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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장성(張姓)은 중국(中國)에서 비롯된 성(姓)이다. 중국의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오랜 옛날부터 시대별(時代別) 여러 중국의 나라 조정(朝廷)에서 장씨들이 등용되어 활약했던 흔적(痕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씨 중 장씨가 세계에서 3번째로 많다는 통계가 있고, 이는 중국에 장씨 수가 많기 때문이다(중국에서 3위, 1위 이李씨 2위 왕王씨) 우리나라 남북(南北)의 장씨 수도 만만찮으며, 최근통계(남한)엔 장씨는 10대 성씨 중 순위가 9번째로 가구수 30만에 인구 약 1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장씨는 언제부터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장씨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각 성씨들이 그 종족의 연원(淵源)을 찾고 후손에게 전수(傳受)하기 위하여 1423년 문화유(柳)씨, 1476년 안동권(權)씨가 족보(族譜)를 제작하고 그 외 대부분의 종족(宗族)들이 1700년대에 이르러 앞 다투어 족보를 펴내니 바로 이것이 그 답을 얻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족보의 역사는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족보 제작과정에서 혹은 조상의 행적(行蹟)을 상실(喪失)했거나 헤어져 후대자손들이 파(派)와 대(代)를 바르게 알지 못해 오류(誤謬)가 생기고 혹은 누락(漏落)되고 과장(誇張)되던 일도 많았을 것으로 본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든 족보들이 그 점에서 완전하다고 장담하지는 못할 것이며 장씨들 족보들도 그러한 점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다.
한때는 우리나라의 모든 장씨는(덕수장씨, 절강장씨 제외) 고려태조 때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초휘 길(初諱 吉)-을 시조로 하는 모든 종파(宗派)들이 모여서 장씨대종회(범장씨대종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근일(近日)에 이르러 장경(張敬)을 시조로 하는 일족(흥성장씨)과 장금용(張金用)을 시조(상장군계 인동장씨)로 하는 일족(一族)이 있어 장씨는 크게 세 종족이라는 주장이 생기게 되었다.
필자(筆者)는 이 문제의 옳고 그름을 논(論)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장씨들의 기록이 전해오는 역사서(歷史書)에 나타난 연대(年代) 순서대로 찾아 기록함으로써 이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료(史料)와 족보(族譜)의 기록을 모아 보았다.
472년 장무:백제(張茂:百濟) 개로왕(蓋鹵王) 18년 왕은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餘禮)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龍攘蔣軍帶方太守司馬 張茂)를 위(魏)의 현조(顯祖)에게 보내 조공을 하고 청병(請兵)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치려하였으나 위(魏)의 현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762년 장문휴(張文休):고구려 유민(遺民)으로 발해(渤海)의 장군이니 당나라 원정(遠征) 시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여 칙사(勅使) 위준(韋俊)을 살해했다. 당서(唐書)
822년 장웅(張雄):신라 현덕왕 14년 3월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부친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원한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일길찬 장웅을 보내 반란군과 싸우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과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반란군을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828년 장보고(張保皐):신라 흥덕왕 3년에 왕을 배알하고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되고 청해진을 세웠다.
837년 5월 김명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웠던 우징(佑徵)(신무왕)이 청해진으로 가서 청해진대사 궁복(弓福)에게 의지하였다.
838년 우징의 요청으로 대사(大使)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나누어 주고 또 12월에는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염장(閻長) 장변(張弁)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과 더불어 싸우게 하다. (장보고의 휘하 장수 중에 두 사람의 장씨가 있었다.)
839년 우징이 신무왕이 되어 즉위하고 청해진대사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이천호(食實二千戶)를 封하였다. 신무왕이 갑자기 죽자 태자 경웅(慶웅)이 뒤를 이어 문성왕(文聖王)이 되고 청해진대사 궁복(弓福)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의복을 하사하였다.
845년 문성왕이 청해진 대사의 딸을 차비(次妃)로 맞으려 했으나 정신(廷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 청해진의 보복이 있을까 늘 불안하게 지냈다.
846년 한때 청해진대사의 휘하장(麾下將) 무주(茂州) 염장(閻長)을 시켜 청해진대사를 암살하였다. 그리고 5년 후 851년 2월 청해진은 해산되고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현재 김제) 이주시켰다.(삼국사기/삼국유사)
894년 장일(張一): 궁예가 명주(현재 강릉)로 침입하였는데 그 무리 3천5백 명을 14대(隊)로 나누고, 김대검(金大黔) 모흔(毛昕)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舍上(사상:부장)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궁예편)
918년 왕건 고려국을 세우다.
926년 장빈(張彬): 태조(太祖)가 장빈을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파견하였다. (고려왕조사 1권)
927년 장분(張芬):고려 태조(太祖) 병부시랑 장분 등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후당 명종(明宗)은 장분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의 벼슬을 주었다. (삼국사기 경애왕 편)
930년 장길(張吉):태조(太祖) 왕수(王授) 13년 견훤(甄萱)의 군사가 순주(順州 현재 안동)를 함락하고 인민을 약탈하여 갔다하므로 태조가 곧 순주에 가서 견훤의 군사와 싸워 대승(大勝)하였다. 그리고 고창(古昌) 병산 싸움에서 공을 세운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幸), 장길(張吉), 대상(大相)으로 삼고 그 고을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다. 장길은 후에 정필(貞弼)로 개명하고 안동장씨(安東張氏) 시조(始祖)가 되다. 그 해 12월 태조는 신흥사(新興寺)를 증수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여 동서벽에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 1등에 최응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2등에 유검필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왕희순 김훤술 윤신달 박윤웅 등의 형장(形狀)을 그려 붙였다. 3등은 왕식렴 진평 견권 박희술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이며 4등은 김홍술 박수경이다.(고려왕조사 1권)
936년 후백제 멸망.
943년 왕건 태조 서거(逝去).
950년-970년 장단설(張端設): 광종조(光宗朝)의 문관으로 일찍이 한림원박사(瀚林院博士)를 거쳐 군부경(軍部卿)을 지냈으며 필법(筆法)에 능하였다. 당대의 명필로 개성의 양산 봉암사와 여주 혜목산 고달원에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를 쓰다.〔보국사대사전補國史大事典〕(고려왕조사 1권)
993년 장영(張瑩): 성종 12년 10월 윤달 임금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을 거란의 진영에 보내 소손녕을 만나게 하였다.(고려왕조사 1)
현종 7년(1016) 정월 장영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하다.
1017년 현종 8년 참지정사 장영 퇴직원서를 내고 퇴직하였다.
1021년 현종 12년 장영 상서좌복시(尙書左僕射)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삼아 사임하게 하였다.(고려왕조사 1권)
1010년 장연우(張延祐): 현종 원년 10월1일 이부상서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병부시랑 장연우를 부사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1년 7월 최사위를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장연우 채충순을 함께 중추사(中樞史)로 임명하였다. 또 8월 을사일에 장연우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고려왕조사 1권)
1014년 11월 초하루 상장군 김훈 최질 등이 여러 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군사를 격동시키고 궁중에 난입하여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묶어 매질하고 거의 죽게 한 후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호소함으로 중추원사 장연우와 일직 황보유의 귀양 보냈다가 뒤에 기용하였다.〔현종 원년 전쟁 이후로 군의 수효가 더 늘어 이로 말미암아 백관(百官)의 록봉(祿俸)이 부족하니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켰더니 무관이 매우 불만을 품었었다.〕1015년 6월 장연우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기사일 호부상서 장연우가 사망하였다. 그는 영주사 질현 사람이다. 장유(張儒)는 장연우의 아버지이다. 신라말기 장유가 오월국에 피난하여 중국말을 배워 익혀서 광종(光宗:945-975)이 여러 번 객성(客省)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사신(使臣)을 접대하게 하였다. (고려왕조사 1권)
1052년 장정(張廷): 6월 무인일(戊寅日) 송(宋)나라에서 진사 장정이 귀순하였다. 문종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에 임명하고 조서 1통과 의대(衣帶)와 채단(綵緞)과 백은(白銀)을 내리었다.(고려왕조사 1권)
1072년 장선(張善): 문중(文宗) 26년 7월 병자일(丙子日)에 병사 장선이 반역을 고발하기를 교위 거신이 그 도당 천여 명과 더불어 임금을 폐위시키고 왕제인 평양공 기를 세우려 음모 합니다 하였다. 거신을 처형하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이고 기는 이미 죽었으므로 기의 아들 진은 남해현에 정은 안동부에 귀양 보냈다가 모두 얼마 뒤에 죽였고 막내아들 영은 어리므로 면하였다.
이에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장선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각각 벼슬을 한 급씩 올려주었다.(고려왕조사 1권)
1073년 장대원(張帶垣): 장서충(張誓忠) 2월 21일 동여진에서 귀순한 도령 나거수(那居首)를 장대원이라 사명(賜名)하고 대상(大常)에 임명하고 고사(高舍)를 장서충이라 사명(賜名)하고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에 임명하였다.(고려왕조사 1권)
이상은 우리나라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470년대부터 1100년대의 장씨인물(張氏人物)들의 기록이다. 이로써 안동장씨(安東張氏) 시조(始祖)인 태사공(太師公) 휘정필(諱貞弼) 이전 시대(時代) 인물인 장무(張茂), 장문휴(張文休), 장웅(張雄), 장보고(張保皐), 장변(張弁), 장건영(張建榮) 장일(張一)과 태사공과 같은 시대인물인 장빈(張彬), 장분(張芬), 장유(張儒)와 그 다음 시대 인물 장단설(張端設), 장형(張螢), 장연우(張延祐), 장정(張廷), 장선(張善), 장대원(張帶垣), 장서충(張誓忠)까지 사료(史料)를 통해 그분들이 어느 시대와 나라에 어떻게 이바지하며 살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사료(史料) 장씨 인물들은 각관(各貫) 장씨들 족보엔 대부분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분들의 관직(官職), 성명(姓名), 행적(行蹟)이 자손들에게 전해진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高麗)의 역사는 수많은 외침(外侵)과 내란(內亂)을 겪으며 많은 사료(史料)가 소실(燒失)되고 인멸(湮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겨우 전하는 국가사기(國家史記)는 조선(朝鮮)초기,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 선생이 만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고려사(高麗史)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두 가지 역사서만으론 옛 조상(祖上)들의 가족 사항이나 근원계통(根源系統)을 정확이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필자는 서두(序頭)에서 말한 대로 문제를 제시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장씨들의 연원을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원할 뿐, 우리나라 모든 장씨가 같은 혈통(血統)이고 또한 어느 파(派)는 누구의 자손(子孫)이라고 단정(斷定)할 순 없다.
연대순으로 본 역사서와 족보에 기록된 장씨 인물
연대 | 역사인물 | 역사서/족보 |
472년 | 張茂 백제가 위나라에 보낸 사신 | 삼국사기 |
728년경 | 張伯翼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환한 장보고 장군 아버지 | 안동장씨족보 |
762년 | 張文休 발해가 당나라에 원정했던 장군 | 당서(唐書) |
768년경 | 張保皐 출생(연대 추측)당에서 무령군 소장 | 삼국사기 |
822년 | 張雄 신라 헌덕왕 14년 난을 정복한 장수 | 삼국사기 |
828-846년 | 張保皐 청해진대사임명 | 삼국사기 |
838년 | 張弁 張建榮 장보고 장군의 휘하 장수 | 삼국사기/삼국유사 |
893년 | 張源 장보고 증손 新羅로 오다(아들 장길과 함께) | 안동장씨족보 |
894년 | 張一 궁예의 부장 으로 임명 되다 | 삼국사기 궁예편 |
918년경 | 張儒 장연우 아버지,오월국으로 피난(광종 때 객성관원) | 고려왕조사 |
906년 | 張吉 수학을 위해 入唐 920년경 張吉 귀국 | 안동장씨족보 |
926년 | 張彬 고려 태조가 후당에 보낸 서신 | 고려왕조사 |
927년 | 張芬 고려 태조가 후당에 보낸 조공사 | 고려왕조사 |
930년 | 張吉 太祖朝 大相 二等 開國 功臣 | 고려왕조사 |
930년경 | 張寶千 장길의 아들 출생吏部尙書 | 안동장씨족보 |
950-970년 | 張端說 광종조 문신 당대의 명필 | 고려왕조사 |
966년 | 張錦善 일명 緖 출생 | 안동장씨족보 |
993년 | 張瑩 성종조 和通使 | 고려왕조사 |
997년 | 張光賢출생 | 안동장씨족보 |
1010년 | 張延祐 현종원년 병부시랑 | 고려왕조사 |
1015년 | 張延祐 호부상서로 임명 | 고려왕조사 |
1052년 | 張廷 송나라에서 귀화 | 고려왕조사 |
1072년 | 張善 문종26년7월 장군으로 승진,안동장씨족보엔 지선 | 고려왕조사 |
출처: 안동장씨대종회(安東張氏大宗會)공식홈페이지/글쓴이: 장동권