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의 히딩크'
축구용품 팔러 갔다 맡은 유소년 대표팀… 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 '대형 사고'
김신환(金信煥·53)은 촉망받는 축구선수였다. 100m를 12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처럼 탄탄대로를 달릴 거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랬던 운명이 꼬일 대로 꼬였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더니 실업팀 생활도 태극마크 한 번 달고 끝났다.은퇴 후 손대는 사업마다 망했다. 팔자(八字)를 고쳐보겠다고 인도네시아에 갔지만 거기서도 쪽박을 찼다. 아내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를 두고 떠났다. 마지막 한탕을 노리며 김신환이 택한 곳은 이름도 생소한 동(東)티모르였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돈방석'이 아닌 맨발의 소년들이었다. 그 순간 가난한 건달이 '동티모르의 히딩크'로 재탄생했다. 수기 '맨발의 기적'(미래를 소유한 사람들)과 6월10일 개봉하는 영화 '맨발의 꿈'의 주인공 김신환 스토리다.
- ▲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은 올 10월 다시 한번 국제대회에 나선다. 제대로 빛 한번 본 적 없던 왕년의 축구 소년이 절망 속에서 만난 아이들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김신환은“미쳤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김신환 감독이 성남 풍생중학교 축구 선수들과 그라운드에 누웠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2004년 3월 27일 일본 히로시마의 호텔. 김신환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내일 제30회 리베리노컵 국제축구 결승전이 열린다. 리베리노컵은 브라질의 전설적인 스타 로베르토 리베리노를 기념한 유소년(幼少年)대회를 말한다.
동티모르는 축구 불모지(不毛地)다. 그랬던 이 나라가 32개국이 나온 대회에서 결승까지 간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대망의 최종 승부를 하루 앞둔 날, 선수들이 집단 설사 증세를 보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식당에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날보다 훨씬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수북했거든요. 평소 못 먹던 아이들이 정신을 잃은 듯했어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먹어치우더군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결승전은 김신환의 우려대로 진행됐다. 일본팀은 배탈에 걸려 절절매는 동티모르의 골문을 마구 유린했다. 전반 10분 만에 두 골을 먹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다리가 풀려 허우적대던 무낀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파리한 표정의 라모스와 옥타비오도 질주하기 시작했다. 4대2 승리, 동티모르 사상 첫 국제축구대회 우승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이 펼칠 기적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불운
김신환의 미래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충남 장항중앙초, 장항중을 거쳐 축구명문 한양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다. 절정은 고2 때였다. 그가 활약한 한양공고는 전국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고 한 번 준우승했다.
그랬던 그의 운명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꼬였다. 한양대행(行)이 틀어졌다. 성균관대·명지대 진학도 무산됐다. 곧 창단하리라고 믿던 동서산업 축구단 창단도 물 건너가버렸다. 고교 졸업 후 2년을 김신환은 그렇게 보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같던 인생이 잠시 환해진 건 1979년이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해군 감독이 손을 내민 것이다. 당시 해군팀은 국가대표가 즐비한 최강이었다. 김신환은 허정무·김성남·김강남·정용환·한문배와 한솥밥을 먹게 됐다.
1980년 5월 실업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인도네시아 마라하림컵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때가 전성기였다. 그 대회 준결승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 져 3위를 차지했다. 제대 후 그는 실업팀을 거쳐 국가대표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줄 것 같던 은행들이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좌절할 때마다 그는 장항선을 타고 낙향(落鄕)했다. "잘나갈 때는 그리도 느리던 기차가 가기 싫을 때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1983년 현대자동차 유니폼을 입었지만 좌절한 기대주에겐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다. 1987년 그는 그라운드를 떠나 울산 현대차 안전관리실 직원이 됐다. 공장 안에 있는 도랑이나 개울에 시약(試藥)을 넣고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추락
2년째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다. 고교 선배인 부장(部長)이 그를 불렀다. "홍보업무를 해보지!" 가보니 연장 들고 시트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선배를 찾아가 항의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 일인데, 왜 그래?"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 무료한 생활에 '유혹'이 왔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일 끝나고 카드나 치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조금 땄지만 점점 돈을 잃다 마침내 사채(私債)에도 손대기 시작했다.
'타짜'들에게 얼마를 농락당하다 정신차리니 빚만 3500만원이 돼 있었다. 1995년 여름 그는 더 울산에 붙어 있을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건달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신환아, 인도네시아 가볼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처음 한 일이 유리가공공장 관리였다. 몇달 지내보니 그 공장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것이었다. 1년 만에 백수(白手)가 된 그에게 퀼팅 사업을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제법 되나 싶더니 빚만 다시 늘리고 끝냈다.
인형(人形) 납품업 실패, 칼리만탄에서의 목재업(木材業) 실패…. 도무지 그의 삶에 몇번의 실패 운(運)이 웅크리고 있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1999년 한국에 돌아온 그를 반긴 건 형사들이었다. 돈 떼먹고 도망갔다는 혐의였다.
교도소에서 6개월을 보냈다. 나와보니 아내가 종이 한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이혼서류였다. 15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이혼 수속을 밟는 데 15분이 걸렸다. 김신환에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 ▲ 동티모르의 한 스포츠용품점 아저씨 김신환은 가게 망하도록 아이들과 공을 찼다. 태양에 검게 그을린 그는 아이들과 피부색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푸짐한 음식에 배탈 난 축구 소년들은 질주했다. 김신환은 타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도 동티모르를 떠날 수 없었다.
2001년 10월 신문을 보다 눈이 번쩍했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다는 기사였다. 4년 전 자카르타에서 만난 빠올로가 생각났다. 소년의 고향이 동티모르였다. 김신환은 마음먹었다. "그래 마지막이다. 그곳에 가보자!"
당시만 해도 동티모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도 딜리로 가는 항공편은 예약하기도 힘들었다. 지인들이 챙겨준 돈을 들고 김신환은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
1주일간 동티모르를 헤매다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귀국했는데도 자꾸 그곳 풍광이 떠올랐다. 미심쩍으면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운동선수 특유의 성격이다. 김신환은 다시 동티모르에 갔다. 그때 뭔가가 머릿속에 번쩍했다.
딜리의 시민운동장이라 할 포르무까 데모크라시 운동장에서 대여섯살 어린이부터 40대까지 공을 차는 게 아닌가. 모두 생기있고 활기찬 얼굴들이었다. 김신환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왕년의 실업대표 실력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다음날 운동장에 가니 김신환은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김신환은 거기서 축구용품점을 하면 대박이 나겠다고 생각했다. 2002년 돌아왔을 때 서울은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김신환은 지인들에게 사정해 1000만원을 빌렸다.
김신환은 그 돈으로 공과 유니폼을 사 딜리로 갔다. 개업 첫날부터 물건은 잘 나갔다. 그런데 그게 전부 외상이었다. 아이도 어른도 외상을 요구했다. 김신환의 동티모르 '월드 스포츠'는 여섯 달 만에 외상 때문에 망했다.
#동티모르의 히딩크
월드스포츠는 뭔가를 남겼다. 가게를 알리려 공짜 유니폼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몰려온 것이다. 김신환이 장사보다 아이들 축구 가르치는 데 더 신경을 썼으니 월드스포츠는 엄밀히 외상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니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괴짜에 관한 소문은 동티모르에 자자했다. 2003년 1월 그런 그를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이 찾았다. 대통령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스터 킴, 우리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석달이 지난 2003년 4월 동티모르 유소년 대표팀 40명이 창단식을 가졌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오후 매일 두 시간씩 김신환은 그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2004년 기적이 일어났다.
그에게 물었다. 왜 돈 한 푼 받지 않느냐고. 김신환이 말했다. "그 일이 없었으면 전 미쳤을 겁니다. 그냥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요. 싱가포르에서 거액 연봉을 주겠다는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지만 단박에 거절했지요."
그에게 물었다. 축구는 둘째치고 각종 비용은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김신환이 말했다. "한국가스공사, 이미경 의원, 덕유패널, 동티모르 한국대사관 등에서 많이 도와줍니다. 제가 가진 건 없어도 사람 사귀는 재주는 있어요."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그걸 하겠느냐고. 김신환이 말했다. "지금 제가 가르치는 선수들이 연령별로 200명쯤 됩니다. 제가 가르쳤던 유소년들이 소년, 청년을 거쳐 앞으로 국가대표가 될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동티모르의 히딩크'는 작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16세 이하)에서 1차 예선을 통과했다. 올해 10월 23일부터 열리는 본선에서 동티모르는 본선진출이라는 '꿈'에 다시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