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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중국탕왕의반명(세수대야)에있는말로서 날로 새롭게하며 나날이새롭게하며 또 날로 새롭게함.
곧 '날마다 잘못을 고치어 그 덕을 닦음에 게으르지 않음'을 이르는 말 ,
또 다른 답변을 보려면 화면 아래로 스크롤 해주세요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보면 이와 유사한 질의응답이 나옵니다. 즉 인생이 고통이 바다인데 어떻게 살아
야 하냐고요. 법정스님이 '日新日日新又日新 ( 일신일일신우일신 )'이란 어구를 비유해서 말씀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매일 매일이 고통으로 얼룩져있는 고해의 바다를 살아가는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
는가 하는 질문에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그리고 또 새롭게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삶의 진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무언가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추구하며 살다보면 삶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
워지리라 생각되고요.
사람에 따라 고통의 강도는 다르겠지만요. 분명 낙천적 성향의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되니깐요. 아마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고통을 절감하며 살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행복이나 기쁨과 서로 맞물려 순
환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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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4개 동에서 시범 운영 중인 방문복지팀을 전동으로 확산, 주민과의 협력을 보다 공고히 하여 촘촘한 복지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김 구청장은 이어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 팍팍해진 주민들 삶엔 상생이라는 활력을 찾아드리겠다"며 "사회적 경제는 다양
한 모습으로 주민을 찾아가게 될 것"이라며 "때로는 일자리로, 때로는 복지로, 때로는 주민 간의 협력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메마른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귀 기울여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이란 말처럼 2015년에는 주민들께 더 많이 찾
아가 듣겠다"며 ". 듣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며 하루하루 양천을 변화시켜 나가겠다"고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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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바라고 있다. 어느 누구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더 나은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하지만 인생은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이 있다. 중국 고대 은나라의 시조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인 ‘苟日新(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에서 유래된 말이다. 진실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야 하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반(盤)’은 목욕을 하거나 세수를 할 수 있는 큰 그릇 등을 뜻하며, ‘銘(명)’은 새긴다는 뜻이다. 즉 탕왕은 세숫대야에 ‘苟日新日日新又日新’이라고 적어놓고 매일 세수를 하면서 보고 또 보고 다짐했다고 한다. 신길수 경제학박사/희망교육문화재단 이사장
사설/칼럼
더 나은 인생 더 기쁜 행복을 위한 노력
데스크승인 2014.07.11 | 최종수정 : 2014년 07월 11일 (금) 00:00:01
꾸준한 노력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다양하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우여곡절 끝에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집념이 대단한 사람도 있다. 성공을 하고 난 후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의 시절이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험난한 시련만 겪게 되는 사람에게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매일매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보기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매일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일신우
新(신)은 방향성 없이 단지 변화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을 쌓아가야 하는 지식(知識)이나 덕성(德性)이 더 나아지는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진정으로 지식과 덕성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매일 성실하게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신우일신에서 나아진다는 ‘新(신)’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보다 깊은 뜻은 매일매일 한결 같이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성(誠實性)을 뜻하는 것이다. 더 나은 인생과 더 기쁜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으로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자신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함께 하는 공동체문화를 중시해야
우리 사회는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지역마다 지역성이 다르듯이 사람은 모두가 같을 수가 없다. 외모나 성격도 모두 다르다. 다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경우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약하다. 하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은 경청할 줄 안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기만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하나 둘 실수를 줄여가며 사는 것이다. 때론 실수도 커다란 교훈이 되며 장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마음대로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미완성이란 말이 있다. 부족한 것을 평생에 걸쳐 채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이기에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다소 부족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삶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자신의 생각처럼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어떤 때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만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여건이나 환경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인 것이다.
인간관계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이 아무리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타인이 자신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때로는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배려해 주는 공동체문화를 중시 여겨야 한다. 그런 사회가 바로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딱딱한 내용과 글인데도 그의 상상력이 그 안에서 빛나고 있다. 게다가 개인과 사회, 도덕과 이성의 문제
라는 거대한 담론을 넓은 안목과 역사적 이해로 쉽게 접근하게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그 혜안이 존경스럽
다. 게다가 그가 목사며 신학자였기 때문에 영성적 해석까지 담겨 있어서 종교적 성찰까지 확장할 수 있
다. 물론 그런 종교적 윤리적 색채 때문에 불편해 하거나 고루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는 갈등의 핵심적 화두를 세운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는 도덕성이라는 게 본디 개인에 국한된 개념이지
사회나 국가를 판단하는 데에 공정한 척도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건 본인이 마키아벨리
스트라는 고백일 뿐 정확한 비판은 아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읽어
내야 한다.
이 책은 1930년대 초반에 쓰였다. 그 시대는 미국의 대공황시기이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은 급속히 성장하여 1927년에 이르러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심각
한 문제점을 드러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계층간 소득불평등이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
층에만 국한되어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상류 부유층이 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시민의 구매력을 떨
어지고 재고는 쌓였다.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자금은 증권 등 투기 시장으로 몰렸다. 거품이 일었지만
탐욕에 눈이 먼 자본의 투기 질주는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1929년 대폭락을 맞았다. 경제 공황의 시작
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파산을 의미했다.
책은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상황에서 쓰였기 때문에 그 논조가 비판적이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
한 환경을 배제한 채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상찬이든 비판이든 정당하지 못하다. 물론 니부어 역시 시대
의 딸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도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도덕성과 합리성을 회복하여 사회를
구원하자는 바람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 대안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 한계의 핵심이다.
그러나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비판
그 자체이다. 문제를 찾아내야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강구한다. 그런데 듣기 고깝다고, 상대가 비판한다
고 억누르고 못살게 굴어 입을 다물면 문제가 더 악화되어 곪아터진다. 어제는 옳았지만 오늘은 그를 수
있다. 그게 삶이고 세상이다. 어느 한 가지 입장만 옳다고 고수하고 다른 생각은 외면하거나 억압하면 결
국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세숫대야에 ‘구일신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 아홉 글자를 새겨 세수할
때마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새롭게 변화하려는 다짐을 늘 일깨웠다. 탕왕은 백성의 입장에서 세금을 줄이
도록 제도를 고치고 억울한 세금을 경감하게 하여 성군을 칭송받았다. 탕왕은 ‘나의 눈’으로만 바로 보지
않고 ‘백성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늘 깨어 변화하려 스스로 노력했고
세상을 읽었다.
니부어의 분석과 비판이 21세기에 온전히 맞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사회가 문제다. 그런데도 불행히 그
의 비판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상당 부분 적용된다. 자본주의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만능
은 아니라고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탐욕으로 질주하지 않고 더 건강한 경제 가치로 진화할 수 있
다. 21세기 이곳에서 니부어는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를 물어보고 싶다. ‘일신우일신’은 그런 물음이다.
시대에 끝없이 물어야 한다. 나도 탕왕처럼 세면대에 아홉 글자 적어둘까?
김경집 인문학자
주의 종 헌신예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일신우일신입니다.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의 신앙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속히 변화되기 원하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기 원했습니다. 또 은혜를 받으면 ‘이제 내가 능히 할 수 있다’ 했고
자신감도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스스로 점검해 보면 변화가 더딘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아버지 앞에 민망하고 죄송
하다’ 탄식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 해, 회개의 시간들을 통해서는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는가?’ 하면서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육의 속성까지 발견했
지요. 그러나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면 낙심하게 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는 여
전히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발견할 수 있었으니 감사한 것이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변화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변화시켜 주실 수 있음을 믿으니 기뻐하
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더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 나가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옛사람의 속성을 벗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이 참된
주의 종의 삶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어찌하면 여러분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세 가지 분야로 말씀을 증거합니다.
말씀을 통해 올해는 반드시 영으로, 온 영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맡은 양 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항상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살찌게 할 수 있는 참된 종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이 사심에 대한 말씀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없이 듣고 또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사심이 있으면 양 떼를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도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주의 종이라면 더더욱 육의 정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내 부모나 자녀, 육의 가족보다 맡은 양 떼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하지요.
탐심은 물론이고 자존심이나 교만도 버려야 하고 명예욕, 권세욕도 버려야 하지요. 자신을 잘 섬기고 사랑하는 일꾼이나 그렇지
못한 일꾼이나 누구를 대한다 해도 태도와 안색이 달라져서도 안 됩니다.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하지요.
무수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화 시키는 핑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드러
내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님께 감사하여 이렇게 했다” 하지요.
좀 더 구체적인 비유를 들면, 성도들에게 “이러저러한 용도로 예물을 모으자”하거나 야외로 나가 어떤 모임을 갖자고 합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이런 일을 추진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굳이 일을 벌이는 것이지요.
어떤 행사나 일정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성도나 일꾼들의 입장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좋게 여기는 대로 일을 진행합니다.
이럴 때는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열매도 육의 열매가 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집하면서 자기 사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교회나 교구의 각종 예배 시 설교를 할 때의 마음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이라면 항상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
다. 말씀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하고 언제든지 성령의 주관을 받아 증거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들레는 마음에서 설교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양 떼의 문제를 내가 더 잘 알고 내가 말씀을 더 잘
증거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 후에는 양 떼가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기를 기대하
면서 기다리지요.
또 양 떼가 축복받은 간증을 전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해 줬고 내가 이렇게 심방해 줬
고 내가 이렇게 목자께 인도해 줘서 축복받았다”고 슬쩍 생색을 내는 것입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나는 주의 종이니까 양 떼가 나를 이렇게 섬기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고요.
예를 들어 주의 종에게 경조사가 났을 때 어떤 일꾼들이 주의 종을 섬겼는데 어떤 일꾼들은 섬기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럴 때 주의
종은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요? 섬김 받음에 고맙고 민망한 마음이어야 하지요. 또 ‘이로 인해 양 떼가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혹 어
려움을 당하지는 않았는가?’ 하고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주님 앞에 심히 민망한 일이
지요.
하물며 자신을 섬겨 주지 않는다 해서 ‘저 양 떼는, 저 일꾼은 마땅히 할 도리도 하지 않는가?’ 하고 서운해 하거나 불편해한다면
주의 종으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를 섬기라”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두를 섬기셨고 영혼들에게 사랑과 생명과 축복만 주셨지요. 이에 은혜 받은 영혼들
이 자원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의 섬김을 받으신 것은 그들이 기쁨으로 섬긴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믿음과 사랑
의 행함이 더 큰 영육간의 축복으로 임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지요.
정녕 여러분이 주님을 닮기 원한다면 ‘어찌하면 예수님처럼 사랑받고 섬김 받을까?’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하면 예수님처럼 은혜
를 끼칠까? 어찌하면 영혼들을 더 섬기며 더 낮아질까?’를 궁구해야 하지요.
세상적인 권세나 명예, 부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권세와 능력은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과 여러분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구해서 받아야 하는 것이고요.
여러분은 날마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정결하게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말 한마디를 해도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의욕이 앞서고 내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갖고자 하는 마음, 섬김 받
으려는 마음,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심의 작은 흔적조차 없는 주
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둘째,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새신자나 초신자를 심방할 때 세상 것만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지 못하는 영혼들을 보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부귀영화를 아무리
누린다 해도 육의 것들은 결국 다 헛된 것이기에 천국을 사모하고 영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고 여러분이 열심히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영의 것만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로는 영을 사모한다 하면서도 그 마
음과 생각이 육으로 차 있고 그 시선이 육의 것을 향해 있는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을 종이에 쭉 기록할 수 있다면 어떤 내용들로 채워질까요? 어디 가까운 야외로 가면 경치도
좋고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는데 언제 날을 잡아서 한번 가볼까?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좀 쉬어 볼까? 어떤 옷을 입을까? 집을 어떻
게 꾸밀까? 어떤 취미생활을 해 볼까? 요새 이런 TV프로가 재미있다는데,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데 언제 볼까? 혹여 이런 것들로 채
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먹고 마시고 입고 쉬고 취하는 그런 육의 것들에 마음을 두면 점점 더 육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채워졌으니 이제 족하다
하고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의 것을 더 많이 추구하게 되지요. 마치 바닷물을 마시니 갈증이 더해지는 것처럼 육으
로 육으로 마음이 더 쏠리고 결국 범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의외로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 일꾼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한다 하는 사람들이 중한 육체의 일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이들
도 처음부터 중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면서 작은 육의 것들을 허용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지요.
마음과 생각에 육을 허용하는 만큼 성령 충만함은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사소한 죄를 짓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입
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둔해지고 죄를 경계하는 마음이 무뎌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큰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첫사랑의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는 온 마음과 생각을 영의 일들로 채웠을 것입니다. 또 신학교를 나와 처음
주의 종의 길로 갈 때 혹은 목사로 안수 받았을 때 그 처음의 각오는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육은 철저히 버리고 속히 영으로, 온 영
으로 들어가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종이 되리라’ 굳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전에 취하던 작은 육의 일들도 끊고 여가 시
간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지요.
이런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영의 일들이지요.
‘어찌하면 내가 말씀을 더 무장할까, 어찌하면 내가 더 기도할까, 어찌하면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영육 간에 좋은
열매를 낼까, 어찌하면 나도 권능을 행하여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전할까, 어찌하면 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줄까, 어찌하면 저
양 떼를 충만하게 하고 믿음이 성장하게 할까’ 이런 영의 일들만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들기 전에 누워 있는 잠깐의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을 해야지요. 맡겨진 영혼
들을 생각하고요. 영의 일들만 생각하며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워나가면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며 보장하시는
주님을 늘 체험하기에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지요.
속히 변화되어 성결을 이룰 수도 있고, 사명감당의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항상 영의 일만을 생각하여 날마
다 자신을 새롭게 해 나가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셋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후반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순종에 대한 말씀도 주의 종 여
러분은 늘 듣는 말씀입니다.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의 말을 들어야지요. 주인의 말을 듣고 순종할 때 주인이 그 종을 먹이고 입히고
주인이 원하는 일에 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충만할 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도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
는 분들이 많이 있었지요.
또 “목자의 권능을 보았고 목자를 신뢰하니 오직 아멘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
는 일꾼을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브라함 같은 입장이 되면 온갖 육신의 생각들을 동원할 것입니다. ‘아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무
서운 일을 시키시는가?’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 하셨는데 이제는 그 언약의 말씀을 번복하시는 것인가?’ 이런저런 고민
을 하다 보면 충만함이 떨어지고 그런 고민되는 일을 명하신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결국은 이삭을 바
칠 수도 없구요.
자기가 충만할 때만 순종하고 자기 의와 틀과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한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을 버려야 하고 육신의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순종하겠다고 결심해도 육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옵니
다. 충분히 순종할 수 있는 일조차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이유를 대면서 순종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이렇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입술로는 “아멘”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얼마나 명심하고 계십니까? 정녕 ‘하라’ 하
시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안 하시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한계 속에서만 순종합니다.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하니까, 예전보다는 낫고 누구보다는 나으니까’ 하
면서 당장 결단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가령 “영의 일만 생각하라” 하면 그 순간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영의 일만 생각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구습대로 육의 생각이 떠올라도 당장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계속 떠오르는 생각에 빠져들고 그 생각을 좇아 육을 취해 나가기
도 하지요. 아까 들은 말씀이 있고 기도한 것이 있어서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죄는 아니니까 일단 이것은 놔두고 다른 것
부터 버리겠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정체된 신앙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결여가 있어도 채울 수가 없고 아버지께
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만들지 말고 진
리대로 배운 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순종만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주님
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지요.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인내로 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함을 압니다. 성공의 길을 아무리
알아도 게으름과 정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정작 그 길로 갈 수가 없지요.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방탕하여 구제불능의 삶을 살던 사람이 큰 위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반듯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기만 하던 학생이 어떤 일로 충격을 받으면 밤낮으로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평가하기를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려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제 2011년도를 맞아 완전히 달라지시길 부탁드립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
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셨지요.
여러분은 이 마지막 때 심히도 할 일 많은 제단에서 수백, 수천 명 이상의 양 떼를 책임져야 할 귀한 주의 종들입니다. 가나안 시대를 눈앞에 둔 이 시점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적 장수들을 더욱 급박하게 찾고 계시지요.
이제 단단한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육의 한계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사심을 버리고 영의 일만 생각하며 온전한 순종
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비상하는 것처럼 힘찬 기상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전진하는 만민의 주의 종들
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