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채석장이 에메랄드빛 호수와 보랏빛 별천지로!
6월 중순이면 2만㎡가 보랏빛으로 물드는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정원. 사진 동해문화관광재단
동해시 무릉별유천지
일정6월 8~23일
장소강원 동해시 이기로97 무릉별유천지 일원
문의(033)532-1945
애물단지로 전락할 뻔한 폐산업시설인 채석장을 복합 체험 관광지로 되살려 반전에 성공한 곳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로컬100(지역문화매력 100선)’에 선정된 강원 동해시 ‘무릉별유천지’다. 잿빛 채석장 한가운데엔 에메랄드빛 호수가, 초여름이면 그 주변엔 보랏빛 라벤더가 활짝 펴 장관을 이룬다. 2021년 11월에 문을 열어 2년 5개월 만에 35만 명이 다녀갔을 만큼 별천지가 된 이곳에서 6월 23일까지 라벤더 축제가 열린다. 1년 중 가장 화려한 때를 앞두고 무릉별유천지에 다녀왔다.
새처럼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 사진 동해문화관광재단
금곡계곡의 용출수가 대형 웅덩이에 채워져 형성된 ‘청옥호’.
드넓은 라벤더 정원 품은 천상의 화원
라벤더는 초여름을 알리는 꽃이다. 무릉별유천지 내 약 2만㎡ 규모의 야외 라벤더 정원은 축제를 준비하는 듯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온라인엔 무릉별유천지의 실시간 라벤더 개화 상황을 알리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곳 라벤더는 6월 초쯤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6월 중순이 되면 만개한다. 주말이었던 6월 2일, 1만 3000포기의 잉글리시 라벤더가 군락을 이룬 라벤더팜은 서둘러 찾아온 이들로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주인공은 라벤더지만 순환 이동수단인 무릉별열차가 오가는 메인 도로 양옆으론 금계국 군락이 먼저 마중 나와 눈을 즐겁게 한다. 정원마다 금어초, 금영화, 수레국화, 금잔화 등 다양한 야생화가 경쟁하듯 여름 꽃 향연을 펼치고 있다. 전남 신안군 퍼플섬, 전북 고창군 청농원, 강원 고성군 하늬라벤더팜 등 전국에 라벤더를 비롯한 야생화 군락이 다양하게 조성돼 있지만 무릉별유천지가 특별한 이유는 공간의 내력 때문이다.
매표소와 갤러리, 전망카페가 들어선 쇄석장. 가동이 멈춘 시설들을 둘러볼 수 있다.
폐광산이 복합 체험 관광지로
강원 지역엔 전국 석회석광산의 절반이 있다. 채굴량도 전국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석회암 매장량이 풍부한 강릉·동해·삼척·영월 등 강원 남부지역에는 1960년대부터 대규모 시멘트 공장들이 들어섰다. 이 시멘트 공장들은 국가 기간산업의 한 축을 이루며 1970~19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40년쯤 지나 쓸모를 다한 채석장은 하나둘 폐산업시설로 방치되기 시작했다.
무릉별유천지는 쌍용C&E가 1978년부터 2017년까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채광하던 곳이다. 40년 동안 1억 6000만 톤을 채석하고 조쇄한 산업시설들이 남아 있던 무릉3지구를 자연이 함께하는 복합 체험 관광지로 만들었다.
이곳의 정체성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안내소 역할을 하는 ‘쇄석장’이다. 쇄석장은 과거 커다란 쇄석기 등 산업시설이 있던 자리다. 시멘트 공장의 시설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낸 듯한 외관 때문일까. 건물에 들어서기 전까진 관광지라기보다 공장 견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연·산업·사람 등 세 개의 주제로 영상을 보여주는 멀티미디어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 공간인 갤러리가 나온다. ‘삼화 세계의 빛’이란 주제로 석회석의 쇄석과 시멘트 생산 과정, 당시 노동자들의 근로 현장과 생활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아카이브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삼화(三和)는 무릉별유천지가 있는 곳의 지명이다. 이곳 김봉진 도슨트는 “무릉별유천지란 이름은 동해의 명소인 무릉계곡의 ‘무릉’과 ‘용추폭포’ 아래 바위에 새겨져 있던 암각문 ‘별유천지’를 합한 이름으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유토피아’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4층에 자리한 전망카페에선 무릉별유천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석회석 폐광산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린 ‘시멘트 아이스크림’은 꼭 먹어볼 것! 흑임자로 맛을 내 색깔이나 질감이 시멘트와 흡사한 아이스크림을 삽 모양의 숟가락으로 떠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쇄석장 입구를 장식한 벽화 ‘공생’. 무릉계곡과 석회광산이 어우러진 모습을 담았다.
에메랄드빛 호수 한 바퀴
쇄석장 전망카페에서 무릉별유천지를 파노라마로 조망했다면 이젠 구석구석을 탐방할 차례다. 라벤더 정원은 청옥호와 금곡호 두 호수 사이에 있다. 날씨에 따라 짙푸른색을 띠기도, 에메랄드빛을 띠기도 하는 호수는 인근 금곡계곡의 용출수가 대형 웅덩이에 채워지면서 형성된 인공호수다. 신비롭고 특이한 호수의 색은 석회 성분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청옥호는 수질이 양호해 생활용수로는
쓸 수 있으나 성분 특성상 음용수로는 부적합하다.
약 12만 5000㎡, 수심 30m의 청옥호 주변에선 ‘거인의 휴식’과 ‘무릉정령’ 두 개의 조형물을 볼 수 있다. 또 약 3만㎡, 수심 15m의 금곡호 근처에 있는 ‘신들의 화원’은 계절별로 15만 본의 꽃들이 번갈아 방문객을 맞는다.
전체 107만㎡의 무릉별유천지를 한 번에 돌아보기엔 무리가 있다. 코스를 순환하는 무릉별열차를 타고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A·B·C 세 구간을 오가는데 무릉별유천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두미르전망대’는 C 정류장에서 하차해 15분(편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도착한다. ‘두미르’란 이름은 ‘쌍용’의 순우리말. 채석 후 생긴 산의 절개지 상단에 자리한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전망대와 이어진 길은 과거 보부상들이 동해안의 소금을 영서 지방으로 운반하던 ‘소금길’ 코스이기도 하다.
드라마 촬영장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두미르전망대는 tvN ‘사랑의 불시착’에서 배우 현빈과 손예진이 절벽에서 패러글라이딩하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다. 청옥호는 SBS ‘펜트하우스3’와 ‘7인의 탈출’에, 금곡호는 tvN ‘호텔 델루나’에, 그리고 ‘거인의 휴식’ 작품은 tvN 예능 ‘바퀴 달린 집 3’에서 배경으로 쓰였다.
구간을 오가는 길목에 전시된 채석 장비도 볼거리다. 모두 석회석 채굴에 활용됐던 장비들로 집 한 채를 완전히 부숴서 담을 만큼 큰 85톤의 몬스터 덤프트럭 앞에 서면 어린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입이 떡 벌어진다.
산악 체험시설도 인기
어드벤처 체험시설도 빼놓을 수 없다. 금곡호 상공 777m 구간을 새처럼 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를 비롯해 폐쇄석장의 임도로 사용되던 길을 무동력 카트를 타고 내려오는 오프로드 루지, 곡선형 고공 레일에 매달려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내려오는 롤러코스터형 집라인, 알파인 코스터 등은 스릴을 즐기는 청소년과 젊은 층에 인기다.
축제 기간엔 볼거리, 즐길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올해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축제는 ‘라벤더로 두드리는 마음(lavender_LOVEnder)’이라는 부제로 진행된다. 축제 기간 중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쇄석장 매표소 앞 공연무대에서는 ‘라벤더 보라(BORA!) 콘서트’를 선보인다. 6월 15일과 22일 청옥호에선 음향·제트스키 분사를 이용한 전문팀의 수상 공연쇼도 열린다. 청옥호 둘레길 트레킹, 보물찾기, 라벤더 사생대회 등 풍성한 체험행사와 푸드존도 더해진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 바람에 실려온 라벤더 향기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백색소음처럼 들린다. 에메랄드빛 호숫가엔 꽃이 만발하고 하늘 위로 새 모양의 글라이더가 날아다닌다.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따로 있나? 여기가 무릉이고 별유천지지.
글·사진 박근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