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도 훨씬 전에 동네 형들을 따라 올라가 보았던 "백운대".
전혀 기억이 없다.
북한산 둘레길을 다 돌아 온 후에 그래도 "백운대"는 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
인터넷에서 지도를 찾아 복사를 해서 준비를 하고 날은 따뜻했지만 "아이젠"과 여벌 옷까지 챙겨 나왔다.
제일 문제는 "우이전철역"에서 "도선사"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는게 싫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마침 택시가 하나 서 있어서 "도선사" 입구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타란다.
도선사 입구 주차장까지 단숨에 올라가니 걱정을 하나 덜은 셈이다.
국립공원 입구 주차장.
스틱을 꺼내어 단단히 준비하고 오르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이다.
발빠른 젊은 사람들은 두 시간에 정상까지 오른다고 한다.
나는 천천히 세시간을 계산한다.
시작부터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든 계단길이다.
그런데 길이 점점 험악해진다.
완전 자연석을 밟고 올라야 한다.
간간이 예쁘게 다듬어진 길도 있지만 그건 잠깐이다.
높낮이가 일정치 않은 돌계단은 무릎과 발목이 시원치 않은 내게 완전 치명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쓴 산행기를 미리 보고 왔지만 이리 일정하지 않은 돌계단일줄이야,,,,,
심지어는 이렇게 길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고 걸어야 하는 곳도 있다.
저기 하늘이 보이는 곳이 "하루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걷는다.
"하루재"가 멀지 않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하루재 쉼터"
잠시 앉아 쉬며 "인수봉"(仁壽峰, 810.5m)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마신다.
북한산 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을 여러번 돌면서 자주 본 "인수봉"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하루재"에서 "영봉"은 200여M란다.
내려올 때 가봐야 겠다.
"하루재"까지 계속 오르던 길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내리막이다.
하지만 이건 잠시이고 다시 험한 바윗길을 올라야 했다.
"인수암"(仁壽庵)앞에 오니 인수봉이 정말 훤히 보인다.
바위를 타는 사람들도 자세히 보인다.
"인수암 문기둥에 "상중무불"(相中無佛), "불중무상"(佛中無相)이라고 씌어 있다.
저 글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만공(滿空)스님(1871~1946)이 한 여름 수박이 먹고 싶어서 스님들을 모아 놓고,
“오늘 내게 매미 우는 소리를 제일 먼저 잡아오는 사람에게 수박을 사겠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스님은 벌떡 일어나 "맴맴맴“ 매미 우는 소리를 하고,
어떤 스님은 "할"(喝)!을 외치고, 어떤 스님은 바닥을 탁 치고,
어떤 스님은 빙빙 돌다 절을 하며 “이겁니다!”라고 하고,
별의 별 소리를 다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상중무불 불중무상"(相中無佛 佛中無相)입니다". 하니, 만공스님이 "말은 좋다!“ 하였다.
늦게 보월(寶月)스님(1884~1924)이 들어오자 만공스님이 다시 물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보월(寶月)스님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드리며,
"내일 이걸로 수박 사 잡수십시오."한다.
만공(滿空)스님이 껄껄 웃으며
"과연 보월이로다! " 하였다고 한다.
"인수암"(仁壽庵)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다리건너 마지막 화장실이 나온다.
이후에는 사용할 수있는 화장실이 없단다.
"인수봉" 낙석(落石)위험지역을 표시한 사진.
등산로 초입에서 백운대의 중간지점쯤에 "산악 구조대" 건물이 있다.
"인수암"을 지나면서 부터는 거의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않은 천연의 바윗길을 걸어야 한다.
겨우 바위틈에 돌을 끼워 넣어 계단을 만들었다.
지금은 "아이젠"을 사용하지 않아도 조심하면 되지만 겨울에는 "아이젠"이 필수이겠다.
첫번째 까마득한 직선 계단이 나온다.
다 올라와서 내려다 본 계단.
바윗돌 사이 사이마다 얼음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져 큰 부상을 입을 수가 있겠다.
두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 "백운산장"이 있다.
"백운산장" 왼쪽 끝에 특이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白雲의 魂"이란다.
올라가 보니 아래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란 표시가 보인다.
1950년 6월 28일.
백운암을 거쳐 후퇴하던 이름모를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이곳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중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 모두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비(碑)는 두 사람을 기리는 비(碑)인것이다.
"서울을 빼앗기고 무슨 면목이 있으리"
"자유 대한이여! 서울 시민이여! 용서 바라오!"
젊은 장교는 그의 연락병과 더불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었다.
때는 四二八三년 六월 二八일 새벽!
"白雲의 魂"! 그의 분통 어찌 잊으리.
일찍이 그는 6.25 붉은 이리떼의 남침을 이곳 백운대에서 앞장 서 맞아 싸웠다.
그 기개와 용맹은 그의 책임을 다 했으나 끝내 서울의 방어선은 뚫리고 말았다.
그들은 붉은 이리떼에 짓밟히고 있을 서울을 굽어보며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치 쏟았다.
오직 한 몸의 영예와 젊음을 저버리고 겨레를 위하여 보람있게 간 대한男兒는
여기 백운대에 혼이 되어 기리 우리들을 지켜주리라.
길손이여 전해다오.
젊은 목숨 자유와 바꾼
두 용사의 넋이 北漢山麓
동녘에 고히 잠자노라고.
檀紀 四二九三年 六月 二十日
一日不作
一日不食 白雲義塾
이 사연을 찾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던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비(碑)앞에서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것을 보았다.
이 비(碑)의 내용을 알고도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지금은 "백운산장"은 운영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옛날의 이야기를 써 놓았지만 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무덤덤할 것이다.
산장 앞에 있는 탁자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출발을 한다.
정상까지는 700m라고 하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길이다.
첫댓글 무리하지 마시라고 하였는데.
백운대 올라 갔던 적이 언제일꼬???
사진을 뒤져 봐야겠네.
그래도 평생에 한 번은 올라가 봐야 하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