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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71권
50. 대사기품(大事起品)을 풀이함
【經】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큰일[大事]을 위하여 일어나고 불가사의한 일[不可思議事]을 위하여 일어나며, 명칭할 수 없는 일[不可稱事]을 위하여 일어나고 한량이 없는 일[無有量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무등등한 일[無等等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깊은 반야바라밀은 큰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다섯 가지 바라밀이 포함되어 있으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가 포함되어 있고 4념처로부터 8성도분까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일체종지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관정(灌頂)한 왕은 그 국토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므로 관청 일은 모두 대신(大臣)에게 맡기고 국왕은 안락하게 지내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있으며, 반야바라밀은 그 일을 이룩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을 취하지 않고 물질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룩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느니라.
나아가 일체종지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고 수다원의 과위로부터 아라한의 과위까지와 벽지불의 도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물질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이룩되며,
어떻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이룩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릇 이 물질을 취할 수도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릇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나도 또한 이 물질을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나도 또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및 일체종지를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나는 또한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을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어서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사유나 비교로써는 알 수 없고, 미묘하고 선교한 지혜로써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얻은 이라야 알 수 있으며, 이들만이 이 반야바라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살이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였고 선근을 많이 심었으며 선지식(善知識)을 따랐으므로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설령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모든 중생이 모두 신행인(信行人)ㆍ법행인(法行人)이 되고 팔인(八人)이 되며,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짓는다 하여도,
이 보살이 하루 동안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욕망을 참고 사유하고 헤아리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행인ㆍ법행인과 팔인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덕과 단덕이 곧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천자들아, 신행인과 법행인과 8인과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까지와 벽지불이 곧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이니라.
천자들아,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써서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억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빨리 열반을 얻으리니,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그 밖의 경전을 1겁이나 또는 1겁이 채 안 되는 동안 행하는 것보다 뛰어나느니라.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으뜸가고 묘한 법이 널리 설해져 있기 때문이니,
이 신행인ㆍ법행인과 팔인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벽지불이 배워야 할 바요,
보살마하살도 배워야 할 바이며, 배운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이때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다 함께 소리를 내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마하(摩訶)바라밀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한 바라밀이라 하나니,
신행인과 법행인과 8인은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벽지불을 성취하게 되고,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보살마하살을 성취하게 되며,
이 깊은 반야바라밀 안에서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나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또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이때 모든 욕계ㆍ색계의 천자들은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부처님을 돌고는 떠나갔으며,
떠나간 지 오래지 않아 홀연히 보이지 않더니 저마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하는 이면 어디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났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하면,
마음이 침몰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기뻐하면서 듣기를 좋아하고 들은 뒤에는 기억하며,
끝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서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안에도 끝내 버리거나 잊지 않으면서 항상 법사를 따르리니,
마치 갓 낳은 송아지가 그 어미소를 떠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기 위하여 끝내 법사(法師)를 멀리 여의지 않으며,
나아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바른 소견에 통달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보살은 인도(人道) 안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이 인간 안에 와 났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는 전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써서 받아 지니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는 번기ㆍ일산으로 공양했기 때문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인간 가운데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 안에 와 나서는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한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릇 어떤 보살마하살로서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고서 다른 세계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는 이 세간으로 와 나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즉시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는 이도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보살로서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고 다른 세계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며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즉시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는 이가 있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다른 국토[他方]에 계신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났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바로 전생에 공덕을 성취한 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미륵(彌勒)보살마하살로부터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으며 그런 선근의 인연 때문에 이 세간에 와 난 이도 있느니라.
수보리야, 다시 어떤 보살마하살은 전생에 비록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는지라, 인간 안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마음에 의심과 후회가 있어 깨치기 어렵느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은 보살은 전생에 비록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다 하더라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하여 뉘우침과 후회를 내며 깨치기 어려운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선바라밀(禪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전생에 비록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므로,
이 인간 안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어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며 깨치기가 어렵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전생에 비록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과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므로,
이 인간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어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며 깨치기가 어렵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전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그 안의 일을 묻지도 않으면서 행하지도 않았으므로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났을 때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하루ㆍ이틀ㆍ사흘ㆍ닷새 동안은 그 마음이 견고하여 무엇으로도 파괴될 수 없다 하여도,
만일 들었던 법을 여읠 때에는 이내 물러나고 상실하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전생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을 때에 비록 그 안의 일을 물었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어느 때는 듣고 싶어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듣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하면서,
마치 가벼운 털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듯 그 마음이 경솔하여 견고하지 않으며 뜻이 어지럽고 안정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이 보살은 뜻을 낸 지도 오래지 않고 선지식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지도 않았고 전생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았으며,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고 선바라밀을 배우지 않았으며,
비리야바라밀을 배우지 않고 찬제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시라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고 단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배우지도 않았고,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5신통과 부처님의 10력을 배우지 않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배우지도 않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새로 대승(大乘)의 뜻을 내었으나 믿음이 적고 즐거움도 적기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쓸 수도 없으며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거나 해설하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도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고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지도 못하며 해설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으면 역시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보호되지도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도 못하느니라.
이 사람은 또한 깊은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지 않으니, 이런 이는 2지(地), 곧 성문의 지위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느니라.
왜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으며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설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기 때문이니, 이런 이 역시 깊은 반야바라밀에 보호되지 않느니라. 또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2지(地) 가운데 하나의 지에 떨어질 것이니라.”
【論】
【문】 위에서 누누이 이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은 인연을 말씀하셨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거듭하여 말씀하시는가?
【답】 곳곳에서 매우 깊은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이익된 것이 많이 있는데도 범부는 그런 줄을 모르고 거듭하여 말씀하신다고 여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나라의 왕에게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여러 해 천신지지(天神地祇)에 기도를 했는데도 해가 지나도 효험이 없다가 마침 왕이 밖으로 출행(出行)하고 없을 때에 그 부인이 남아를 해산한 것과 같다.
그 소식을 가지고 간 이가 왕에게 아뢰기를,
“대부인(大夫人)께서 남아를 낳으셨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듣고 기뻐하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열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그 사자(使者)가 왕에게 말하기를,
“조금 전까지 아뢴 말씀을 왕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말하기를,
“나는 잘 들었다. 하도 오랜만에 원이 성취됐으므로 마음속이 기쁘고 그 말이 듣기 좋아서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곧 관리에게 명하여 이 사람에게 백만 냥의 돈을 주게 하였으니, 한 번 말할 때의 값을 10만 냥씩 쳐 준 것이다.
왕이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적에 그의 말마다 그 속에는 이익이 있었던 것이요, 거듭하여 말한 것이 아닌데도 모르는 사람은 거듭하여 말했다고 여긴다.
곳곳에서 매우 깊음을 말씀할 때도 역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보살과 수보리에게 큰 이익이 있음을 알도록 해주신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깊은 반야를 들으면서도 그 맨 밑까지 얻지 못하고 갈수록 심히 깊다함을 깨달을 뿐이며, 듣는 이들은 곳곳에서 매우 깊은 법을 들으면 선정과 지혜의 이익 등을 얻고 있는데도 범부들은 거듭하여 말씀하신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깊고 얕은 것은 일정함이 없고 중생에 따라 다르다. 이해한 이는 깊은 것이 없거니와 이해하지 못한 이는 깊다고 여긴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두루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항상 ‘매우 깊다’고 말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매우 깊다고 말씀하시나 그 매우 깊은 모양이 일정한 모양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일정하게 매우 깊다면 능히 행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말씀하시되,
“보살이 반야가 매우 깊다고 여기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은 인연을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라고 하신다.
이른바 ‘큰 일[大事]을 위하여 일어났고, 나아가 무등등한 일[無等等事]을 위하여 일어났다’고 함의 큰일 등에 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큰일 등에 관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포함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문】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은 저마다 그 모양이 다르거늘 어찌하여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시는가?
【답】 여기에 대한 설명은 경전에 다 포함되어 있다.
또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은 반야바라밀과 화합하여 방편으로 회향(迴向)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으로 부처님의 도에 이르게 된다.
관정왕(灌頂王)은 부처님과 같은 이요, 국사(國事)는 바로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며, 대신(大臣)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맡기고 의지하여 갖가지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선정에 편히 계시면서 쾌락을 누리고 할일이 없으신 것이다.
또 마치 마른 초목을 없애려고 할 때 불을 붙여 던져 놓으면 그 불의 힘으로 모두가 다 타버리므로 사람은 그것을 치울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 등의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포함하고 있다 한다. 처음에 물드는 것[染]을 취(取)한다 하고 갈애를 내는 것을 집착[著]한다고 한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떻게 반야는 물질 등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포함하고 있다 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네 개의 답(答) 가운데서 반문(反問)하시면서 대답하시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혜의 눈으로써 이 물질 등의 법을 취할 수도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느냐?”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지혜의 눈으로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고 한량이 없고 불가사의한 모양을 본다 하면 어떻게 취하고 집착할 만하며 정해진 물질의 모양[色相]이 있다고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며,
부처님께서는 그가 하는 말을 옳다고 여기면서,
“그대는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으므로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보지 못하거니와 나는 일체지를 지닌 이로되 역시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라고 하시고
이 때문에 칭찬하시면서,
“훌륭하다.”라고 하셨다.
이때에 모든 천자들은 반야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를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모두 신행(信行)ㆍ법행(法行) 내지는 벽지불이 되어 지(智)와 단(斷)을 짓는다면……”이라고 했다.
이 지는 10지(智)이다. 단은 두 가지의 단이 있나니, 남은 것이 있는[有殘] 단과 남은 것이 없는[無殘] 단이다.
배울 것이 있는 사람[有學人]은 남은 것이 있는 단이요,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人]은 남은 것이 없는 단이다.
이 보살이 하루 동안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모든 성현의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은 모두 보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기 때문이다.
【문】 만일 모든 성현의 지덕과 단덕이 곧 무생법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답】 신행(信行) 등의 사람은 대비(大悲)가 없고 중생들을 버리기 때문에 못하다는 것이니, 방편의 힘도 없고 열반에서 스스로 되돌아올 수가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모든 물들이 항하(恒河)에 모여들어 다 함께 큰 바다에 들어가는데 바다에 들어갈 때에 물살이 센 곳에 중생이 있게 되면 그는 되돌아올 수가 없고 오직 큰 힘을 지닌 이라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그 밖의 모든 성현들이 지덕ㆍ단덕을 성취했다 해도 보살이 처음에 무생법인을 얻으면 그 힘이 그보다 더하나니, 이 때문에 수승하다고 한다.
비록 지단(智斷)의 공덕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보살이 처음 얻는 법인에 미치지 못함은 마치 대신의 공업(功業)이 크다 하더라도 태자(太子)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은 바로 소승의 첫 문이요, 보살의 법인은 대승의 첫 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이 마침내 이루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보살이 처음 도에 들어가는 문[初入道門]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처님을 이루는 것이랴.
【문】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은 소승이요, 보살은 대승이거늘 어떻게 2승(乘)의 지단(知斷)이 곧 보살의 무생법인이라 하시는가?
【답】 반연할 것[所緣]이 동일하고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도 또한 동일하거니와 예리하거나 둔한 지혜만이 다르다.
또 한량없는 공덕과 대비의 마음으로 수호하기 때문에 그 밖의 갖가지 해설보다 뛰어난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을 찬탄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다.
하(下)는 반야바라밀을 듣고 곧바로 믿으면서 받아들이되 그 안의 이치를 묻지 않는 이요,
중(中)은 들은 뒤에 그 이치를 물으면서도 행하지는 못하는 이며,
상(上)은 듣고 이해하면서 능히 행하는 이다.
하는 비록 사람 몸이 되어 반야를 듣는다 하더라도 의심하고 후회하면서 깨치기가 어려운 이니, 근기가 둔하고 복이 박하기 때문이다.
중은 사람 몸을 받아 반야를 듣고는 일심으로 믿고 좋아하면서 그 이치를 잘 알아 하루에서 나흘이나 닷새까지는 마음이 견고하지만 그날을 지난 이후에는 믿고 좋아하지 못하며, 혹은 듣고 싫어하기도 하고, 혹은 들으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생에 비록 그 이치를 이해하기는 했으나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기가 둔하고 복이 박하기 때문이다.
상은 사람 몸을 받아 반야를 들으면 마음으로 곧 깊이 이해하며 믿고 좋아하면서 버리지 않으며 항상 법사를 따르는 이다.
앞의 두 보살은 높은 지위[上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2승에 떨어져야만 하니, 반야의 수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런 일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후품(後品) 가운데서 비유를 드시는데,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배가 침몰될 적에 만일 의지할 것을 얻으면 건너갈 수 있거니와,
만일 의지할 것을 얻지 못하면 건너갈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