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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울산/울주답사 자료원안 2018.11.28.(수)
삼한시대 진한에 속함
삼국시대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굴아화현을 취함
고려시대 태조 때 하곡, 동진, 우풍의 3현을 합하여 흥례부로 승격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년) 울주를 울산군 개칭
1962년 1월 27일 각령 제403호로 울산 특정공업지구로 지정 공포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
1995년 1월 1일 울산시, 군 통합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출범
면적 ; 1,061.18㎢
인구 ; 1,185,645 명 (2017년 12월 31일 기준, 외국인 포함)
* * 문화재 현황 = 도표생략
* * 간절곶 [艮 絶 串] * 간짓대 * 간절함
이칭/별칭 ; 이길곶, 간절갑, 간절포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에 있는 곶.
간절은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과일을 따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뾰족하고 긴 장대를 가리키는 간짓대처럼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곶은 육지가 바다로 돌출해 있는 부분을 의미하므로 간절곶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넓고 길다는 의미를 가진 이길곶으로 불리기도 하였고,『조선지지자료』에는 간절포로 기록되어 있다.
이길(爾吉)은 지금의 간절곶 일대에 설치되었던 이길봉대(爾吉烽臺)라는 봉수대의 명칭에서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간절갑(艮 絶 岬)으로 바꾸어 불렀으며, 이는 1918년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 鮮 五 万 分 一 地 形 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간절갑으로 불리다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지 조성계획에 따라 간절곶으로 불리고 있다.
+ 자연환경 – 동경 129도 21분 50초, 북위 35도 21분 20초 지점에 위치한 간절곶은 부산의 남항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39㎞ 지점에 있으며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된 지역이다. 곶의 서쪽에서 봉화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다가 간절곶에 이르면 매우 평탄한 지형을 형성한다. 주변 평지에서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북쪽의 진하에서 남쪽의 기장에 이르기까지 지형의 기복이 거의 없고 해발고도가 200m 이하인 구릉성 산지와 해안단구의 평탄면이 연속적으로 분포한다. 해안가는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해안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절벽이 나타나는데 반해, 간절곶에서는 해안절벽을 보기 어렵다. 간절곶 주변은 난류와 한류가 혼합되는 구역으로, 수온은 4월이 가장 낮고 8월에 가장 높다.
+ 현황 – 한반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매년 간절곶을 찾는 인파가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일출 여행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일찍 뜨는 곳은 독도이지만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아침이 온다는 의미를 지닌 ‘간절욱조조반도(艮 絶 旭 肇 早 半 島)’라는 말도 전해진다.
2000년에 세워진 간절곶 표지석에는 “이곳을 찾은 분과 그 후손은 새천년에 영원히 번성할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매년 12월 31일부터 그 다음날인 1월 1일까지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개최된다.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인 소망우체통이 설치되어 있는데, 우체통의 높이는 5m에 달하고 너비는 2.4m이다. 신라시대의 충신인 박제상 부인과 그의 딸을 추념하는 모녀상과 새천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새천년 기념비 등이 있다.
이곳에는 1920년 3월 26일에 등대가 설치된 이후, 2001년에 높이 17m의 등대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간절곶등대는 백색 팔각형의 본체에 10각형으로 된 전통 한옥형태인데, 동으로 만든 기와지붕을 얹어 전망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등대 옆으로는 간절곶항로표지관리소가 자리한다.
간절곶으로 연결되는 해안길의 명칭은 한반도의 새해를 여는 간절곶의 명칭과 해맞이를 통해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포함하는 ‘간절곶 소망길’로 정해졌다. 한편 간절곶의 서쪽을 통과하는 국도 31호선의 도로명은 ‘해맞이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간절곶 [艮絶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하해수욕장
백사장 면적 9만 6,000㎡, 길이 1km, 너비 300m
1974년 해수욕장으로 개장. 울산광역시에서 남쪽으로 21km 지점에 있다.
수심이 얕으며 백사장이 넓고 바닷물이 맑아 피서지로 적합하다.
회야강과 만나는 곳에서는 담수욕도 즐길 수 있고 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면 앞바다에 있는 명선도까지 걸어갈 수 있다.
매년 7월 8일부터 8월 22일까지 개장한다. 주변에 서생포왜성 간절곶등대와 2개의 해중암으로 이루어진 이덕도, 소나무숲이 우거진 명선도 등 관광지가 많다.
자동차로 울산에서 20분, 부산에서 40분이면 닿아 부산시민들도 많이 찾는다.
+ 서생포 왜성[西 生 浦 倭 城] -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8호(1997년 10월 30일)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성 둘레는 4.2km, 면적은 15만 1,934㎡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왔다. 이때 서생포에는 수군만호진을 두고 있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이 성은 그해부터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 藤 淸 正]가 일본식 건축방법으로 돌을 사용해 계단식으로 쌓았다. 산의 꼭대기 부분에서 아래로 성벽을 겹으로 두르고 있다. 특이한 점은 성벽이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곽을 만들 때에도 일시적으로 응용된 적이 있다. 16세기 말의 일본 성곽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된다.지금은 석축 성벽만 남아 있지만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비록 일본이 쌓았으나 뒤에 조선에서도 사용하였다. 기장 죽도성과 부산진성, 그리고 울산왜성과 봉화(烽 火)를 신호로 서로 연락하였다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부른다. 성터에는 당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충신애국지사를 모신 창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서생포 왜성 [西生浦倭城] (두산백과)
+ 서생포 만호진 [西 生 浦 萬 戶 鎭 城]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5호(2000년 11월 9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西 生 面) 화정리(禾 亭 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
울산지역에는 서생포 만호진성을 비롯해 염포진성(鹽 浦 鎭 城), 개운포진성(開 雲 浦 鎭 城) 등의 수군진영(水 軍 鎭 營)이 있었다는 《태종실록》과 《경상도지리지》의 문헌기록에 따르면 이 성의 축조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야산의 구릉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구릉의 경사면과 평지를 연결해서 쌓은 포곡식 성이다. 성의 북쪽은 저습지와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회야강(回 夜 江), 회야강이 합류하는 바다가 성의 동쪽 1.5㎞ 지점에 있어서 수운을 활용하기 유리한 곳에 성곽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생면 서생리(西 生 里)에 왜군이 쌓은 서생포 왜성(西 生 浦 倭 城: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8)은 서생포만호진성의 남동쪽 약 800m 지점의 구릉지대에 축조되어 있다. 서생포에는 조선 태종 때 만호진을 두었는데 세종 때는 도만호진(都 萬 戶 鎭)을 두었다가 다시 만호진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와 서생포에는 수군만호진을 두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생포 왜성을 쌓으면서 이곳의 성돌을 헐어갔기 때문에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체성(體 城)의 기단석 일부가 남아 있다. 체성은 길이 440m, 너비 4m 정도이고, 성의 서쪽에 문지 시설이 일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서생포 만호진성 [西生浦萬戶鎭城] (두산백과)
+ 울산대교
○ 위치 : 울산광역시 남구 매암동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본선 )
○ 공사기간 : 2010 년 5 월 31 일 ~ 2015 년 5 월 30 일 (60 개월 ) 2009년11월~?
○ 사업의 목적 : 교통 통행시간 단축 , 울산항의 랜드마크
○ 총연장 : 8.871km(본선구간 5.615km, 아산로 구간 2.756km)
울산대교는 남구 매암동에서 동구 일산동을 이어주는 1,800m의 현수교이다. 이로 인해 40분 걸리던 동구와 남구가 20분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주탑과 주탑 사이 거리인 단경간이 1,150m인 현수교로, 최장 단경간인 중국 룬양대교 (단경간 1,400m), 장진대교 (단경간 1,300m)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길다.
[네이버 지식백과]울산 12경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 울산대교 전망대
소재지 ; 울산광역시 동구 봉수로 155-1 (화정동)
울산항과 남해바다를 내려본다 화정산 정산에 자리한 지상 4층, 높이 63m의 울산대교 전망대에 올라서면 울산대교와 자동차, 조선해양 등 산업시설과 울산의 시가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특히, 밤에 보는 공단과 도심은 다른 곳에서 경험하기 힘든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울산대교 동쪽 진입로에 전망대를 설치해 울산대교와 울산의 3대 산업인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산업단지 및 울산 7대 명산을 조망할 수 있어서 울산광역시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또한 2017년에 개봉한 영화 ‘공조’촬영지 중 한 곳으로 울산대교 자동차 추격신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의 컷이기도 하다.= 울산 시티투어 ‘아름다운 달빛여행’코스 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금~일(주3회) 시티 투어로 관람 가능
* * 장생포 고래박물관
소재지 ;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44 (매암동)
옛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국내 유일의 고래 박물관.
2005년 5월 31일 개관하였다.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 250여 점을 수집, 보존, 전시하고 있으며 고래뱃속길, 바닷속여행 등 어린이 체험관, 브라이드 고래 골격, 범고래 골격, 귀신 고래 전문관, 복원 포경선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규모 ; 지상4층, 부지면적 6,946㎡, 연면적 2,623㎡
관람소요시간 ; 약 1시간~1시간 30분
- 이용요금 = [고래박물관]개인 – 어른 2,000원 / 청소년, 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단체 – 어른 1,500원 / 청소년, 군인 1,000원 / 어린이 500원※ 어른(20세 이상), 청소년(14세~19세), 군인(하사 이하의 군인, 의무ㆍ
작전 전투경찰, 경비교도), 어린이(36개월 이상~13세)※ 무료(4D영상관 제외) : 65세 이상, 36개월 이하, 장애인,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관련 증명서 제시)
[네이버 지식백과]장생포 고래박물관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 고래체험관
고래생태체험관은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 해양공원 내에 있는 돌고래수족관이다. 어류수족관에서는 크고 작은 신기한 담수 열대어와 다양한 해수 열대어, 상어와 바다거북들이 살고 있다. 해저터널에서는 실제 돌고래들을 만날 수 있으며, 돌고래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4D영상관에는 생동감 넘치는 고래 애니메이션을 관람할 수 있으며, 체험동물원에는 다양한 소동물들을 만져보고 먹이도 줄 수 있는 체험이 가능하다.+ 개관일 : 2009년 11월 24일
+ 규모 - 부지면적 6,542㎡ / 연면적 1,805㎡(지상3층)
+ 이용요금 ; 어른(20세 이상 ~ 64세 이하) - 개인 5,000원 / 단체 4,000원 청소년(14세 이상 ~19세 이하),군인 - 개인 4,000원 / 단체 3,000원 어린이(36개월 이상 ~ 13세 이하) - 개인 3,000원 / 단체 2,000원 4D영상관 - 개인 2,000원 / 단체 1,600원※ 단체기준 - 유료관람객 20인 이상※ 4D 영상관은 고래생태체험관 2층에 위치하여, 고래생태체험관 이용자에 한하여 이용 가능※ 무료 입장 (4D 영상관 제외) - 만 65세 이상, 만 36개월 미만, 장애인, 국가유 공자, 독립유공자,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네이버 지식백과]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소재지 ;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71-1 (매암동)
2015년 조성된 고래문화마을에서는 예전 장생포 고래잡이 어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으며, 고래광장, 장생포 옛마을, 선사시대 고래마당, 고래조각정원, 수생 식물원 등 다양한 테마와 이야기를 담은 공원을 둘러 볼 수 있다. 고래의 모든 것을 한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고래특구이다. 박물관, 생태체험관, 장생포항의 옛 모습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돌고래와 함께하는 생태설명회, 수족관, 4D 영상관 등을 운영하고 있고 고래여행바다선을 타고 동해로 고래를 찾아 떠날 수 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울산 12경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장생포 옛마을 – 고래 포경이 성업하던 1960~70년대의 장생포의 모습을 그대로 조성한 공간으로,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추억의 공간이자 교육의 현장+ 고래조각공원 - 실물크기의 고래를 형상화하여 다양한 고래를 경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이색적인 체험공간+ 고래 이야기 길·고래 만나는 길 – 고래와 관련된 교감,공존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스토리텔링 포토존+ 선사시대 –––당 - 반구대 암각화와 고래잡이벽화 등 선사시대 고래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야외 학습 공간
관광코스안내
+ 서편진입광장 – 토템폴 - 고래만나는길 - 장생포 옛마을 - 수생식물원 - 고래광장 - 선사시대 고래마당 - 토템폴 - 고래이야기길 - 고래조각공원 + 동편진입광장 - 장생포 옛마을 - 수생식물원 - 고래만나는길 - 선사시대 고래마당 - 고래광장 - 고래조각공원 - 토템폴 - 고래이야기길
관 람 료 – 고래문화마을 ZONE(장생포 옛마을, 5D입체영상관) ※5D–유아입장 불가[개인] ; 어른 / 청소년·군인 / 어린이 2,000원[단체 – 유료 20인 이상] ; 어른 / 청소년·군인 / 어린이 1,600원 ※ 무료(4D입장관 제외)- 노인(만65세 이상) - 유아(36개월 미만) - 국가유공자·독립유공자 – 장애인
-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관련증명서를 제시하는 분에 한함 ※ 반드시 무료입장권 발급받아 입장
이용가능시설
고래광장, 옛 장생포마을, 선사시대고래마당, 고래조각정원, 야외무대, 고래이야기길, 고래놀이터, 수생식물원, 주차장, 5D입체영상관(설계중) 등
[네이버 지식백과]장생포 고래문화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 울산박물관
울산 남구 두왕로 277
보물 제1006호인 1399년 이종주 고신왕지 및 이임 무과홍패
보물 제441호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보물 제1281-4호 자치통감 권226~229
시도유형문화재 제14호 부북일기
시도유형 문화재 제18호 조선시대울산부 선생안(蔚山府 先生案)
+ 울산 박물관은 2011년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울산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종합 도시역사 박물관으로 설립되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울산 역사관, 울산에 기반을 둔 다양한 산업을 소개하는 산업사관, 어린이들에게 울산의 역사와 산업을 배우게 하는 해울이관, 기획 전시실, 영상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000여 점의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역사관에는 구석기시대에서부터 1962년 울산공업센터 지정 이전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 15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새장식 뚜껑 항아리, 골촉이 박혀있는 고래뼈, 청동솥, 오리모양 토기, 연꽃무늬 수막새, 금동불상 등을 볼 수 있다. 등이다. 산업사관 1, 2관에는 지역 기업체가 참여해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전기전자, 비철금속 등 주력 산업의 역사가 담긴 자료 170여 점을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현대 자동차 아반테의 실물과 제조 공정,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 과정, 삼성 SDI 디스플레이, 삼양사의 제당공정 모형과 초기 제품, SK에너지의 원유 시추에서 제품 생산까지 과정을 보여주는 석유화학단지 모형, 울산공업센터를 기념해 1967년에 세워진 공업탑 축소 모형 등이 있다.
박물관은 울산 대공원 안에 위치한다.
+ 울산 대공원
울산은 1960년 이후 국가 경제발전의 중추로서 급속한 성장을 하는 동안 '도시 환경의 질'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화학공업을 위주로 한 공업도시로서의 울산의 이미지는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공해도시' 그리고 '삶의 질이 열악한 도시'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기 시작 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정제 역할을 할 공원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86년부터 대공원 조성을 추진해 오던 울산광역시와 기업이윤의 지역사회 환원을 기획하던 SK주식회사가 1995년 상호간 협의를 통해 울산대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울산광역시는 556억원을 투자하여 울산광역시 남구 공업탑 로터리 주변 신정동과 옥동 일대 364만여㎡의 부지를 매입ㆍ제공하였고, SK주식회사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총 1,020 억원을 투자하여 울산대공원 시설을 조성한 후 이를 울산광역시에 무상 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립 된 울산 대공원은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함은 물론, 도시의 균형적 성장의 시작점이 되고 있으며, 산업도시 울산이 산업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로 전환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태화강대공원과 십리대숲 전국 12대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된 울산의 대표 도심공원으로, 태화강과 태화강 양편에 형성된 4.3㎞의 십리대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생태환경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태화강을 따라 조성된 태화강대공원은 도심 속 휴식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푸른 대숲은 해 질 녘에 찾으면 한층 더 낭만적이다. 영남 3루로 불리는 태화루에서 바라보는 태화강의 풍경과 백로, 까마귀가 찾는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태화루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로 300 (태화동)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울산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대표적 유적이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온 자장대사가 울산에 도착하여 태화사를 세울 때 함께 건립했다. 태화강변 황룡연 절벽 위에 위치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역사와 미래가 있는 태화강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태화강대공원, 십리대숲과 산책로로 이어지며 태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태화루(太 和 樓) 붉은 난간은 관도에 임해 있고, 푸른 물결은 절 문을 격했어라. 시끄러운 수레 소리 동헌으로 돌려보내니, 노래 소리 날마다 끊이지 않네. 가랑비 속에 꽃은 나무 가지에 피고, 봄바람 이는 곳 술이 잔에 가득하네. 고금에 떠나는 한, 달은 황혼인데, 고기잡이 노랫소리 앞마을에서 일어나네.
[네이버 지식백과]울산팔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전통팔경),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蔚州 靑松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382호 (1963.01.21.)
소 재 지 ;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1420번지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 백양사 [白 楊 寺] * 백양사(白 陽 寺), * 백양사(伯 楊 寺)
울산 성안동 함월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932년(경순왕 6)에 백양(白 楊)이 창건하였고, 1678년(숙종 4)에 연정(衍 淨)이 중창하였으며, 1753년(영조 29)에 설인(雪 仁)의 중건을 거쳐, 1922년에 비구니 보현(普 賢)이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의 이름은 1780년(정조 4)의 『울산읍지』에서는 백양사(白 陽 寺)로 기록하였고 1899년의 읍지에서는 백양사(伯 楊 寺)라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 府 殿)·칠성각·산령각·선실(禪 室)·누각·종각 등이 있다. 또한, 2기의 부도가 있는데 1기는 서편 송림 속에 있으며 창건주 백양의 사리를 모신 부도라 전하며, 동편에 있는 것은 연정의 부도라 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백양사 [白楊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양사 승탑(白楊寺 僧塔)
울산광역시 중구 백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승탑이다.
2013년 8월 16일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1]
백양사 사찰입구 좌측 낮은 언덕에 위치하며, 당호가 새겨져 있지 않아 탑주를 알 수 없음. 백양사 창건주인 백양대사(백양사창건 : 932년)의 탑이라고 전칭되나 양식적으로 맞지 않다.[1]
+ 백양사 석조아미타삼존불좌상 [白 陽 寺 石 造 阿 彌 陀 三 尊 佛 坐 像]
울산광역시 중구 백양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2013년 8월 16일)
본존상의 높이 69㎝, 좌협시상 높이 66.5㎝, 우협시상 높이 63㎝.
+ 백양사 신중도 [白 陽 寺 神 衆 圖]
울산광역시 중구 백양사에 봉안된 19세기 말의 신중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 2013년 8월 16일)
+ 백양사 아미타삼존후불홍탱[白 陽 寺 阿 彌 陀 三 尊 後 佛 紅 幀]
울산광역시 중구 백양사에 소장된 19세기 말의 아미타삼존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2013년 8월 16일)
* * 울주 간월사지
기념물 제5호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온천4길 15
간월사터는 간월산 해발 215m정도에 동쪽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폐사된 이후 주위가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1984년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뒤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 발굴조사 결과, 금당 등 건물터와 축대, 주초석(柱礎石), 장대석(長大石), 2기의 삼층석탑이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금당지에서는 청동여래입상 등의 불상과 함께, 각종 기와, 토기 및 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금당지 앞쪽으로 남북으로 위치한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다른 사찰과 비교하여 금당과 탑 사이의 거리가 좁고, 남북으로 위치한 쌍탑의 거리가 멀다. 또한 금당의 지대석 보다 탑의 지대석이 높은 편이며, 이는 지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탑은 통일신라시대 정형적인 삼층석탑이다.
1층의 탑신부에는 인왕상과 문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인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 중 하나로 금강역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옥개석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남탑은 북탑과 거의 비슷하지만, 1층 탑신 문 모양 안에 자물쇠를 새긴 점과 사리구멍이 북탑보다 2배 큰 것이 특징이다. 보물 제370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과 2기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 불교미술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간월사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간월사의 기록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여지도서』에 그 위치가 언급되어 있으며, 『언양읍지』,『간월사기』등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1592년 임진왜란 시기 소실되어 1634년 다시 중수가 되었지만, 그 후 사찰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84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 *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蔚 州 澗 月 寺 址 石 造 如 來 坐 像]
보물 제370호 (1963.01.21.)
간월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1.35m. 보물 제370호. 등신대의 좌상으로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평행계단식 옷주름은 단정한 불신과 잘 조화되어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 지금은 법당을 지어 봉안되어 있으나,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있어서 광배가 파손되었고 대좌도 완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등신대(等 身 大)의 좌상으로서, 9세기 불상에 즐겨 사용되던 인체의 모습을 재현한 전형적인 불상 형태이다.
+ 불상의 둥근 머리에는 육계(肉 髻)가 거의 퇴화되었고, 나발(螺 髮)의 머리카락을 촘촘하게 새겼다. 얼굴은 작고 둥글며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전체적으로 은근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좁고 가슴 또한 빈약하여 위축된 모습이지만, 인체의 형태를 세련되고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어 아래를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 魔 觸 地 印)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다리 위에 얹어 그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다. 단정한 얼굴과 신체에 비해 두 손은 크고 형식화되어 약간 어색해보인다. 법의는 통견(通 肩)으로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며, 얇게 빚은 듯이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凸형의 평행 계단식 옷주름은 단정한 불신과 잘 조화되어 있다.
대좌는 상대의 앙련(仰 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과 하대의 팔각복련(八 角 覆 蓮)의 안상석(眼 象 石),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안상이 새겨진 팔각대석이 놓여 있다. 즉 중대는 없고 대신 중대의 위치에 완전한 하대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하대석은 현재 법당 앞에 놓아둔 다른 두 석불상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앞으로 좀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 듯한 풍만하고 사실적인 얼굴이라든가, 약간 위축되었으나 인체를 방불케 하는 불신 등은 8세기 말에서 9세기경의 불상 양식이다. 즉,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 동국대학교 소장 법주사석불좌상 등의 전형적인 사실주의 양식과 공통되는 것으로서, 이 불상의 연대도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蔚州澗月寺址石造如來坐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작천정
작천정이란 이름은, 수석이 청정 기이하여 마치 술잔을 주렁주렁 걸어 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천정으로 들어서면 계곡 좌우에 우람하고도 기괴한 암석들이 크고 작게 자리 잡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계곡에는 닳고 닳은 반석 위로 수정같이 맑디맑은 옥수가 얄팍하게 깔려 미끄러져 흐른다. 우선 여기서 세수하고 손발을 담그고 있으면 아무리 더운 날에도 곧 더위가 싹 가시고 만다. 조선조 세종 20년에 지방의 학자들이 세종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작천정이란 정자는 주변의 절경 속에 깨끗한 물과 흰 바위가 잘 조화되어 하나의 선경지대를 이루고 있다. 더위를 식히고 나서 이 정자에 올라앉아 명승정경을 즐기고 있노라면 입에서 저절로 시가 터져 나올 것만 같고, 그 아름다움을 그림에라도 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또한 가을이 되면 이곳의 만산홍엽은 타는 듯한 풍경을 이뤄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작천정은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낭만만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이곳은 3.1운동의 계획을 세우던 곳이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는 많은 의병들이 순국하기도 했으며, 또한, 울산지방에 천도교, 천주교가 들어올 때 노천교회의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이곳은 조국과 민족을 구하려는 우국지사들의 보금자리였는가 하면, 외래 종교들의 정착을 위한 싹을 틔운 곳이기도 하고, 시인 묵객들에 의해 이 고장 학문을 중흥시킨 곳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작천정계곡(작괘천)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도깨비도로
* * 언양읍성(彦陽邑城) = 해자(海 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언양읍성
사적 제153호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
언양읍성은 읍내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북쪽에 있는 화장산 사이에 있는 평지성이다. 읍 규모가 커지면서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읍성이 지역 발전을 가로 막는 애물단지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평지읍성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언양읍성은 14~15세기의 축성 방법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 토성(土城)에서 조선 초 석성(石城)으로의 변천 과정, 그리고 평지읍성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관아(官衙)를 중심으로 시가지를 둘러싸는 읍성은 유사시에는 군사적 기능도 발휘하도록 축조됐다. 즉, 읍성은 행정.군사적 기능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시설이다. 우리나라 지방 읍(邑)들은 대부분 배후에 있는 산에 의지해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어 읍성의 성벽 일부가 산으로 연장돼 있는 곳이 많은데, 이런 곳을 평산성(平山城)이라 한다. 그러나 순수하게 평지에 축조된 평지읍성은 그리 흔치 않은데, 언양읍성은 평지읍성이다.
언양은 경주, 울산, 밀양, 양산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언양읍성은 1390년(공양왕 2)에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 현감 이담룡 때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으면서 확장됐다. 성 둘레는 1.5km, 평균 높이는 약 6m다. 참고로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둘레는 약 18.6km, 평균 높이 약 5~8m였다. 이웃 경주읍성은 둘레가 2.4km였고, 높이는 평균 3.6m다.성벽은 큰 바위와 돌을 이용해 쌓았다. 성벽 밑바닥 기초부분은 큰 바위를 세워 쌓거나 눕힌 다음 겉면만 다듬어 그 위에 큰 돌을 얹었다. 그리고 큰 돌 사이에는 잔돌을 끼워 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전기 읍성의 일반적인 축조 형태로 매우 견고해 웬만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
언양읍성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이 읍성과 마찬가지로 언양읍성에도 동.서.남.북의 4대문 위에 각각 누각이 있었다. 동문(東門)에는 망월루(望月樓), 서문(西門)에는 애월루(愛日樓), 남문(南門)에는 영화루(映花樓), 북문(北門)에는 계건문(啓乾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4대문은 각각 옹성을 갖추고 있었다. 옹성이란 성문 앞에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한 겹 더 성벽을 쌓아서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는 시설이다.
이 가운데 언양읍성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에는 원래 진남루(鎭南樓)라는 현판이 있었는데, 1800년대 초 영화루로 바뀌었다. 그후 4대문은 모두 없어졌다가, 2013년 읍성 남문인 영화루만 복원됐다. 영화루는 체성, 옹성, 누각을 갖춘 모습으로 복원됐다. 복원된 누각은 2층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이다.
20세기 초까지 영화루 바로 안쪽으로 객사가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는 동헌이 있었다. 객사 자리에는 언양초등학교가 100년 넘게 자리 잡고 있다가 최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언양읍성에는 마치 계획된 것처럼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있었다. 그리고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수로(水路)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는 물로 둘러싼 해자(垓字)가 있었고, 성의 모서리에는 각루, 성 모서리와 성문 중간에는 치성(雉城)이 있었다.
읍성의 동, 서, 북쪽 도로를 따라가면 도로와 읍성 사이 공터가 있는데 이곳이 해자 흔적이다. 각루는 적의 침입을 관측하거나 군사 지휘를 용이하게 하는 시설이고, 치성은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양쪽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영화루가 복원되기 전 읍성의 동, 북쪽 성곽 일부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했지만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복원된 성벽의 안팎이 모두 수직으로 되어 있다거나 성벽 높이 계산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올바른 문화재의 복원은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복원, 남아있는 흔적의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언양읍성(사적 제 153호)은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성으로 네모반듯한 평지성이다. 둘레 1,559.7m으로 성벽의 현재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85m이다. 읍성의 동서남북 성벽 중앙에는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두른 성문이 배치되었다. 또한 각 성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성벽에서 돌출되게 쌓아 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인 7m~8m×8m~10.4m 규모의 사각형 치성을 배치하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와 뾰족한 말뚝인 목익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평지읍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군창이 있고 웅덩이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은 연산군 6년(1500년)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이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다. 고쳐 쌓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더 넓게 쌓은 것으로 보인다.읍성 내부에는 각종 관아시설이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가 불에 타 수리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며, 동헌은 성종 21년(1490년) 6월 7일자 기록에 의하면 언양현 관아가 불에 타버렸으며, 명종 4년(1549년)에는 언양의 관사를 신축한 내용이 적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울산 언양읍성 -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언양읍성 (국립중앙과학관 - 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국립중앙과학관)
* * 석남사 [石 南 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上 北 面)의 석남산(石 南 山)이라고도 불리는 가지산(迦 智 山)에 있는 사찰.
창건시기/창건자
824년 / 도의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인데, 비구니(여승)의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824년(헌덕왕 16) 도의국사(道 義 國 師)가 호국기도를 위해 창건한 절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인 1674년(현종 13) 언양현감(彦 陽 縣 監) 시주로, 탁령(卓 靈)·자운(慈 雲) 등의 선사들이 중건하였고, 1803년(순조 3) 침허(枕 虛)·수일(守 一) 선사가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련도량으로 그 면모를 갖추었다.
주요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인 석남사 부도(石 南 寺 浮 屠:보물 369)가 있으며, 821년에 도의국사가 세운 석남사 3층석탑(울산유형문화재 22)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석남사 [石南寺] (두산백과)
=== 석남사 가자산과 쌀바위 전설
• 주제 : 사찰전설• 국가 : 한국• 지역 : 경상도•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가지산(加 智 山) 석남사 정상에는 쌀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어느 옛날의 일이다. 쌀바위 밑 조그마한 암자에 한 스님이 불경을 외우며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스님은 며칠마다 한번씩 마을로 내려가서 동냥을 하며 연명하였다.그러던 어느날 스님이 염불을 하다가 바위틈을 보니 쌀이 소복이 쌓여 있어 누군가 시주한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다음날, 그 다음날도 끊이지 않고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쌀이 바위틈에서 물방울 흐르듯 흘러나오는 것이었다.그 날 이후 스님은 마을로 내려가서 힘들게 동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의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쌀이 물방울처럼 매일 한 명이 먹을 만큼만 답답하게 흘러나오니, 구멍을 더 크게 내면 많은 쌀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여 쌀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어놓고 다음날을 기다렸다.하지만 그날 이후 바위에서는 쌀은 간 곳이 없고 물만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스님은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정진에만 힘쓰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바위를 쌀바위(米 岩)라 부르게 되었다.이러한 쌀바위 이야기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 전하는데, 사람들에게 분수를 지킬 것과 욕심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기 위한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이야기라 하겠다.
석남사 가자산과 쌀바위 전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 석남사 승탑 [石 南 寺 僧 塔] =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승탑.
보물 제369호(1963년 01월 21일)
높이 3.53m. 도의국사(道 義 國 師)의 사리탑이라고 전한다. 팔각원당형(八 角 圓 堂 形)을 기본으로 8각 지대석 위에 높직한 8각 하대석이 놓여 있고, 하대석 각 면에는 사자가 양각되었다. 중대석은 고복형(鼓 腹 形)으로 8각을 이루고, 각 면에 화형(花 形)이 낮게 솟은 안상(眼 象)이 1좌(座)씩 있으며, 중앙에 독립된 화형이 있다. 탑신은 8각으로 각 우각(隅 角)에 기둥형이 조각되고, 전후에는 호형(弧 形)이 모각되었으며, 전면의 호형 좌우에는 신장입상(神 將 立 像)이 양각되었다. 옥개석(屋 蓋 石)의 각 우동(隅 棟) 끝에는 작은 귀꽃이 달려 있다. 상륜(相 輪)에는 앙화(仰 花)·보개(寶 蓋)·보주(寶 珠)가 남아 있다.
1962년 5월에 해체보수하여 원형을 다시 찾았으며, 이때 고복석의 윗면 중앙에 17×10 cm, 깊이 7.5 cm의 사리구멍이 확인되었으나 사리는 없었다.
* 절 입구 4기의 부도.
* 석남사 대웅전시대: 조선(1666년) • 지정문화재: 미지정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웅이라하며 보존불로 모신 불당을 대웅전이라고 한다. 석남사의 대웅전은 1974년 인홍스님께서 해체복원한 건평 37평의 건물로 석가모니불상과 좌우에 문수 보살과 보현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놓았다.
대웅전 [大雄殿]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설선당(說 禪 堂)·조사전(祖 師 殿)·심검당(尋 劍 堂)·침계루(枕 溪 樓)·정애루(正 愛 樓)·종루(鐘 樓)·무진료(無 盡 寮)·대방(大 房) 등 30여 동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극락전은 1791년(정조 15)에 세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석남사 팔각원당형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 삼층석가사리탑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높이11m 축(지대석)4.57m
[네이버 지식백과]석남사 [石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석남사삼층석탑 [石 南 寺 三 層 石 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1997년 10월 09일) +경남유형문화재 제22호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석남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2.5m.
하층기단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어 우주(隅 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 柱 : 받침기둥)의 수를 확인할 수 없으나, 갑석(甲 石)의 상면에 호각형(弧 角 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양 우주와 1개의 탱주가 정연히 새겨져 있다.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상층기단 갑석의 상면은 평박하게 조성하였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 椽)이, 상면에는 각형 4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초층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새겨졌는데, 상층으로 이를수록 정연한 체감비(遞 減 比)를 느낄 수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각형 4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었고, 상면에는 각호각형(角 弧 角 形) 3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석을 받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 角)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는데, 탑신석과 더불어 안정된 체감비를 보이고 있다. 정상에는 노반(露 盤)·복발(覆 鉢)·앙화(仰 花)·보개(寶 蓋) 등이 남아 있는데, 노반석 이상의 부재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층석탑은 체감비가 우수하고, 각 부에 표현된 제반 양식을 고려할 때 9세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석남사삼층석탑(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석남사 산신도 (石南寺 山神圖)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2014.12.31.)
석남사 산신도는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한 산신과 산신의 옆에 온순하게 앉아있는 호랑이를 중심으로 배경에 소나무와 시중드는 동녀를 표현한 그림이다. 전체 구도는 화면의 향우측에서 향좌측으로 경사진 낮은 암반 위에 신선과 호랑이가 앉아있고, 구릉 너머로 두 그루의 노송이 신선의 왼편에 보이고 쟁반을 든 동녀가 신선의 오른편에 서 있다. 장방형의 화면은 신선과 호랑이를 중심으로 뒤편에 소나무, 동녀를 배치한 단순한 구성을 보이는데, 인물과 배경에 간격을 두고 좌우로 배치하여 안정적인 공간감 보인다.+ 해당 산신도는 화기를 통해 해인사의 경운당 성규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그는 19세기 후반 경에 경상도에서 활동한 불화승이다. 대부분 수화승으로 참여하였으나, 석남사 산신도는 성규의 작품으로 새롭게 알려진 유일한 단독 작품이다.
* 석남사 독성도 (石南寺 獨聖圖)
시도유형문화재 제34호(2014.12.31.)
노송과 암석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 那畔尊者]를 그린 독성도(獨聖圖)이다. 화면 중앙의 독성은 오른쪽으로 향한 좌안(左顔)의 반측면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독성의 향우측 뒤편으로 노송 한 그루가 묘사되어 있다.노송의 전면과 화면의 향좌측에는 괴석을 배치, 절벽 골짜기 사이로는 폭포수가 흐르며 독성의 우측으로 뻗은 절벽 끝에는 삼족 향로가 놓여 있다.독성의 신체 표현은 기본적으로 백색을 바르고 엷은 주색으로 윤곽 처리되었고, 법의는 가사와 승각기, 복견의를 착용하였다. 가사는 가장자리에 검정색단을 댄 붉은 가사로, 의습선은 먹선으로 그렸다. 복견의는 녹색으로 채색하고 의습선은 주선 처리하였다.독성의 배경은 연녹색으로, 화면 상단으로부터 노송을 감싸고 있는 유운문(流雲紋)은 먹선으로 윤곽 처리하고 농도가 짙은 백색안료를 사용하였다. 화기는 화면의 하단 중앙에 주색 바탕에 묵서로 적혀있다. 화기를 통해 독성도는 1889년에 봉규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언양현 가지산 석남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 석남사수조 (石南寺水槽) + 엄나무수조(구유)
시도문화재자료 제4호(1997.10.09.) 시대 ; 조선수조는 일반적인 사각형의 형태와는 다르게 사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모습이며,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각 면을 잘 다듬은 세련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도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 * 2018-10 울산/울주답사 일정 2018.11.28.(수요일)
+ 마산박물관 00 = 000.0km 07;00-
+ 간절곶 83 = 91.1km 08;35-09;05 (30)
+ 울산대교 전망대 50 = 29.7km 10;00-10;30 (30)
+ 장생포고래박물관/체험관 11 = 7.4km 10;45-11;30 (45)
+ 울산박물관 22 = 9.3km 11;55-12;30 (35)
+ 점심;할머니순두부=왕콩정식 23 = 7.4km 13;00-13;50 (50)
+ 간월사지/작천정 30 = 24.8km 14;20-14;50 (30)
+ 언양읍성 17 = 7.5km 15;10-15;40 (30)
+ 언양석남사 14 = 12.0km 15;55-16;40 (45)
+ 마산박물관 80 = 95.5km 18;00 귀환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