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른 시간이다. 직장에 근무할 때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퇴직 후에는 함께 모이는 것이 어색해서일까 드디어 경험하지 못한 일을 시작한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가족이 모였다. 딸이 수년간의 채용시험에서 벗어난 것도 한 몫 하였다. 한가롭게 지내는 일상을 벗어나 바깥에서 며칠 보내기로 하였다. 일정은 오래전부터 잡혀 있어 그동안 다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출발 당일 여유를 가지고 공항으로 향한다. 출국장 심사를 거쳐 네 시간 가량 비행기 타는 시간은 여러 가지 준비 부족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심사를 받고 청사를 나서는 발을 내딛는 순간 피부에 와닿는 열기는 호흡을 멈추게 만들 정도다. 닷새 동안 이 날씨를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목덜미부터 통증이 는 태양의 열기는 그늘을 가까이 하게 만든다. 관광사 여행 안내자의 인솔하에 공항을 벗어났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숙소까지 가는 길이 멀게 만 느껴진다. 야자수와 거리마다 가득 달리는 오토바이는 화면으로만 접하던 모습 그대로다. 차선 따라 줄지어 달리는 이동 수단일 따름인듯하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저녁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꼭대기 층 수영장으로 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수욕장 옆에 자리 잡아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 쳐다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꼬마 손님들이 부모와 함께 먼저 자리를 잡았다. 헤엄치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수영장에 들어서서 팔을 휘저어 보는데 생각처럼 멀리 나가지 않는다. 호흡을 가쁘게 내뱉다가 금새 수영장 바닥에 발을 내딛는다. 한 차례 더 도전을 하고는 이내 물에서 나왔다. 저녁 산책은 낯선 곳에서 무작정 길을 걷는다. 바닷가 백사장 따라 형형색색 불빛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아내와 딸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모래톱을 지나 해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닷물에 젖은 모래는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굳어있다. 멀리 밝게 비치는 조명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어제와 달리 아침 해를 일찍 맞이할 준비를 한다. 편히 자고 있는 아내와 딸을 모습을 살피다가 뒤꿈치를 들고 살며시 잠자리에서 벗어났다. 간편한 차림으로 반바지를 입고 얼굴을 가려 눈만 내놓은 모자를 쓰고 차선이 희미하게 보이는 찻길을 건넜다. 숙소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다다. 방향 감각도 잊은 채 왼쪽 길을 따라 나선다. 멀리 맞은편 바다에는 어스럼한 시간인데도 물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사람들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이어져 있다. 물기가 없는 마른 모래를 밟다가 시원한 기분을 느끼려 바다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도 한다. 삼삼오오 모여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 사이에는 혼자 기체조를 하는듯 익숙하게 몸을 단련한다. 몇 발자국 옮겨 가는데 내지르는 소리가 멀리까지 전해진다. 간이용 골대를 세워두고 편을 나누어 축구 경기가 한창이다. 상대를 구분하기 위해 상의 옷차림부터 달라 재미로 펼치는 경기가 아닌듯싶다. 경기를 잠시 지켜보는데 골이 들어가는 순간 종료 고함 소리와 함께 철제 골 구조물을 도로 옆 가장자리로 이동시킨다. 그들만의 약속인듯하다. 파도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멀리서 흰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고 있다. 한 두 쌍이 아니다. 해변을 배경으로 결혼 사진을 담는 듯 서너 명이 조를 이루어 움직이고 있다. 이곳 해안 풍경이 모두의 추억을 남긴다. 사랑의 속삭임에 부러워 부부의 지나간 시간을 불러 세워본다. 바구니 배 근처를 지나는데 여러 사람이 그물을 싣고 있다. 물놀이를 즐기는 해수욕장이 그들은 생활 터전이다.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내리고 거두어 들여 생선을 잡는 모양이다. 앞서 거둔 그물에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병어와 피라미가 잡혔다. 멸치만큼 작은 물고기는 채반처럼 생긴 소쿠리에 쟁여 즉석에서 판다. 물고기를 잡는 사람 수에 비해 수확물은 셀 수 있을 정도다. 바닷가 모래밭에 직각으로 난 구멍을 들여다 보는데 엄지 발을 지켜 세워든 게가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시선이 불편하게 만들었나보다. 얼마를 걸었을까.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가보니 여러 가지 수산물을 넓적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 팔고 있다. 새벽 시장격이다. 갈치부터 새우, 낙지 등 우리네 어시장에서 파는 종류와 마찬가지다. 백사장을 두고 바다와 도로 사이에 아낙네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앉아 각자 남편이 잡은 것인지 아니면 소매로 팔고 있는지 흥정이 이어진다. 포장 용기는 투명 비닐이다.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인듯 생선 구입을 끝내고 총총 걸음으로 백사장을 나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부부도 생선 값을 확인한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입꼬리가 올라간다. 욕심이 없는 듯 편안한 모습이다.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작은 일에도 만족할 줄 아는 이들의 삶을 지긋이 바란본다. 또 다른 구역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내판의 그림과 몇 개의 단어는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지역이다. 모터 보트와 카약까지 다양하다.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시작에 앞서 레저용품을 세우고 팔을 높이 든 채 기념 사진을 남긴다. 혼자 산책하는 자신을 둘러본다. 숙소에 있는 가족과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이어지는 백사장 곳곳에 저마다 해맞이 전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부러움으로 바뀐다. 해안선 따라 먼 바다 쪽에는 어선들이 셀 수 없이 머물러 있다. 밤이 되면 불을 밝히고 고기잡이에 나선다고 한다. 길게 늘어선 바다 풍경에 이들의 삶이 와 닿는다.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 바다를 찾는 사람과 여유를 누리는 이, 또 멀리 다른 나라로 휴식을 지내러 온 사람까지, 같은 바다지만 서로 다른 대상으로 다가온다.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태양의 무게에 못 이겨 더 이상 발걸음을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섰다. 숙소로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 계획 없이 내달려온 길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은가. 삶의 무게도 주변에 대한 경청도 던져두고 앞만 보고 오지 않안던가. 여행은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하였던가. 날씨를 확인해본다. 체감 온도가 42도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기온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미케비치에서 꾸려본다. 오랜만에 가지는 휴식의 시간이다. 남아있는 나흘간의 일정이 기다려진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오늘의 축복 받는 장소로 이어져 뭇사람의 즐거움이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