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외가는 완도군 군외면 원동리로 군내읍으로 가는 삼거리 버스정거장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이었다.외가는 군에서 몇손가락 안에드는 부자였고 면에서는 제일 부자라고 했다.그런데 외할아버지는 결혼할 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고 당신의 노력으로 재산을 이루어낸 자수성가한 분이셨다고 한다.당신은 젊었을 때부터 야학을 마을 젊이들에게 가르치셨던 어느 의미에서는 선각자이셨다.지금 기억해 보면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하고~~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세...이 세상에 태어나서 글을 모르면~~~"이런 식의 기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노력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할아버지는 초가을이면 경남 하동(박 경리의 토지의배경이었던 팽사리 부근)에서 김발을 하는 대나무를 사서 완도로 가져와서 완도군의 여러군데 마을에 파는 도매상이었다.그때도 할아버지는 이미 각마을 마다 직원들을 두었다.그중 직원 한분은 우리와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좋은 담배를 피운디고"제까짓 게 언제 돈벌었다고 저런 비싼 고급담배를 피워!"하고 수근대며 질투하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버스정거장 가까이서 큰 상점(만물상)을 운영하셨는데 인심이 워낙 좋고 통이 커서 밥을 20인분정도 해서 큰 밥통에 넣고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 놓았는데 외지에 갔다오는 오는 군내면 사람들이 들러 "형수! 밥줘 " 하면"나부르지 말고 니가 퍼 먹어"했다.그들은 마치 자기 집안방인양 부억에 가서 맛있게 담아놓은 배추김치 큰 한접시 퍼와서 뚝딱 먹고 갔다.갈 때는 거의 대부분 신발이나 과자,공책,우산이건 무엇이든 한가지씩 사서 갔다.집에는 할아버지 내외분밖에 없었는데도 항상 네댓명이 우글거렸다.방학때 가서 있을 때면 할아버지내외 두분만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그당시 어른 들은 "안방에 내가 있으면 서공아!니 할머니는 국회의원 나와도 될거야"하면서 칭송했다.이말은 나의 어머니가 광주에 사실 때도 자주들은 말이었는데 아마도 모전여전인 듯 싶기도 하다
이것이 상술인지 천성인지 모르지만 청산의 어린눈으로 볼 때는 너무 아까왔다.청산은 방학 때면 의례히 외가에 가서 은아와 놀다가 방학이 끝나면 흰 운동화,책가방,우비와 우산 ,연필과 필통, 공책등 이것저것 할머니가 잔뜩 싸주셨다.
방학이 끝나고 등교할 때면 할머니가 준 하얀 운동화와 고급가방,또 새공책,연필 그리고 멋진 모자까지 쓰고 학교에 가면 진구들은 부러워서 주위에 몰려 구경하느라 아단 법석이었다.
그렇지만 청산은 몸이 허약하여 한달에 서너번 때로는 한달씩 아파서 학교에 못간 때도 많았다.그래서 청산은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동안 한번도 개근상은 말할 것 없고 정근상도 받지 못했다.더구나 예능과목 ,즉 미술,음 악,체육과목은 항상 꼴찌에서 맴돌았기 때문에 우등상은 생각지도 못했다.다행히 고등학교 입학시험때 예능과목이 없어서 일고에 갈 수 있었지만 요사이 같으면 어림도 없을 것 같다.그렇지만예능과목만 빼고 공부는 제법 잘했다.
그런데 청산은 강단(반골기질,아버지가 젊은시절 자유총연맹 청년단장을 했고 리더쉽이 있었다고 함)은 조금 있있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 국민학교까지는 약 3키로 쯤 되었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인 듯 싶다.남학생은18영,여학생은 6명이었다.동네 아낙네들은 서로 시샘해서 아들들을 이렇게 많이들 낳았다고 했다. 어찌된 일인지 남학생중 이일세가 그중 리더였다.힘도 별로 세지 않고 공부도 별로 못했는데 일세의 말이라고 하면 누구도 꼼짝 못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일세가 못가게 해서 아무도 거역못하고 학교를 가지 않고 땡땡이를 쳤다.3일째부터 나와 사촌 동생인 화동이가 반기를 들었다.그 무서운 일세에게 대들었다."나는 학교에 갈꺼야.때릴려면 때려봐.너한테 맞아 죽을 꺼야"하고...그렇지만 일세와 그를 추종하는 그 누구도 나를 때리지 못했다.내 기세에 눌렸는지 왕자라고 불리던 청산의 친척들에게 혼날까봐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그로부터 우리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훗날 일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곤했다. 일세도 도대체 어디서 그런 리더쉽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자기 스스로도 그리더쉽을 잘 살렸더라면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하고 하고 아쉬워했다.그는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았고 늦게 서른여섯에야 결혼했다. 그런데 늦게 난 아들도 우울증으로 몇년전 자살 했는데 얼마후 일세도 그것을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자서전을 쓰면서 보니 나의 어린시절의 친구들과의 추억,새잡고 뛰놀던 뒷산과 고향집 앞바다 모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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