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333) 최후의 생존자
밤새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며 파도가 미친 듯이 날뛰던 바다가 아침 해가
동녘 수평선에 떠오르자 언제 풍랑이 일었느냐는 듯 잠자는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해변에 부서진 배 조각들이 널브러졌고 판자와 부러진 돛을 잡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사람들이 기진맥진 해변에 쓰러져 있다가 하나둘 일어났다. 강진에서
스물네명이 탄 배가 난파되며 목숨을 건진 사람은 단 여섯명밖에 되지 않았다.
여인도 한사람 있었다. 남자 다섯과 여자 하나, 그들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여자는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선장이 해변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가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도 만만찮을 거요. 해변에
떠다니는 잔해 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 모두 건져 올립시다. 특히
먹을 것은 쌀 한톨이라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포에 떨던 남자들이 일제히 바다로 들어가고 여자는
첨벙첨벙 옷가지를 챙겼다. 그 와중에도 남자들 시선은 바닷물에 착 달라붙은
여자의 몸매에 쏠렸다. 몸의 굴곡으로 봐서 삼십대 초반이요, 차림새나 얼굴을
봐서 사대부가의 맏며느리 같은 귀부인이다.
처서가 지난 초가을이어서 저녁나절이 되자 서늘했다.
불행 중 다행, 오후 내내 젖은 부싯돌로 애를 쓰던 선장이 마침내 불을 만들었다.
바닷가 넓적한 바위 위에 불을 피우고 여섯이 빙 둘러앉아 건져 올린 물통의 물과
육포로 저녁을 때우고 하룻밤을 새웠다. 이튿날, 선장이 섬을 한바퀴 돌아오더니
“이 무인도는 보잘것없는 섬이요. 이제 건져낸 식량으로는 한달 살기도 빠듯하오.
구조선이 올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를 일이니 힘을 합쳐 살아갈 궁리를 해봅시다”
라고 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에선 우선 물을 찾는 게 급선무다.
남자 다섯이 섬을 샅샅이 뒤져 운 좋게 옹달샘도 찾고 선장은 동굴도 찾았다.
바닷물에 젖은 쌀로 밥을 해 먹고 나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마른 풀을 모아와
동굴 바닥에 깔았다. 선장이 자연스럽게 두령이 돼 하나하나 질서를 잡아갔다.
기역(ㄱ) 자로 꺾어진 동굴은 꽤 깊어 얼추 서른자는 됐다. 맨 끝에는 홍일점 호실댁이
입구 쪽에는 남정네 넷이, 그리고 꺾어진 중간에는 호실댁을 지키기라도 하듯
두령인 선장이 자리 잡았다. 선장만 돌아앉으면 호실댁은 마음대로 옷을 벗고 입을
수도 있게 칸막이가 된 셈이다. 선장은 건져 올린 그릇 중에서 하나를 골라 호실댁
요강으로 마련해줬다.
어느 날, 오 사범은 찬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을 해 소라 열두어개와 전복 한개를 따왔다.
전복을 선장에게 바치자 선장이 먹기 좋게 칼질을 해서 호실댁에게 건넸다. 먹을거리는
모두 동굴 끝 호실댁 방에 두고 선장이 통제했다. 선장이 안동소주 호리병 하나를 꺼내
삶은 소라 안주에 남정네 다섯이 술판을 벌였다. 청나라로 가던 무역선의 승객 네사람은
모두 점잖아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하 대인은 청나라에 경면주사를 사러 가던 길이요,
이 진사는 유학을 공부하러 가던 학자요, 정 의원은 침술을 배우러 가던 의원이다.
소라와 전복을 따온 오 사범은 태극권을 배우러 가던 무술인이다. 김 대감의 셋째 며느리인
호실댁은 당나라 왕실에서 새어나온 비취노리개를 사러 가던 길이다.
그날 밤, 술자리가 파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잠에 빠졌는데 선장과 호실댁은 끝없이
얘기꽃을 피우다가 호실댁이 흐느끼고 선장이 달래는 듯하더니 둘이서 술 마시는지
캬~ 소리도 났다. 파도소리에 깨끗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선장이
“우리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에 체면은 무슨…”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부스럭거리다가 숨소리가 가빠지고 호실댁의 자지러지는 감창소리도 파도소리와 뒤엉켰다.
입구 쪽 네사람은 자는 척했지만 한사람도 자지 않고 귀를 세우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네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호실댁과 선장에게 쏠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라는 듯. 선장은 뻔뻔한데 호실댁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오 사범, 물을 떠 와서 아침을 지어야 할 것 아니야.”
선장이 명령조로 말하자 두손을 허리춤에 놓은 오 사범이 두눈을 가늘게 뜨고
“내가 당신 하인이야? 오늘은 당신이 한번 해봐”라고 소리쳤다.
오 사범이 달려들자 선장은 “어어… 나이도 어린 사람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오 사범은 젊은 데다 무술인이라 멱살잡이라도 하면 일합에 선장이 방바닥에 패대기
쳐질 것은 뻔한 일이다. 위풍당당하던 선장의 위엄이 쥐구멍 속으로 처박힌 셈이다.
바닷물이 차가워졌는데도 오 사범은 자맥질을 해서 전복을 따내고 문어도 잡아올렸다.
바위가 병풍 두른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 사범이 바다에서 나오자 따듯하게
데워 김이 나는 물수건으로 벌거벗은 오 사범의 알몸을 닦아주는 사람은 호실댁이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바위가 삼방을 막아주는 멍석 한장만 한 백사장에 호실댁 치마를
펼쳐 깔고 아랫도리만 가린 오 사범과 속치마만 걸친 호실댁이 문어와 전복 안주에 잔을 부딪쳤다.
(하편에서 계속)
첫댓글 아침 저녁이 제법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가 가을이 느껴지고
모두 행복하시고 건강한 주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