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 자리잡은 청국 공관(淸國公館) (1)
중구 명동2가 83번지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2년 8월 24일 이전까지에는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이었으나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체결하면서 대만대사관은 철폐되었다. 이 곳 명동2가에는 조선말 임오군란 직후인 1883년에 청국 공관이 처음 세워졌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후 상민수출무역장정(商民輸出貿易章程)을 체결하고, 그 다음해 1883년 9월 16일 주(駐)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3 년간 역임한 바 있는 진수당(陳壽棠)을 총판(總辦) 조선상무위원으로 조선의 수도 한성부에 부임하게 하였다. 진수당은 부임 직후 바로 공관에 입주하지 않고, 당분간 남별궁(南別宮)에 여장(旅裝)을 풀고 업무를 보았다. 조선과 무역장정을 체결하자 청나라 산동반도에 살던 중국인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명동과 소공동, 수표동 등에 자리 잡았다.
이 당시 청나라 거상(巨商)이던 담걸생이 무역회사 동순태(同順泰)를 만들어 자리한 곳은 을지로입구 근처였다. 동순태가 현재 유네스코건물 자리(명동 2가 82번지)의 2천여 평을 구입하자 많은 청나라 상인들이 명동 일대의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청국공관(淸國公館)은 진수당이 부임하기 직전인 1883년 9월 7일에 회현방(會賢坊) 낙동(酪洞)에 이미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초기의 규모는 잘 알 수 없다. 진수당이 부임한 후 청국 상민(商民)의 권익이 보장되면서 청상(淸商)들의 출자(出資)에 의해 청국공관 주변의 가옥과 대지를 매수하였다.
즉 공관이 설치된 직후 한 달 후인 동년 10월 16일에는 박씨(朴氏)소유의 가옥(110칸)과 토지(300칸)를 매수하였고, 곧 이어 다음해 1월 25일에도 인근의 가옥 및 토지를 60여 칸이나 매수하였다. 그 해 5월 22일에는 거금 5,300양(兩)을 들여 한국인 주택 142칸을 사들여서 상무위원 공서(公署)를 개축하고, 이른바 청상회관(淸商會館)을 설립하는 등 그 규모를 급격히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부동산 매입은 진수당이나 청국 상인들이 그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거래가 이루어 졌다. 그 예로 청상회관 도로를 둘러싸고 소송사건이 벌어졌다. 원래 청상회관 터는 흥선대원군 집권 때 천주교를 박해했던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살던 낙동(駱洞) 집이었다.
당시 이경하 포도대장이 어찌나 혹심하게 천주교인을 살육하였던지 울던 아이도 ‘낙동대감’하면 울음을 멈추었으며, 천주교인을 그의 저택에 잡아들여 고문했기에 염라대왕을 빗대어 ‘염라대감’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