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학기에 새로 입학하여 베단타 학과 첫 학기를 수강한 강병준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께, 그리고 도반이 되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3개월 동안 저의 수행 생활에서 변화가 있었던 부분과 현재 저의 수행 상황을 보고드립니다.
1.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목표의 구체화
저의 경우에는 아쉬람에 와서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이미 약간의 참나 체험이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생각, 감정, 감각, 신체는 '진짜 나'(참나)가 아니며, 이것들 너머 더 깊은 곳에서 고요히 그것들을 지켜보는 그것이 참된 나 아트만이고, 이것을 가만히 집중하여 바라보는 훈련을 통하여 참나와 일체감을 느끼는 체험을 발전시켜 가다 보면 이 세상 자체가 참나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직관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제가 이전에 배워 알고 있던 지식이었습니다.
저는 이같은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동경하여 얻고 싶어 하였으나, 그것을 실제로 얻기 위한 수행의 실천에는 게으른 편이었습니다. 그저 명상 중의 평안함에 머무르며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는 것에 만족하면서, 이렇게 때때로 수행하며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르겠거니, 또 설령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세상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기에는 충분하겠거니 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수행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적 체험의 수준이 발전해가는 것이 더뎌서 답답한 기분에 수행의 의지가 자주 꺾이고 멈추게 되는 것을 느끼면서, 수행의 정체기를 넘어서 뚜렷한 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지도해 주는 스승을 찾고 싶었던 것이 수강 전 저의 상황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무상 사마디의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시면서, 그 체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간단치 않은 노력이 필요함을 늘 강조하시고, 제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깊은 사마디의 체험에 이르러야 하는데 수행을 너무 게으르게 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데도 들을 때마다 제 얘기처럼 찔리는 기분이 들어서, 매 주마다 스승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한 주 동안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수행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승님께서 이렇게 지도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하루 빨리 무상 사마디의 체험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시간과 집중력을 동원하여 명상 수행에 몰입해야겠다는 목표 의식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마음이 없는 자리에 신이 드러난다 : 명상 수행과 체험
어느 날 스승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을 기억합니다. "마음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내 책임이다. 마음은 내 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남에게 줄 수 있다. 마음을 주고 나면 마음은 더 이상 나에게 없다. 마음이 없는 자리에 신이 드러난다."
제가 비록 약간의 참나 체험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무상 사마디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제 딴에는 마음으로부터 떠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음을 충분히 없애버리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이것은 마음이 아니라 참나다"라고 생각하고 붙들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은 마음이었을 것이므로, 이전에 제가 붙잡고 있었던 것을 최대한 남김없이 주어 버리는 수행이 필요했습니다.
마음을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필요한데, 저는 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무척 모호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은 다시 말해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에 이르기를 "신은 곧 사랑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에게 마음을 드린다는 것과, 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신을 만난다고 하는 것의 세 가지가 사실은 똑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같은 내용을 묵상하면서 사랑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신을 열심히 떠올리며 바라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약간의 희열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내가 마음을 신에게 드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는 붙잡고 있던 마음을 놓을 뿐이고, 그러면 신이 직접 가져가신다"는 느낌이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마치 해가 뜬 것처럼 눈 앞이 조금 환해져 밝아왔는데, 제 바깥의 어딘가에서 빛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저의 온 몸에서 빛이 나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온 몸의 근육은 긴장해서 약간 힘이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여전히 저의 몸이 제 방 책상 앞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방 안 공기가 차가워 약간 춥다고 느껴졌습니다.
이 날의 체험은 제가 예전에 경험해 본 적 있는 것보다는 약간 더 강한 체험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체험을 진전시키고 싶어 최대한 선정에 든 상태를 오래 유지해 보려 하였으나 이 이상 진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3. 행위 없는 자와 동일시하며 행위하기
『바가바드 기타』 4장 18절의 괄호에서 스승님께서는 "자연의 활동들을 보는 자, 고요한 목격자로 있는 것이다. 자연이 모든 일을 한다.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만약 자신을 행위 없는 아트만과 동일시한다면, 아무리 많은 행위들을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행위가 아니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행위 없는 자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행위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아직 머리로도, 체험으로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요가수트라』 1장 2절은 "요가는 마음의 생각의 물결들의 정지이다."라고 가르칩니다. 마음을 '물결'에 비유한 것이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결을 없애겠다고 건드리거나 무언가를 하면 물결은 없어지지 않으며, 가만히 두어야만 물결은 사라집니다. 갑작스런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떠올라서 저에게 영향을 주려고 할 때마다, "물결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고서 가만히 두고 보다 보면 그것들은 저를 통과해 지나간 뒤 사라져 갔습니다. 되도록이면 이렇게, '감정이나 기억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행동하려고 노력해 보고 있습니다.
명상 수행을 할 때에도 "'내가' 명상을 한다", "'내가' 체험을 한다" 하고 '내가'를 강하게 내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나(프라크리티)가 방해하지 않으면 내 안의 신은 스스로 알아서 신을 찾아갈 것이므로, 나(프라크리티)가 할 일은 단지 나(푸루샤)를 방해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생각이나 감정, 감각 따위가 나(푸루샤)를 방해하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 뿐이라고 가정을 하고 명상에 들어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어떤 체험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데, 빨리 그런 체험이 오지 않으면 조급한 기분이 되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진 나머지 금새 명상을 포기하고 중단해 버리곤 했습니다. 반면에 이 날은, 나를 체험으로 이끌어주든 말든 그것은 신이 알아서 할 일이므로, 나는 뭔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명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몸도 신의 것이고 이 시간도 신의 것이니, 신의 것을 신이 사용하시도록 드릴 뿐이지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날도 약간의 희열이 있었습니다. 이 날 직전 삿상 때 스승님께서 사마디 체험을 푸른 하늘에 비유하신 이야기를 들은 것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 날은 눈 앞의 빛이 약간 푸른 색으로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신체나 공간에 대한 감각이 혹시 사라지는지 관찰해 보았는데,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신체에 대한 감각이 약간 옅어져 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명상에서 깨어날 때, 신체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뚜렷해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4.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다
한 차례 깊은 선정에 들고 나면, "나는 이제 깊은 선정에 드는 방법을 알았다, 내일도 이 방법으로 명상하면 깊은 선정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실제로 그 다음 날 같은 방법으로 명상에 몰입해서 깊은 선정에 드는 일에 성공해 본 적은 없습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는 일은 여러 번 반복해도 쉬워지지 않고, 매 번 할 때마다 마치 처음 명상해 보는 것처럼 충분히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기로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데, 신은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신을 만나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신을 만나기 어렵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신이 또 어떤 방법으로 나를 이끌어 줄지 나는 모른다. 단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내가 뭔가 방법을 알아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자꾸 확인해 가는 과정이 혹시 '행위의 포기'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