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 걷기(3차, 4월 20일)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독주항 수로 …
… 다녀왔습니다.
만경강 따라 걷기 세 번째.
역시 강의 중하류로 내려가면서 폭이 넓어지고 직선화된 강둑길이 다소 따분해지기 시작합니다. 넓은 평야 때문에 멋진 경치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맑은 하늘은 햇살이 덥고, 마침 “미세먼지: 나쁨”의 공기상태도 그리 즐겁지 못한 날입니다.
지난주에 흐드러졌던 벚꽃도 거의 졌군요.
이번 만경강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관개수로 견학여행’이 주된 테마일 것 같습니다.
봉동읍~삼례읍 구간에서 가장 눈대목은 역시 오늘 마지막 구간인 삼례의 「독주항 수로」.
이 특이한 지명은 어디서 연유했을까요.
산길이나 물길 중에 굽은 곳이나 나뉘는 곳을 ‘목’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리목[鳧項(부항)」, 노루목[獐項(장항)]… 등의 이름이 붙은 물목이나 길목이 있는 것이지요.
송아지[犢]가 달린[走] 길목[項]이라 하여 독주항. 그 길목에 낸 수로라 하여 독주항 수로.
봉동읍 장기공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지난주에 잘 난 척 떨면서 선조들의 치수·방제사업에 대해 글로 쓴 것을 카페에 들어가 읽지 못한 사람도 있을 거라며 다시 한 번 말로 설명하라는 정국장의 요구에, 1분간 비석 앞에 서서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했어도 여전히 별로 관심들 없으시더라구요.
길을 떠납니다.
지난주보다 연두색이 훨씬 선명해진 강변길이 신선합니다. 아침 바람이 의외로 쌀쌀해서 자칫 감기라도 들까 조금 걱정도 되면서.
봉동읍 옛 터미널 자리를 지나, 장기공원에 있던 옛 씨름판을 재현해놓은 듯한(?) 고수부지 체육공원을 지나, 완주경찰서를 끼고 둑길을 내려가 낙평리 신월마을을 향합니다.
(위 : 구 봉동터미널 자리)
(위 : 옛 씨름판 복원한 곳?)
해가 오르고 땀도 나기 시작합니다. 아침 찬바람에 놀라 두텁게 입고 나온 사람들이 한 꺼풀씩 벗기 시작하네요. 시멘트길을 걷는 여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발바닥도 화끈거리고 무릎도 시큰시큰.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버스정류장에서 신기한 지명을 발견합니다. ‘마그네다리’.
‘마그네’가 무얼 뜻할까.
이곳은 계획도시로 시가지가 바둑판처럼 짜여 있습니다. 2006년에, 진안 용담댐 담수로 쫓겨나야 했던 상전 월포리 신전마을과 원월포마을 주민들이 집단 이주해온 곳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도시 교외의 전원주택지처럼 고급스러워 보입니다만… 농사가 본업이던 사람들이 이런 데로 이사 와서는 뭘 해먹고 사나? 궁금증과 걱정이 앞섭니다. 당시 이주해온 40명의 이름이 마을회관 앞 돌판에 새겨져 있군요. 알 만한 이름은 두 명 정도뿐입니다. 제가 진안으로 이사 오기 바로 전 해의 일이어서요. 기념사진 한 컷 찍고 되돌아 나옵니다.
일행 중 길을 잃고 떨어진 한 사람을 기다릴 겸 강변 고수부지에서 잠시 쉽니다.
이제는 여지없이 그늘 없는 고수부지 자전거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도 차가 자주 오가는 강둑길보다 덜 위험해서 낫습니다.
5백미터 쯤, 길옆의 안내판에 이르되 “여기서부터 ‘마근보’까지 1킬로미터 구간은 다슬기 잡기 등을 해도 좋다”고 썼군요.
“마근보? 보(洑) 치고 막지 않은 보가 어디 있을까?”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아차!’ 무릎이 탁 쳐집니다. 아까 본 ‘마그네다리’와 ‘마근보’가 서로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완주경찰서 못미처 커다란 보를 통과했는데 그것이 ‘마근(막은)보’였고, 그 보 아래의 봉동교 다리가 옛 이름으로는 '막은내(마그내) 다리’였을 거라는 것.
보 아래라 물이 적고, 강 가운데 갈대숲 무성한 모래톱이 넓습니다. 흐름이 거의 정지된 물가에서 낚시를 놓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요. 어떤 이는 아예 고무보트를 타고 물 안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이 일대를 신천습지라 부른답니다.
익산-포항고속도로의 다리 아래. 그늘에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저는 다리 위로 올라가 동네를 잠깐 둘러보았습니다.
이 일대는 신탁리라는 곳인데 옛 만경강의 곡류가 심하던 지역입니다. 지금도 원래의 구불거리던 물길 따라 불규칙하게(자연스럽게?) 형성된 논밭과 마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간선수로」는 이곳보다 북쪽 수계리·석전리 들판을 서쪽으로 달려가고 그 일대는 바둑판처럼 농경지가 정리되어 있지만, 당시에 이 신탁리 쪽은 만경강의 직강공사만 했을 뿐 부정형의 농경지를 반듯반듯하게 만들기는 포기(?)했던 듯합니다.
일제는 관개수로 공사를 하면서 되도록 직선화하여 관리에 편하게 함을 기본으로 하여, 기존의 자연개울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공수로를 자연하천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하천을 아예 막아 마른 내를 만들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기존하천과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하상(河床) 땅 밑으로(또는 위로) 도수거를 통과시켜 간선수로의 물이 섞이지 않고 건너뛰게 한 것입니다. 이런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춘포면에서 익산천과 교차하는 곳일 것 같습니다.
(위 : 하저터널 굴착 공사 모습.)
다리 밑 휴식을 끝내고 다시 움직입니다. 회포대교 다리 아래를 통과. 이 지점은 소양천이 합해지는 곳이어서 강폭도 강 가운데 모래톱도 더 넓어집니다. 회포대교도 매우 깁니다. 회포는 혹시 ‘돌아가는 물, 그곳에 있는 나루’ 돌개[廻浦]의 한자명이 아닐까요?
여기는 이미 삼례읍 경계에 들어선 셈입니다. 둑방길을 벗어나서 하리 용전마을을 통과합니다. 마을 안길에도 작은 수로가 사통팔달 뚫려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물이 깨끗하지 못하군요. 고여 있기도 하고 흙이나 풀로 막혀 있기도 한 것이, 글쎄요, 가문 탓에 수량이 적어 그렇다고 보기만은 힘든 것 같습니다. 역시 관리를 잘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넓은 마을이지만 빈 집도 많고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습니다.
(위 : 공중전화 부스 안에 웬 음료수대가? 물도 나오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하리 신풍마을을 통과합니다. 이 마을은 용전보다 조금 더 깔끔하고 집집이 꽃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한 집의 담장 너머 연보라색 라일락이 화사한 꽃송이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강둑길로 올라섭니다.
점심 후의 발걸음은 아무래도 처집니다. 기온은 20도가 넘었고, 머리 위를 쬐는 햇볕은 사정을 두지 않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탈 것 같습니다.
신풍마을을 나와 1킬로미터, 멀리 비비정 정자의 팔작지붕이 보일락 말락 할 때 쯤, 한없이 넓게 퍼지는 강폭을 만납니다. 전주시내를 통과하고 북상하는 전주천과 합류하는 지점.
강 가운데에 수면 위로 겨우 보일 정도로 야트막하고 폭 좁은 둑이 긴 곡선을 그리며 반대쪽 하안까지 닿아 있습니다.
이 둑의 연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주천이 합해지면서 물 높이가 갑자기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잠깐 동안 분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만경강 본류의 물은 이 얕은 둑에 갇힌 채 오른쪽으로 유도되어 오래된 수문 아래를 통과하고, 전주천의 물은 그 둑 왼쪽으로 분리된 채 흘러 수문보다 하류에서 비로소 만경강 본류 물과 합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참 놀라운 아이디어입니다.
얕은 둑까지 내려가 볼 수 있도록 짧은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시멘트 다리도 연륜을 자랑합니다. 낚시 놓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이는군요.
거대한 수문도 시멘트의 색깔이나 축대 따위가 오래된 흔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수문의 이름을 새긴 판이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대는 물길이 정말 복잡합니다. 다섯 갈래 여섯 갈래의 크고 작은 물이 만나 합해지는 복잡한 지점. 게다가 예전에는 밀물 때 바로 이곳 삼례 앞까지 잠기곤 했던 낮은 지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소중한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궁리해야 했겠지요. 그 난제를 이렇게 해결한 것입니다. 강 속의 「중앙분리대」로 전주천 물을 잠시 분리하고, 작은 하천들의 출구마다 역류를 막는 수문…. 둑과 수문들을 집중시켜야 했을 이 일대는 만경강 수리사업 중에서도 가장 난코스였을 것 같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