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어도 외국인과 만나면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How are you?” 하면 무조건 “fine! thank you, and you?”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지 정말 행복하고 컨디션이 좋아서 “Fine! thank you" 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 교민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지나가던 차가 멈추고 운전자가 달려와 물었습니다. “How are you?” 그는 신음하면서 대답했습니다. “fine! thank you, and you?” 그러자 그 사람이 “I am fine!" 하고는 가 버렸답니다.
우리 믿음이 이럴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가장 분명한 표징은 얼굴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어디 믿는 데가 있나봐요?” 라면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 걱정거리가 있나봐요?”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막 9장에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온 아버지가 “할 수 있거든” 이라고 말한 것을 주님이 책망하시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시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했습니다. 우리 심정이 꼭 이와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그저 자신 안에 들어와 계신 줄 압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은 마음 문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도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영접합니다!” 했다면 마음을 연 것인 줄 압니다. 마음은 그렇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려 해도 대단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양자를 입양하려고 해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다는 것은 이와같은 일과는 비교가 안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영원히 왕으로 모시고 완전히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이 없이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다고 믿는 것은 아무 역사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도 원수 사랑은 안되고,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은밀한 죄는 해결되지 않고, 고난이 두려우면 아직 마음을 열고 주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된 후 왕이 없어졌습니다. 솔직히 자신의 삶에 왕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왕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삶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와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모님만 모시고 살아도 사위 며느리와 함께 살아도 집에 자녀나 손자가 생겨도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사는데 어찌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었다면 예수님을 무시하고 산 것입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산 것입니다. 결코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