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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1903년 5월 08일 회기 [라이프니츠에서 칸트로]
벩송: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2-1903)
-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편집, PUF, 2016, pp. 323-328(P. 395).
앞 강의에서 이번 강의에는 “칸트”로 간다고 했는데, 벩송은 이 강의에서 근대 철학이 지속이라는 직관에 들어섰다가,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하고 고대철학의 이데아의 직관과 닮은 공간화된 직관에 대해 머물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서 다시 라이프니츠를 다루면서 이 강의 후반에 가서야 칸트를 라이프니츠의 결과물처럼 다룬다. 따라서 칸트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데카르트의 직관은 플라톤주의에 영향으로 지속의 주변에 맴돌았고, 라이프니츠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입었지만 실재성의 내부로 들어가기보다, 인식론적으로 직관의 관통을 통해 모나드의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으로서 직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즉 시간 지속의 문턱에서 근대철학자들, 데카르트든 라이프니츠든 더 이상 깊이 있게 내부로[영혼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벩송은 기억 또는 생명의 지속성에 대해 움직이며 지속하는 영혼을 고대 철학적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며, 이런 방법적 한계 때문에 실험과학이 과정을 파악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이며 공간화 된 물리적 실험과는 달리 다루는 실험적 과학, 즉 생물학, 미시물리학, 전자기학,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도래로 직관은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55PMD)
# 제19강 1903년 5월 08일 회기 [라이프니츠에서 칸트로] pp. 323-328.
지난 강의의 첫 부분에서, .. 고대철학은 전적으로, 한편 이데아들의 세계와 다른 한편 감각적 세계 사이의 대립으로 지배되었다. (323)
한편으로 이데아들의 체계, 따라서 비시간적 체계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 있고, 이데아들 속에 감겨있는 실재성의 불완전한 형식 하에서 풀려지는 시간이다. (323)
감각적 세계와 가지적 세계의 대립, 지속과 영원의 대립이 있다. (323)
철학의 기원들은 플라톤주의였다. 플라톤에서 이런 철학이 그려졌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초점을 맞추고, 플로티노스가 철학에게 가장 완전한 형식을 부여했고 동시에 철학의 전환(tournant)을 준비했다. (323) [철학의 기원은 지속이다. 소크라테스에 와서야 지속이 영혼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플라톤주의와 달리 플라톤은 영혼의 실재성을 탐구한 첫째 철학자일 것이다. 그 영혼을 다루는 방식, 따라야 할 방법을 찾은 것은 벩송이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가장 엄격한 형식 하에 위격들[토대들]의 이론을 소개 했다. .. 플로티노는 우리가 내부의 삶이라고 부를 것에 매우 결합된 정신의 소유자이다. 플로티노스는 의식을 깊이 탐구한 첫째 철학자이다. (323)
플로티노스는 의식에게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하게하는 철학을 준비했고, 결국 영혼은 첫째 자리에 놓았다. (324) [영혼의 자리에 지속, 기억, 생명으로 놓은 자가 벩송이다. / 우주에서 최종심급은 질료(물질)이며, 인간에게 최종 심급은 영혼이며, 공동체에서 최종심급은 인민이다. (55PMC)]
르네상스 철학은 전적으로 플로티노스가 철학에 부여한 형식 하에서 플라톤주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철학은 철학이 영혼에게 부여한 위치에 의해서 고대철학과 구별된다. (324)
단어의 플라톤적 의미에서 이데아들은 우선 사물 속에 내려갔고 그리고 이데아들(elles, 사물들?)은 살아있고, 이데아들은 일하며, 결국 이데아들은 사물들이라기보다 관계들, 사실들 사이의 연결들이다. (324) [르네상스의 중요점은 이데아들이 관계들, 연결들이 되면서, 상대성이 인정된다. ]
이 철학은 보편영혼을 제1서열로 통하게 하는 사물들의 개념작업을 향해 방향 잡았다. 보편영혼이란 생명성, 즉 생명성을 지니고 있는 지속이다. (324)
과학의 대상(목적)은, 고대인들이 그렇게 원했던 것처럼, 더 이상 지속을 초월하는 것도, 영원 속에 위치하는 것도 아니다. .. 과학의 대상은 운동자(le mouvant)가 될 것이다. (324)
우선 순수히 정태적인 과학이 아니라, 수학(la Mathématique)은 도형들과 사실들을 연구하고 이 도형의 형성작용의 과정(le processus)을 따르고자 애썼다. .. 이로부터 새로운 수학들(les mathématiques)이 나오고, 운동성(la mobilité)의 수학들이 나올 것이다. 그 운동성의 기원에, 우리는 사물들이 심리학적 진설의 관념으로 나타날 있다는 것을 확립하려고 애쓸 것이다. (324) [벩송은 사물들 속에 이데아가 아니라 운동성, 영혼이 내재한 것이라고 보려한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지속의 감정을 불러온다. 이 감정은 수학의 변형을 규정하고, 수학을 매개로해서 우리의 전 과학의 혁신을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험의 새로운 과정의 도움보다 더 많은 수학의 변형작업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수학의 변형작업은, 척도와 변수의 취급으로 향하여 전적으로 수렴하는[적분하는] 실험, 즉 실험 방법들의 변화를 규정한다. (324-325)
16세기, 심지어는 17세기에 인간적 사유는 선천적으로 할 수 있는 두 방향, 두 길 사이에 선택을 했다. (325)
첫째 길은 직관의 방향에, 순수지속의 깊이의 방향에 의지 하면서 시작했던 운동을 계속해서 참가하는 길이었다. 이때에 점점 더 깊은 지속의 층등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즉 점점 더 깊은 직관, 다양한 형식들 하에서 운동성을 가졌을 것이다. (325)
다른 말로 하면 지속의 변화들 위에서 점점 더 깊은 직관의 계열들을, 아마도 다양한 서로서로 매우 다른 과학들을 가질 것이다. 이 과학들은 동시적으로 서로 평행하게 전개되었으리라. 사실상, 사람들은 하나의 과학이라는 고대의 개념작업으로부터, 개념의 유일한 체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으리라. (325)
[둘째 길] 사람들이 따라갔던 다른 하나의 길도 있었다. 수학은 매우 깊은 몇 몇 직관들을 도입하여 막 새롭게 구성되었다. 이 새로운 수학과 더불어 사람들은 고대 사유의 작업을 다시 다루고 다시 시작하기를 시도했다. .. 이 유일한 과학이며 보편 과학은 고대인들의 과학보다 매우 우월했다. 또한 우리의 수학이 고대의 기하학보다 우월했다. 고대의 기하학은 정지[정태]의 연구로 환원되며, 현상의 운동성에 순응(se plier, 유연)할 수 없었다. (326)
사람들은 위대한 수학에, 실재성의 체계인 기호의 체계에, 이를 것이라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변형된 플라톤주의에 도달하였으리라. (326)
사실상 사람들은 수학과학의 기원이었던 이런 직관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또 점점더 멀어지고, 점점 더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순수 지속이라 불렀던 것을 시각으로부터 잃어버렸다. (326)
이것이 둘째 길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참가했고, 많은 이유들 때문에 참가했다. 그 길의 중요성은 사람들이, 무작위적 시도(기획)들을 위해서, 획득되고 확신된 결과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길은 매우 힘든 노력을 요구한다. (326)
이러한 것은 자연에 반대이며, 그것은 사유의 자연적 작업의 역방향을 가정한다. (326) [EC에서 사고의 자연스런 경향은 지성의 경향이며, 물질로 향한 하향하는 경향이다. 이에 비해 생명 또는 직관은 상향하는 것으로 자연의 자연스런 경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런 직관은 그 타당성이 획득된 결과들만을, 즉 얻어진 결과들만을 측정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실한 직관과 착각적(illusoire) 직관을 구별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도달한 결과이며, 그것은 실천이다. 그것은 불확실한 방법의 적용이었다. 요구된 노력은 상당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기획(시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에 다가가는 것은, 사람들이 충분한 일반성에 의해 찾아진 결과들에 이를 수 있는 지를 찾아내고 난 후이다. (327) [영혼에 관한 내적 직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신(지성)의 착각적 직관으로 들어간 것이 후설의 수의 개념에 대하여: 심리학적 분석(Über den Begriff der Zahl. Psychologische Analysen, 1887)과 산술의 철학(Philosophie der Arithmetik. Psychologische und logische Untersuchungen, 1891)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했듯이 플라톤주의는 모방작용이며, 기하학의 외연이다. (327)
사람들은 이 실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우왕좌왕도, 많은 후퇴도, 정신에게 열려져 있는 다른 길로 가는 많은 산보도 없지 않았다. (327)
데카르트의 철학은 대부분에 있어서 직관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가 완전한 순수지속이라 부른 것과 접촉을 다시 하는 철학이다. 사유의 자연(본성)이 중요할 때뿐만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또한 영혼과 신체의 통합을 위해서, 결국에서는 철학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위해서, 순수지속이라 부른 것과 접촉을 다시 하는 철학이다. 그 토대들(les fondements)을 던졌던 이가 데카르트이다. (327)
확실히 보편 수학의 토대들을 던졌던 이는 데카르트이다. 그의 철학은 훨씬 더 넓고, 그의 철학은 보편 수학을 넘어서고 또한 무한히 넘쳐난다. .. 운동자 즉 활동성과 접촉을 다시 하기 위하여, 데카르트에게서는 직관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327)
사유의 전개 즉 근대철학의 전개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 방향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시하고 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관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계승자들의 노력이 데카르트의 사유를 형상으로 끌고 가려고 한 노력이었고, 그 사유를 가능한 한 고대 사유의 거푸집 속에 부어넣으려고 한 노력이었다. (327-328)
최근에 나온 논문에서도 있었듯이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대부분에서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플로티노스의 철학으로 회귀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방법은 플로티노스의 가지적인 것이고, 또한 노에톤(le νοητόν, 단수)이라고 제시했다. 왜냐하면 플로티노스는 라이프니츠에 앞서서, 실재성의 전체이며 존재자체인 가지적인 것들에 대해 우리에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왜냐하면 노에타(τὰ νοητά,복수, 전체의 관점들)는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에서 모든 가지적인 것들은 통찰(des visions), 관점(des vues), 전체의 통찰(des visions du tout)이다. (328) [프랑스어의 부정관사의 복수가 의미있다. 비규정적이지만 다수 또는 다양체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를 혼성(조성)하는 것, 전체의 통찰이다. 이 통찰들은, 각각이 전체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 .. 모든 가지적인 것들은 서로 서로 일치되어 있다고 하며,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보편적 협동(la conspirationuniverselle, 합의, 결탁)이라 부르고, 라이프니츠는 그것은 예정 조화라고 부른다. (328)
이런 학설을 스피노자는 다시 다룬다. 그는 우회에 의해 플로티노스가 그에게 부여한 형식하에서 플라톤철학에 되돌아온다. 그는 세계를 가지적인 것들을 가지고 구성한다. .. 이런 철학이 목표로 삼는 것은, 부분들을 가지고 전체를 구성하는 기계적 철학처럼도, 상식의 철학처럼도 아니고, 오히려 매우 주목해야할 것은 각 부분으로 전체들(des tout)을, 서로들이 서로들을 간섭하는 전체들(des tout)을 구성하는 것이다. (328)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플로티노스의 철학 사이에 매우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플로티노스에게서 일단 가지적인 것들이 구성되면, 이것들에게 다른 것들을 덧붙여(adjoindre)야 한다. 이것들에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지적인 것들의 축소(cette diminution), 확장(cette extention), 확산(cette diffusion)을 덧붙여야 한다. 시간은 세계의 영혼일 것이고, 세계자체는 영혼보다 열등할 것이다.대신에 라이프니츠에게서 일단 모나드들이 제기되면, 보태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공간과 시간은 혼재된 지각작용들이다.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는 것은 공현존의 질서이고,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계속의 질서이다. 라이프니츠가 거기를 통하여 이해하는 것은 단순하게 우리의 정신과 같은 불완전한 정신에서 모나드들의 다수성은 필연적으로 일련의 관점들의 형식을 필연적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329)
또한 이처럼[라이프니츠에게서], 우리가 하나의 전체로서 생각된 모나들 중의 한 모나드를 취한다면, 이런 모나드는 자기 자체에게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인데, 그 경우에는 일련의 상태들의 구성작용에 의해서이고 더 좋게 말하자면 일련의 판단들의 진술 작용에 의해서 이다. 주체[주어]에는 그만큼의 관점들이 있고, 주체[주어]가 병치의 덕분에서만 그 자신에게 드러나는 한에서 그만큼의 관점들이 있다. 이 주체는 시간 속에 있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사물들을 분명하게 지각하는 어떤 존재(un être)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 어떤 존재는 모나드들인 한에서 모나드만을 볼 것이다.(329)
이러한 것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개념작업이며, 실재성에 대한 개념작업이다. 만일 우리가, 왜 라이프니츠가 플로티노스 철학에 이렇게 되돌아오는지를, 또한 왜 라이프니츠가 그의 철학을 이런 방식으로 변형시켰고, 한편으로 공간의 실체와 다른 한편 시간사이에 특수한 연관을 확립시켰는지를 자문한다면, 우리가 아주 단순하게 발견하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수학적 보편보다, 즉 데카르트가 견고하게 확립한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한 방식으로 기초를 놓기 바랐기 때문이다. (329)
꾸뛰라의 흥미있는 책에서 ... 사람들은 우리에게 제시했다. 어떻게 보편적 성격[특성]의 기획이 기원에서부터 라이프니츠 사유를 관통하였는지를, 어떻게 그것이 그의 모든 노력들의 목표였는지, 보다 확장적인 수학인지를 즉 하나의 단순한 과학 즉 실재성의 총체적(intégrale) 과학인지를 제시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관념)이다. (330)
라이프니츠에게서, 이 유일한 특성, 즉 일반화된 수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수학은 필연적이다. .. 그것은 가지적인 것이다. 이 가지성은 라이프니츠철락의 원리이며, 그것은 예정 조화이다. 그것은 보편적 가지성이다. (330)
그리고 그때에는 이런 가지성에는 가능한 모든 관점들이, 모든 개념들이, 모든 모나드들이, 살아있는 개념들이, 결국에는 모나드들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일치, 라이프니츠가 말하기를 예정된,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필적인 일치가 있다. (330)
데카르트는 모든 사물들을 감싸는 거대한 수학[보편 수학, mathesis]에 대해 말했다. .. 데카르트는 자연 속에 모든 사물들이 수학에 의해 규칙화되어 있고 이런 매카니즘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립했는가? 그는 그것을 임의적 자유(le libre arbitre) 위에, 신의 선한 의지(la bonne volonté) 위에 확립하였다. (330)
데카르트에 따르면, 세계가 [현재대로] 있는 것인 것은, 즉 우리 수학에 완전히 복종하는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것은, 신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신적 은총의 결과에 의해서 신적 자비의 결과에 의해서 이다. (330)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보편 수학[정역학]을 충분히 견고하게 기초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자기 학설에서 그렇다고게 말할지라도, 그 수학은 필연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수학은 신의 자유로운 법령(le libre décret)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신의 본성과 신이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동(l’acte) 사이에 심연(un abîme)이 있다. (330-331)
라이프니츠가 행한 것은 이 틈을 채우는 것, 수학에 복종되는 것으로 가정한 세계와 창조자이자 조직자인 신 사이에 간격을 채우는 것이다. ..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신은 결국 가지성 자체인 것이고, 모나들의 조화 자체이며, 결국 지난 강의에서 말했듯이, 라이프니츠의 신은 조화이며, 심지어는 세크레땅(Secrétan, 1815-1895)의 자유의 철학(La philosophie de la liberté, 1849)에서 말하듯이,단순한 이상(l’ideal)이다. (331)
라이프니츠의 신은 자기 주위에 자기에 관한 가능한 모든 관점들을 갖는 보편적 가지성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앞서 행한 모든 것을 요약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가지성들의 고대 개념작업으로 되돌아갔다. ..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마치 가지성들의 혼재된 통찰들처럼 생각했다. [이에 비해] 데카르트의 메카니즘은 어느 면에서는 뚫어야할 각질이며, 뚫어야할 구름이다 .. 그에게서 보편적 특성, 보편 수학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331)
[칸트]
칸트철학에서도 비슷한 노력이 있다. 그 목표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변화가 있다는 것은 수단들의 선택이다. 칸트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은 하나의 단순한 과학이다. .. 하나의 인식이 있다. (331-332)
칸트는 라이프니츠가 남긴 해결책과 비슷한 해결책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1770년 논문(La dissertation de 1770: de la forme et des principes du monde sensible et du monde intelligible)에서부터, 라이프니츠적 칸트와 비판철학의 저자인 칸트 사이에 이전(transition)의 작품처럼 생각하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론은 라이프니츠 결론이다. 이런 생각에서 겉보기[현상]에서 실재성으로 가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서 순수 관념으로 즉 순수 가지성적인 것들로 고양해야만 한다. (332)
따라서 칸트는 라이프니츠처럼 하나의 과학을 믿는다. .. 라이프니츠처럼 칸트는 순수 이데아들의 플라톤적인 철학의 회귀로 이런 과학을 기초하고자 생각했다. .. 수단들은 아주 다르고, 칸트의 목적은 라이프니츠 작품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으며, 보다 더 경제적[실용적]으로 요청들(postulats)을 실행하는 것이다.
완전히 철학적인 작업,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요청들을 가지고 가장 많은 가능한 것을 얻는 것이다.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이 매우 철학적이다.이것이 칸트의 기획이다. (332)
이러한 목표[기획]은 데카르트가 추구했고 라이프니츠도 추구했다. ..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진행은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332-333)
데카르트의 해결책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무한한 자유로부터 자유로운 신을 갖는 것이다. 그 신은 보편 메카니즘을 원했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라이프니츠에서 신은 무제한적 자유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신은 사물들의 가지성들 자체일 분이다. 그 신은 중앙의 기계이며, 가지성의 전체이다. 신이 메카니즘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왜냐하면 메카니즘은 개방된 가지성이기 때문이다. (333)
이것은 칸트에게 너무 과도하고, 너무나도 많다. 그는 이런 과학[하나의 과학, 뉴턴 물리학]을 기초하기 위하여 이 과학의 필연성 자체를 요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칸트가 통각의 원초적 종합의 통일성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또한 의식의 객관적 통일성이라 불렀던 것으로 충분하다. (333)
사람들은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로, 라이프니츠에서 칸트로 신의 개념작업의 점진적 후퇴를 따를 수 있다. 그 조건으로 신의 이름을 통각의 원초적 통일성에 부여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은 라이프니츠에서는 전체의 예정조화의 신이 되고, 칸트에서는 통각의 원초적 종합의 통일성이 된다. 보편 수학과 증명을 보증하기 위해 이런 계보가 실재적이다. 이런 통각의 원초적 종합의 통일성이 신의 이름을 취하고, 다시 신이 된다. (333-334)
이것이 칸트의 출발점이다. ../ 이런 요청을 우리는 어디에 놓을 것인가? 사물 안에 놓을 것인가? 그것은 법칙에 또한 경제적 원리에 반대일 것이다. (334) - [칸트가 사물(Ding an sich)를 버린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쉬운 길을 간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실용적이고 더 스콜라적이다. - 이런 스콜라적 사고가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데, 이를 이용하는 것이 카톨릭 교리성이었고, 국가와 자본이 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칸트는 물자체를 버림으로서, 이데아가 상감한 사실들에서 원리를 찾은 것처럼 여기는데, 이 사실들의 원리가 이미 심어 논 이데아의 원리이다. 벩송이 EC 3장에서 악순환의 두 가지를 말할 것이다.]
칸트는, 라이프니츠가 했던 대로 전체의 총체적 과학을, 요청들의 최소치를 가지고 기초하기를 애썼다. .. 라이프니츠는 보편적 수학에 대해 말하기보다 오히려 보편적 특성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다. .. 칸트의 생각은 라이프니츠가 이런 메카니즘을 불충분하게 기초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우리에게 표현하기를 “공간과 시간은 라이프니츠 믿었던 것보 더 많다”고 한다. 공간과 시간은 단지 부정들만이 아니고, 또한 혼재들만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서 공간과 시간은 혼재된 논리학이다. (334)
칸트에게서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공간과 시간은 실증성을 갖는다. 왜? 수학들은 논리적인 것들 보다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수학들은 완전하게 논리적이다. .. 왜냐하면 수학 속에는 게다가 공간화된 공간과 공간화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 순수 논리학으로는 사람들은 수학들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 칸트에게서, 수학적 명제들은 선천적(a priori) 종합 명제들이다. (335)
수학들과 순수 논리학 사이에 있는 틈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에게 어떤 실재성을 돌려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두 측면에 의해 동시에 우리는 보편 메카니즘을 공고하게 할 것인데, 한편으로 요청들의 최소와 가장 큰 견고성과 더불어, 우리는 과학의 필연성을 제시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공간과 시간에 어떤 실증성을 회복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사물들에 대해 하나의 총체적 과학이 수학적 형식을 취해야만 하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335)
자, 칸트가 오성으로부터 구성된 통각의 종합적 통일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 어떻게 그는 통일성을 제기하고 어디에서 오성을 제기하는가?사물에서는 그것은 무용하다. 그러한 것은 우리가 제기했던 경제적 원리 덕분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335-336)
만일 우리가 통일성을 사물 속에 놓는다고 할지라도, 정신 속에서 통일성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대신에 만일 통일성을 정신 속에 놓는다면 우리는 사물 속에 통일성을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은 형상인 한에서 한편으로 우리 지각의 순수 형상들일 뿐이고, 다른 한편 우리통각의 원초적 종합의 통일성일 뿐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식 전체를 구성할 것이고, 인식은 이런 토대 위에 전적으로 위치되어 있는 것이 될 것이고, 사물들의 총체적이고 정합적인 필연성은, 인식이 실재성의 토대자체가 될 것이라는 이런 의미에서 정당화 될 것이다. (336) [사고 악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칸트에서 자연의 총체적 과학의 필연성의 증명은 한편으로 완전히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우리 의식의 종합적 통일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한편 항상 수학적 형식에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종합적 통일성에는 공간과 시간의 그와 같은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336)
이 지난 3년간 했던[1901년부터] 강의들은 전적으로 이런 생각에 매여 있었다. 칸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해 전적으로 개념적이고 체계적이며 무엇보다 하나이자 완벽하게 정합적이 과학에 대한 이론의 규약(le code)이다. (336)
이런 과학의 철학은 과학이 가치있게 하는 것을 가치있게 한다. 이 철학은 과학의 개념작업이 지속하고 결정일 수 있는 정도에서 지속하고 결정적이다. (336)
이렇게 제기된 질문은, 칸트 이래로 과학이 르네상스의 발견이후 방향을 잡았던 기를 계속했는지를, 그리고 한 세기 이래로 과학자들이 이런 단순하고 하나인 과학을 믿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극히 의심스럽다. (336-337)
그렇지[의심스럽지] 않다면, 미래에 철학의 역할이 이론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전체의 체계적 통일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직관의 연속성으로부터일 것이다. (337)
만일 그러하다면[의심스럽다면], 아주 다른 노력이, 또한 시도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 왜냐하면 만일 과학자들이 완전히 유능한 과학 속에 있다면 또 그들이 과학에 관해 철학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보편 수학들의 개념작업으로, 즉 전체에 대해 하나인 과학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 과학자들이 철학으로 과학으로 만들 때, 그들은 항상 마치 보편수학의 일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37)
이 강의의 첫 3년의 목적은 고대철학이 근대철학에서 감당했던 변형작업을 찾는 것이었다. .. 그리고 시작에서 3년 전에, 철학이 따라야 할 곡선의 방향(la direction de la courbe)을 찾는 것이었다. (337) [나로서는 벩송의 전집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의 전집에서 한 단어를 뽑으라고 한다면, “우여곡절(la sinuosité)”을 뽑겠다고 했다. 곡선의 방향과 같은 뜻이다.]
다음 해에 심리학의 특수한 문제에 접근하기를 제안한다. 그것은 생물학의 철학에 관계하는 문제들의 연구의 준비일 것이다. (337) [그는 “기억 이론의 역사(1903-1904”를 계획하면서 생명철학(EC 1907)을 준비하고 있었다.)
(lu 55PMD) (9:15, 55PMF)
* 인명록 ***
460 히포크라테스(Hippocrate de Cos, Ἱπποκράτης, 460경-377경) 페리클레스 시대 그리스 의사, 철학자, 의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80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우주론을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세 위상으로 전개한다.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 Στάγειρος)에서 탄생(플라톤 나이 4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6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왕의 시의(侍醫)였다.
O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 탄생. 이집트 리코폴리스(Lycopolis, 나일강 삼각주)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 [이 말로 보면 상층의 일자, 중간에 점으로서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자체가 된다.]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2=1.414213 ...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관념론자. 삼 비판서로 유명하다. 순수 근거 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재판1787) 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1788,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1790)
1815 세크레탕(Charles Secrétan, 1815-1895) 스위스 법률가, 교육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철학자. 셸링의 제자, 라이프니츠 철학(La Philosophie de Leibnitz, fragments d'un cours d'histoire de la métaphysique, donné dans l'Académie de Lausanne. 1840, 자유의 철학(La philosophie de la liberté: Cours de philosophie morale fait à Lausanne.(Tome 1: L'histoire, t. 2: L'idée. Lausanne: Georges Bridel, 1848, 364 + 424 pp.; 2e éd. Paris: L. Hachette et C-e, 1849).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철학자 논리학자, 러셀처럼 논리주의자. 라이프니츠 미발표 작품들 출간. La Logique de Leibniz: d'après des documents inédits, 1901 Opuscules et fragments inédits de Leibniz. Extraits des manuscrits de la Bibliothèque royale de Hanovre, 1903 재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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