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30〉깨달은 자에게 삶.죽음 여일(如一)하다
죽음에 초연한 자세도 삶의 한 부분
禪에선 生死 용어 번뇌를 상징
“삶있어 죽음있음 당연한 이치”
장자는 ‘자연은 끝없는 변화인데,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니 이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시인은 ‘우리는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죽음을 ‘(제자리로) 돌아갔다(歸)’고 한다.
선(禪)에서는 생사(生死)라는 용어가 번뇌를 상징한다. 공부를 하면서 죽음이라는 것 또한 이런 의미 속에서 해석하였고, 죽기 전 제대로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는 단어와 연결 짓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전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인생수업>을 읽으면서 죽음을 다른 각도로 보고, 따스한 시선으로 단어 해석을 하게 되었다.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죽음 또한 소중한 삶의 연장이라는 것을.
불교에서도 죽음이란 매우 값진 것으로 본다. 파라미타(paramita, 到)는 완성의 뜻이지만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열반이란 말도 승려의 죽음을 뜻하지만 곧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명사요, 동사이다. 깨달은 성자에게 죽음이란 삶의 한 연장이요, 삶 또한 죽음의 연장인 셈이다. 즉 생사를 초월한 경지이지, 굳이 생사라는 단어에 의미조차 없다는 뜻이다. 한참을 돌아서 제대로 진리(法)를 보게 된 것이다.
유태인 빅터프랭클(1905~1997)은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감옥에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들을 연구하여 정신질환 치료법을 발전시켰는데, 로고데라피(Logotherapy)라는 학설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수용소의 처참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 죽음이라는 것조차 삶의 한 연장선에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는 내용이다.
의도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승려들의 경우, 세인들의 학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목련 존자와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빠(1052~1135)이다. 밀라레빠는 동시대의 수행자였던 짜뿌와의 시기질투로 괴롭힘을 받았다. 마침내 짜뿌와는 여인을 시켜 독이든 우유를 밀라레빠에게 공양물로 바치게 하였다. 밀라레빠는 미소를 지으며 독이든 우유를 받아 마시고 말했다.
“약속받은 보석은 손에 넣었는가? 나는 원한으로 그대에게 앙갚음 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가엾이 여기노라. 내 수명은 다 되었고, 내가 해야 할일도 다 마쳤다. 그대와 짜뿌와가 이번일로 깊이 참회하고 수행에 전념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미래세에 지옥고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공양물을 수락하였노라.”
밀레레빠처럼 생사해탈의 경지를 보인 목련 존자가 있다. 목련은 불교 교단이 외도들에 의해 저해 받을 때마다 신통력으로 보호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목련은 외도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신통력으로 피하였으나 세 번째의 위협에 목련은 피하지 않았다. 어느 날 목련이 탁발을 나갔다가 외도들에 의해 온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맞고 열반하였다.
목련이 외도들의 폭력으로 열반에 들자, 비구들이 화가 나서 부처님께 ‘그들에게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타이르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아직도 삶의 진리를 체득하지 못했구나. 육체는 무상하고 업보는 끝이 없나니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 이것은 목련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내가 한 밤중 선정에 들어 죽은 목련을 만났는데, 그는 어떤 원망도 슬픔도 없이 편안하게 열반에 들었다. 깨달은 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여일(如一)하며, 삶과 죽음은 흐르는 강물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한 자세도 삶의 한 일부분이다. 목련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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