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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1 - 3)
1. 북·중 국경선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2.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다
3. 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 꿈꾸던 선조의 열정 헤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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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북·중 국경선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731500085
입력일 2024-07-31 수정일 2024-08-09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1)]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투먼의 북한·중국 국경 지역에서 강우일 주교(왼쪽 두 번째)와 순례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투먼은 함경북도 남양과 맞닿은 국경도시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흔적 따르며 평화 향한 열정 새길 여정
지난 6월 마지막 주간에 나는 오랜만에 5박6일 일정으로 중국을 여행하고 왔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Pax Christi Korea)라는 가톨릭 평화운동 평신도 단체가 주관하는 평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하였다.
가깝긴 하지만 중국으로 단체여행을 떠나는 것이 내게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좀 부담으로 느껴졌다.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평화운동을 하는 평신도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팍스 크리스티의 공동대표 직함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단체여행에 동행하는 일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사셨던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걸으며 그들의 망국의 한과 평화를 향한 열정을 새기고 이어받기 위한 여행이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일정에 백두산 등정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사실 백두산은 통일된 다음 우리 땅을 밟으며 오르고 싶었기에 특별히 가야겠다는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일반 관광여행사가 아니라 공정여행을 기획하고 도보여행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발간해 온 국제민주연대의 최정규 작가가 안내자로 나선다니 잘못하면 아주 고달픈 여행이 될 것 같아,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입원이라도 했으면 불참할 핑계가 생기겠는데 출발일이 다가왔으나 건강상으로도 별문제가 안 생겨 꼼짝 없이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옌지(延吉, 연길) 공항까지는 직선거리로 가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 비행기는 북한 영공을 피해 중국 내륙 쪽으로 돌아서 가는 바람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옌지가 만주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도시라 그런지 국제선 여행객은 우리 말고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옌지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더니 제복의 중국 공무원이 사뭇 위압적인 톤으로 우리를 향해 단체는 이쪽이라며 옆쪽으로 비켜서라고 했다.
최정규 작가는 우리에게 단체 비자를 신청한 사람들은 비자가 나온 명단의 순서대로 줄을 서서 창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별도의 창구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 땅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권 검사 과정에서는 전원 특별한 문제 없이 모두 무사히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 밖에서 청사 건물을 보니 제일 위에 한자와 한글로 연길이라는 아주 큰 표지가 걸려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의 영어, 일어, 러시아어, 만주어 표기가 붙어 있었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는 모든 간판에 한자와 한글을 병행 표기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했다. 중국 땅에서 한글 표지판을 보니 안심이 되고 푸근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숙소 호텔로 향하는데 옌지시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광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독 주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아파트 단지가 계속 이어지는데 해가 지면서 아파트 건물 벽면 둘레와 지붕까지 화려한 원색 조명으로 치장하여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시내 한복판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 이름이 ‘부르하통하’라고 한다. 한강보다 약간 폭이 좁은 정도다. 강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푸른 버드나무라는 여진족 말이 강 이름으로 남았다고 한다. 저녁 요기를 한 다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옌벤대학 쪽으로 산책 삼아 발길을 옮기니 명동 뺨치게 젊은 세대의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대학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상당수의 젊은 중국 여성들이 캠퍼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근처 상가에는 한복을 대여해 주는 가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코로나로 한국 여행이 완전히 중단된 후 한국에 가지 않고도 옌지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기에 수많은 관광객이 중국 각지에서 옌벤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한류 덕분인지 각종 식당가와 상가가 마치 서울의 어느 동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풍 먹거리와 술집이 넘쳐났다. 예전에는 옌벤대학 캠퍼스 안으로 산책을 할 수 있었다는데 한국 정부가 사드를 배치한 다음부터는 보안 강화를 이유로 캠퍼스 안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한때 사드 배치 문제로 많은 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시위도 끊이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는 사드 배치로 인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이 급격히 퇴색하고 한국 기업이나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아주 엄하고 까다로운 규제를 펴게 되었다고 한다. 사드 이전에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2차대전 전승절과 열병식에 참여하였을 때 중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이 전승절에는 주로 구 소연방에 속하던 국가들이 참석하는데 친 서방 친미 정부인 한국의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중국 정부에는 아주 뜻밖의 우호적인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년부터 미군이 한국 내 사드 배치를 거론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할 뜻을 밝히자, 중국 정부는 격하게 반대하고 중국 진출 한국 기업과 단체들에 대한 모든 호의적 정책을 폐기하며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하였다. 하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는 이러한 정치적 정세에는 크게 좌우되지 않았는지 한류에 대한 인기는 쉽사리 식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첫날 저녁 우리가 묵은 호텔은 꽤 높은 빌딩인데 호텔 방도 널찍하여 땅덩어리가 큰 대륙인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중국 투먼과 북한 남양 사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국경선을 따라 걷고 있는 강우일 주교.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남북 겨레에 관용과 평화의 기운 불어넣어 주시기를”
철조망 가로막은 북·중 국경선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우리는 두만강 기슭에 있는 투먼(图们, 도문)이라는 국경도시로 갔다. 투먼은 한반도의 제일 동북쪽 꼭대기, 토끼 머리끝에 자리하는 도시다. 두만강이란 명칭은 토문강이라고 부르는 만주족의 발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투먼에서 본 두만강은 강폭이 50미터 정도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상류로 올라가면 강폭이 훨씬 좁고 수량도 적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강이 완전히 얼어붙기에 건너기가 쉽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두만강 강줄기에는 국경을 감시하는 감시선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중국 쪽 두만강 기슭에는 상당한 높이의 철조망이 세워져 있어 탈북자의 월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투먼과 맞닿아 있는 북한 땅은 ‘남양’이라는 도시인데 그곳으로 통하는 철교와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국경 관문이 세 군데 있는데 코로나 이후 국경이 닫힌 후 도문과 남양의 국경선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 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 땅을 향해 사진을 찍자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완장 찬 요원들이 쫓아와서 촬영금지를 외쳐대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을 향해서만 의도적으로 더 엄하게 규제하는 듯했다.
중국 땅에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다. 나는 잠시 철조망이 가로막은 국경선을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했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도 맺고 자유롭게 교류도 하는데, 같은 동포이면서 갈라선 지 80년이 다 되어도 여전히 반목하고 비난하고 적대하는 남북의 겨레에게 성모님께서 관용과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우리는 투먼에서 두만강 기슭을 따라 서남쪽으로 여행을 이어갔다. 중국 쪽에는 텃밭에 옥수수나 각종 채소류를 재배하는 소농이 계속 이어지고 산에는 큰 나무와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아주 소수의 농가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었고 왕래하는 주민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야산에도 큰 나무로 조성된 숲은 보이지 않고 대체로 무슨 농사를 짓는지 확인은 안 되지만 키 작은 식물을 일구는 들판만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산 위에 몇 그루 솟아있는 키 큰 나무들이 마치 대머리 꼭대기에 몇 가닥 돋아난 머리칼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두만강 넘어 보이는 북한 땅은 경사가 급해지며 꽤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두만강과 함께 자연스러운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산줄기를 타고 넘어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룽징(龙井, 용정)에서 마주한 윤동주의 시 ‘십자가’
다음 목적지는 룽징이었다. 룽징은 1899년 함경도 종성에 살던 전주김씨 가문과 남씨 가문 등 총 다섯 가문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우리말이 잘 통한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자 버스는 우리를 룽징 냉면 잘 한다는 집으로 데려갔다. 이곳 사람들은 타지에 가면 제일 생각나고 먹고 싶은 음식이 룽징식 냉면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냉면치고는 맛이 좀 강했다. 우리가 아는 남한식 냉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심심한 평양식 냉면도 아니었다. 우선 면의 양이 한국 냉면의 곱빼기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육수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약간 진한 색이 돌고 면도 검은 색인데 고춧가루도 뿌려져 있었으나 그리 맵지는 않았다. 한국 냉면에는 오이나 무 또는 배가 들어가나, 룽징 냉면에는 오이와 함께 배추와 다른 채소류가 풍성히 들어 있는데 나중에는 육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꿩고기 덩어리가 젓가락에 잡혀 올라왔다. 나도 여름이 되면 냉면을 즐겨 먹는데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시내에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어릴 적에 다녔다는 대성중학교(현재 룽징중학교)를 찾아갔다. 학교 정문 돌기둥에는 ‘룡정중학교’라는 교명이 새겨져 있었다. 현지 안내인이 정문 옆 수위에게 우리가 학교 내부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그때까지 열려있던 철문이 스르르 닫혔다. 최정규 작가에 의하면 사드 이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가서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인 출입이 금지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묵묵히 발길을 돌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밍둥춘(明东村,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에는 민족교육과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밍둥학교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룽징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동네 초입에 있는 교회 건물은 지금 전시관처럼 꾸며져 있고 간도 지역의 민족독립운동과 반일민족문화교육의 선구자인 김약연 선생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나 우리에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관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곳 교회는 1800년대에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조선인 청년들을 적극 지원하고 양성하였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익환 목사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밍둥춘 일각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보존되고 기념관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지자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명소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생가 마당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여러 편 돌판에 새겨져 있고, 건물 한 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저작 활동과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감 시절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2회에 계속>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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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801500004 입력일 2024-08-01 수정일 2024-08-09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2)] 윤동주 시인의 생가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 十字架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鍾(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이 시에서 나는 25세의 청년 시인 윤동주가 당시 조선 민족이 겪었던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과 그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길인가를 처절히 고민하고 자문하며 자신의 신앙을 민족애 안에 육화시킨 살아있는 신앙인이었음을 절감하였다. 룽징 밍둥춘 윤동주 시인 생가터 마당에 놓인 돌판에 시인의 시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1943년 7월 시인은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일본 체류 기간 중 썼던 상당한 분량의 시작품과 일기를 압수당했다. 1944년 2월 시인은 법원에 기소되고, 3월31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은 다음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갑자기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가 고향으로 배달되었다. 후쿠오카에 달려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몰라보게 바싹 마른 송몽규는 자신도 윤동주도 다른 조선 청년들도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윤동주 사망 후 23일이 지난 3월 10일에 송몽규도 옥사하였다. 오만한 제국의 부당한 억압과 집요한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추구한 두 청년의 유해는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 땅 용정 동산 마루에 묻혔다. 겨레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 청춘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 앞에서 시인의 묘소는 명동촌에서도 택시로 10분 정도는 달려야 하는 외곽지대 공동묘지에 있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하여 버스 진입이 안 되는 비포장도로라 우리는 택시 세 대로 나누어 타고 가야 했다. 윤동주 시인의 이름과 묘지 장소를 정확히 아는 기사는 셋 중 한 사람뿐이어서 세 대의 택시가 함께 움직였다. 당시 인근 지역에 살던 조선인 개신교 신자들이 묻힌 교회 공동묘지였다. 룽징 밍둥춘의 윤동주 시인 생가터를 찾은 강우일 주교가 윤동주 묘소를 참묘하고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나지막한 봉분이 솟아올라 있는 시인의 무덤에는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시인의 함자가 적힌 비석이 서 있었다. 겨레와 조국을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의 청춘을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답게 수많은 다른 무덤들 틈에 티 내지 않고 숨어있었다. 사촌 송몽규의 무덤도 바로 옆쪽에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두 분의 젊은 선각자 앞에 깊이 허리를 굽히고 존경과 흠모의 예를 표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안식을 기도하였다. 나는 윤동주 시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촌 송몽규 선생은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동갑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고 동고동락한 동기간 같았다. 동주는 내성적이었고 몽규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몽규가 먼저였다. 일본 유학도 1942년 둘이 함께 가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응시했으나 몽규는 합격하고 동주는 낙방하여 도쿄의 릿교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 가을 학기에 동주는 몽규가 있는 교토로 가서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10일에 몽규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먼저 체포되고 동주도 나흘 후에 체포되고 같이 고난의 길을 갔다. 룽징 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이도백하)라는 마을로 이동하였다. 백두산 등반객 때문에 새롭게 조성된 리조트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동네에 백두산을 찾는 등반객들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형성된 상업지구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을 찾는 이들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이 지역의 개발과 관리는 옌벤조선족자치주의 소관 업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관광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관광지로서의 백두산의 가치와 전망이 급속도로 부각되었고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관광 개발 사업을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 지린성 소관으로 이관시켰다고 한다. 그런 이후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지역에 관광 인프라 조성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집중하였고 현대식 숙소와 교통편을 확보하고 중국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친 결과 지금은 중국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관광리조트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규모로 봐서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내부 시설은 국제 수준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가 한 번은 가보기를 꿈꾸는 민족의 명산이다. 우리가 왜 모두 이렇게 백두산을 꿈에 그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불러온 애국가 첫마디에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구절이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두만강으로 흘러 금방 동해로 유입된다. 서해까지는 한참 흘러야 하지만 백두산에서 동해는 훨씬 가깝다. 나는 이번에 백두산에 올라 푸른 천지를 보고서야 애국가의 첫 마디가 더 깊이 가슴에 와닿았다. 전날 이도백하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현지 안내인은 우리에게 중국 일기예보에 의하면 다음 날 비 올 확률이 70%라고 했다. 또 백두산이 워낙 높은 산이라 수시로 기상 변화가 심하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당일이 되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5분 차이로 어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천지를 살짝이라도 보는 사람이 있지만, 직전에 온 그룹은 못 보고 하산하기도 한다고 했다. 날씨만큼은 인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좋은 날씨를 주시도록 하늘에 열심히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평균적으로 백두산을 찾는 이들 가운데 청명한 백두산 천지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날씨가 안 좋으면 가이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미리 참가자들에게 재확인시켜 주고 백두산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예방주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누가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백두산 여행은 지린성 지방정부의 큰 수입원인 듯, 일반 관광버스나 자가용은 백두산 초입에서 모두 하차하게 하고 지자체가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셔틀버스도 도중에서 두 번이나 갈아타게 되어 있었다. 경사가 급한 마지막 구간에는 셔틀버스에서 소형 밴으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는 환승장에는 매번 수백 명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외국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거나 보안 검색을 받을 때도 비슷한 기다림을 경험하곤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남녀노소 상관없이 여러 차례 수백 미터씩 줄을 세우는 일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나 예의를 도외시한 전체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 횡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자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오만한 위세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이미 오래 살아온 중국인 관광객들은 이런 기다림에 익숙한 듯했다. 마침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찾은 백두산 천지 전경. 백두산은 워낙 높은 산이라 날씨가 수시로 변화무쌍하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정상에 오르기까지 편치 않았던 나의 심기는 백두산 정상을 밟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씻어졌다. 백두산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하고 싶은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해 주었다. 백두산을 오르는 중산간 지역은 자작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정상 가까이 이르자 나무는 전부 사라지고 아주 낮게 깔린 풀밭에 에델바이스 같은 작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백두산 천지를 한 눈에 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봉헌하다 정상에 당도하자 고도 때문인지 화산토라서 그런지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 없고 검붉은 토양이 넓게 펼쳐진 광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수많은 인파가 긴 줄을 서서 조금이라도 더 그 장관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산 아래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기온 때문에 배낭에 넣고 간 패딩을 얼른 꺼내입고 우리도 긴 인파의 대열에 떠밀려 천천히 올라갔다. 비탈길을 백여 미터 더 오르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뚫린 하늘의 푸르름이 그대로 투사되고 있는 천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고 단군신화의 탄생지로 삼았던 연유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천지는 둘레가 14.4킬로미터나 되는 호수로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압도적인 자태를 조용히 내보이고 있었다. 우리 겨레 영혼의 고향인 백두산을 중국 땅에서 오르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으나 그곳에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정상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한반도 형상의 지도가 그려진 옆에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펼치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어느 틈엔가 이를 보고 완장을 찬 요원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플래카드를 압수해 갔다. 그나마 연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 3회에 계속 >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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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 꿈꾸던 선조의 열정 헤아리며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807500033 입력일 2024-08-07 수정일 2024-08-12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3·끝) ] 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선조들의 열정 헤아리며 백두산 여행을 마친 우리는 다시 옌지(延吉, 연길)로 가서 기차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인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흑룡강성) 하얼빈(哈尔滨, 합이빈)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는데도 또 입국 단체 비자 발급 순서대로 줄을 서서 여권 사진을 보여주고서야 승차가 허락되었다. 중국 여행 내내 우리는 정부 당국의 감시하에 있음을 절감하였다. 옌지에서 하얼빈까지 고속철도로 가는데도 4시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4시간의 기차 여행 내내 우리는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바라보았다. 옛날 만주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기상과 뜨거운 열정을 마음속에서 헤아리다 보니 4시간이 전혀 길게 느끼지 않았다. 중국의 숙소에서 강우일 주교와 순례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하얼빈은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로 인구가 9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다. 하얼빈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며 상당한 투자를 하여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러시아가 청나라 땅을 가로질러 철도를 세울 수 있던 것은 청의 국력이 매우 약화하여 서구열강의 간섭과 침탈을 막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후 하얼빈을 빼앗겼다. 하얼빈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래서 하얼빈 곳곳에는 러시아풍의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얼빈의 중심가에는 지금도 러시아 시대에 돌로 포장된 도로와 건물들이 즐비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문을 닫았고 지금은 관광명소로 개방되고 있었다. 외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옛날 성당 내부의 이콘과 제대 등 성물은 모두 훼손되어 사라졌고, 제대가 있던 자리에서 젊은 음악가 몇이 버스킹 형태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엄숙하고 장엄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자취는 사라지고 무신론자와 여행객이 심심풀이로 들러보는 관광지로 퇴색한 모습에서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만난 신앙의 가족 그런데 하얼빈에 천주교 성당이 또 한 군데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단 들려보기로 했다. 천주교 성당인데도 건축양식은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비잔틴 양식이었다. 그러나 성당 정문 위에 분명히 ‘천주당’이라고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성당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문은 닫혀 있었고 관리실이나 사무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냥 겉모습만 본 것으로 만족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성당 마당 한쪽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한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우리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할아버지는 앞으로 20분 정도 후면 문이 열린다고 했다. 가이드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인지 다음 일정으로 옮겨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모처럼 하얼빈에서 천주교회를 발견했으니 다음 일정을 위한 시간을 조금 줄이더라도 현지 성당을 방문하고 가자고 했다. 성당 마당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노인들 주변을 20분 정도 오락가락하며 기다렸더니, 굳게 닫혔던 성당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에서 열렸다. 관리인 같은 제복을 입은 여성 둘이 우리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꽤나 높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에 제대와 감실이 있고, 예수님과 성모님 성상들이 자리 잡아 가톨릭교회의 성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현재도 성당으로 활용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제대 앞에 자리 잡고 앉아 하얼빈의 교회공동체가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다. 하얼빈의 한 천주교 성당을 찾은 강우일 주교(오른쪽)가 4대째 신앙을 지켜온 중국인 신자(가운데)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자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한국에서 주교와 신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휴대폰 통역기를 동원하여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자기 집안이 4대째 신자 가정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그녀는 한국의 주교와 신자들이 여럿 방문해 준 것이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통역이 없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북만주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 신자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같은 신앙의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과 감동을 맛보게 하였다. 하얼빈 역사 한쪽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강우일 주교(앉은 사람 중 오른쪽에서 네 번째)와 순례 참가자들이 안 의사 등신대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우리가 하얼빈을 찾은 이유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장소와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평소 매년 3·1절이 되면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천주교 신자나 성직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고 송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중에 일본 제국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순국한 가장 대표적인 인사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큰 위로와 자긍심을 되찾곤 하였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나는 다시 한번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돌이켜 보며, 불의한 침략을 감행하여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만주 벌판을 내달리고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그분의 결연한 의거와 희생에 경이로운 숭경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사실 마음 한구석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정을 간직하면서도 다른 한구석에는 사람을 살해한 죄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정리되지 않는 한가락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안 의사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를 통해 밝힌 이토 저격의 15가지 이유를 돌아보며, 그분의 행동이 한 개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병장으로 감행한 정당방위의 전투행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얼빈 역사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안 의사가 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기차역 플랫폼의 지점이 삼각형으로 표시돼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하얼빈 역사(驛舍) 한쪽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安重根义士纪念馆)에는 입구에 안 의사 등신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전시실에는 그분 생애와 활동, 그리고 뤼순(旅顺, 여순) 감옥 수감 중 남기신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의 표시였다. 현재도 사용 중인 하얼빈 기차역 플랫폼 바닥에 안 의사가 섰던 자리에는 세모가 그려져 있고, 이토가 서 있던 자리에는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한 중국 정부가, 불의한 외세의 침탈에 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친 안 의사에 대해 그들 나름의 존경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2월 14일 뤼순의 일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어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뮈텔 주교는 일본 제국과 조선 천주교회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사제 파견을 거절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동생들을 통해 뤼순 감옥 방문을 직접 요청받은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뤼순을 방문하고 안 의사를 만났다. 빌렘 신부는 3월 7일 뤼순에 도착하여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차례의 면회를 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서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중에는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나, 훗날에도 자신이 취한 행동은 정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장상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공유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에도 문의한 결과 포교성성장관은 뮈텔대주교가 빌렘 신부의 뤼순행 허락을 거절한 것이나 성무집행 정지를 내린 처사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1913년 7월에 회신하였다. 교황청의 이런 회신에도 불구하고 뮈텔 주교와 조선의 파리외방선교회 성직자들은 빌렘 신부가 취한 행동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빌렘 신부는 1914년 2월 뮈텔 주교에게 1년간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그에게 서울교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빌렘 신부는 1914년 4월 22일 유럽을 향해 출발, 5월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인 로렌에 도착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휴가를 보낼 마음이었으나 두 달 후에 발발한 1차대전으로 인하여 결국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안 의사의 거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가 취한 행동과 선택의 정당성을 성찰하고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과 입장을 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못가에 봄풀 돋아나듯’ 죽어서도 염원했던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안 의사가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결정했던 자오린(兆麟, 조린) 공원을 방문하였다. 자오린 공원은 도심이지만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식물과 잔디밭이 여유롭게 펼쳐져 있었다. 강우일 주교와 순례 참가자가 자오린 공원에 있는 둥그런 바위에 새겨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 ‘청초당’(青草塘)을 마주 보며 묵념하고 있다. 등지고 있는 쪽에는 그의 단지(断指) 손도장과 또 다른 유묵 ‘연지’(硯池, 벼루물이라는 뜻)가 새겨져 있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공원 한쪽 구석에는 허리만큼 오는 둥그런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한자로 ‘청초당’(青草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듯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담은 글씨다. 그 좌측 하단에는 안 의사의 단지(斷指) 손도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도 기울어져 가는 석양빛을 맞으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자신의 유해를 잠정적으로 이 공원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조선천주교회 안에 이런 의인이 우뚝 서 계심을 세계 교회에 자랑하고 싶은 커다란 자부심과 영예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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