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5. 구산선문의 성립
곳곳에 산문 개산 사상적 대안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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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법흥사 징효대사 탑비> |
사진설명: 사자산문을 크게 부흥시킨 징효절중선사의 탑비. 보물 612호로 신라말 고려초 선종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삼국에 전파된 불교는 고구려.신라.백제 발전의 ‘사상적 기반’과 삼국통일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원효.의상으로 대표되는 고승들이 연이어 출현한 통일신라시대, 불교는 발전의 극에 도달한 채 대중들을 리더해 나갔다. 그러나 사상적 교리적으로 발전을 구가하던 교종불교는 신라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 들어 ‘어지러워진 정치’와 함께 ‘현학적인 불교’로 변하고 만다.
신라 하대는 방계 김씨 왕실이 등장해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등 어지러움에 빠져든 시기. 46대 문성왕에 이르러 사회가 일시 안정되지만, 그것도 잠시. 50대 진성여왕의 실정(失政)으로 통일신라는 이내 난세로 돌아가 버렸다.
신라 통일의 사상적 원천이 됐던 화엄 등 교학불교 또한 이 때에 이르러 ‘사제(司祭)적인 불교’로 흐르고, 사원은 왕실귀족의 선왕열조(先王列祖)를 봉덕하는 장소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즈음 중국으로부터 선사상이 전래된다. 진덕왕(재위 647~654) 무렵 법랑(法郞)선사가 중국 선종 4조 쌍봉도신의 동산종을 전래한 일이 있지만, 본격적인 선의 도입은 41대 헌덕왕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헌덕왕 13년(821) 도의(道義)선사가 서당지장(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 법맥)의 선법을 도입한 후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의 유입이 쉼 없이 이뤄져 구산선문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9세기 전반 ‘수용의 진통’을 겪은 선은 9세기 중반을 고비로 신라 지방 곳곳에 ‘산문의 기반’을 닦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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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선사의 법을 이은 법랑선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법랑(法朗)선사는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선사(580~651)의 법을 이었다.
호북성 기주 황매현 쌍봉산에 거주하던 도신선사는 교단을 집단화시켰으며, 우두선(牛頭禪)이라는 분파를 최초로 파생시키는 등 선종 발전에 전기를 마련한 선사.
법랑선사는 도신선사의 비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시됐던 인물, 때문에 “선사의 귀국은 신라 선종 발전에 큰 계기가 됐을 것”(서울대 최병헌 교수)으로 추측된다. 법랑선사가 전하려던 새로운 불교는 당시 신라 불교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사는 은거하고 만다.
법랑선사의 자취가 사라질 즈음인 성덕왕대(재위 702~736) 지리산 화개곡의 삼법화상, 백률사의 대비선사, 김유신의 부인이자 영묘사 스님인 비구니 법정스님, 미륵사 규정스님 등이 우리나라 선과 관련돼 사서(史書)에 이름이 나온다.
헌덕왕 이전 신라 선 성립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북종선을 신라에 처음 도입한 신행선사(神行. 704~779)가 바로 그다. 김헌정이 찬(撰)한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따르면 신행선사는 호거산에 은거하고 있던 법랑선사에게 3년간 선법을 배웠다. 법랑선사가 입적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신수선사(?~706)를 이은 보적선사의 문인 지공(志空)선사의 관정수기(灌頂授記)를 받고 귀국, 지리산 단속사에서 혜공왕 15년(779)에 입적했다.
신행선사가 입적하자 북종선의 법맥은 끊어지고 말았지만, 신행선사의 법맥은 혜은(慧隱)선사를 거쳐 지증대사 도헌(道憲)스님의 희양산문 개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선종사상 선행선사의 위치는 높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선사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헌덕왕(재위 809~826) 이전의 신라에선 독자적인 선종 종파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고대국가의 지배자인 왕실이나 귀족세력에 사회적 기반을 두고 있던 화엄이나 계율 등의 교학불교가 풍미한 것”(서울대 최병헌 교수)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정치사상적인 면에서도, 왕실의 전제권이 유지되던 신라 중대(무열왕~선덕왕) “개개인의 특성을 강조하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분권적 사고는 발 디딜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집권화가 약해지고 지방 분권화가 힘을 받던 신라 하대가 돼야만, 선종이 비로소 기지개를 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선사상 9세기 전반 수용, 중반 이후 정착
때문에 신라 헌덕왕 이전에 귀국한 선사들은 “마어(魔語)를 퍼트린다”는 등의 비난을 받고 불우하게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안 입당(入唐) 유학승들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통일신라 말의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남악회양 문하 마조도일의 고제(高弟) 서당지장선사의 심인을 얻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국한 도의 선사와 홍척선사가 나타나면서 신라 선종은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결국 9세기 전반 교종 사찰에 의탁해 기반을 닦은 선종은 서기(西紀) 800년대 중반을 고비로 신라 곳곳에 ‘아홉 개의 선문(九山禪門)’을 개창,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상계를 주도했다. 9세기 초 당나라로 유학 간 신라 유학승들이 9세기 중반 대거 귀국한 것이 신라 구산선문 성립의 결정적 계기였다.
“더 이상 배울 것 없어” 귀국했지만, 신라유학승들이 9세기 중반 경 귀국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841년부터 846년까지 진행된 ‘회창폐불’ 당시, 당나라는 외국유학승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귀환령을 내렸던 것. 이 조치로 많은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왔고, 조짐을 미리 눈치 챈 스님들은 한 발 앞서 귀환하기도 했다.
최치원(857~?)이 찬한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엔 귀환승 가운데 ‘왕의 스승’ 노릇을 할만한 이들로 12명이 나온다. 기록이 없거나, 소략한 스님이 대부분이어서 자세한 행적을 알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전하는 선사들의 비문과 〈조당집〉 등의 자료를 가지고도 9세기 중반 이후 선종사를 검토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비문과 자료들을 토대로 구산선문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늦게 세워진 수미산문의 진철리엄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인 915년 영각산사에 터를 닦았고, 그 뒤 후삼국통일 이전인 932년 해주 광조사에 자리했다. 따라서 “구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인 9세기 중반부터 후삼국시대인 935년 이전까지 완료됐다”(추만호)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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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조계종조 도의선사가 은거했던 설악산 진전사지에 있는 도의선사 부도. |
9세기 중반 선사들 중 가장 주목되는 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821) 귀국한 도의선사, 도의선사를 중심으로 구산선문 개창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자.
대한불교 조계종 종조인 도의선사의 사상과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스님의 위치는 대단히 크고 높다.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불교사상의 흐름이 ‘화엄’에서 ‘선’으로 바뀌는 데 스님은 일조(一助)했고, 면면부절한 우리나라 남종선(禪)의 흐름을 시작시킨 시원(始源)에 해당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위인들처럼 스님도 당대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교학불교가 흥행한 풍토 속에서 스님이 초전(初傳)한 남종선은 환영받을 수 없었고, 결국 설악산 진전사로 은둔해야만 했다.
제자 염거선사가 설산 억성사에서 수행하고, 그의 제자 체징선사가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개창하자 ‘스님의 사상’은 비로소 만개했다.
손상좌 대에 이르러 사상의 꽃이 피지만, 도의국사가 이 땅에 뿌린 ‘남종선’이라는 씨앗은 주지하다시피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에 이어지고 있다. 한국 남종선맥의 남상(濫觴)에 위치하는 인물이 바로 도의국사인 것이다. 조선불교 조계종 종정 한암스님(1876~1951)이 〈불교〉 제70호(1930)에 발표한 ‘해동초조에 대하야’를 통해 “도의국사가 해동초조임”을 밝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귀국한 도의선사가 남종선의 뿌리를 기른 곳이 진전사지다. 행정구역상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위치한 진전사지는 한국불교 1700년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온 조계종의 시원에 해당하는 성지라 할 수 있다.
옛 속초공항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4.8km 정도에 석교리가 있고, 여기서 3km쯤 더 들어가면 계곡 한편에 넓은 밭이 나타난다.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밭 가운데 진전사지 3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석탑을 끼고 돌아 산비탈을 30분 정도 올라가면 진전사지가 나타난다.
조계종조 도의선사 821년 당에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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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스님이 성주산문을 개창한 충남 보령 성주사지 전경. |
“처음 도의선사가 사당에게서 심인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廉居)선사(?~844)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며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體澄)선사(813~880)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결국 도의선사.염거선사.체징선사로 이어져 가지산문이 개창(858년경)된다. 도의국사는 우리나라 남종선의 제1조로 추앙받고, 진전사 도의선사 영탑은 조사당으로서의 의미를 점점 더해갔다. 가지산문 개창을 전후해 신라 지방 곳곳에 ‘아홉 개의 산문’이 문을 열고,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 구산선문
산문 이름 주요인물 중심 사찰 및 사지
가지산문 도의선사, 체징선사 양양 진전사지,
장흥 보림사
실상산문 홍척선사, 수철선사 남원 실상사
동리산문 혜철선사 곡성 태안사
봉림산문 현욱선사, 심희선사 창원 봉림사지
사자산문 도윤선사, 절중선사 영월 법흥사
사굴산문 범일선사, 개청선사 강릉 굴산사지
성주산문 무염선사 보령 성주사지
희양산문 도헌선사, 긍양선사 문경 봉암사
수미산문 이엄선사 해주 광조사지
양양.영월.강릉.문경.보령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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