정화법 때문에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무직으로 장래의 희망도 없었다. 셋방살이를 하는 초라한 가장이었다.
어머님과 여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고, 어머님은 몸이 안 좋은데다 누이동생도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또한 어린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거기로 시집을 간다고 하니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훗날 내 결혼상대자가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후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결심한 이유는 역시 그 인물됨에 끌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곁으로 가기로 했다고 모두에게 설명한 기억이 난다. (주석 10)
이희호여사와 결혼하고 부모님께 인사
김대중은 정치에 입문하여 거듭된 좌절을 겪고 모처럼 인제에서 당선되었지만, 이틀 만에 군사쿠데타를 맞아 의원직을 상실한 채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이희호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찾게 되었다.
김대중에게 이희호는 아내이자 동지이고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어려웠던 가정살림은 그의 도움으로 꾸려갈 수 있었고, 김대중은 새 부인의 격려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열흘만에 시련이 닥쳤다. 김대중이 반혁명의 죄명으로 체포된 것이다.
이후 이희호의 시련은 늘 김대중과 함께 하였다. 남편의 도쿄납치 살해위기와 내란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 이를 함께 나누며, 수년 동안의 옥바라지와 가택연금의 ‘연금바라지’를 도맡았다.
김대중은 뒷날 부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뒤 오랜 뒤의 일이지만 다시 집을 장만해서 문패를 걸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이름과 함께 아내 이희호라는 이름을 거기에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집을 옮길 때마다 그 일은 어김없이 계속해 오고 있다.
하찮은 전시용으로 내가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니다. 아니,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 반박하자면, 전시용 문패가 우리에게 필요없던 시절에도 나는 그래왔다. 그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 그 마음의 소박한 발로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막상 그렇게 하고 보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해놓고도 이래저래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석 11)
1992년 단식투쟁 뒤 병원으로 이송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은 1981년 이른바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되어 청주교도소수감 중에 부인에게 쓴 ‘옥중서신’은 어김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 라는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그만큼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김대중은 내란음모사건으로 복역 중 결혼기념일을 맞아 부인에게 봉함엽서에 빼곡히 편지를 썼다.
다음은 옥중서한의 한 부문이다.
오는 5월 10일은 당신과 나의 기념일입니다. 우리가 결혼한 지 10일 만에 당시 군정 아래서 민주당 반혁명사건에 무고되어 한 달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출발부터 시련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세 번 감옥살이, 네 번의 죽음의 고비, 세 번의 국회의원 당선, 71년의 대통령선거,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걸이를 얻었습니다. 당신의 훌륭한 내조의 덕으로 나는 오늘까지 내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께 충실한 삶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기 그지없는 것은 당신이 홍일이와 홍업이와 사이에 나보다 더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서로 맺어졌으며, 이제 큰 며느리와 지영이ㆍ정화까지 사랑으로 감싸주고 있는 점입니다. 나의 감사와 행복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5월 10일에 앞서 미리 드리는 나의 존경과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를 받으시오. (주석 12)
이희호는 남편이 1971년 2월 3일 신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을 때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의 부인 패트리셔 닉슨과 만나 한미 우호관계와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 논의하는 등 김대중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민주화와 집권에 큰 기여를 해왔다. 이때 패트리셔와 백악관에서 찍은 사진이 국내의 한 신문에 공개되자, 공화당정권에서는 조작한 사진이라고 공격하여 외교망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주석
8) <김대중 자서전(1)>, 156~157쪽.
9) <이희호 자서전 - 동행>, 67 ~ 68쪽, 웅진지식하우스, 2008.
10) 앞의 책, 157쪽.
11)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99~100쪽.
12) <김대중 옥중서신>, 68쪽, 한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