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의 인연법과 공한 법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다소 도식적이라 생각되기도 하는데, 혹시 이 도표의 내용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 인연법 | 공한 법 | |
| 세속법,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 가장 공한 법 [제일의공법] | |
오고 가는 곳 | 있다, 분별[유자성] | 없다, 비분별[무자성] | |
모양[相] | 있다, 유상[有相] | 없다, 무상[無相] | |
번뇌 | 있다, 유루법 | 없다, 무루법 | |
생주이멸 | 있다, 유위법 | 없다, 무워법 | |
태어남 | 있다, 유생법 | 없다, 무생법 | |
다툼 | 있다, 유쟁법 | 없다, 무쟁법 | |
법의 4근본 | 무상, 괴로움 | 비아/무아, 열반 | |
비유 | 꿈, 허깨비, 물거품, 뜬구름, 아이들의 모래성 쌓기 놀이; 가시, 종기, 독사, 원수; 장작불 등 | 허공, 꿈에서 깨어서 봄 | |
여여/진여 | 인연법은 곧 가장 공한 법이다. 인연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도 그러하다. | |
언어 | 언어는 기본적으로 분별에 기초한다. 따라서 공도 ‘공이다, 공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세속법에 떨어진다. ‘있다,없다’라는 말도 그러하고,나아가 모든 불경의 모든 말씀도 그러하다. | |
[임시로 붙인 이름]
불경을 이해하고자 할 때 언어의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렵다. 예컨대 공은 비분별의 성질의 것인데, 그것을 언어로 서술하고자 하면 곧바로 분별에 떨어진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분별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대승 경전에서는 언어를 악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언어를 악이라고 하여 버릴 수도 없다. 언어를 버린다는 것도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가 없으면 언어를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를 떠나서는 부처님도 말할 수 없고 부처님의 말씀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야 경전에서는 공한 법을 서술할 때 대개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와 같은 표현한다. 이러한 부정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분별성을 피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공한 법을 부정의 형식으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분별성을 피할 수는 없다.
‘임시로 붙인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불경의 언어에 관한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연기법이란 말도 임시로 붙인 이름이고 공이란 말도 임시로 붙인 이름이며, 또 그것들을 설명하는 모든 말들도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반야 경전에서 공한 법에 관한 서술에서 ‘아니다, 않는다, 못한다, 없다’ 등과 같은 부정의 형식으로 된 문장들을 일고 이해할 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러한 부정문에 대응하는 긍정문으로 표현되는 모든 법들이 사실은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위법과 무위법]
https://cafe.daum.net/sutta-nipata/RQWt/57
[유루법과 무루법]
https://cafe.daum.net/sutta-nipata/RQWt/56
[불생법/무생법]
https://cafe.daum.net/sutta-nipata/RQWt/59
[유쟁법과 무쟁법]
https://cafe.daum.net/sutta-nipata/ROxe/169
[네 가지 법의 근본]
https://cafe.daum.net/sutta-nipata/RVPQ/149
인연법을 넘어서 가장 공한 법으로, 그 법들을 넘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진여법으로.
[진여법을 얻게 하는 법에 관한 경들]
https://cafe.daum.net/sutta-nipata/RQWt/40
(2024. 11. 18,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